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은 나의 경쟁력, 건축가 김원철
정직은 나의 경쟁력, 건축가 김원철
  • 조현진
  • 승인 2007.12.1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직한 사람의 형통을 믿는, 김쌤을 만나다 / 조현진




[인터뷰365 조현진] 김원철이란 사람이 있다. 그의 명함에는 ‘건축사, 프랑스 국립 건축사 김원철’ 이라고 분명히 쓰여 있다. 하지만 의외로 그가 건축사인지 바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김원철을 인터뷰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그의 대한 첫 마디는 ‘아, 프란체스카의 김샘!’ (그 말을 하는 친구는 정말 김원철을 학교선생님으로 알고 있었다.) 혹은 ‘MBC 러브하우스 인테리어 하던 디자이너 말이지?’ 급기야는 이제 44살의 그를 ‘아, 그 머리 하얀 할아버지?’ 라고 말하는 식이었다. 즉, 많은 사람이 김원철을 알고 있지만 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인터뷰 365가 김원철을 만난 첫 번째 이유다. “김원철. 누구냐, 당신?” 이 질문으로 그의 사무실인 (주) 지온건축사사무소에서 인터뷰는 시작되었다.



정체가 궁금하더라고요.

그러게요. 사실 많이 받는 질문이고 스스로에게도 자주 묻는 질문이에요. 그럴때마다 저도 혼란스러워요. 난 뭘까? 하고.


정말요?

정말로요. 오랫동안 건축사로 살아온 건 분명하고 이제 10년 가까이 건축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지만 사실 저 스스로는 건축에 재능이 있는지도 항상 의심스러워요.


그 말씀은 좀 의외네요. 제가 정체성을 여쭤본 건 본업이신 건축만이 아니라 ‘TV인테리어 쇼’건, 아니면 시트콤이건 ‘미다스의 손’처럼 만지는 것마다 화제를 일으키셨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자학적 답변은 좀 당황스러운데요?

음... 며칠 전에 아끼던 카메라를 가방채로 모두 잃어버렸어요. 꽤 비싸고 오래 쓴 것이었어서 사실 아직까지 좀 정신이 없어요. 아깝고. 그런데 오늘 아침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아, 카메라가 나한테 위안이었구나. 언제부턴가 나는 집, 가족, 직장, 자동차, 카메라... 이런 것들을 내 삶의 위안이자 목표로 살았나 보구나.’ 하구요. 그런 걸 하나씩 가지면서 ‘난 잘 전진하고 있어.’ 하면서 만족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거 아닌가요?

그럴지도요. 하지만 그러면 안되는 거 같아요. 그런 물질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건 뭔가 분명히 부족한거라고 난 생각해요. 어떤 내 안에 있는,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좋은 마음을 발견하고 가꾸는 것을 목표로 살아가는 것이 더 옳은건데 하는 생각을 오늘 아침에 했어요.


음. 그런 말씀은 지극히 김원철 씨 다워요. 물론 아직 제가 아는 건 메스컴을 통해 대중에게 주입되고 읽혀진 보편적인 ‘김원철의 이미지’이지만.

대중에게 주입되고 읽혀진 김원철과 진짜 김원철. 너무 일찍 꺼내진 건지도 모르지만 사실 오늘 인터뷰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바로 이 두 얼굴에 대한 것이었다. 이 두 개의 면이 동일한지, 그렇지 않은지가 나에게는 - 불쌍한 사람을 보면 글썽이는 눈매를 가진, 코미디에 나와서도 따듯한 감성을 나누는 - 김원철을 볼 때마다 드는 의문이었다. 돌아가지 않고 직접적으로 묻는 방법이 옳을 것이다.


진짜 김원철을 한번 이야기 해보자고요. 어떤 사람이세요?

자기가 원하는 일을 다 하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지만 우선 저는 어떤 재능이나 소질이 있어서 건축을 택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릴때 꿈은 천문학자 같은 사람이 되어서 아무도 살지 않는 높은데 가서 별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사실 전 기초적으로 비사회적인 사람이에요. 기본적인 성격이나 성장환경 모두가 날 그렇게 만든 거 같아요. 중학교 때부턴 산에 가서 중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정말이에요. 그러니까 고등학교땐 허무주의에 푹 빠져 있있고... 인생이란 무언가? 허무하고 고통스럽다. 뭔가가 될 자신도 전혀 없었고...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채로 살았죠.


