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은퇴 실감나, 그래도 여전히 달리는 중”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
“이제야 은퇴 실감나, 그래도 여전히 달리는 중”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
  • 유성희
  • 승인 2009.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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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동안 지구 네 바퀴, 16만Km 달려 / 유성희



[인터뷰365 유성희] ‘봉달이’ 이봉주(39)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사랑하는 마라토너다. 얼마 전 41번째 풀코스를 완주 우승하며 은퇴를 선언했을 때 국민들은 고마움과 사랑의 박수를 아낌없이 그에게 보냈다.

이봉주는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은메달 이후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2연패, 2000년 도쿄마라톤 준우승(현 한국 신기록 2시간7분20초 수립), 2001년 세계 최고 권위의 보스턴마라톤 우승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집념의 마라토너로 온국민에게 자부심을 심어줬다.

1994년부터 이봉주의 곁에서 동고동락한 은사 오인환 감독(삼성전자 육상단)은 “이봉주는 타고난 자질은 뛰어나지 않지만 오랜 세월 꾸준한 훈련으로 세계 톱 마라토너 대열에 오른 선수”라며 그를 노력형 둔재로 평가했다.

평발에 짝발, 후천적 훈련으로 키운 폐활량 등 신체적인 열세와 좌절을 딛고 세계 정상에 우뚝 선 이봉주가 마지막 레이스를 마친 얼마후 인터뷰365와 마주 앉았다.



오늘 아침에도 달렸나요?

그럼요. 운동을 그만뒀다고 바로 달리기를 멈출 수 있나요?(웃음) 집 앞 공원에서 1시간 정도 뛰었습니다.


은퇴가 실감나는지.

조금씩 피부로 와 닿는 것 같아요. 마지막 경기 뛰고 2~3일 정도는 은퇴했다는 실감이 전혀 안 났는데 이제 선수 때와 생활패턴이 달라지다 보니까 조금씩 실감하고 있어요.


은퇴 기자회견에서 마라톤 동영상을 보고 눈물을 흘리던데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선수생활의 순간순간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가면서 순간적으로 울컥했던 것 같아요.(웃음) 보통 운동선수들이 은퇴할 때 대부분 눈물을 흘리는데 저는 안 그럴 것 같았거든요. 평소에 눈물이 그렇게 많지 않은 편인데 그날은 저도 모르게...


마지막 경기에서의 마음가짐이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은퇴경기니까 다들 빨리 뛸 필요가 있겠느냐고, 부담없이 경기에 임하라고 말씀들을 하셨어요. 이번 대회(대전 전국체전)를 고향인 충남대표로 출전했는데 그동안 고향을 위해 한 게 별로 없어서 뭔가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승부근성이 발휘되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후배들에게도 내가 마지막으로 몸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게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달렸습니다.


20년 동안 달린 거리가 16만1천7백km, 지구 네 바퀴를 돈 셈이라죠?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달린 건가요?

부상 때문에 쉬었던 날 빼고는 매일 30km-40km를 쉬지 않고 뛰었죠.


선수생활하면서 가장 긴 휴식이 신혼여행 일주일이었다고 하던데.

그렇긴 한데 신혼여행 가서도 뛰었으니까요.(좌중 웃음) 아내가 그런 제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여행을 가든지 어딜 가든지 운동복 먼저 챙기거든요.(웃음)




마라톤은 레이스 자체도 힘들지만 준비과정이 더욱 고통스럽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떤 훈련과정을 거치나요?

대회가 결정되면 3개월 전부터 스케줄에 맞춰 훈련에 들어갑니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며 매일 힘든 훈련을 견뎌내야 하죠. 특히 시합을 일주일 앞두고 진행하는 식이요법이 무척 힘이 듭니다. 고기에 일체 간을 하지 않은 채 3일 동안 우선 육류를 섭취하고, 나머지 4일은 탄수화물 위주의 식사를 해요. 달리는데 있어 가장 중요하면서도 지구력을 향상시키는데 필요한 것이 탄수화물이라 가능한 많은 양의 탄수화물을 저장해놓아야 하는 것이죠. 고기만 먹는 과정에서는 온 몸에 힘이 없어 걷기조차 힘이 드는데 훈련은 계속 해야 하니까 그로키 상태가 됩니다. 그때는 신경도 예민해지고, 지옥의 식이요법이라 할 수 있어요.


지옥훈련이라고 정해놓고 하는 훈련이 따로 있나요?

