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백년 세월을 재단해온 종로양복점 명장 이경주
1백년 세월을 재단해온 종로양복점 명장 이경주
  • 김우성
  • 승인 2009.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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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아들 김두한도 단골손님이었죠” / 김우성



[인터뷰365 김우성] 우리나라에서 맞춤양복이 서서히 자취를 감춘 건 산업화가 절정이던 70년대부터다. 서양의 유행과 진보된 기술을 앞세운 기성복들은 ‘한 사람을 위한’ 마름질을 ‘불특정 다수를 위한’ 기계소리로 대체해갔다. 이제 기성복은 수천만 원대 초고가 명품에서 수만 원대 점포정리까지 쉴 새 없이 찍혀 나와 누군가를 기다린다.

이러한 때에 1백 년 고집을 이어가는 가게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맞춤양복점인 ‘종로양복점’이다. 할아버지 이두용 옹과 아버지 이해주 옹에 이어 3대째 가업을 물려받은 이경주(65세) 대표는 세상 단 하나뿐인 양복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장인이라는 칭호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는 원래 건축공학을 전공했고 위의 두 형 역시 가업과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던 상황에서 선친으로부터 가업 계승을 권유받았다. ‘좋은 양복 실컷 입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덜컥 시작은 했으나 불혹을 넘겨 가게를 완전히 물려받을 때까지 혹독한 시간을 거쳐야 했다.


광화문 네거리로 옮겨온 현재의 종로양복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주변 고층빌딩의 위엄에 가려 건물 자체도 눈에 띄지 않을 뿐더러, ‘since1916 종로양복점’이란 작은 간판마저 노포(老鋪)의 진가를 아는 이들에게만 손짓하는 듯했다.



양복 한 벌이 만들어지는 데 보통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한 벌만 제작한다고 하면 하루 반나절이면 가능한데, 계속 주문이 들어오니까 대략 열흘 정도 잡아야 합니다. 가령 오늘 손님이 와서 맞추고 갔다고 하면 2~3일 후에는 가봉을 하고, 그로부터 일주일 후쯤 찾아갈 수 있죠.


양복을 만드는 과정에 손님과 몇 번을 만나야 하는 건가요.

세 번이죠. 제일 처음 치수를 재러 오고요. 치수를 재고나면 종이에 재단을 하고 본을 떠요. (작업하던 걸 보여주며) 이렇게 저고리바지 떠서 양복감을 놓고 초크로 그리는데 그걸 잘라서 임시적인 양복 형태로 만든 걸 ‘가봉’이라고 해요. 그 가봉한 걸 입어보러 오는 게 두 번째.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정할 거 다 해서 옷이 완성되면 찾으러 와야 하는 겁니다.


손님과 많이 대면하게 되면 꼭 신체치수가 아니더라도 개개인의 취향을 파악하는 데 유리하겠습니다.

여러 번 볼수록 그럴 수밖에 없죠. 처음 온 손님이라면 100% 마음에 들기가 힘들거든요. 저도 40년 간 재단을 해오면서 100% 만족해 본 적이 없어요. 그 손님이 몇 번씩 오고 경험이 쌓이다 보면 어떤 부분에 신경을 써야 할 지 감이 오는 거죠.


요즘 기성복도 워낙 ‘잘 나온다’고 인식되어져 있습니다만 맞춤양복만의 장점이 있을 텐데요.

기계의 힘을 빌리는 기성복과 달리 순전히 손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체형을 스무 군데에 걸쳐 일일이 재서 제작하니까 그 사람에게 잘 맞을 수밖에 없어요.어느 한 사람도 타인과 체형이 같은 경우는 없지 않습니까. 개개인에 대한 고려 없이 평균체형에 사이즈만 다르게 나오는 기성복과 비교할 수가 없지요. 간단한 예로, 팔이 짧으면 소매를 줄이면 됩니다. 하지만 팔이 길면 기성복을 입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등이 굽은 분들은 곧아보이게, 다리가 짧은 분들은 길어보이게 하는 등 신체적 약점을 보완할 수가 있습니다. 손님들이 옷감을 직접 선택하니까 색상별 디자인별 옷감도 다양하고요. 지금 이 가게에 있는 옷감만 수백 종류가 됩니다.


체형이 꼭 특이하지 않더라도 남들은 가지지 못한 옷을 입는다면 누구라도 특별한 기분이 들겠습니다.

아무렴. 개성이 강한 사람들은 기성복 안 입어요.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잖아요. 멋쟁이들은 맞춰 입지.(웃음)


입고 다니다가 차후에 이것저것 수정도 가능한 건가요?

