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시대를 대표하는 디자인학자 김영기 계원예대총장
디자인시대를 대표하는 디자인학자 김영기 계원예대총장
  • 김두호
  • 승인 2009.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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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디자인 문화는 공기와 같다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디자인이 세상의 모든 분야를 연결하고 변화시키는 금세기 실용예술의 중심축이 되고 있다. 김영기 계원디자인예술대 총장은 디자인이라는 응용미술의 한 장르를 산업미술과 실용학문의 큰 분야로 발전시켜온 대표적인 디자인교육학자다.

 

그는 대학을 소개하는 총장 인사말에서 “21세기 인간은 과학에, 과학에 의한, 과학을 위한 일념으로 살아온 지난 세기의 기계화된 인간성을 반성하고 인간에,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진정한 인간성 회복을 예술의 창조적 활동을 통하여 이루어 가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이미 보통사람들에 의해 물결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머리말에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지난 20세기는 과학기술의 혁명에 의해 숨가쁘게 발전해온 시대였다면 21세기는 보다 넓은 인간의 자유와 창의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예술에 의한 인간성의 혁명시대라고 주창한다.

 

서울대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디자인대학원장 등을 거쳐 디자인대학의 총장까지 50여 년간 디자인분야에서 보낸 그의 학문적 과제는 언제나 한국인의 정체성과 한국의 미(美)를 토대로 한 한국적 디자인 미술의 발견이었다. 1960년대 문자를 디자인 시각에서 분석한 <한글 문자 꼴의 역사적 연구> 논문을 발표하면서 시작된 디자인 관련 연구는 <한국인의 조형의식> <한국인의 기질과 성향을 통해 본 한국미의 이해> <디자인 담론-한국인의 정체성 탐구> 등의 저술활동으로 이어졌다. 2006년에는 <이화여대 김영기 교수의 인생을 디자인하는 개념시>라는 독창적인 시집을 펴내 주목을 받았다. “읽으며 잊혀진 나를 만나 새로운 날들이 디자인 된다”고 소개한 시집은 직접 찍은 사진과 그림을 삽입하고 글자 배열 등 편집 디자인도 색다르다.

 

그의 디자인학은 미술의 울안에서만 찾아낸 것들이 아니다. 역사와 철학, 과학 등의 다양한 학문과 꾸준히 소통하고 접목해온 이론, 그리고 물건을 만들어 내는 산업사회의 상품 디자인 활동까지 직접 참여해 성과를 거두고 실현한 실용예술들로 차있다. 그래서 그는 디자인을 두고 예술(Art)과 과학(Science)을 결합하는 행위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과학 기술과 예술을 연결하고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분야가 디자인이라는 것이 디자인 학자의 철학이다.

 

김영기 총장은 대학운영도 대학 스스로가 인재를 찾아내는 개혁 프로그램으로 새롭게 디자인하고 있다. 암기식 교육의 폐단인 시험점수와 성적에 의존해 신입생을 뽑지 않고 수시모집을 통해 면접과 토론시험 방식을 도입, 적성과 창의성을 중심으로 신입생을 선발하고 있다. 경기도 안양근교 숲속에 있는 계원디자인예술대의 총장실은 크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반세기 현대 디자인의 역사와 함께한 주인의 중후한 체취를 느끼게 했다. 창밖의 가을 풍광도 유난히 아름다웠다.

 

 

 

 

 

올해도 잠실 체육관에서는 서울시가 주최한 디자인올림픽이라는 큰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습니다. 디자인 문화가 모든 분야,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실용예술로 폭넓게 뿌리를 내린 이 시대의 일면입니다. 지금은 디자인고등학교까지 있습니다. 디자인이란 용어조차 생경하던 과거를 생각하시면 격세지감을 느낄 때가 많을 것 같습니다.

내가 응용미술학과(서울대)에 입학한 것이 1960년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디자인을 가지고 꿈을 펴온 지 2010년이 만 50년째입니다. 그동안 디자인 문화와 더불어 개인적으로 보람도 얻고 이룬 것도 많으니 부지런히 빚을 갚아야한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지금 한층 책임감을 느낍니다. 21세기에는 교육이 변해야 한다는 강한 미션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전반에서 디자인 분야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현상의 가장 큰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20세기는 산업사회의 발전, 곧 과학기술의 혁명기였고 교육과 지식의 발전도 따랐습니다. 새로운 지식분화 작업이 일어나고 세분화되면서 각 분야의 전문화시대가 열렸지만 역기능의 측면에서 보면 인간의 전체적 기능이 박탈당한 것으로도 볼 수 있어요. 인간은 태어나면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도록 열려 있으나 특정 분야에만 쓰임을 받아 다른 면은 퇴화시키는, 이를테면 20세기의 교육은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으로 맞춰져 균형을 잃은 교육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디자인은 과학문명이 요구하는 맞춤형으로 교육된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인간성을 어떻게 하면 회복할 수 있느냐, 과학문명의 발전에 초점이 맞추어진 문명화된 인간에게 결핍된 문화를 보충하고 과학기술과 예술을 연결하는 임무를 띄면서 발전해온 것이지요. 과거는 경제발전의 대명제에 가려져 디자인분야의 활동이나 기여가 부각되지 않았어요.

