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계의 박찬호’ 1세대 만화 스토리작가 박하
‘만화계의 박찬호’ 1세대 만화 스토리작가 박하
  • 육홍타
  • 승인 2009.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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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식 만화는 독자 권리 무시하는 것” / 육홍타

 

 

 

 

 

 

 

 

 

[인터뷰365 육홍타] 만화스토리작가들은 그동안 음지에서 일해왔다. 최근 들어서는 스토리작가의 이름도 나란히 밝히는 경우가 늘고 있지만, 남의 스토리로 작품을 하고도 만화가 혼자서 글부분까지 다 해낸 것처럼 포장하는 것은 오랫동안 만화계의 관례였다. 만화의 서사부분을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게 하는 이런 현실은 만화를 연구하는데 큰 장벽이 되기도 했다.

 

만화의 사회적 위상이 높아지고 콘텐츠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스토리작가들은 비로소 제몫찾기에 나섰다. 법정투쟁도 잇따르고 있다. 그동안 나온 판결은 일단 스토리작가측의 승리로 보인다. 스토리작가의 저작권을 상당부분 인정해주는 추세다.

 

영화로도 히트한 <비트>(허영만 그림)로 널리 알려진 만화스토리작가 박하(54)의 본명은 박찬호. 야구선수 박찬호와 이름이 같다. 우리 만화계에서 그가 점유하고 있는 위치도 야구계에서 박찬호선수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과 같다.

 

메이저리그를 소재로 한 <빅 리거>(그림 김일민)를 데일리 포커스에 리바이벌 연재하고 있는 그는 우리만화계에서 ‘야구에 관해 가장 해박한 사람’으로 꼽힌다. 동네 야구팀의 투수 겸 감독으로 실전감각을 쌓았고, 메이저 리그도 일찍부터 AFKN을 통해 지켜봐 각팀의 족보를 줄줄이 꿴다.

 

그러나 막상 그의 작품 중 야구를 다룬 것은 <빅 리거> 하나뿐이다. <비트>나 <야수라 불리운 사나이>(장태산 그림), <짜장면>(허영만/김재연 그림) 등 현대물로도 인기를 모았지만, 무협 쪽에 더 걸작이 많다. 무협만화의 스타작가였던 이재학, 황재 등과 오래 일하며 <검신검귀>, <추혼> 시리즈 (이상 이재학 그림), <소림108권객전>(황재 그림) 등 추억의 명작들을 내놓았다. 만화만이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해, 2005년엔 무협소설 <절대검귀>를 발표한 바 있고, 시나리오도 여러 편 썼다.

 

 

만화계 입문은 그림으로 한 걸로 알려져 있는데요.

고등학교도 제대로 안 다니고 돌아다니던 시절에 박부길선생님(본명 전래식. 훗날 국전에서 동양화로 대통령상 수상) 만화를 봤는데, 거기에 문하생 구한다는 광고가 있었어요. 찾아 가보니 그 만화가 묵은 거라 이미 마감이 됐다면서, 그래도 나를 잘 봤는지 일을 하게 해주셨습니다.

제가 지금은 온화하다 소리까지 듣지만 10대 때엔 엄청 다혈질이었거든요. 성질 급하고 폭력적이고... 그래서 선배들하고 자꾸 싸우는 바람에 쫓겨났습니다. 이우정 선생님 문하로 들어갔다가 또 쫓겨나고, 우연히 심만기 선생님을 만나 심만기 이덕송 유표 이렇게 세 작가가 여관을 잡아놓고 작업하는데 합류했지요. 신문가판대에서 파는 만화가 한창이던 무렵이었습니다.

 

 

 

 

그럼 스토리는 언제부터 쓰셨나요?

유표선생님 제자인 정지룡 형이 놀러왔다가 “여기서 꼰대들하고 뭐하냐. 젊은 사람끼리 하자”고 해서 야반도주를 했어요.

정지룡 형이 펜터치와 배경, 먹칠을 하고 내가 스토리와 데생을 맡아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18세에 폐결핵으로 각혈을 했었거든요. 1975년 말 무렵엔 병이 아주 심해졌어요. 결국 원고를 중단하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그래도 오래 쉬지는 못했습니다. 밥벌이를 하려고 유효종 선생을 찾아가 일을 시켜달라고 했지요.

 

유효종 선생님 문하에서는 어땠나요?

그 무렵 만화계는 일본 것을 베끼는 일이 일상화되어 있었습니다. 스토리는 TV 외화를 각색해서 쓰기도 하구요. 제가 베낀 만화하고 똑같은 내용의 만화가 동시에 심의(당시 만화는 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를 통과해야 출판을 할 수 있었음)에 올라오는 바람에 원고료를 못 받은 적도 있었어요.

