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게먹기 문화운동’ 벌이는 인산가 김윤세회장
‘짜게먹기 문화운동’ 벌이는 인산가 김윤세회장
  • 김재원
  • 승인 2012.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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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사람은 무조건 살려놓고 보라” 선친 인산선생의 유지 따라

【인터뷰365 김재원】이 세상의 의학상식은 싱겁게 먹으라 아우성인데 그는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짜게 먹으라고 외치는 사람이다. 짭짤한 맛을 봐야 건강의 의미를 안다고.... 그는 지금 ‘인산죽염’ 전도사로 불리우고, 신건강문화운동가로도 불리운다. 사연이 있는 사람이다. 청운의 꿈 가슴 가득한 청년기자 시절, 느닷없이 기자직을 때려치우고 소금장수로 나선 사람이다.
말이 ‘나섰다’이지 소금을 사 주는 사람도 소금을 팔 데도 없는 1980년대의 대한민국에서 그가 직장을 버리고 평탄치 않은 소금장사의 길을 택한 데는 그의 선친 고(故)인산 김일훈옹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전세방 보증금을 빼 내 아버지의 저서 ‘신약(神藥)’을 내드린 효자. 책이 안 팔리면 길거리로 나앉을 판이었다.
그 책 ‘신약’은 인산선생의 의학원리와 치료체험기와 비방(秘方)으로 가득 차 있다. 아버지가 부르는 대로 구술해서 만든 책. 그 두꺼운 책의 구술이 쉬운 일도 물론 아니었지만, 어려서부터 김윤세 회장은 아버지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아무리 아버지이지만 매료되지 않았다면, 6년 경력의 물이 오를 대로 오른 기자생활 때려치우고 소금장수로 나섰겠는가?
어쨌든 그 책이 날개돋힌 듯 팔리면서 더욱 곤혹스런 입장이 된다. 하루 2-3백명의 말기암환자들이 몰려들고 온동네가 시끄러워졌다. ‘신약’을 보고 온 사람들이었다. 집에서 수공으로 만든 소금을 환자들에게 주었다. 돈 없는 환자들이었다. 거의 거져 주고 있었다. 그 양(量)을 당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김윤세 기자는 기자직 때려치우고 소금장수로 나서게 되는데....
지난 10월 30일 오후 6시부터 서울 강남구민회관 강당에서 특강을 끝낸 그를 만났다. 지난 8월 25일 함양 인산가에서의 인터뷰에 이어 두 번째다.

-인산인해는 아니지만 저녁 시간에 참 많이 모였습니다.
네, 저분들 그런데 이 시간까지 식사를 못하셔서 어떡하죠? (본인도 시장하기는 마찬가지일 텐데 다른 사람들 걱정이다) 그래도 건강한 삶의 실마리를 찾았다면 좋겠습니다. 저는 죽염을 많이 먹어라, 짜게 먹자고 강의하는데, 요즘 무조건 짜게 먹지 말라는 사람도 있어요, 정말 말도 안되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고 김일훈 선생 때부터 줄기차게, 세상의 상식과는 반대로 짜게 먹어야 암도 고치고 건강하게 산다고 주장하시는데, 만약 그 주장이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되는 것이라면 듣는 사람들이 믿어주지도 않을 것이고,...곤란한 일도 생길 수 있겠습니다.
인산죽염이 잘 된다고 인정을 받고 하니까 업체가 난립하는 등 곤란한 일이 더러 생겼었죠. 그래서 죽염의 효능과 안전성에 대한 공인을 확보하기도 했구요, 예를 들면 1993년 7월 31일에 중국 인민대회당에서‘중국 중의연구원의 인산죽염 학술보고회’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중국의 권위 있는 의학연구기관인 중의연구원 왕기 박사팀이 「한국 인산죽염의 임상 및 기초실험 학술보고회」를 가졌죠. 8명의 학자들이 한 팀으로 참여한 연구에서 왕기 교수는 ‘인산죽염은 소화기 계통 질환의 치료(유효율 91.95%)와 예방에 탁월한 효능을 보였다’고 발표했죠. 이 보고회에는 중국 위생부(錢信忠) 부장(장관) 등이 참석했고, 저도 참석해서 그 발표를 들었습니다.


