초야에 묻혀 지내는 이글스 마운드의 전설 한희민
초야에 묻혀 지내는 이글스 마운드의 전설 한희민
  • 김우성
  • 승인 2009.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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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에 취하고 산세에 취해도 야구는 못 잊어" / 김우성



[인터뷰365 김우성] 한희민은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정통 언더핸드 투수였다. 호리호리한 체구 아래쪽에서 큰 반원을 그리며 솟구치던 그의 공은, 먹이를 낚아채는 독수리 부리와도 같았다.

희소성 있는 투구폼에 싱커를 주무기로 승수를 쌓아갔던 한희민은 빙그레(현 한화) 창단멤버로 동료투수 이상군과 함께 무적의 원투펀치를 형성했다. 창단 첫해 꼴찌였던 빙그레는 그가 활약한 일곱 시즌 동안 무려 네 차례나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며 단시간에 강팀의 면모를 구축했다.

한희민은 그러나 비운의 투수였다. 동시대 장종훈, 송진우, 이정훈, 이강돈, 유승안, 한용덕, 강석천 등이 함께한 빙그레는 해태와 롯데에 가로막혀 매번 한국시리즈에서 쓴잔을 들이켰다. 결국 그는 단 한 번도 샴페인을 터뜨리지 못했고, 삼성과 대만프로야구를 전전하다가 변변한 은퇴식도 치르지 못한 채 글러브를 놓아야했다.


인터뷰를 위해 적당한 시간장소를 잡으려하자 그는 대뜸 번지수를 알려주며 아무 때나 오라고 했다. 호남 지역에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17일 오후. 백양사IC를 지나 구불구불 시골길을 한참 들어가서야 시간에 구애받지 않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호수 위로 사복사복 눈이 내려앉고, 이따금 바람소리만 머물다가는 산 깊숙한 곳에서 지인과 함께 집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마당에서 불을 지피던 그가 악수를 건네는데 가슴의 이글스 로고가 반가웠다.



여기에 뭘 짓고 있는 건가요.

찻집 하려고요.(웃음) 밥도 먹을 수 있고, 아는 분들 오가며 편히 쉴 수 있는 그런 공간을 조그맣게 운영하려고 해요.


예전에 고향인 충북 영동에서도 직접 설계시공해가며 찻집을 열었던 적이 있었죠? 운동선수 출신 중에는 은퇴 후 고깃집이나 술집을 창업하는 사례가 많던데, 원래 조용하게 지내는 걸 좋아하세요?

사람들 북적대는 것보다는 이게 더 낫죠. 혼자서 뚝딱뚝딱 만드는 걸 좋아하고, 또 산 자체를 워낙 좋아하니까 초야에 묻혀서 사는 게 그냥 좋아요. 많이들 모르시지만 야생화 화원도 운영한 적이 있어요. 목부작 석부작하며...(웃음)



마당에서 장작불을 쬐며 얼마간 안부를 주고받던 중 눈발이 거세져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희민'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주셨나요. 당시로서는 드문 예쁜 이름이었을 텐데요.

천주교 신부님이 지어주셨다고 어머니께 들었어요. 처음엔 제 이름이 싫었어요. 여자이름 같잖아요. 하하. 지나고 보니까 흔치 않아서 좋더라고요.


야구를 처음 시작한 건 언제죠?

중학교 1학년 때 야구부에 들어갔어요.


늦게 시작한 편이네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가요?

초등학교 5학년 6학년 때 농구를 했었어요. (영동)중학교에 가서도 농구를 하려고 했는데 제가 입학할 때 즈음 농구부가 없어지고 야구부가 생기더라고요. 어떤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계속 운동이 하고 싶어서 자연스럽게 야구를 시작한 겁니다.


처음부터 언더핸드 폼이었나요?

아니요. 오버핸드로 시작했는데 고등학교 1학년 끝나갈 무렵에 언더로 전향한 거예요. (그는 야구명문 세광고등학교 출신이다) 그해 제 인생의 큰 야구스승이신 김승성 감독님께서 새로 부임하셨는데 감독님이 사이드암 투수 출신이셨어요. 어느 날 언더로 바꿔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시기에 한 번 해봤던 게 저한테 너무 잘 맞았던 거죠. 감독님이 없었으면 저란 존재가 없었을 거예요. 그 분 밑에서 2학년 때 대구 대붕기 우승하고, 3학년 때는 다른 전국대회에서 준우승하고 졸업했죠.


송진우 선수가 고교 후배더라고요. 빙그레에서도 각별했겠습니다.

아무래도 마음이 좀 더 가죠. 진우도 그렇고 (장)종훈이도 후배예요. 종훈이는 동향이기도 하고요.


성균관대 재학 시절 함께 운동한 동료 중 팬들이 알만한 선수는 누가 있었나요?

해태 장채근, LG 김태원, 그리고 지금 성대 감독으로 있는 쌍방울 이연수 등이 동기였어요. 그 멤버들과 춘계리그에서 우승도 했었죠.


대학 다닐 때 국가대표도 했었죠?