유 선생님이 제가 쓴 스토리를 보시더니 “우리집 스토리는 네가 다 써라” 하셨어요. 원고료가 데생은 권당 1만원 스토리는 3천원이었는데, 데생은 체력이 달려서 한 달에 두 권밖에 못했습니다. 거기에다 스토리도 한 달에 9권이나 했지만 월급은 공장 공원 월급이 안 됐어요. 저로선 정말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피를 토하면서 일했지요. 제 키가 173cm인데 몸무게가 47Kg 정도였으니까요.

유 선생님 밑에 3년 있었는데, 여러모로 실력 있는 분이라 많이 배웠습니다. 폐병으로 인해 조신하게 한곳에 있던 그때가 만화에 대해 많이 배운 시절이었어요.

 

전업 스토리작가가 된 것은...?

운명적으로... 동네야구를 하다가 오른 팔목이 부러졌어요.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스토리를 당시 천재적 그림솜씨를 가졌던 김영찬씨와 최두환씨에게 하나씩 줬더니 한국일보 만화에 김영찬씨 1석, 최두환씨 2석으로 당선된 거예요. 명목상 당선작은 안 내고 가작 1석 뭐 이런 식으로 뽑았는데 1,2등을 한 거죠.

마침 1981년에 대룡출판사가 생기면서 만화계에 르네상스가 왔습니다. 5공 들어서면서 우민화 정책을 썼잖아요. 그 덕에 만화도 심의가 대폭 약화되었습니다. 그 참에 대룡 임현승회장이 얇은 만화책 두껍게 하고, 사무실 차려주고, 원고료도 3,4배 심지어 5배까지 주면서 작가들 스카웃하고 했지요.

대룡에서 만든 사무실을 제가 책임지게 됐어요. 그렇지만 나이가 비슷한 처지라 서로 불만 갖고 싸우고... 결국 10여 개월 만에 접었습니다.

 

박하란 필명은 언제부터 사용하셨나요?

1990년 일간스포츠에서 처음 썼습니다. 당시 일간스포츠가 가판에만 끼워주는 만화부록을 만들면서 이재학선생님과 박원빈씨에게 작품을 의뢰했는데 그 스토리들을 제가 썼어요. 이재학선생의 <자객가도>는 그전에도 많이 쓰던 최평환이란 필명으로 나갔고, 박원빈씨의 <광풍도시>는 박하라는 새 필명을 썼죠. 당나라 시인 이하(李賀)를 좋아해서 따온 이름인데, 감히 같은 한자를 쓰지는 못하고 글자를 바꿨죠. 賀자 대신 河로...

 

 

 

 

그 첫 작품에서 필화를 겪었죠?

딱 5회 나갔을 때였어요. <광풍도시>가 원래 우리 사회의 구조적 비리를 만드는 이들을 지하법정을 만들어 심판한다 뭐 이런 컨셉이었는데, 첫 타깃으로 우리나라에서 성역처럼 되어서 건드리지 못하는 목회자들을 다뤘습니다. 당시 만화부록업무를 관장했던 김영렬 이사 이야기로는 신문사가 거의 마비됐다고 하더군요. 박하란 놈이 누구냐 하는 전화가 빗발쳤다는 겁니다.

저는 외부 노출이 안 돼 직접 연락이 안 왔지만 박원빈씨는 생명의 위협을 받았지요. 견디다 못해 가족을 데리고 도망을 갔을 정도였습니다. 그 교회가 유명한 조폭조직하고 연계되어 있다는 말이 있었거든요. 결국 김영렬이사가 ‘작가에 대해 더 캐면 아예 당신들 비리를 시리즈로 다루겠다’고 정면승부로 나가서 무마가 됐습니다.

그래도 그대로 연재를 할 수는 없다고 해서 원고를 여관방에서 모조리 고쳤습니다. 친일파를 제거하는 걸로 컨셉을 바꾸어버린 거죠.

겨우 석달 정도 연재했는데 그 사이에도 또 말썽이 있었습니다. ‘N대통령이 일본과 딜 했다는 추정이 있다...’ 뭐 이런 내용을 다뤘더니 이미 찍은 지방판을 다 거둬들이느라 큰 손해를 봤다는 겁니다. 적당히 호도하고 조심하라는 얘기에 의욕을 잃었지요.

 

무협물을 많이 했는데?

어쩌다보니 무협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근데 사실 무협은 국민학교 때 와룡생의 <비룡>하고 <군협지>, 딱 두 작품만 읽어봤거든요. 무협작가 검궁인씨가 제 작품을 평하기를 ‘무협만화 문법이 전혀 아니다’라고 하더라고요. 무협의 일반적인 설정이나 구성이 아닌 게 오히려 좋았던 듯합니다.
 