-하버드 의대 쪽에서도 비슷한 공인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미국 하버드 의대 부설 데이너 파버(Dana Faber) 암 연구 센터에 인산죽염의 안전성 실험을 의뢰했었죠. 데이너 파버 암연구센터는 세계적인 암 연구 기관인데, 1995년 7월 1일 ‘인산죽염은 일시에 다량 섭취해도 안전할 뿐만 아니라 항(抗)종양 효과까지 보인다’는 연구 결과를 공식 발표했죠. 아시다시피 항종양이라 하면 항암 성분이 있다는 연구발표입니다.


-그럼 이건 어떻게 되나요? 짜게 먹지 말라는 얘기 말입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짜게 먹지 말라’ ‘염분 섭취량을 줄여라’하는 주장이 나오곤 하는데 세계적인 암 연구 기관인 허버드 의대 암센터는 ‘인산죽염은 일시에 다량 섭취해도 안전할 뿐만 아니라....’라고 하고 있으니.
짜게 먹지 말라는 거 믿으면 안됩니다. 싱겁게 먹다간 큰일 납니다. 인산죽염 아무리 퍼먹어도 해롭지 않습니다. 싱거운 세상 좀 짭짤하게 먹어야죠.(웃음)


-옛날엔 목구멍이 포도청이었지만, 지금은 먹는 것이 문화입니다. 그런 뜻에선 짭짤하게 먹기 문화운동이라도 벌이실 것 같습니다. (웃음)
이미 짭짤하게 먹기 문화운동 벌이고 있습니다. 싱겁게 먹다간 정말 큰일 납니다. 염분 부족으로 모두 쓰러진다구요.


-그렇다면 인산 죽염 짜게 먹고 실제로 건강이 좋아졌다거나, 병을 고쳤다거나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겠군요.
물론이죠. 오늘 제 강의 들으러 온 분들은 약과구요, 선친 살아 계실 때는 정말 인산인해라 해야 옳을 지경이었죠. 말기암 환자 등 그야말로 생사경각지경에 있는 중증환자들이 수도 없이 들이닥칠 때는 큰일 났구나 싶더라구요.


-‘신약’이라는 인산선생님 저서를 보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왔다고 그러시는데 그 이전에는 어땠는지요? ‘신약’ 나오기 전후의 사정을 좀....
신약’이 나오기 전에는 지리산에 죽을 사람도 고치는 도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물어물어 찾아온 환자들이 많았구요,‘신약’이 나오자 그 책을 보고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함양 아버님 사시던 집이 대지 23평에 건평 11평짜리 작은 집이었는데 하루 2-3백 명의 중환자와 그 가족들이 모여드니 어땠겠습니까? 온동네가 시끄럽고 하루종일 참 이거 낭패로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더라구요.


-그럼 ‘신약’ 출판 이후 환자가 늘었다면 책도 많이 팔렸다는 얘기로군요. 책 내용은 어떤 거였습니까?
책이 좀 나갔습니다. 540페이지에 1만원짜리 책이었는데 초판 4천부를 찍었습니다. 두껍고 내용이 딱딱한 책이라 잘 안 팔리리라는 출판사 쪽 의견과는 달리 6개월 사이에 순식간에 3판까지 다 나갔습니다. 당시로서는 베스트셀러였죠. 내용은 주로 고치기 힘들다는 난치병의 원인과 증상, 그리고 말기암 등 말기 중환자를 살리는 비방(秘方) 같은, 처음 접하는 이에겐 다소 생소한 내용일 수도 있었지만 환자들에겐 야! 이거구나 하고, 구세주 만난 기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책 속에 의약부국론(醫藥富國論)이라는 항목이 있는데 의약부국론을 쉽게 설명하신다면...
우리나라 산하에 흩어진 풀의 70% 이상이 약초라는 것은 알려진 사실 아닙니까? 그 약초와 다른 재료 등을 주재료로 해서 암등 현대의학이 손대기 어려운 불치병 치료제를 개발하자는 논리입니다. 우리나라는 가난했고 자원 없는 나라지만, 사실은 약초나 풀뿌리 등에서 취할 수 있는 것이 많다는 주장이셨고.... 특히 주로 암 등 선진국도 쩔쩔매는 불치병 치료제를 우리가 먼저 개발한다면 충분히 세계적인 의약부국이 가능하다고 보신 거죠.