그거야 당연하죠. 1년 후에 배가 좀 나온 분들은 그에 맞게 다시 수정을 하고, 반대로 살이 빠져서 옷이 커졌다고 하면 줄여주기도 합니다.


맞춤양복이 기성복의 공세에 흔들리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인가요.

60, 70년대부터 이미 기성복이 나오긴 했지만, 크게 위협적이지는 않았는데 80년대 중반을 넘어갈 무렵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성복을 입었습니다. 무엇보다 대기업들이 직접 했기 때문에 광고가 엄청났던 데다가, 사서 입기까지 시간이 절약되니까 젊은 사람들이 많이 옮겨갔지요.


언젠가 지역의 작은 면소재지에서 봤던 양복점 간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업종은 바뀌었는데 간판은 그대로더군요. 그만큼 예전에는 맞춤양복이 보편적이었다는 말이겠죠?

60, 70년대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등학교 졸업할 때 양복을 한 벌씩 맞춰 입었어요.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의미였죠. 그때는 양복점이 번창했어요. 종로양복점이 있던 주변을 원래 '남대문통'이라고 불렀는데, 미도파백화점(현 롯데백화점)부터 종로 네거리까지 양복점이 쭉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맨처음 조부께서 종로양복점을 개업할 당시의 과정을 소개해주시죠.

할아버지께서는 열다섯 살 때부터 일본인 양복점에서 일을 하며 집안의 생계를 꾸려가셨어요. 그러다가 30대가 되자 일본으로 건너가셔서 본격적으로 일을 배우셨고, 서른다섯 살쯤인 1916년에 종로 보신각에 개업을 하신 겁니다. 양복에 대한 인식이 미미하던 시절이라 처음엔 주로 학생들 교복을 만드셨다고 해요. 그런데 조선 학생들도 일본인 양복점에서 교복을 맞추라고 학교에서 지시가 떨어졌는데도 우리 학생들이 전부 종로양복점으로 왔다고 해요.(웃음) 이후에 종로양복점이 입소문을 타고 번창해서 1920년대 중반에는 종업원 1백 명을 두고 함흥, 개성에까지 분점이 생길 정도로 호황을 누렸죠.


1916년 이후로 한 번도 문을 닫은 적이 없었던 건가요?

전쟁통에도 열었는걸요. 아버지께서 물려받아 운영하실 때인데 대구로 피난 가셔서까지 계속 양복을 만드셨어요. 나중에 서울 수복하면서 다시 종로로 왔지요. 아버지는 보성전문(고려대학교의 전신) 상과를 졸업하시고 동기들이 모두 은행으로 갈 때 일본 양복회사에 취직해서 일을 배우셨어요. 할아버지의 권유였죠.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자연스레 가게를 이어받으셨는데, 생각해보면 할아버지는 일찌감치 아버지를 후계자로 점찍으셨던 거죠.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도 직접 마름질을 하실 정도로 가게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대단하셨어요.


처음 선친 밑으로 들어간 건 언제죠?

1969년이니까 벌써 40년 전 일이네요. 처음엔 가업을 물려받겠다고 결정한 것에 대해 후회도 많이 했지. 생활이 안 되니까.


맞춤양복이 사양길에 접어들기 전인데 생활이 어려웠나요?

아버지로부터 용돈을 받아서 썼어요. 난 장가가서 애를 낳았는데도 월급은 안 주시고 용돈을 주셨지. 그러니까 유지가 되나. 집에서 한 달 살고 처갓집 가서 한 달 살고... 경영을 넘겨받기까지 그렇게 10년을 살았어요. 이사를 열 댓 번 다니면서 말이죠. 허허.


그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다면 다른 쪽으로도 마음이 갔겠습니다.

‘다른 일’을 하고 싶기보다는 다른 가게로 가고 싶었어. 어허허. 그래서 내가 집을 뛰쳐나간 적도 있어요. 월급 받고 싶어서. 허허. 며칠 동안 안 나오고 버티다가 다시 들어갔지요.


그러다가 양복점 일을 완전히 물려받은 게...

그건 1980년. 열쇠를 주시면서 “이제 네가 해봐라”.(웃음) 경영을 맡기신 거죠.


일을 배우던 시절 경제적으로는 힘들었을지라도 더 큰 무언가를 주시려 했던 건 아닐까요.