페이소스가 있는 작품을 많이 했지만, 명랑물에도 일가를 이룬 걸로 알고 있는데요.

사실은 코믹만화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남들도 웃게 하고 나도 웃으면 좋으니까요. 송순히 선생님이 원래 순정만화로 유명하신 분인데, 제가 가서 명랑만화로 바꿔놨지요. <아저씨> 시리즈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황원철씨의 <천기신군>도 많이 웃겼던 작품이에요. 원래 ‘천귀신군’이었는데 윤리위에서 ‘귀’자가 귀신 연상시켜서 안 된다고 하는 바람에 <천기신군>으로 고쳤지요.

그런데 제 코믹물 특징이, 억지로 가공으로 만들어 웃기는 거밖에 못하더라고요. 일상과 연결시키지 못하고, 현실에선 없는 이야길 하는 거죠. 그나마 가장 자연스럽게 코믹물과 접촉시킨 게 <빅 리거>인 듯합니다. 주인공이 자기 직분에 맞는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웃기지요. 작업하는 중 제일 행복했던 작품입니다.

 

<빅 리거>는 신문사 사정으로 연재가 일찍 끝나는 바람에 완결을 못 본 작품인데, 다시 이어서 완성시킬 계획은 없나요?

2000년부터 일간스포츠에 2년 정도 연재했는데, 원래 계획의 1/3~1/2 정도 진행한 셈이에요. 신기한 것은, 연재 당시보다 훨씬 후에 더 <빅 리거> 얘기들을 많이 하더라고요. 메이저 리그 붐 덕분인지... 언젠가는 다시 제대로 하고 싶긴 합니다. 여건만 되면...

 

<비트> 얘기를 좀...
당시 잡지만화계는 20대 후반 30대 중반까지, 신세대 감각 아닌 작가는 만화계 퇴출 분위기였어요. 그런 마당에서 50 가까운 허영만 선배와 40 된 제가 연재를 하게 된 거죠. 제가 신세대물 하자고 했더니 허 선배가 “우리가 무슨 신세대냐?”하는 거예요. 저는 “우리가 생산하면 신세대가 소비하는 거다.”고 했지요.
뭐가 신세대일까 생각해보니, 우리 세대는 소비가 안 되던 세대였는데 비해 지금 세대는 쓰고 싶은 거 쓰는 세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때는 부잣집 아들도 차를 몰지는 않았잖아요. 계층간 편차가 별로 없었던 거죠. 요즘은 편차가 큰데, 부잣집 애들 문화를 신세대 문화로 광고하는 거예요, 내 눈에는. 그럼 저 신세대문화를 향유하지 못하는 애들은 얼마나 될까 하고 생각해보니 97%는 되겠더라고요. 그렇게 못 누리는 세대의 대표로 민이를 내세우고, 나머지는 대부분 누리는 세대로 설정했어요. 누리는 세대로 살아가는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 시대에 신세대로 살아가는 고통 보여주자 이런 컨셉이었지요.
제 경험도 들어 있습니다. 10대 시절 건달 형들과 588 한구석에 가건물을 얼기설기 엮어서 만두 가게를 열었어요. 철거반이 와서 치고받고 싸우고 도망치고 했던 것이 <비트>의 분식집 얘기예요.

 

 

 


시나리오도 쓰셨죠?

<짜장면>(그림 허영만/김재연)은 원래 시나리오로 썼던 작품이에요. 감독하겠다고 시나리오를 찾는 사람한테 임웅순 선배의 한권짜리 만화 <황새를 따라간 뱁새>를 소재로 소개해 줬다가 결국 시나리오 작업까지 하게 됐는데, 그게 영화진흥공사의 시나리오 공모에서 1등을 했어요. 제작지원금도 많이 주는 상이라 영화를 찍으려고 배우 섭외 하고 있는데 광복 이후 한번도 나온 적 없던 자장면 영화가 두 개나 나와서 다 흥행에 실패한 거예요. <북경반점>하고 <신장개업>. 영화는 엎어지고, 만화로 만들게 된 거죠. 시나리오는 두어 작품 더 있지만 늘 일이 꼬여서 영화화가 되진 못했어요.

<비트>도 영화사에선 직접 쓰라고 했는데 내가 하면 영화가 경직될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다른 사람이 쓰면 관객들이 좋아하는 거 만들 텐데, 내가 쓰면 문예물처럼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는 비용도 많이 들고 하는 장르잖아요. 이렇게 쓰면 손님 안 드니 고쳐달라 뭐 이런 트러블이 예상돼서 꺼려졌던 거죠. 5권 무렵 영화화 의뢰가 와서 7권 나갈 때 완성됐어요. 그래서 앞부분 반쯤만 원작과 비슷합니다.