선친인 인산선생의 구술을 김윤세 회장이 받아 적어 출간한 책 신약’
의약부국론 또는 약초부국론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 뛰는 얘기다.
산하에 흩어진 잡초를 비롯해서 우리나라에서 나는 재료만 가지고 항암제 등 당시(1980년대)로서는 꿈도 못 꿀 의약품을 개발해서 국부(國富)를 이루자는 의견은 다분히 창의적이고 혁명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인산 김일훈옹이 어떤 인물인지 한 번 살펴보자. 어려서부터 아픈 사람 치료를 많이 해서 신동 소리를 들었고, 독립운동으로 만주벌판을 헤매기도 한 항일투사. 해방 직후 초대 부통령 이시영씨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그를 비서실장으로 천거했다. 그러나 당시는 미 군정시대였고 경무대 인사권을 거머쥐고 있던 미 군정청의 하지 중장이 한방(漢方) 중심으로 이루어진 인산의 의학을 반대했다는 것이다.
한방의 탕재를 설명하면 “풀뿌리를 끓여서 사람이 먹어? 노!!”, 침을 설명하면 “사람 몸을 바늘로 찔러? 노!”, 뜸을 설명하면 “뜸? 사람 몸을 불로 지져? 노노!!” 이런 식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산은 함양으로 낙향하고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서 죽염의 신화 탄생한다. 만약 인산이 초대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되었다면 우리나라 의료체계가 달라졌으리라는 것이 당시 상황을 아는 사람들의 아쉬움이다.
‘신약’ 출판으로 세상과 다시 접하게 되는 인산. 돈 없고 병든 말기암 환자를 비롯한 많은 중환자들의 희망이 되긴 했지만, 개인적인 생활은 아주 힘들었다. 죽염을 만들고 중환자들을 살려주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돈 들여서 만든 죽염을 그냥 나눠 주다시피 하니 생활의 고통이 따르는 건 당연지사. 때로 돈이 없으니까 쌀자루를 메고 오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그것조차 마련할 길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죽염은 천일염을 대나무 통에 넣어 진흙으로 아래 위를 봉한 후 1,600도 넘는 불에 9번을 굽는다. 당연히 천일염 구입비, 대나무 구입비 등등 돈이 들어가는데도, 죽염을 받아가서 병을 고친 사람들로부터는 들어오는 돈이 없었으니....


-요즘 세상 인심으로는 참 이해가 안가는 구석입니다. 환자를 무료로 치료해 주는 일이 있긴 하죠. 허지만 그건 한시적인 거고 무작정, 무기한 그럴 수는 없으셨을 텐데요..
네. 그런데 아버님이 워낙 확고하셨습니다. 돈 들여 만든 죽염을 딱하고 힘든 사람들 오면 거저 다 주어버리시는데, 죽염을 거저 받아간 사람이 수천 명도 넘습니다. 그러니 죽염을 만들수록 생활은 어려워졌습니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이러다가 우리 거지된다고 만류해도, “돈 있는 사람은 여기 안 와요. 여기 오는 사람은 다 돈 없고 죽기 일보 직전 사람인데 그런 사람들에게 무슨 돈을 받아요?” “그래도 약값은 받아야죠.“ 그러면 아버지가 화를 버럭 내시거든요. “없는 사람한테 뭘 받아?” 이런 생활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인산선생을 ‘병 고치는 데는 신의 경지, 돈 못 버는 데도 신의 경지’ 라고 별명을....(웃음)