그 때가 제 야구인생에서 가장 보람을 느낀 순간입니다. 대표팀에 발탁되자마자 83년 아시아선수권에서 우승을 했거든요. 전혀 기대도 않았는데 병역 혜택까지 받았어요.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짜릿합니다.



빙그레의 창단 멤버입니다만 원래 가고 싶었던 팀은 없었나요?

일단 졸업하는 게 우선이니까 4학년 때까지 대학생활에만 전념했어요. 졸업할 무렵이 되니 빙그레가 생긴다고 하기에 다른 쪽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우리 때는 또 지역연고가 있어서 어딜 가고 싶다한들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언더핸드 투수야 이전에도 있었겠지만 프로야구 출범 이후로는 최초 아니었나요?

제 위로는 없었죠. 사이드암은 많았는데 언더스로를 정통으로 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그래서인지 어린이 팬이 참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다들 오버핸드인데 튀잖아요.(웃음) 그거 때문에 꼬마들이 많이 좋아했어요.


데뷔해서 첫 세 시즌 동안 완투(투수 교체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던지는 것)를 서른여섯 차례나 했습니다. 비결이 뭐였나요.

투수에게는 '승'이죠. 오로지 승리를 보고 한 거예요. 몇 승을 했느냐가 연봉을 결정지으니까... 말 그대로 승을 따내기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정규시즌 우승을 수차례 하고도 정작 한국시리즈에서는 우승을 못했습니다. 가장 아쉬웠던 한국시리즈는 언제였나요?

88년도 해태와의 한국시리즈가 참 아쉬워요. 아깝게도 졌지만, 프로 입단해서 처음으로 맞이한 한국시리즈라 가장 안타까운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현역 때 우승을 한 번도 못해본 거랑 정식으로 은퇴를 못한 게 지금도 마음에 걸려요.


빙그레 시절 가장 든든했던 동료는 누구인가요?

(유)승안이 형이요. 이것저것 도움도 많이 받았고, 무엇보다 카리스마가 대단했어요. 그 형 말 한마디면 꼼짝 못했으니까. 하하. 포지션이 포수이니까 마운드에서나 더그아웃에서나 승안이형만 보면 든든했죠.


상대팀이었는데 매력적이었던 선수는요? 얄미운 경우일 수도 있겠고요.

투수는 선동렬 선수?


한국프로야구 한 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은 1991년 6월 광주구장에서 나왔다. 홈팀 해태의 선발투수 선동렬은 빙그레를 상대로 13이닝을 완투하며 18개의 삼진을 뽑아냈다. 하지만 경기는 1대1로 무승부. 당시 빙그레의 선발은 한희민이었다. 그 역시 13이닝을 완투하며 해태 타선을 틀어막았던 것이다. 한희민에게 그때 얘기를 꺼냈을 때 돌아온 대답은 현재의 삶을 대변하는 듯했다.


"글쎄... 기억이 안나... 하하. 뭔가 한 적은 있었던 것 같아요."



타자 중에는요?

롯데 (김)용철이형이요. 데뷔 첫 해에 그 형한테 많이 약했어요. 이후에 약점을 파악해서 좀 쉽게 가긴 했는데 아무튼 제일 얄미웠던 사람은 용철이 형이었죠.(웃음)


김용철 선수는 나중에 삼성으로 이적했죠? 당시 빙그레 타선도 강했지만 삼성은 1번부터 9번까지 모두가 홈런타자라 할 정도로 타선이 막강했는데요.

(이)만수형, (박)승호형, (김)성래형. 화려했죠 그쪽 타자는.


93년도에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을 했습니다. 팬들이 많이 의아해 했는데.

좀 갑작스럽게 가긴 했죠. 실은 감독님과 불화가 있어서 LG로 보내달라고 트레이드를 요구했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은퇴식을 하겠다"고 밝혔는데 얼마 후 구단에서 삼성으로 갈 것을 제안한 거죠. 그렇게 삼성에 가서 4승 1패 2세이브를 하고 있었는데 중간계투로 보직이 변경되면서 감독님과 또 갈등이 생겼어요. 당시 중간계투는 곧 패전처리였거든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2군행을 자처하면서 한국에서의 야구인생이 사실상 끝났죠. 성격을 차분하게 가다듬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와서 후회한들 뭐하겠습니까.(웃음)


대만 진출도 의외였어요.

삼성에서 2군 생활을 하고 있는데 대만프로야구 준궈 베어스 코치를 지낸 안계장 감독님(휘문고에서 임선동 등을 길러낸 지도자)께서 대만 쪽을 한 번 생각해보지 않겠냐고 권유하셨어요. 아마 시절 대만과의 경기에서 성적도 좋았고, 야구는 계속 하고 싶으니까 주저 없이 준궈 베어스에 입단한 겁니다.


지난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대만은 본선 티켓 향방을 가를 가장 중요한 승부처로 한국을 경계했다. 당시 대만 일간신문 민생보는 WBC 특집 기사에서 '대만 대표팀은 80년대 국제대회에서 한국의 한희민에게 꼼짝을 못했다'고 소개한 바 있다.


대만프로야구 진출도 한국인 최초였죠?