지옥훈련이요? 힘들게 뛰는 매순간이 지옥훈련이죠 뭐...(웃음)


대회 당일에는 어떤 준비를 합니까?

마라톤은 그날의 컨디션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일단 잠을 잘 자야 합니다. 잠을 푹 잔 상태와 그렇지 못한 경우 컨디션 차이가 크거든요. 예전에 한숨도 못자고 시합을 뛴 적이 있는데 결국 레이스 후반에 이르러 몸에 나타나더라고요. 시합 당일은 아무래도 긴장을 많이 하니까 화장실도 자주 가게 되는데 당일의 몸 상태를 잘 체크해야 합니다.


초반 레이스에서 경기결과가 예상되기도 하나요?

어느 정도 감이 와요. 뛰기 전에도 자기 몸 상태를 보면 어느 정도 예측이 되고요.


달릴 때의 모든 상황이 만족스럽게 잘 풀린 경기로 꼽을 만한 대회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96년 후쿠오카마라톤이었던 것 같아요. 애틀랜타올림픽에서 3초 차이로 금메달을 내줬던 조슈아 투과니(남아공) 선수와 함께 출전했는데 만회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가짐부터 달랐어요. 컨디션도 시합에 맞게 잘 갖춰진 상태였기 때문에 다른 때보다 제가 원하는 대로 게임을 하면서 우승할 수 있었던 시합이었죠. 조슈아 투과니 선수는 중간에 기권을 했는데 제가 우승을 하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어요. 당시 진눈깨비가 날리는 궂은 날씨 속에서 우승을 하니까 더 기쁘더라고요.(웃음)


2시간의 레이스 중 가장 힘든 시간은 언제인가요?

처음 5km~10km정도까지가 가장 힘이 듭니다. ‘숨통이 트인다’ 그러죠. 그 전까지는 아직 숨통이 트이지 않았기 때문에 힘이 듭니다. 그 시기가 지나면 호흡이 편해지면서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며 달릴 수 있어요. 그러다 보통 35km지점 이후 스퍼트를 해야 하는 시기가 힘듭니다.



달리면서 주로 무슨 생각을 합니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되면 집중력이 떨어지니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는 건 금물입니다. 어느 지점에서 스퍼트를 하고 언제 선수들을 추월할 것인가, 또한 다른 선수들에게 제 표정을 읽히지 않기 위해 힘든 내색도 참아가며 달리고요. 물을 마시는 것도 중요한데 5km마다 배치된 물을 마시고 수분을 섭취해 안정된 페이스를 다시 찾는 게 중요해요. 중간에 물통을 잡지 못해 그냥 지나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는 다른 선수들에게 남은 물 좀 달라고 하기도 합니다.(웃음)


달리면서 선수들끼리 얘기도 하나요?

거의 안하는데 뛰다가 다른 선수 다리에 걸리거나 방해를 받으면 얘기를 하기도 하죠. 저도 뛰면서 다른 선수를 건드린 적도 있고 제가 걸려서 넘어진 적도 있어요.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죠. 준비도 잘됐고 대회 당일 컨디션도 좋아 기대치가 상당히 높았었어요. 이번에는 (금메달이) 될 거라 생각을 했었는데 잘 안 되려고 그랬었는지 아예 경기를 할 수 없게 되어서... 어떻게 보면 저에겐 가장 좋은 기회였는데 그래서 아쉬움이 가장 많이 남는 경기입니다.


마라톤이 이제는 단거리 확대판이라고 일컬어집니다. 베이징 올림픽 당시 초반부터 속도전을 펼쳤던 케냐, 에티오피아 선수들과의 레이스는 어땠습니까?

요즘 마라톤 추세가 스피드화 되다 보니까 스피드가 없는 선수들은 살아남을 수가 없어요. 지구력이 강세인 우리 선수들은 그에 맞춰서 짧은 스피드 훈련을 통해 현대 마라톤의 흐름을 얼마나 따라잡느냐가 관건입니다. 베이징올림픽의 경우엔 부상으로 제대로 훈련을 수행해내지 못했어요. 그러다보니 상대 선수들의 빠른 스피드를 따라 잡으려고 몸이 부담을 느껴 제대로 된 레이스를 펼치지 못했습니다.


