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여사 35주기에 김두영 전 비서가 밝힌 일화
육영수여사 35주기에 김두영 전 비서가 밝힌 일화
  • 김두호
  • 승인 2009.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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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층에 사랑과 눈물을 남긴 비운의 퍼스트레이디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오는 8월 15일은 육영수 여사의 35주기가 되는 날이다. 역대 퍼스트레이디 가운데 아직도 가장 온화하고 정갈한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육 여사는 생전에 알게 모르게 숱한 일화를 남겼다. 김두영 전 청와대 비서관은 육 여사가 1974년 국립극장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공산주의자의 흉탄으로 운명할 때까지 지근에서 모신 청와대 제2부속실의 마지막 비서였다.


오래도록 청와대에 살았지만 가장 비정치적인 인물로도 평가되는 육 여사는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진실을 전하는 가장 비판적이고 객관적인 측근으로 ‘청와대 야당’소리를 듣기도 했다. 진실하고 겸손하고 항상 흐트러짐이 없는 조용한 인품을 지켜가며 틈만 나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속으로 발걸음을 옮겨 다닌 육 여사에게는 하루 한 묶음씩의 진정서나 호소문이 답지했다. 편지마다 담긴 발신인의 사연을 눈여겨 읽고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고 물심양면으로 그들을 돕기도 했다. 억울한 사람들의 민원은 공직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부탁이나 지시를 하지 않고 대통령을 통해서 할 만큼 자신이 지켜야할 선과 역할에 대해서 처신을 분명하게 했다.


김두영 비서는 육 여사를 수행하면서 육 여사가 자동차 안이나 행사장에서 한 번도 의자에 등을 기대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오만해서는 안된다는 세심한 자세였다. 특히 부군과 함께 물 한 방울 종이 한 장을 아껴 쓴 얘기는 거짓말처럼 들린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침실을 정리하던 직원들이 변기 물통에서 물을 아껴 쓰기 위해 넣어둔 두 개의 벽돌을 발견하고 눈물이 나왔다는 일화가 있지만 육 여사는 중학생인 아들이 비서를 통해 얻어간 백지 몇 장도 돌려받아 ‘대통령 아들이라고 사무실 용지를 함부로 쓸 수 없다’며 꾸짖었다.


49세 길지 않은 생애였지만 떠나는 날까지 맑고 슬기로웠던 박 대통령부인 육 영수여사의 청와대 시절 이야기를 김두영 전 비서관에게 들었다.




먼저 육 여사를 모시고 일하면서 가장 잊을 수 없었던 이야기부터 듣고 싶다.

70년대 초 아카시아꽃이 흐드러지게 핀 어느 해 5월이었다. 그때까지도 고깃국에 흰쌀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때였다. 육 여사께 경기도 성남에 사는 한 가정주부가 한통의 편지를 보내왔다. 남편이 서울역 앞에서 행상을 해서 다섯 식구가 입에 겨우 풀칠을 하며 살아가다가 남편이 교통사고로 입원해 온 가족이 굶고 있다는 사연이었다. 자신과 어린 자식들이 끼니를 잇지 못하는 것은 견딜 수 있지만 80세가 넘은 시어머니가 아무것도 모른 채 마냥 굶고 있으니 도와 달라는 절박한 호소였다.

그날 저녁 나는 육 여사의 지시로 쌀 한 가마와 얼마간의 돈을 들고 그 집을 찾아 나섰다. 성남은 지금 신도시가 되었지만 그 때는 철거민들이 정착해가는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도로는 물론 번지수도 정리가 안 되어 집 찾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어물어 초막같은 그 집을 찾아갔을 때는 마침 온 가족이 둘러 앉아 저녁상을 받아 놓고 있는 중이었다. 전기도 없이 희미한 촛불 하나가 어두컴컴한 방안을 겨우 밝히고 있었고 백발의 노인 한분은 누가 찾아왔는지도 모른 체 밥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밥그릇에는 수북한 흰 쌀밥과 멀건 국 한 그릇 그리고 간장 한 종지가 놓여 있었다.

잡곡밥도 아닌 쌀밥을 본 순간 갑자기 사실과 다르다는 서운한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잠시 후 컴컴한 방안의 물체를 분별할 수 있게 되면서 그 할머니와 가족의 밥상에 오른 흰쌀밥이 아카시아꽃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날 내가 받았던 충격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며칠 후 박대통령 내외분과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자리에서 잠시 그 가족 얘기를 말씀드렸을 때 육 여사께서는 눈물을 보이셨고 박 대통령께서는 수저를 놓으시고 처연한 표정으로 천정을 바라보며 담배만 피우셨다.


두 분의 그 때 심경이나 생각은 같았을 것 같다.

