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로 변신한 언론방송계 원조 강현두 서울대명예교수<하>
화가로 변신한 언론방송계 원조 강현두 서울대명예교수<하>
  • 김두호
  • 승인 2012.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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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성우 김세원과 연애결혼

【인터뷰365 김두호】유학 후 대학으로 간 것은 계획하고 생각했던 진로인가?
귀국 후 바로 대학으로 가지 않았다. 대학보다 다시 방송현장에서 일할 생각을 했고 바라던 대로 신생 민방 TBC로 가게 됐다. 그곳에는 옛 KBS 동료들이 이미 많이 와 있었다.
대학에서 학위과정을 끝낸 나는 2년 더 방송 일을 하고 귀국에 앞서 캐나다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여러 나라의 방송 현장을 방문해 기술적인 실상을 연구하고 관찰하는 기회를 가졌다. 대학과 방송국에서 만난 여러 나라 방송인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영국 BBC에는 가깝게 지낸 제르미 죤슨 프로듀서가 협조를 많이 했다. 맨체스타의 세계적인 민방 그라나다 TV에서 한 달 넘게 제작기술의 연수를 받기도 했다. 당시 영국 쪽은 방송을 통해서도 강한 극예술의 전통을 지키고 있었다면 프랑스는 영화산업에 치중하고 있었다.

TBC는 삼성그룹을 배경으로 대표적인 민방으로 활기 있게 성장했으나 군사정권 때 KBS에 흡수되어 지금의 KBS 2TV가 됐다. 그 때 활동했다면 방송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일화도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TBC시절에 짧았지만 나의 전문성인 방송 저널리즘을 실현한 것을 내 인생에서는 가장 의미 있던 시기라는 생각을 한다. 와서 보니 보도기능은 초기와 달라진 게 없었다. 뉴스나 다큐멘터리는 무성 필름을 돌리면서 아나운서가 기사를 읽는 수준의 방송이었다. 비디오 테이프를 가위로 잘라 편집하는 기술방식은 아마도 우리나라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참 뒤에 TBC 기술이사로 있던 강진구 씨를 앞세워 편집이 가능한 녹화기재로 일본산 시바덴을 도입하게 됐다.

나의 첫 작품은 저널리즘과 다큐를 추구한 시리즈로 첫 회는 ‘이승만의 두 세계’라는 주제의 프로였다. 진행을 중앙일보 신영철 논설위원에게 맡겼다. 그때 과도정부 수반을 역임한 허정 씨를 만나 실제 이승만 대통령이 두 얼굴의 인물 같다는 증언을 받아냈다. 기획의도가 맞아 떨어질 때는 희열을 느낀다. 허정 씨는 미국의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이승만 대통령이 왕조 때 사람같이 권위적이었다고 말했다. 또 여당과 맞서 국회 등원 거부에 들어간 야당의 박순천 당수가 인터뷰 중에 곧 등원을 해야 한다는 중대 발언을 해서 특종을 터뜨린 것도 쾌감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방송 뉴스는 당시 신문뉴스의 위세에 눌려 뒷전에 밀려다니던 시절이다.

이어서 <우리 고등교육은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교육 현실문제를 다룬 주제를 선택했고, 다음이 살인누명을 쓰고 고문 받은 한 연탄장수의 인권문제를 추적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한국비료 밀수사건관련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서 내가 교육받은 미국식 방송 제작 시각과 우리의 방송 제작 현실에는 차이가 많다는 데 갈등을 겪기도 했다. 방송국 생활을 다시 시작한 지 불과 1년만의 일이다.

대학으로 옮긴 시기인가?
프로듀서로 힘들게 일하는 것보다 후학을 가르치며 미래에 기여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 기자출신의 신문학 박사로 미조리대 출신인 한양대 장용 교수의 요청을 받아들여 1968년부터 한양대에서 전임교수로 강의를 시작한 것이다.

자녀도 언론 전공 아버지 대이어

부인이 된 김세원 여사는 한 때 TV광고의 목소리 주인공으로도 이름을 날렸던 분이다. 결혼에 이르게 된 연애담을 들려 달라.
동양방송(TBC) 시절 엘리베이터에서도 만나 낯이 익었으나 처음 교제를 시작했을 때는 그가 그렇게 유명한 성우인줄 몰랐다. 서로 일하는 내용이 달라 직업에 관심이 없었고 그냥 슬기롭고 반듯한 여자라는데 호감을 느껴 데이트를 하게 됐다. 지금은 도심이 된 영등포쪽으로 가면 논밭이 있는 시골 동네가 많았다. 주로 만나면 그쪽으로 가서 데이트를 했다. 결혼을 한 것도 바로 한양대 교수로 갔을 때였다.