 

‘디자인’이라면 산업 디자인부터 생각하게 됩니다. 산업 디자인 분야는 세계적 수준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산업발전에서 끼친 디자인의 기여도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1961년도에 우리나라 GNP가 80달러 정도였어요. 1만 달러, 2만 달러로 가는 과정이 기적의 경제성과로 세계의 부러움을 사고 있어요. 성공요인은 우리가 문화를 내려놓고 산업화를 위한 지식과 많은 문명의 도구들, 과학기술들을 빠른 시간 내에 습득하고 활용해 온 노력의 결과로 봅니다. 그러니까 문화를 중요시했던 민족이 문화를 내려놓고 일제강점의 암흑기와 6.25전쟁의 폐허를 딛고 50여년의 집중적인 노력을 해서 여기까지 왔기 때문에 자연히 정신문화라고 하는 것은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 기간에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끝없는 투쟁을 통해서 사회발전과 경제발전에 대한 균형도 이루었어요.

그런데 사회발전을 해오는 과정에서 디자인이 기여한 것은 전혀 부각이 되지 않았어요. 산업발전을 위한 디자인만 있었지, 사회발전으로 가는 것은 안했다는 거죠. 애초에 디자인은 산업사회가 생산하는 모든 물건들이 추악한 인간환경을 만들어 갈 것이라는 우려에서 발전을 했거든요. 추악한 물건을 추하지 않은, 인간을 위한 물건으로 변화시키려면 예술가의 힘이 필요하다는데서 디자인이 탄생한 겁니다. 1920년대 독일에서 처음 등장 했어요.

우리도 1960년대부터 관심 분야가 되긴 했지만 그러나 초기 산업사회는 디자인에 돈을 투자하지도 않았고 우리가 입는 의상에서부터 모든 제품들이 돈 적게 들이는 것을 요구했어요. 디자인은 그것과 끊임없이 투쟁을 해왔습니다. 민주주의 투사들이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싸우듯이 디자이너들은 아트라는 무기를 들고 투쟁을 해와 그래도 우리 디자인 예술이 세계에서 인정을 받게끔 발전했어요. 텔레비전, 자동차 등 기계 전자제품에서 패션 등의 디자인이 모두 세계적인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어요.

 

디자인이 새로운 분야의 명칭으로 부각된 것은 1960년대 말 한국디자인포장센터라는 곳이 설립되면서로 기억됩니다. 지금은 한국디자인진흥연구원으로 발전되었지만 그 때만해도 디자인만 다루는 전문센터가 생긴 것이 신기하게 보였습니다.

1969년 한국디자인포장센터가 설립되기 한 해 전 1968년에 내가 서울대 디자인연구센터의 상임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수출품 포장에 대한 논문도 쓰고 했는데 그 연구센터가 한국디자인포장센터의 전신 역할을 했어요. 정부가 산업디자인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상공미술전람회도 개최하고 대학에서 디자인과 연관된 공예과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디자인’을 두고 아직도 겉모양을 아름답게 꾸미는 단순한 포장문화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21세기 디자인이 추구해야할 역할과 기본정신이 인간성 회복에 있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디자인이 추구해야할 인간성은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과 생태계를 일컬어 한 말입니다. 인간도 생물다양성 중에 하나입니다.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다양한 생물군 속에서 한부분이고, 인류라고 하는 부류 안에서 또 생각과 생활환경이 다양한 인종이 있습니다. 인류가 과학기술문명을 발전시킨 종족이라고 해서 마치 지구의 대표적인 종족인 것 같이 행세하는 것은 일종의 엄청난 인간성의 재앙이라고 봅니다.

또한 민주주의의 3대 명제가 된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을 그대로 원용한다면 디자인이야 말로 바로 “design of the people, design by the people, design for the people”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디자인도 획일주의적인 기업가와 자본가들에게 반란을 일으키며 발전해 왔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시대로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것을 생각하는 다양한 디자이너들에 의해 지금은 이쑤시게 하나에서 우주의 인공위성까지 디자인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디자인이 누구에게나 언제 어디서나 공기같이 필요한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사회를 아름답게 바꾸고 맑은 공기를 호흡하려면 디자인부터 인간성회복의 기본 정신을 실현해야합니다.