-인산 선생께서 함양에 계시면서 서울 강의도 많이 하신 것으로 기억되는데요.
그렇습니다. 함양 그 좁은 집에 환자들은 몰려오죠, 혼자 오는 것도 아니고 그 가족까지 함께 오니...게다가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이니 설명을 해도 잘 못 알아들으니 아버님은 더 힘이 드시지요. 한 5년 동안 하루 평균 10시간을 환자들을 보시는데... 큰일 날 것 같았어요. 좀 쉬시라고 그래도“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사람이다. 내가 죽어가는 사람을 놓고 어찌 쉬느냐?”고... 그래서 환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 한꺼번에 하면 어떨까 생각을 하다가, 86년 6월 21일에 서울 한국일보 논현클럽에서 아버님의 첫 번째 강연회를 했죠. 300여명 들어가는 강당에 500명이 넘게 왔더라구요. 무료강의였고 끝난 후에도 계속 질문 공세가 이어져 할 수 없이 장소를 바꿔 밤늦도록 상담을 해주시고.


-그럼 그 강의를 하신 후에는 인산선생께선 좀 편해지신 건가요?
웬걸요. 아버님은 평생 편할 날이 없으셨습니다. 한국일보 강의가 끝나고 나서는 함양으로 오는 사람들이 더 늘었습니다.


-한국일보 강당에서의 강의가 오히려 화근이 되셨네요(웃음)
그런 셈이죠. 매일 수백명씩 함양으로 몰려 와서 죽염 만들어 달라고 아우성치는 통에 할 수 없이 마당에서 죽염을 구었죠. 그러나 장소가 워낙 협소하다 보니까 그것도 여의치가 않아요. 그러다가 지리산 실상사와 협의해서 실상사 마당에서 죽염을 굽기 시작한 거죠.


-실상사는 금산사의 말사(末寺) 아닙니까? 그런데 그 절 마당에서 소금 구으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소나무 장작, 대나무, 천일염을 구해다가 굽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얼마 못가 끝났습니다.

인산선생이 실상사에서 소금을 굽기 시작한 그 이듬해 가을인가 금산사에 화재가 났다. 본사인 금산사에 불이 났으니 그 말사 마당에서 소금 굽는 일이 가능했을 리가 없다. 허기야 천년 문화재 고찰인 실상사에서 밤마다 소급 굽는 불꽃이 오르니 화재 난다 아우성이고, 소금 구우니 공기 오염 된다 아우성이고 가는 곳마다 푸대접이었다.
그때 이 소문 듣고 현재 인산가가 있는 땅의 지주가 찾아왔다. 원래 5천여 평짜리 이 땅은 국고 보조금을 받아 초지를 조성한 민간목장. 그런데 그 당시 ‘전경환 소 파동’이란 것이 있었다. ‘전경환 소 파동‘이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이 호주에서 소를 왕창 수입해 온 사건을 말하는데, 그 바람에 국내 소 값이 떨어져서 모두 소 사육을 포기하는 바람에 못 쓰게 된 목장터였다.
그래서 전기도 없고 길도 없는 지리산 깊은 산골에서 소금 굽는 일이 시작되었다. 가을부터 겨울까지 드럼통 20개를 연결해 놓고 죽염을 굽기 시작했다. 그 소금 굽는 연기가 어찌나 짠지 근처에만 가도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러는데도 인산선생은 5천여 평 땅이 생긴 것에 용기백배하여 열정적으로 죽염 제조에 몰두했다. 드럼통에 4각으로 구멍을 내서 화로를 만들고 풀무질을 해서 죽염 제조에 들어간 것이다.
얼마후 지주는 아예 그 땅을 인수하라고 권한다. 43,00O평인데 커피 한 잔 값에 땅 6평 하던 시절이지만 수중에 그 돈조차 없던 인산가. 그런데 지주는 현금은 조금만 내고 나중에 벌면 갚으라더니, 잔금도 치르기 전에 명의이전을 해준다.
인산선생은 자신의 인품을 믿는 지주의 성의가 고마워 잔금을 치른 후에 1백만원을 더 얹어주기까지 했다. 그래서 함양 그 동네에선 ’잔금 전에 명예이전 해 준 사람이나 잔금 후에 1백만원 더 준 사람이나 똑같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이어져 오고 있다.