그렇게 느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땅에서 가난만은, 가난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박 대통령의 지상목표며 통치철학이었고 육 여사께서는 부군의 뜻을 누구보다 마음 깊이 헤아리며 살던 분이다.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었을 텐데 일일이 도와준 것인가?

육 여사께 생활고로 도움을 요청할 정도면 사정이 다들 딱하다고 볼 수 있었지만 그때는 대다수가 가난했고 육 여사도 그런 요청을 모두 들어줄 수 없는 처지였다. 취직을 부탁하고 억울한 일의 해결이나 은행융자를 도와달라는 등 갖가지 하소연도 있었다. 그들 중 절박한 처지의 사람일 때 육 여사는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여건에서 최선의 온정을 베풀었다. 언젠가는 말단 순경의 아내가 단칸 셋방에서 3대가 함께 먹고 자는 고통을 견디지 못해 가족들이 제대로 잠을 잘 수 있도록 방 한칸을 더 얻을 수 있게 30만원만 도와달라는 편지를 받고 그 가족에게 나를 보낸 적이 있다. 그런 예를 들면 끝이 없다.


박 대통령이 생전에 검소하고 청빈했다는 점은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육 여사는 양장이나 한복차림의 자태가 언제나 화려하게 보였던 탓인지 검소한 이야기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 내외분이 수범을 보여준 근검절약은 상상을 초월한다. 육 여사는 한복이든 양장이든 외제 옷감으로 옷을 해 입은 일이 없었다. 그러나 새옷을 입으면 고급스럽고 우아하게 보여 많은 사람들이 외국산으로 오해를 했다. 육 여사는 입던 옷을 줄여 따님에게 넘겨주기도 했다. 박지만 EG회장이 중학생 시절에 나에게 종이 몇장을 달라고 하기에 부속실 내 책상 위의 백지 30여장을 집어준 일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육 여사께서 종이를 회수해 나에게 돌려주며 두 사람 앞에서 “대통령 가족이라고 사무실 용품을 함부로 쓸 수 없다”고 꾸짖고는 대신 파기하는 서류 가운데 한쪽을 쓸 수 있는 종이를 아들에게 주었다.

박 대통령은 구두 뒤창뿐만 아니라 앞창도 고무판을 덧붙여 신은 분인데 여름에도 냉방을 끄고 선풍기와 부채로 더위를 견뎠고 겨울에도 청와대 사람들은 옷을 두껍게 입고 더운물이나 커피로 몸을 녹이며 근무했다. 평소 집무실 화장실은 물론 서거 후 침실 화장실에서도 물을 아끼려고 놓아 둔 벽돌 두 개가 물통에서 발견되어 정리하던 직원들을 울렸다.



억울한 일로 고민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사례가 있었는가?

1973년 가을 한 여인이 애절한 사연을 육 여사께 보내왔다. 정보부(현재의 국정원) 직원이 다른 사람의 재산권문제에 개입하여 자신의 남편을 정보부 지하실로 끌고 가 고문을 해서 성불구자가 되어 입원했다는 사연이었다. 그 편지를 읽은 육 여사는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울었어”라고 하시며 그 내용을 박 대통령께 전했고 박 대통령은 즉시 이후락 정보부장에게 진상조사를 지시했다. 그러나 이 부장의 보고서는 부하직원들이 사건을 치밀하게 조사한 완벽한 보고서였지만 그 여인의 남편이 잘못한 것으로 돼 있었다. 육 여사는 나에게 정보부 보고서를 보여주며 병원을 방문해 사실과 다른 점을 얘기하고 주의를 주고 오라고 했다. 지시대로 그 여인을 만나 호되게 나무랐는데 그 여인은 청와대 민원반 검찰 경찰 등에 진정을 했지만 통하지 않아 마지막으로 육 여사께 희망을 걸었다며 억울한 사정을 다시 밝히고 “육 여사도 별 수 없군요”라며 통곡했다.

나는 여인에게 들은 얘기와 내가 확인한 병원 기록 등을 사실 그대로 말씀드렸다. 박 대통령은 나와 이 부장을 함께 불러서 진위를 직접 체크하셨지만 의견이 같을 수가 없자 시경국장을 다시 불러 재조사를 지시했다. 이때의 조사는 시경국장이 나를 돕는 선에서 주로 내가 사실을 파악토록 배려하셨고 조사결과 그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단서를 찾아낼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은 확신이 서자 가해자의 처벌을 비롯해 사건의 의혹을 말끔하게 해소시켰다. 육 여사는 이 사건조사 때 내가 혹시 해를 입지 않을까 우려하며 대통령께 보고할 때는 소문이 나지 않도록 집무실 정문을 이용하지 않고 정원으로 통하는 뒷문을 출입하도록 직접 챙겨주셨다.