 

 

 

 

디자인 분야에서 전문가로 활동하려면 미술공부 못지않게 인문학에서 이공학분야까지 해박한 지적 감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사실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돌이켜보면 나의 디자인 연구와 학문적인 토대는 철학이었어요. 대학시절부터 그림 중심의 전공과목 강의에만 매달리지 않고 국문학 철학 법학과 강의실을 옮겨 다니며 도강 청강을 많이 했어요. 국문학자 이희승, 법학자 유기천 교수의 강의도 많이 들었지요. 특히 여러 분야의 지식과 사상을 제대로 접하게 된 계기는 대학 시절 학술도서를 많이 출판하던 동양출판사에서 12권짜리 <20세기 문명과 과학-전환기의 현대사상>이라는 전집의 편집스태프로 참여하면서였습니다. (총장실 책꽂이에 지금도 빛바랜 1960년대 출판물인 그 서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김두헌 박종홍 윤태림 신일철 김형석 안병욱 함석헌 백철 김학영 등 역사, 철학, 법학, 문학 등 각 분야 석학들의 사상을 접하면서 다자인 바깥의 지식들을 흥미있게 받아들이고 접목해 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또 부호였던 그 출판사 장삼식 사장이 한학기 등록금이 2천850원일 때 선뜻 5천원을 장학금으로 주더군요.

 

대학시절에 아르바이트를 하셨군요. 가정이 어려웠습니까?

나는 서울 태평로에서 출생했지만 굴곡이 있었어요.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에게 미분적분을 가르쳐 주신 인텔리 사업가로 서대문 독립문 부근에 양초공장을 운영하시며 김포에 많은 토지를 가진 지주였습니다. 금융조합도 운영하셨고. 아버지는 함흥 질소비료공장과 고주파중공업, 아오지 석탄액화공장 건설에 참여한 엔지니어셨죠. 그런데 해방 후 토지개혁과 6.25를 거치면서 토지도 사라지고 공장도 불에 타 집안이 어려워졌어요. 덕수초등학교를 다니고 경기상고를 졸업한 뒤 은행에 취직을 했을 때 모두가 부러워했지만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어요. 공부를 잘하니 등록금을 안내고 공부할 수 있다는 교수의 말에 은행을 그만두고 좋아하는 미술 쪽을 염두에 두고 서울대미대에 진학했습니다. 할아버지는 김포에 남아있는 집터를 팔아 입학금을 마련해주셨지요.

 

시대에 따라 젊은이들의 의식구조나 가치관도 많은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1960년대 젊은 세대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이었습니까? 다들 가난했다는 이야기는 빼시고.

대학 1학년 때 4.19가 터졌지요. 나도 청와대(당시 경무대) 앞길에서 총 맞고 쓰러지는 대열에서 소리 지르며 뛰었어요. 3공화국 유신정부 때는 이화여대의 젊은 교수로 고려대 이대 서울대 연세대 등 교권선언 33인 교수 서명에 참가해 김옥길 총장으로부터 경고를 받기도 했지요. 명분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젊은 날의 가장 큰 고민이었지요. 우리의 젊은 시대는 타의에 의해 그리고 환경에 의해 자기를 합리화 시키며 지성의 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강하게 부딪혀 봤자 상처뿐인 영광이고 사회는 싸움꾼 정도로 평가를 해요. 그러나 용기 있는 지성의 힘이 사회를 발전시키고 변화시키는 것이지요. 4.19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혁명도 엄청난 지성인들의 희생으로 이룬 결과였어요.

 

톰보이 로고나 CJ의 햇반, 진로의 석수 디자인 등 화제를 남긴 히트작품도 많은 것 같습니다. 디자인 작업은 주로 한국적인 미의 표현에 치중해 오셨지요?

사실 대학시절까지 일본 서적을 많이 보았습니다.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얻기 위해 일본 책을 많이 샀는데 점점 의식이나 사물을 생각하는 관점이 일본화 되고 있다는 자각증상이 느껴졌어요. 이러다가 식민사관에 굴러 떨어지는 것 아닌가 하고 무서운 생각이 들어 어느날 내가 가진 일본책을 모조리 재단기로 분쇄해 고물상에게 넘겼습니다. 그로부터 한국의 미에 대한 애착이 더 집요해지더군요. 나는 작품을 생각할 때 역사적이어야 하되 역사에서 벗어나야한다는 점을 염두에 둡니다. 역사 속으로 가면 과거로 뒷걸음질 치는 것인데 디자인은 미래로 가야합니다. 청자를 굽던 시대의 후손들이 막그릇인 분청사기를 굽고 그 후손들이 다시 백자를 만든 것은 역사를 벗어난 시도지요. 르네상스도 역사적이었지만 역사에서 벗어난 문화의 창조시대였습니다.