선친 인산선생과 김윤세 회장

-지난 8월 25일 인산죽염의 날에 함양에 들러 흘낏 보니까 아직도 여기저기 공사중이인 것 같던데요..
87년부터 25년 동안 계속 공사중입니다. 처음 그 땅을 인수했을 때 전기도 없었고 주택, 축사 등이 모두 무허가 건축물들이었어요. 그래서 모두 새로 지어야 돼서 87년부터 25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공사중입니다. 언제 공사가 끝이 날지...


-여간해선 안 끝날 것 같군요. 김회장께선 경영에 집중해서 돈 버는 일보다 전국을 누비며 강의하시는 일에 치중하신다니 공사가 쉽게 끝날라구요,,,(웃음) 광주대학교에서 대체의학을 하는 교수이시고 다른 데 강의도 많다고 들었는데 1년에 몇 강의나 하십니까?
많이 안합니다. 몇 번 안 되는데.....일년에 한 2백번 하던가요.


-2백번이 안 많은 겁니까?(웃음)
그럼 많은 겁니까? (웃음) (그는 건강엔 자신 있는 사람이다. 청년 시절 3라운드 선수이긴 했지만 권투를 했고, 한 때는 3종철인경기 연합회 회장도 지냈으며 지금도 암벽타기에 능하다.)


-경영의 목표는 이윤추구인데 이윤추구보다는, 강의를 통해 인산선생의 철학을 전파 하는 일에 주력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아버님께서 특별히 ‘사업보다는 인명구제’를 강조하신 건 아닌지...
시간 나실 때마다 “죽어가는 사람은 무조건 살려놓고 보아야 한다. 물에 빠진 사람은 일단 건져놓고 보아야 해! 암 같은 거에 걸려 비명횡사 할 사람을 돈 없다고 치료를 안 해 주든가 한다면, 그건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이런 말씀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습니다. 저도 아버님 그 말씀에 동감이고 항상 지키고 실천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아버님의 이 훌륭한 의술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나의 소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윤세 회장은 죽염 공장이 있는 함양 지리산 자락에 머물고 있다. 죽염을 굽는 공장, 1천여 개의 장독대, 중환자는 물론 피로에 지친 서울 사람들이 와서 심신의 긴장을 푸는 황토방 등 그의 선친이 ‘돈보다 소중히 여겨라’고 한 것들이 모두 함양에 있기 때문이다.
그 함양에서 출발해서 전국을 누비는 강의를 1년이면 2백여회나 뛰고 있다. 강의 한 번 나갔다 돌아오면 대개 하루가 걸린다. 비교적 가깝다는 광주대학 강의만 해도 오고 가는 데만 4시간 정도, 강의하고 오가는 길에 하루 해를 보낸다. 서울이나 강원도 고성, 또는 설악산 자연학교 강의가 있는 날에는 가는 데만 6시간 오는 데 6시간 하루가 모자라기도 한다. 차 안에서 자는 날도 많다.
그리고 함양에서 열리는 봄과 가을에 심신치유(3-4일), 매달 열리는 건강수련회(1-2일), 매년 4월에는 인산선생 탄신제, 8월에는 ‘인산죽염의 날’ 기념 회원초청행사(인산가에는 약 15만여명의 열성 회원이 있다) 등 거의 1년 내내 대중 앞에 서서 강의를 하고 있다. 지난 8월 25일 인산죽염산업화 25주년 기념일에는 2,500여명을 서울에서 함양으로 초대했다. 60여대의 버스가 동원되었고 글자 그대로 인산인해. 그런데 인산선생 생전에 예언이 있었다고 한다. ‘인산에 인해가 날 때가 있을 것이다. 아픈 사람에게 좋은 일 많이 하거라.’