육 여사는 생전에 나환자촌이나 노동자의 숙소 등 주로 소외집단 쪽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렇다. 육 여사는 그런 곳을 쉬지 않고 방문했다. 어느 해 성탄전야였다. 평소 일체 경호를 하지 못하게 했던 육 여사는 그날도 나만을 데리고 쓸쓸하게 연말을 보내는 영등포의 근로자 합숙소를 찾았다. 하루 일을 끝내고 돌아와 저녁식사를 마친 노동자들과 난로를 가운데 두고 그들의 애로 사항과 정부에 대한 요망 등 이런저런 세상 얘기를 나누던 자리에서였다. 고시공부를 하다가 날품을 팔게 된 청년이 도발적이고 공격적인 발언으로 시청을 비롯한 공직자에 대한 비판과 불만을 털어 놓았다. 육 여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고 끝까지 그 불평을 귀담아 들어주었고 오히려 이튿날 그 청년과 다른 곳의 근로자 9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식사를 대접했다. 초청자 중에는 양택식 서울시장도 있었다. 그날 일로 양 시장은 그 청년을 관악구청의 임시직 민원직원으로 채용했지만 직접 부딪쳐 본 민원업무가 쉽지 않았든지 나중에 그만 두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육 여사의 나환자 정착촌에 대한 애정은 특별했다. 그들을 만나면 손가락이 온전치 않았지만 손을 덥석 잡으며 반가움을 나누었다. 그들이 육체적으로 불행했지만 누구보다 순수하고 진실하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멀리 전북 익산에 있는 음성나환자촌 상지원을 방문했을 때는 집집마다 찾아가 부엌까지 들여다보며 사는 모습을 살폈다. 전국 37개 정착촌을 골라 육 여사를 중심으로 모인 지도층 부인들의 봉사단체인 양지회를 통해 5백여마리의 새끼 돼지를 나누어주기도 했다.




곁에서 지켜본 육 여사는 한마디로 어떤 성품을 가진 분인가?

천성적으로 결벽을 좋아하는 완벽주의자였다. 조금이라도 미흡하거나 의심을 살 만하면 반드시 그것을 밝히고 넘어가는 성미였다.

언젠가 경제신문에서 어느 필자가 육 여사의 가친 육종관 씨에 대한 글을 실었다. 충북 옥천의 토호인 육종관 씨가 천성이 착하고 후덕하여 마을의 어려운 사람들을 늘 보살피고 도와주어 인심을 크게 얻었다는 글이었다. 신문기사를 본 육여사가 나를 불러 “우리 아버지는 글 내용처럼 후덕하고 인심 좋은 분이 아니었어요. 아버지를 잘 아는 옥천 분들이 이 글을 읽으면 무어라 하겠어요. 남의 사정을 이해하고 도움을 주신 분은 어머니였어요. 필자에게 전화를 해서 글을 써주셔서 고맙지만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었다고 바로 잡아주세요”라고 지시했다.

베푸는 온정도 가식 없이 마음에서 울어 나오는 정성을 느끼게 했다. 후덕했던 어머니 이경령 여사의 심성을 닮은 점도 있겠지만 혁명으로 시작한 부군 곁에서 모든 사람을 돕고 돌보아야 한다는 무한 책임감을 한시도 잊지 않았던 것 같다.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돕고 봉사하는 활동에는 몸을 아끼지 않았다.


경호원 없이 활동하다보면 예상치 못한 일도 많았을 것 같다.

전임 비서가 모실 때 얘기지만 휴가 나와 연탄배달을 하며 가족을 부양하다가 사고를 입은 병사의 이야기를 접하고 직접 판자촌에 있는 그 집을 찾아갔다가 싸움판이 벌어진 것을 보고 싸움을 말리다가 봉변을 당한 일도 했다. 육 여사가 그 곳에 나타날 줄 모르고 말리는 육 여사를 밀쳐낸 것이다.

또 비서 한사람만 데리고 구호품을 실은 짚차를 타고 수해지구를 찾아갔다가 목적지가 침수된 것을 알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어둠이 깔린 저녁에 나룻배를 타고 현장을 찾아가 수행비서의 가슴을 애태우기도 했다. 1968년 호우로 서울 잠원동 일대가 물에 잠겼을 때였다. 뱃사공까지 극구 만류했지만 발목까지 빠지는 흙탕물을 저벅저벅 걸어서 침수마을에 들어서는 용감한 사람이 육 여사인줄을 수재민들은 뒤늦게 확인하고 감격해 했다.


육 여사 생존시에 그분의 얘기가 나오면 으레 ‘청와대 야당’이라는 표현이 나왔다. 실제 그만한 브레인 역할을 한 것인가?