사춘기 땐 많이들 그러잖아요. 어쩌면 그 나이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이란 건 반항이냐, 자학이냐 하면서 둘로 딱 나뉘고.

제가 남보다 사춘기가 일찍 오고, 늦게 끝난 건지도 모르지만, 이 생각이 사실 오래갔어요. 제가 명지대 건축과 83학번인데 그때는 예비고사 보고 그 점수로 전기 대학에 원서 넣었다가 떨어지면 후기에 또 넣고 할 때거든요. 아까도 말했지만 한 번도 건축가가 되어야지 하거나 뭐 이런 꿈을 꾼 적이 없으니까 그냥, 학교선생님이 네 점수면 전기대 중에 어느 학교 정보공학과는 가겠다. 하셔서 그대로 원서 넣었는데... 떨어졌어요. 재수를 할까 생각했는데 원체 성격이 나약하니까 재수하면 안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허무주의자들이 그렇듯이 나에 대한 자존감이 전혀 없고 두려움으로 가득 찬 사람이니까.


생각보다 심하네요. 그 정도까지?

네. 그래서 다시 입시지도 선생님을 찾아갔어요. 후기대 가겠다고. 그때가 중동에 건설 경기가 좋을 때였었거든요. 그래서인지 그 분이 건축과를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거기가면 밥은 굶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명지대에 간 거예요. 갔지만 재미없죠. 원해서 온 대학이나 학과도 아니고. 그래서 학교도 거의 안가고, 방황도 좀 하고 그러다가 군대를 갔다왔고. 군대생활 덕분에 ‘그래도 내가 가진 걸 감사하고 사랑해야 겠다.’라고 생각을 하고 잠깐이나마 열심히도 냈지만 그럼에도 제 자신에 대한 자존감, 사회에 대한 자신감 같은 건 전혀 없었어요. 그 나에게 없는 정체감 때문에 잠깐 학생운동도 열심히 했는데 사실 그건 잘못되었구나 하는 걸 금방 깨달았어요. 다른데서 채워야 하는 갈증을 이념적으로 채우려 하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걸 느끼자 이 사회에선 내가 아무것도 못한다는 생각이 날 지배했죠. 그래서 유학을 준비한 거예요.




그가 대학을 다닌 시기는 한국현대사에서 학생운동이 가장 치열했던 순간이었다. 당시의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투사였고, 누구나 반동이었다. 그들의 목은 터져라 다가올 민주화의 새벽을 적셔줄 ‘아침이슬’을 노래했고, 그들의 육체는 최루탄 연기에 질식되는 경험을 겪어야 했다. 고통스러웠지만 그것이 당시의 대학생들에겐 메인 스트림(Main Stream)이었다. 김원철은 이 상황에서조차 심한 소외감을 느끼고 있던 것이다.



프랑스로 가셨죠?

네. 파리(Paris)였죠. 우선은 분명 이 프랑스에선 나까지 돌아올 어떤 기회가 있겠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지금은 그 시스템 때문에 프랑스 교육의 질이 떨어졌다고 호들갑이지만, 당시 프랑스의 교육정책은 모든 사람들 에게 열린 대학을 추구하는 것이었거든요. 내 입장에선 일종의 면죄부를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면죄부?

이 나라는 내 과거에 신경을 쓰지 않는구나하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후기대를 나온것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내 각오, 내 의지만 또렷하면 새롭게 시작할 기회가 생기는 구나 하고 흥분했었죠.


그래서 거기서 건축을 다시 공부하게 된 건가요?

처음엔 아니었어요. 말했지만 건축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있던게 아니니까. 당시에 주윤발 나오는 ‘영웅본색’ 같은 영화에 심취되어 있을때라, 영화공부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죠. 그래서 시험봤는데 안 뽑아주더라고요. 어떡하겠어요. 대학은 다녀야 하니까 영화과 지원하면서도 안전장치로 건축과를 2지망으로 지원했는데 거기 붙은 거예요. 그래서 또 건축을 공부하게 된거죠.


하하. 건축가가 되어야 하는 운명이셨네요.