그렇지. 손님을 대하는 태도! 그걸 몸소 배웠던 게 지금껏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점심식사로 자장면을 시켜놓고 막 먹으려고 하면 아버지께서 등을 두드리세요. 손님이 왔다는 신호죠. 그러면 젓가락 꽂아놓고 바로 가는 거야. 손님의 시간을 절대 빼앗으면 안 된다는 거죠. 치수 재고 이것저것 하려면 30분 이상 걸려요. 그러면 뭐... 점심 굶는 거지.(웃음) 지성무식, 정성은 끝이 없다고 늘 강조하셨던 게 소중한 재산으로 남았습니다.



단골손님 중에 김두한씨도 있었다던데 종로가 정치1번지이니 만큼 쟁쟁한 손님이 많았겠습니다.

이시영 부통령도 단골손님이었고, 제가 의원회관까지 출장도 가고 했으니까 국회의원도 많았지요. 지난번에는 김성진 전 해수부장관이 다녀가시고... 그러고 보니 옛날 박정희 대통령 시절 김성진 문공부장관도 한 2~3년 전에 와서 양복을 해 입으셨으니까 동명이인 단골이네요.


기억에 남는 손님은 누구였나요?

한 30년 전에 제가 양복을 처음 만들 당시 손님에게 옷이 안 맞은 적이 있어요. 그 자리에서 옷을 찢어버리시는데... 그때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지요. 그날 밤 잠이 안 올 정도로 자책을 했어요. 그런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서 기술적으로 노하우가 생기더라고. 지금은 30, 40년 단골도 있습니다. 부자(父子)가 단골인 분도 있고 멀리 부산에서 오시는 분도 있지요.


주변에 나란히 있던 양복점들이 하나둘 없어질 때마다 위기감 같은 건 안 느꼈는지.

그만큼 살아남기 위해 더 잘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종로양복점이 맨처음 보신각 옆에 있다가 1941년도에 종로1가로 넘어와서 얼마 전부터 지금의 자리로 온 거잖아요. 종로1가에 있을 때하고 여기하고 다른 점이 품질의 고급화예요. 종로1가에 있을 때는 대로변이다 보니 오다가다 들르는 손님이 많았어요. 반면에 지금은 2층에 조그맣게 자리해있지만 일부러 찾아서 오는 손님이 대부분이라 고급스럽게 만드는 데 주력했지요.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지 않겠어요.


1백년을 넘긴 가게가 만오천 개나 된다는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가업을 잇는 문화가 익숙지 않습니다. 종로양복점을 계속 이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아버지께서 생전에 가보(家譜)를 매우 중요시 하셨기 때문에 가업을 잇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후대에 물려주고 싶은 욕심도 있겠습니다.

물론입니다. 그런데 아들놈은 화가야 화가. 그림을 너무 좋아하니까 양복점 운영할 생각은 전혀 없는 거죠. 날 닮아서 소질은 있는 것 같은데 아내와 내가 결혼하고 힘들게 살던 걸 애가 크면서 보고 느끼잖아요. 그러니까 양복점이 재미없다는 게 머릿속에 있는 거예요. 하하. 자기는 하기 싫다는 거야.


따님은 의상을 공부했다고 들었는데.

원래 전공은 산업디자인인데 부전공으로 의상을 했어요. 한때는 여기를 물려받을 생각이 있었어. 그런데 양복점이라는 게 남자들을 상대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선뜻 받아주질 않았지. 요즘에는 하라고 해도 안한대요. 자기가 한다고 할 때는 안 시켰다면서. 허허허.


자녀분들이 가업을 물려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보는 건가요?

난 여전히 미련이 있어요. 한 번은 나이 마흔 다 된 사람이 찾아왔어요. 영어강사를 하던 사람인데 부인은 의사라던가... 근데 이걸 꼭 배우고 싶다는 거야. 양복재단을. 전에는 양복학원이 있었는데 지금은 몽땅 없어졌거든. 양장학원은 있어도 양복학원은 없어요.그러니 배울 곳이 있어야지. 그래서 내가 그랬지 “여기는 학원이 없으니까 외국 나가서 배워라.”하고 돌려보냈는데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언젠가 우리 아이도 배우려하지 않겠나 싶어요.



가장 뿌듯한 때는 아무래도 손님이 마음에 들어할 때겠지요.

우리에겐 그게 제일이지. 손님이 만족하면 그 이상 없어요. 종로1가에 있을 때는 일흔 넘으신 분이(그 때 일흔이면 굉장히 고령이었다고 이 대표가 설명을 덧붙였다) “내 생전에 이렇게 잘 만든 옷 처음 입어본다”하시며 아이처럼 좋아하시더라고. 그걸 보는 내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바라는 게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정확히 1백주년이 되는 2016년에 예전 종로 보신각 대로변에 다시 종로양복점 간판을 걸고 싶어요. 그렇게 되어 가업이 4대까지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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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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