육 여사는 청와대와 국민의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을 쉬지않고 기울였다. 그 방법의 하나가 시중의 여론을 가감없이 부군에게 진실 그대로 전달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틈나는 대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많은 대학교를 방문해 젊은 학생들과 대화의 시간을 마련하는 것도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여성이나 어린이들을 위한 사업도 자신의 주요 과제로 다루었다. 특히 어린이회관을 세우고 읽을거리가 부족한 어린이들을 위해 <어깨동무>라는 월간지를 직접 내용까지 감독하며 발행해 벽촌이나 섬마을까지 보내주었다.

청와대 야당이라는 말이 나왔지만 육 여사는 비판적인 언론에도 관심을 가졌다. 1973년 봄 어느 날 동아방송을 통해 ‘연희동에서 교통사고가 나 사람이 사망했지만 운전자가 권력층 인사라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뉴스를 들은 육 여사께서 나에게 진상을 알아보게 하셨다. 운전자가 대통령 누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보고를 드리자 육 여사는 아침 식사 자리에서 대통령께 사실을 알렸고 박 대통령은 대노하여 시경국장을 불러 구속을 지시했다.



어느덧 35주기를 맞이한다. 악몽이지만 육 여사 피격 당시의 마지막 순간을 다시 기억해 달라.

그 날은 휴일이어서 집에서 TV를 보다가 사건을 접했고 긴급 연락을 받고 서울대병원으로 달려갔다. 경호원이 응급실 침대 위에 누워있는 육 여사의 두 다리를 부축해 있는 모습이 보였다. 경호원은 나를 발견하고 그 임무를 넘겨주었다. 머리에 총탄을 맞은 육 여사는 의식불명 상태에서 헉, 헉하는 불규칙한 호홉소리를 내고 있었다. 한 20분쯤 응급처치를 받고 수술실로 이동한 직후에 박 대통령이 의과대학장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왔다. 나는 그 순간의 박대통령 표정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핏기가 가시고 검은 얼굴은 샛노랗게 변해 있었다.

수술은 오래 걸렸다. 나는 육 여사가 끼고 계시던 반지와 머리뼈 파편을 의사로부터 받아 보관하고 있다가 운명한 후에 의사에게 돌려주었다. 총탄으로 머리뼈가 부서지면서 떨어진 것을 수습한 것 같았다. 육 여사는 저녁 7시쯤 운명했다. 수술이 시작될 무렵 갑자기 하늘이 노랗게 변하면서 건물벽과 마당의 색깔이 모두 오렌지색으로 바뀌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일부 신문에도 보도됐지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나중에 사건현장의 경호원들로부터 저격당시의 상황을 소상히 들을 수 있었다. 총성이 나는 순간 박 대통령은 연설대 뒤에서 몸을 낮추었고 “잡았나?” “총쏘지 마!”가 첫 반응이었다.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순간에도 경호원들이 청중석을 향해 사격했을 때의 유혈사태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어서 육 여사가 피격당한 것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저기 우리 식구한테 가봐!”라고 지시했다. 소란이 가라앉자 “연설을 계속하겠습니다”라면서 총성으로 중단되었던 구절 바로 뒷문장을 정확히 짚어 읽기 시작했다. 퇴장할 때 박 대통령은 육 여사의 고무신과 핸드백을 자신이 직접 주워 들고 나오다가 경호원에게 넘겼다. 이어서 독립유공자를 위로하는 리셉션장의 공식행사를 끝내고 서울대병원으로 갔다. 박 대통령은 그 위기의 순간에도 당황하지 않고 대담하면서도 세심하게 처신했다. 담대할 때는 무섭게 담대하고 자상해야 할 때는 한없이 부드럽고 자상했으며 슬플 때는 누구보다 눈물이 많았던 분이 박 대통령이었다. 저녁 7시 조금 넘어 청와대로 돌아온 육 여사의 유해는 본관 1층 영부인접견실에 안치됐다. 접견실 입구에서 내가 울고 있을 때 박 대통령이 갑자기 내 목을 끌어안고는 대성통곡을 하였다. 김정렴 비서실장이 내 옆구리를 내지르면서 “각하 모시고 이러면 어떡해”하고 야단을 쳐 나는 정신을 차리고 “각하 들어가시지요”라고 말씀드리고 박 대통령을 집무실로 모셨다.




김두영 비서관은 1971년 9월부터 대통령부인을 모시는 제2부속실 행정관으로 근무하다가 서거 후에는 대통령공보비서실을 거쳐 사정담당 비서관으로 재직했다. 5공화국 때는 정무 제2비서관, 국정자문회의 사무처장을 역임하고 6공화국 때는 국가원로자문회의 사무차장을 거쳐 1989년까지 공직에 있었다. 19년간의 공직생활 중 박 대통령을 비롯해 최규하 전두환 대통령까지 모신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현재는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운영회의 의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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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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