일년에 200회가 넘는 강연을 소화하고 있는 김윤세 회장

-오늘 강의는 김회장의 저서 ‘내 몸의 의사를 깨워라’에 들어 있는 내용으로 주로 짜게 먹지 말라는 속설의 극복, 그리고 쑥과 마늘의 신비한 항암효과 등인 것 같은데....
저는 아버님이 병든 사람을 고치고 중병이 들거나 숨이 끊어진 사람을 살리는 등 전설적인 분위기 속에서 보고 들으며 자랐습니다. 뇌사한 사람, 심장이 멈춘 사람 등....아버님이 고친 사람, 죽음에서 구해준 사람이 다 헤어보지는 않았지만 수천 명이 넘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이 힘든 환자를 살리는 중심에 바로 죽염과 쑥뜸과 마늘이 있습니다. 죽염 얘기만 간단히 드린다면 죽염 먹고, 짜게 먹었다 해서 병에 걸리거나 나쁘게 된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인산선생께선 ‘죽염 많이 먹어라’고 하셔서 누가 ‘얼마나 먹을까요?’ 질문했더니 ‘배터지게 먹어라’ 하셨다면서요?(웃음)
그렇습니다. 많이 먹어도 끄떡없다는 말씀이고 죽염을 많이 퍼먹어보았자 배가 터지기 전에 구토가 나올 테니 배 터질 일은 없고(웃음)


-1986년에 죽염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한 25년 됐는데, 죽염에 대한 인식이 처음보단 많이 나아진 거 아닙니까? 대학이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죽염과 관련하여 강의 요청도 빗발치는 줄 알고 있습니다만...
죽염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저는 그것보다는 짜게 먹지 말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가 계속 매스컴을 통해 보도된다는 사실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제가 보기엔 한 10여년 더 지나면 ‘짭짤하게 먹읍시다’로 뒤집어질 것 같기는 합니다만......


-지난 8월 25일 죽염의 날 제가 함양 인산가에 내려갔을 때 마을 사람들에게 들은 얘긴데 한때 형사들이 많이 찾아왔다면서요? 무슨 일 있었습니까?
아 그거요? 처음에는 툭하면 형사들이 몰려왔죠. 깊은 산속에서 소금 굽는다고 연기를 내고 밤에도 불길을 올리고 하니까 혹시 사상적으로 이상한 것 아닌가 하고 보안과 형사들이 드나들더니(웃음) 얼마 후에는 마약반에서 자주 들르더라구요. 하얀 가루를 만드니까 마약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던지....(웃음)


-인산선생님 저서를 보니까 ‘신약’이 있고 ‘신약본초’가 있던데요.
아버님은 생전에 32회에 걸친 대중강의를 하셨습니다. 강의할 적마다 매번 강의장이 넘쳐나곤 했죠. 저는 강연내용이나 하시는 말씀을 틈틈이 구술했습니다. 아버님은 ‘너 또 책 내려고 그러느냐? 나 죽거든 내라’ 하셔서 돌아가신 후 낸 책이 ‘신약본초’입니다.


-강의 끝나셨으니 오늘 같은 날은 서울에서 한 잔 하고 내일 가시죠.
웬걸요. 내일 아침 함양에서 강의가 있어서요. KTX타고 대전에서 내려 다시 차를 갈아타고 바로 함양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사업하는 분이 그렇게 강의 많이 하다가는...
일년에 몇 번 하나요 뭐.(웃음)


-일년에 200번밖에...(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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