그런가봐요. 그런데 그때는 그렇게 생각 안했어요. 프랑스가 물가도 비싸고, 제가 무슨 부잣집 아들도 아니었고 해서, 일하면서 공부를 해야 했거든요. 그땐 정말 힘들게 일했어요. 술집 청소하고, 뒷골목 중국집에서 교자만두 만들고, 접시 닦고, 육체노동하고... 이런 말 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정말 다 더럽고 험한 일이었어요. 우리나라에 와서 힘든 일 하는 외국인 노동자들 있잖아요. 제가 프랑스에서 처음에 딱 그랬었어요. 내 모습, 행색, 언어가 안되는 거... 모두 다요. 마음 속 깊이 아주 처절했어요. 그래서 요즘도 외국인 노동자들 보면 난 그 분들 쉽게 공감이 되요. 얼마나 힘들지도 느껴지고. 그 분들 제일 어려운 게 뭔 줄 아세요?


어떤거죠?

다른 사람과 내가 사는 모습이, 사는 질이 다르다는 게 제일 어려운거에요. 그걸 나도 알고 상대방도 안다는 것이 힘들죠. 그런데 그 경험 때문이었을 거예요. 이건 육체적으로, 현실적으로, 직접적으로 고통스러우니까 되려 내 감성 같은 것은 사치스럽게 느껴지더라고요. 눈 앞에서 바로 내가 타인들과 비교가 되어버리니까. 그때 처음으로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기서 내가 외국인 노동자로 살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그나마 지금 배우고 있는 건축 열심히 공부하는 것 뿐이다. 다행이도 난 학생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니까 자존감이 확 높아졌어요.


좋은 결론이네요.

당시엔 올바른 결론이었죠. 그래서 죽어라 공부하다보니 건축이 재밌어지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성적도 오르고... 그것보다 중요한건 처음으로 내 인생에서 목표가 또fut해졌다는 건데 그건 바로 빨리 귀국해서 ‘화이트칼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그런데?

하지만 건강한 생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였죠. 왜냐면 처음 생긴 인생의 목표가 이렇게 ‘잘 먹고 잘살기’에 맞춰지니까... 사실 내 정체감에 대한 원론적 문제는 하나도 해결된 게 아니었어요. 결국 얻어낸 결론이란 게 학위가 하나 있으면 그걸 의지하고 살 수 있겠구나 했던 거니까. 그러니까 거기에만 매달렸죠.


그러면서 더 ‘성공’에만 의지하게 되고?

그렇죠. 최고가 되어야만 이 고통이 없어진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큰 변화죠. 아니 사실 변화라기 보단 큰 거짓말이죠. 내 고통을 감추기 위한. 그래서 입버릇처럼 ‘최고의 건물이 아니면 건축이 아니다.’ ‘1등이 아니면 죽는다.’ 뭐 이런 관념이 생겼죠. 건축과 인생에 대한 지독한 편견이지만 그땐 그랬어요. 그렇게 되어야만 내가 공허하지 않다. 라고 나를 설득하는... 그렇게 공부를 마치고 학위를 가지고 한국에 다시 돌아왔어요. 화이트칼라로 살게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한국에 왔고, 5년간 직장생활 했어요. 그 시간동안 사실 많이 깨어졌죠. 내 이상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 때문에. 학위하나 있으면 그걸 의지하고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상은 아니더라구요. 이전까지 내가 봐 온 사람들처럼 나도 그렇게 살고 있더라고요. 난 저들처럼 살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나 역시 그대로 였지요. 확실히 조직생활은 어려웠어요. 난 비사회적인 사람이니까. 회사를 나와서 독립한 이유도 그런 거예요. 뭐 거창하고 원대한 꿈이 있던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조직생활을 함께 하는게 너무 어려워서 그냥 혼자 해야겠다고 맘먹은 거죠.


비사회적 사람이면 남 밑에서 일하는 것보다 자기 회사 하는 게 훨씬 더 어려웠을 텐데요.

그러게요. 회사를 차리고 금방 그걸 알게 됐죠.(웃음) 막상 시작했는데 한 6개월 이상 일이 하나도 없었어요. 정말로요. 그때 친구중 하나가 너무 보기가 딱했는지 자기가 날 좀 도울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고 어떤 제안하나를 하더라고요.


어떤?

그게 바로 ‘MBC 러브하우스’ 였어요.



아하.