시나리오는 한번 쓰면 손에서 떠나는 게 아니라 끝없이 연출자와 제작자 형편 따라 고쳐줘야 하잖아요. 저는 성격상 이렇게 고치라는 거 못 견뎌요. 게다가 시나리오는 준비물에 불과한 거고, 영화는 감독의 작품이니 존재감도 없고... 그래서 이제 시나리오는 안 씁니다.

 

장르에 상관없이 영향을 받은 작품이나 작가가 있다면?

매우 많아요. <태양은 가득히> <닥터 지바고> <석양의 무법자> 같은 영화들... <석양의 무법자>는 어릴 때 이 영화에서 본 영상이 나를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간에 대해, 캐릭터와 성격에 관해서는 박기정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공장식 만화 제작 시스템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 걸로 유명한데요.

만화가부터 출판사 사장, 심지어 총판까지 저와 공장을 차리자는 제안들을 많이 해왔어요. 요새는 시장이 불황이라 거의 문을 닫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문자 그대로 ‘공장’들이 번성했잖아요. 만화가는 작품에 전혀 손대지 않고 공장 경영만 하는... 하지만 저는 그게 너무 싫었습니다.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안하는 만화가, 만화공장 사장들이 명예와 부를 차지하는 게 기가 막히고... 자기가 그리지도 않은 만화를 가지고 사인회도 하고... 너무나 부도덕해요. 그런 만화가를 우상처럼 묘사해내는 언론도 문제가 있습니다.

작가 입장에서 그런 시스템이 싫은 이유는 하나예요. 스토리를 주면 데생 다섯 명이 달라붙어 그려요. 그림에 일관성이 없어집니다. 공장 입장에서는 한 사람이 한 작품을 전담하면 화가 따라 작품간 수준 차이가 크게 나니까, 실력 있는 이 두어 명이 모든 작품에 개입해서 균질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공장만화를 못하겠다는 건 작가로서의 자존심이 아닙니다. 독자 입장 생각하면 어느 정도의 질을 보장 받고 보는 게 독자의 권리잖아요.

 

지금 모습을 보면 젊은 시절 폭력적이었다는 게 전혀 상상이 안 가는데요?

깡패라고 소문났었지요.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다 보니 저를 직접 본 사람은 드물고 소문만 무성했나 봐요. 건방지고 오만하고 거칠고... 그런 식으로.

언젠가 이현세씨가 “찬호씨는 스트레스 받을 일 없겠어요.” 그러길래 생각해보니 화를 참아본 적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만화계가 아닌 다른 데 갔으면 내 성격에 이나마 내 삶을 지탱할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규격화된 사회나 직업 조직에선 견디기 힘들었을 거 같아요.

 

어떻게 그런 성격을 고치셨나요?
첫 아이를 낳으니 너무너무 이쁜 거예요. 허영만선배가 자기 아들 초등학교 때 ‘아이가 눈이 너무 안 좋다. 할 수만 있으면 내 눈을 빼서 줬으면 좋겠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전 당시 전혀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으니 이해가 되더군요. 아이를 사랑하면서 비로소 나 아닌 존재를 생각하게 된 듯해요. 아이가 성격 거칠고 수양 안 된 인간을 아버지로 두면 안 좋겠다 싶어 다듬기 시작한 거죠.

 

만화와 만화스토리에 대한 생각을 들려주세요.

만화도 소설이나 희곡과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창구를 통해 본 세상에서 얻은 감정과 사고를 담아내는 것이지요. 만화스토리는 작품의 인격과 성격을 규정하고 전반적인 작품 전체를 커버하는 일이구요.

저로선 그냥 생업의 수단이라고 여겨왔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으니까, 글쓰는 일밖엔 할 만한 것이 없으니까... 남들이 노가다해서 생업하는 것과 똑같은 생각으로 하는 거예요. 다른 데 적응할 수 있었으면 아마 안했을 겁니다.

 

 

 

 

 

 

 

만화계의 불황이 깊어지면서 그는 아예 일손을 놓아버렸다. 같이 일하자는 제의는 많이 받지만, 맘에 안 드는 일을 하느니 그냥 쉬는 게 맘 편하다는 것이다. 현재의 상태를 ‘강제휴업중’이라고 말하며 웃는 그는 아침 7시에 자고 오후 2시에 일어나 읽고 쓰고 구상하고 야구도 보고 하는 자유인의 삶을 구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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