조용하고 내성적이지만 타고난 승부사였던 이봉주는 한 번 진 선수에게 두 번 다시 지지 않는 설욕전이 유난히 많았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3초차로 금메달을 내줬던 남아공의 조슈아 투과니는 같은 해 후쿠오카마라톤에서, 2000년 시드니올림픽 우승자인 에티오피아의 게자행 아베라 역시 같은 해 후쿠오카마라톤에서 막판 역주로 보기 좋게 복수했다.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다시 일어서는 것이 이봉주의 마라톤 인생이었다. 90년대 후반 부진한 성적으로 은퇴 위기에 몰렸을 당시 로테르담마라톤(1998)에서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2시간 8분대의 벽을 깨뜨리며 재기에 성공했고, 코오롱을 탈퇴하고 방랑훈련을 하며 참가했던 도쿄마라톤(2000)에서는 현재까지 깨지지 않는 한국 신기록을 기록하며 준우승을 차지했다. 시드니올림픽에서의 좌절 후 냉담한 여론 속에 참여한 후쿠오카마라톤(2000)에서는 준우승을 차지하며 비난을 불식시켰다.


4번의 올림픽 출전 완주기록을 남긴 유일한 선수인데 올림픽에서만큼은 유독 운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올림픽이 4년마다 열리는 대회인데 그때마다 국가대표 3명안에 선발되기가 상당히 쉽지 않은 건데... 영광입니다. 은메달을 수상하긴 했지만 애틀랜타올림픽 때부터 운이 따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시드니올림픽에서 넘어진 것도 무언가 꼬이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 시합을 위한 준비도 충분해야 하지만, 올림픽 금메달은 어느 정도 운도 따라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것 같아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제가 애틀랜타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면 지금까지 계속 달리고 있을지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뛸 수 있었던 건 2등이라는 타이틀이 가장 큰 동기이자 자극이 됐어요.



2001년 보스턴마라톤대회는 1950년 함기용 선수가 월계관을 차지한 이후 51년 만의 우승이었기에 남달리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보스턴 마라톤 구간은 난코스로도 유명하지요?

보스턴 코스를 심장파열의 언덕이라고 해요.(웃음) 당시 케냐의 10연패 독주는 누구도 깰 수 없을 거라고 했는데 제가 그 예상을 깨고 우승을 했기에 쾌감이 더 컸어요. 당시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어 경기에 임했기에 더더욱 잊을 수 없는 레이스입니다.


극복하기 힘든 슬럼프는 언제였습니까?

매번 힘든 순간이 있었지만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대표 선발전을 앞두고 부상을 당했을 때 6개월 동안 슬럼프에 빠진 적이 있어요. 운동을 그만둘 생각까지 했었죠.


종종 황영조 선수(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와 비교되곤 합니다. 두 분은 언제 처음 만났습니까?

제가 코오롱에 입단하던 94년도에 처음 만나서 96년까지 운동을 함께 했는데, 그때 당시에는 실력으로 제가 비교가 안됐죠. 한 팀이었지만 간판선수인 영조는 정봉수 감독님이 직접 관리했기에 다른 선수들과 떨어져 훈련한 시간이 많았습니다. 우리 둘의 차이점이요? 영조는 스피디하고 파워풀한 선수였고, 저는 은근과 끈기로 달렸어요. 성격에서도 차이가 나는데 영조는 활동적인 반면 저는 내성적인 편이었고요.


황영조 선수는 훈련과정 중 마주 오는 차에 몸을 던지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다고 할 만큼 고통이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달리면서 고통스러운 순간이 많았습니까?

그럼요. 워낙 많은 양의 훈련을 소화하다보니 힘든 상황에서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죠. 차에 뛰어 들고 싶다고 했던 건 과장된 표현이긴 한데 그만큼 고통이 따르다보니까 그렇게 얘기를 한 것 같아요. 제게도 고통스런 순간이 많았지만 일단 제가 좋은 성적을 내면 많은 분들이 대리만족을 느끼시잖아요. 그분들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다는 사명감에 고통마저 즐거웠습니다.


이봉주의 유년 시절은 여느 농촌 살림이 그러하듯 넉넉하지 못한 편이었다. 그는 “유년 시절 연약한 어머니가 아버지의 농사일을 거들며 고생한 것과 비교하면 나의 삶은 호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당시를 술회했다. 유난히 몸이 약하고 작은 탓에 친구들이 만만하게 볼까봐 태권도와 복싱도장을 다녔지만 도장비 마련이 어려워 그마저도 오래 하지 못했다.