선수로는 그랬죠. 그런데 저 혼자만 간 게 아니고 다섯 명이 같이 갔어요. 다같이 한 팀으로 간 덕분에 그나마 외로움을 덜 탔죠. 대만은 아마야구, 리틀야구는 강세인데 프로는 경기력이 많이 떨어졌어요. 한국프로야구 초창기보다 조금 더 아래라고 보시면 돼요. 시스템도 엉망이었고요. 다른 팀에 가서 정보를 수집하거나 전력 분석하는 게 전혀 없었죠.


구단의 대우는 괜찮았나요?

허술했죠. 원룸서 생활했어요. 직접 밥 하고 동료들 불러서 식사하고 그랬어요. 제가 요리를 좋아해서 망정이지. 하하. 고생 많이 했죠. 음식에 강한 향내가 많이 났던 게 가장 힘들었어요. 소위 눈물 젖은 빵도 많이 먹고.(웃음) 특히 고생을 많이 한 게 한국과 대만의 국교가 단절되었던 직후라 대만에서 한국사람을 엄청나게 싫어했어요. 설상가상으로 아시안게임 유치경쟁에서 가오슝이 부산에 패하는 바람에 더 그랬죠.


대만을 떠나던 해에 준궈 베어스가 매각되었는데 한국으로 돌아온 것과 관련이 있는지요.

대만에 있는 자체가 싫었어요. 한국에 돌아와서 다른 팀에 가보려고도 했는데 금세 마음을 접고 스스로 은퇴를 했어요. 그래도 야구에 미련이 남고 아이들도 좋아하고 하니까 대전 유성고 쪽에서 야구교실을 연 적도 있어요. 야구교실 문 닫고 얼마 후 야인생활이 시작된 거죠. 영동에 찻집 냈을 때가 그때입니다.



장채근 코치가 해태 입단 초기에 한희민이 있는 빙그레로 보내달라고 애원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였다죠?

지금도 앞뒷집에 살아요. 가족끼리도 친하고, 놀러도 다니면서 재밌게 지냅니다. 채근이가 잠시 서울에 애들 봐주러 올라가 있는데 말일에 내려온다니까 또 봐야지.(웃음)


빙그레의 우승에 가장 걸림돌이 해태였는데 선수시절에는 사이가 괜찮았어요? 샘도 났을 것 같은데.

하하. 그런 거 없었어요. 대학 때부터 줄곧 친했어요.


기아 타이거즈 코치를 지낸 것도 장채근 코치와 관련이 있나요?

그렇죠. 그때 장재복 단장님이 성대 선배이기도 했었고 채근이가 김성한 감독님께 추천을 해줬어요.


그 후로 광주에 정착을 한 거군요.

여기 와서 결혼도 했으니까요.(웃음) 딸이 이제 네 살입니다.


제일 예쁠 때이네요.

지금 그 맛에 살아요 내가. 하하. 태어나자마자 손가락 발가락 눈 코 입부터 딱 보게 되더라고요. 건강한 거 확인하고 나니까 짠했어요. 집사람이 마취 깼을 때는 안타까워서... 그 아픈 걸 참아냈다고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에 눈물이 나더라고요.


평생 관중들 앞에 서 있다가 산에서 지내는 게 심심하지 않아요?

시골이란 게 부지런만 떨면 할 게 많아요. 심심할 겨를이 없어요. 또 지나가다가 간판에서 제 이름을 보고 우연히 들르셔서는 지금까지 연락을 하고 지내는 분들이 많아요. 만남이라는 게 참 좋더라고요. 여기를 둘러보면 아시겠지만 인테리어 아닌 인테리어를 하고 있는데, 이런 것도 재밌어요. 내가 하는 만큼 눈에 보이잖아요. 나중에 기술 더 익혀서 내가 살 집 내 손으로 짓는 게 꿈입니다.


야구에는 미련이 없는지요.

왜 없겠어요. 한편으로는 남아있죠. 이 인근에 야구와 관련해서 구상해놓은 게 있어요. 어찌 될지 몰라서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어렵지만, 그것만 이루어지면 참 재미있을 것 같아요. 요즘 일반인들 사이에 야구가 열풍이잖아요.(웃음)


'잠수함 투수'라고도 불리는 언더핸드 투수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에 공 10개를 던져 그 중 7개만 성공시켜도 컨트롤 면에서 특A급이라는 말이 있다. 뿐만 아니라 공에 힘과 스피드가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곧바로 장타로 연결되며 바가지 안타를 얻어맞기 일쑤다. 그만큼 어려운 길을 걷는 것이고, 선수 수명도 짧다.



한희민은 독수리 유니폼을 입고 데뷔한 1986년 이후 첫 5년간 66승 39패 20세이브에 평균방어율 3.00이라는 성적을 거뒀다. 같은 기간인 88, 89년에는 2년 연속 팀 내 최다승(각 16승)을 올리기도 했다. 그에게 '이글스의 전설'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이 좋아 풍경이 좋아 머물게 된 땅에서도 야구만은 못 잊겠다는 그 마음이 백분 이해되며 첩첩 설산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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