 

저서 가운데 <조센징 한국인 신조선족>과 는 어떤 내용의 책입니까? 특히 는 내용이 난해한 이론서로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조센징 한국인 신조선족>에서 조센징은 일제강점기 때 교육받은 사람, 신조선족은 한국을 모르는 한국인을 위하여 쓴 글입니다. 싱어송라이터인 김민기도 등장시켜 우리의 소리가 새로운 한국인의 미래를 열어가는 이야기도 다루었습니다. 는 Native Design의 약어로 ‘태어난 나라가 있는 디자인’이라는 의미인데 디자인이 외래문화였지만 이제 여기서 태어나야 한다는 명제로 디자인의 새로운 이론을 다룬 책입니다. 내용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2020년 쯤에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펴냈습니다.

 

아직도 해야할 일이 많다고 하셨는데 어떤 일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우선 대학이 창의성 있는 인재를 찾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키는 일이 과제입니다. 올해 우리 대학은 수시모집으로 신입생을 모두 뽑습니다. 암기식 수능고사나 학교성적 등에 의존하지 않고 심층 면접과 토론 등의 과정을 통해 창의성을 높이 평가하는 선발방식을 택했습니다. 디지털시대는 인간의 기억시스템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국가 발전과 보조를 맞추는 창의성 중심대학으로 교육풍토를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의왕시와 우리 대학이 3천4백억 규모의 첨단 SAD(School of Art & Design) 디자인센터를 설립, 2천6백여명 학생에게 창작 공간이 되게 하면서 중소기업들의 디자인이나 홍보사업을 지원하는 국내 디자인 문화의 메카로 발전시킬 청사진이 나와 있습니다.

 

 

 

 

디자인을 지망하는 젊은이나 디자인을 가르치는 교육계에 우리나라의 현대 디자인 역사와 함께 하신 원로 교육자로 어떤 말씀을 주고 싶습니까?

지금 대학에 들어오는 학생들이 2000년에 초등학교 3학생이었습니다. 앞으로 21세기를 살아갈 주역들이지요. 이들이 살아가는 사회는 우리 기성세대가 살아왔던 사회와는 다르게 한국이 세계 속의 주요 국가가 돼 있어요. 그러면 세계의 문제 속에 우리의 문제가 있고 우리의 문제 속에 세계의 문제가 있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합니다. 강조하면 나의 문제 속에 우리의 문제, 우리의 문제 속에 내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나의 문제가 세계의 문제일 수 있고 세계의 문제가 곧 나의 문제일 수가 있다는 사고(思考)의 스케일을 넓고 크게 가져야합니다.

그런데 초중고교나 대학의 교직자들은 20세기의 문명화된 인간을 빨리 만들려고 하는 의지속에 교육된 분들이라 이 시대적 문화개념이 상당히 빈약합니다. 다양하고 풍부한 문화를 접하며 성장하는 세대를 가르치려면 과오를 범할 수 있다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과오를 덜 범할 수 있다는 인식이 바로 design thinking(디자인 思考)입니다.

나를 인터뷰 하고 있는 <인터뷰365>도 알고보면 디자인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많은 숨겨진 분들의 이야기를 이끌어내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야 한다는 생각의 그림이 바로 design thinking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디자인이 단순히 그리고 예쁘게 칠하는 것에서 머물지 않고 그것보다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거나 문제해결에 앞장서는 교육으로 가야합니다. 21세기를 이끌어갈 젊은 세대들에게 20세기에 교육받은 우리들이 정말 조심스럽게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디자인 학자는 자신의 삶과 생각을 함축적인 언어로 나타낸 <인생을 디자인하는 개념시>라는 이름의 시집을 펴냈다. 내용의 이미지를 반영한 사진과 그래픽 그리고 목차와 제목이 없는 시 60편 중에 한편의 시를 소개한다.

 

그곳에 살고 싶다

그곳에 가고 싶다

그곳에 서서

새로운 나를 만나

이야기하며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

 

그때

그곳에서 옳았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은 후회로 남지만

 

그래도

 

그곳에

살고 싶고 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

 

나는

백발이 찾아온

지금

그곳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린다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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