천안농고 1학년 시절, 이봉주는 육상부 친구의 권유로 달리기를 시작했다. 육상부에 들어간 후 10km를 처음 완주하고 본격적인 연습에 돌입했지만 곧 육상부가 해체되면서 두 번이나 학교를 옮겨 다녔다. 무명으로 지내던 그는 광천고 3학년 때 전국체전 10km에서 3위를 하며 육상 명문 대학에 입학할 기회를 잡았으나, 집안형편이 어려웠던 탓에 실업팀 소속으로 대학까지 마칠 수 있는 서울시청에 입단하게 된다. 그 후 실업팀 최강으로 군림하던 코오롱과 계약을 맺으며 ‘바늘과 실’로 비유되는 은사 오인환 감독(당시 코오롱 육상단 코치)을 만난다. 당시 황영조, 김완기 등의 대선수에 가려 팀 내에서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하다가 1995년 동아마라톤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국내 정상의 마라토너로 발돋움했다.


지금과 달리 어린 시절에는 말썽꾸러기였다던데... 쉽게 연상이 안 됩니다.

친구들과 싸움박질하는 그런 말썽꾸러기는 아니었고.(웃음) 시골이다 보니 밭이나 들에서 자유분방하게 뛰어 다니며 놀았던 보통의 시골 아이였어요. 체구가 작다보니 아이들에게 강하게 보이고 싶어 복싱과 태권도를 조금씩 다니기도 했는데, 그때는 운동을 하면 왠지 아이들이 쉽게 접근을 못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달리기가 이 선수의 마음 속에 쏙 들어왔던 시기는 언제였나요?

중학교 때 느꼈던 것 같아요. 단거리는 잘 못했는데, 오래 달리기는 내가 생각해도 다른 아이들보다 잘 했기 때문에 그때부터 자신감이 붙으면서 좋아했던 것 같아요.



인생에 있어 영향을 준 인물을 꼽는다면?

예전에 아주 어렸을 때였는데 손기정 선생님 다큐멘터리를 본적이 있어요. 어려운 시기에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워주고 의지를 보여준 그 분이, 어릴 때였지만 늘 제 머릿속에 떠나지 않았어요. 이후로 나도 달리기 이상의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달렸어요.


운동실력은 부모님 중 어느 분으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습니까?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많이 닮지 않았나... 어머니께서 굉장히 부지런하세요. 요즘엔 연세가 있으셔서 예전 같지는 않지만, 원래 젊은이들 못지않게 산도 잘 타시고 활동량이 많으셨어요. 또 누구한테 지는 걸 별로 안 좋아하세요.(웃음) 어머니는 제가 시합을 뛸 때마다 그렇게 마음을 졸이세요. 시합도 제대로 못 보시고 혼자서 안타까워서 어쩔 줄 몰라 하시는 거죠. 마지막 경기를 뛰고나서 제게 "이제는 편히 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동안 얼마나 걱정하셨을지 그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2002년 잠실주경기장에서 성대하게 올렸던 결혼식이 기억납니다. 운동을 했기에 제대로 연애도 못했겠어요.

매일 기다리게만 했죠. 제가 훈련하는 시간에 미리 와서 기다리다 보니까 끝날 때까지 기다린 적이 많았고, 연애하는 동안에도 제가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해줬어요. 그때는 정말 많이 미안했는데 돌이켜보면 다 추억이더라고요. 지금도 아내와 그때 얘기를 많이 주고받아요. 이제 가족과 함께 많은 시간 가지면서 그동안 못 해줬던 거 만회해야죠.(웃음)


아내 김미순 씨는 이봉주 선수에 대해 남편을 떠나서 존경한다고 하더라고요.

저 때문에 힘든 과정을 많이 겪었는데 그러다보니 오히려 제가 미안한 게 많아요. 지금까지 이런저런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운동할 수 있었던 건 아내의 도움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 만나서 다 잘됐어요. 모든 게 다.


자녀들은 이봉주 선수의 어떤 점을 물려받으면 좋겠어요?

글쎄요... 성실한 점을 물려받았으면 해요. 세상을 사는데 주어진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성만 있으면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20년을 한결같이 오뚝이처럼 일어나 뛰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습니까?

국민들의 성원입니다. 안 좋은 얘기보다는 좋은 얘기로 많이 감싸주셨는데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기에 지금까지 오랜 시간을 달려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 개인만을 위해 달렸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겁니다.


향후 계획을 밝혀주세요.

우선 그동안 몸으로 부딪혀 터득한 경험과 지식을 후배들에게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고요. 조금 더 크게는 우리나라 마라톤과 스포츠 발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책도 많이 보고 공부를 하면서 찾아 볼 생각입니다. 국민 여러분.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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