너무 힘들 때라서 뭐 찬밥, 더운밥 가릴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이게 나에게 맞는건지 아닌 건지 판단도 못하고 그냥 시작 한 거죠.


하지만 결과적으로 분명히 김원철을 알리는 도구가 되었죠.

그럼요. 그거 아니었으면 누가 절 알아보고, 또 이렇게 인터뷰를 할 수 있었겠어요? 지금생각하면 참 감사한 기회였어요. MBC나 저나 서로 좋은 때를 만났던 거라고 생각해요. 반응도 좋았고. 물론 그 당시엔 그 일이 절 많이 혼란스럽게 했지만.


혼란스러웠다? 어떤 면에서?

그때의 김원철은 100% 내가 아니었다고 말 할 순 없지만 사실 많은 부분 만들어진 이미지였죠. 방송 이란게 그런 거니까.


그렇게 말씀하셔도 사실 방송을 보는 입장에서 김원철씨는 다른 사람과 달랐어요. 불쌍한 분들 사연을 보면서 코가 빨개지는 모습 같은걸 보면 ‘아, 이사람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구나.’ 뭐 이런 감정을 그대로 전달 받았죠.

그건 이런 거예요. 진짜 가슴 아프니까. 그런데 사실 제가 느낀 아픔이 10이면 방송에서는 그게 100으로 포장되기 일쑤였거든요. 그래서 사실 그 방송을 하면서도 함께 만드는 스탭들하고 깊이 있는 교제는 없었어요. 그러면서 얼굴이 알려지니까 더 힘들죠. 이건 아닌데...이건 내가 아닌데... 사실 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고, 빚에 쪼들리는 작은 회사 경영자일 뿐인데 하면서요.


그 기분 이해가 될 것도 같아요.

그러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냐하면, 이건 좀 우습지만 ‘아, 나도 저런 김원철처럼 살고 싶다.’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 쇼에서 보여 지는 김원철처럼 살아야지. 진짜 저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뭐 이런 생각이요.



김원철은 그래서 그렇게 사는 연습을 계속 시도해보았다고 했다. 몇 년간 지방행사에도 나가고, 여러 단체들에 이름을 올리면서 자신을 ‘방송에 나오는 김원철’ 처럼 만드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고 했다. 시트콤인 ‘안녕,프란체스카’에 출연한 것도 그래서 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보면서 기뻐하는 만큼, 스스로는 상실이 몰려왔다고 했다. 결국은 그 노력이 자신을 더 힘들게 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 것은 겨우 2년쯤 전이다.



극복은 하셨죠?

극복했다고 믿어요. 아직도 그걸 벗는 연습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그때 신앙을 가졌어요. 교회에 출석하면서 예수전도단이란 곳에서 DTS라는 훈련을 받았죠. 그 덕분에 내가 아닌 나를 벗어버릴 수 있었어요. 내가 누구인지를 볼 수 있게 되었고. 그때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진짜 일이 뭔가 궁금해졌어요.


그래서 그 다음부턴 일이 쭉 잘 풀린다?

하하. 그렇진 않아요. 도리어 내가 부족한 사람이고, 능력 있는 리더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게 되었으니까 어쩌면 일이 쉽게 풀리지 않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지난 몇 년간 정말 일을 하다가 이익보다 손해가 더 컸어요. 그리고 리더로써 이런 말 하면 안 되지만 그냥 다 털어버리고 자유롭고 싶을 때도 분명히 있었고, 지금도 그런 마음이 자주 일어나고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간다. 그러다보면 언젠간 나도 더 이상 부족한 사람이 아니게 될 꺼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죠.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져요. 설계나 건축이라는 일이 늘 누군가와 경쟁을 하고 이겨야 일이 생기는 직업인데 저는 그 ‘이겨야 한다는 마음’도 이젠 허물려고 노력해요.


이겨야 한다는 마음을 버린다... 그건 어떤 거죠?

우리 직원들 이야기해서 미안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능력이 출중한 친구가 많지 않아요. 저부터 그러니까. 이력서상으로는 경쟁사에게는 상대가 안 되죠. 그런게 더 우리를 도전적으로 만들어요. 누가 봐도 우린 진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공하면 이건 기적이고 감사할 일이다. 이런 식으로 회사를 이끌죠. 모든 걸 내 능력으로 채워야 한다는 부담을 벗는 거죠. 이렇게 최고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시각이 깨지니까 참 자유로워졌어요. 저도 그렇고 직원들도 그렇고.


이상적이긴 한데, 현실과는 좀 거리가 있는 듯이 들려요.

외람되지만 전 ‘이상은 현실이 가야하는 마지막 종착역’이라고 믿어요. 즉 이상이 그냥 이상으로 있으면 그건 ‘허상’이지요. 이상은 분명히 도달할 실체라고 믿고 걸어가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김원철은 자신의 이상, 만나야만 하는 비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난 스승의 날에 찾아가고 싶은 선생님이 없어요. 고등학교 때 입시와 대학 말고는 다른 걸로 날 조언해 준 사람이 없었던 거에요. 다들 그냥 날 모두 몇등 짜리로만 정의하면서 입시지도 해주기만 한 사람들이죠. 요즘 저 역시 대학에 출강도 하고 그러지만, 제가 대학에서 공부할 때도 열정과 자존감이 없었어요. 학생이나 교수나 다 그랬어요. 내 삶에는 롤 모델이 없어요. 그래서 난 타인을 존경하고 사랑 하는게 참 어려운 사람이 되어버린 거예요.


계속하세요.

지금 대다수의 젊은 친구들도 내가 보낸 것과 같은 불행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그 친구들이 더 불행하죠. 돈의 논리 중심으로 자라야 하고, 지금 중고생이 우리 학교 다닐 때 보다 더 유혹이 많잖아요. 그런데 학교환경이나 교육정책은 바뀌지 않은 채로 성공만을 말하니까. 그런데 우리가 정작 채워야 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에요. 점수가 내 정체감이 아니며, 남이 보는 나, 나 스스로가 위장하는 내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 했을때 분명한 비전이 생기죠. 영원히 변하지 않고 평생 가지고 가야하는 비전이.


그 김원철식 비전은 어떤거죠?

저는 사람을 돕고 구한다는 비전이 생겼어요. 돈이나 인기가 비전일 때가 있었지요. 그런데 그게 없어지니까 흔들리더라고요. 그러니까 그런 건 비전이 아닌 거예요. 돈을 벌기위해 의사가 되면 돈 번 다음엔 환자들 치료 안하고 주식투자 하게 되요. 그렇잖아요. 그러기에 어릴때 부터 분명한 비전을 세우고 그거에 맞춰서 공부하고 직업을 선택해야 하는 거죠.


사람을 돕고 구하는 비전. 이게 김원철식 비전이라는 말씀인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하실 수 있어요?

한마디로 내가 먹을 건데 안 먹고 남 돕는게 진짜다라고 생각해요. 작년에 아프카니스탄을 다녀왔어요. 거기서 몇 일간 그들을 도왔거든요. 러브하우스 때처럼 집도 지어주고 집안도 정리해주는 일을 했죠. 그런데 거기서 제가 한 일은 디자인이 아니라 카펫 빨고, 못 박고, 청소하는 일들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그런 일을 참 잘 하더라고요. 그리고 그 작은 일들의 결과 앞에서 진짜로 기뻐하는 아프칸 사람들을 본 거예요. 내가 건축가가 아니더라도 된다는 것. 1등이 아니더라도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거기서 경험했어요. 바로 그날 평생 동안 나를 괴롭히던 거절감이 없어졌어요. 거절당하지 않기 위해 어떤 내 자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졌고요.


불교적으로 말하면 해탈, 도교적으로 말하면 득도군요.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거듭남이죠. 하하. 어떤 표현이건 맞아요.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가 지금까지 내 인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사실 난 그런게 아니었구나. 나도 이렇게 작은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구나. 아, 그럼 나도 살만한 인간이구나. 그렇게 내 스스로에게 ‘호감’이 생기는 거예요. 두려움도 없어지고.


보도자료 및 기사제보 interview365@naver.com
- Copyrights ©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조현진
조현진
press@interview365.com
다른기사 보기


  • 서울특별시 구로구 신도림로19길 124 801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737
  • 등록일 : 2009-01-08
  • 창간일 : 2007-02-20
  • 명칭 : (주)인터뷰365
  • 제호 :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명예발행인 : 안성기
  • 발행인·편집인 : 김두호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문희
  • 대표전화 : 02-6082-2221
  • 팩스 : 02-2637-2221
  • 인터뷰365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interview365.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