대학을 다시 서강대로 옮긴 계기는?
한양대에 간지 2년 만에 고려대와 서강대 양쪽에서 프로포즈를 받았으나 서강대 존 미첼 교수가 먼저 임용절차를 끝내고 요청해 1970년 서강대로 옮긴 것인데 대학의 신문방송학 분야의 창설초기는 방송학자가 없어서 나에게 여러 대학이 교수 임용 제의를 해왔다. 내가 서강대로 갔을 무렵부터 TV 보급률이 늘어나 대학의 방송학 연구 분야도 활기를 띄었다.

흑백 TV시대인데 1970년도쯤의 TV수상기 보급수가 어느 정도였는가?
1970년쯤에는 60여만 대였으나 1973년쯤에 100만대를 넘어선 것으로 추산됐다.

모교인 서울대로 돌아가 후배를 제자로 마지막 교직에 봉직한 시기는 매우 의미 있는 기간이었을 것 같다.
1986년에 언론정보학과 교수로 갔지만 모교인 서울대는 나의 전공은 물론 관련 교수들과도 오랜 연고관계가 있었다. 언론분야가 전공학과로 등장하기 전인 1950년대부터 메스콤 전공은 사회학 분야에 포함되어 있었다. 일찍 언론을 주요 학문으로 분류한 사회학의 대학원 과정에도 A코스가 사회학, B코스가 메스콤이었다. 내가 대학 사회학과 시절에는 동양통신 김규환 기자의 강의를 듣기도 했는데 내가 서울대로 옮겼을 때는 언론학 교수로 계시다가 타계하신 뒤였다. 또 그곳에는 사회학과 은사로 신문대학원장을 지낸 이만갑 교수를 비롯해서 이상희, 차배근 교수 등 인연이 깊은 분들이 많이 계셨다.
자신의 모교에 선생이 되어 돌아가 후배를 제자로 만나 가르친다는 것은 모든 교직자의 바람이며 보람일 것이다.

정년 퇴임을 앞두고 서울대에서 명예퇴직을 신청한 것은 자의인가?
물론이다. 정년을 앞두고 다가올 여생의 새로운 계획을 세울 때 KBS 박권상 사장이 위성방송사업체의 창설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나는 고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대학에는 휴직 절차를 밟을 수도 있었으나 옳은 처신 같지가 않아 께끗하게 명예퇴직을 결심했다.

자녀분을 소개할 수 있는가?
집사람이 TBC시절 <털보가족>이라는 인기 프로를 더빙할 때 주인공이 쌍둥이를 둔 얘기가 나오는 데 그때 집사람도 그 프로를 했기 때문인지 한꺼번에 두 아기를 가졌다. 하하하. 아들 하나, 딸 하나인데 지금 1분 먼저 출생한 아들(강원석)은 연대 신방과, 위스콘신대 언론학 석박사, 싱가포르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옥스퍼드대 법대를 다시 다닌 후 영국 로펌의 국제변호사로 현재 홍콩에서 활동하고 있다. 딸(강수진)은 동아일보가 창립한 종편방송 채널A의 문화과학부장이다.

자녀분이 언론 쪽으로 대를 이어가는 모습이 아름답다.
아들은 가을부터 서울로 사무실을 옮긴다고 해서 집사람이 손자들을 볼 수 있게 되어 반가워하고 있다.

무형의 멘토는 에드워드 머로

이제 많은 업적을 남긴 성공한 언론학자로 젊은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씀을 해달라.
내 인생은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이 인정을 받은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행운도 따랐다. 6.25전쟁 중 인민군에 끌려갈 뻔했으나 나이가 좀 어린 탓으로 운명이 달라진 것도 행운이었다. 나는 과욕을 싫어한다. 욕심을 자제하고 살다보니 사회생활에서도 과격한 경쟁이나 충돌이 없었다. 욕심이 크고 꿈이 원대할수록 성취하는 결실물도 그만큼 크다는 말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다. 내가 해야 할 일에 충실하면 행복해진다는 단순한 말이 진리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한다.


강 교수는 미국 CBS의 뉴스 담당 사장 에드워드 머로를 정신적 멘토의 한 사람으로 꼽는다. 그는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도 멘토 한 사람씩을 가지기를 권한다.


내가 언론학 교수의 길잡이로 삼은 인물이 있다고 했는데 세계 방송저널리즘을 대표하는 미국 CBS의 에드워드 머로(1965년 타계한 전 뉴스담당 사장)가 바로 정신적 멘토의 한 사람이다. 한마디로 미국 방송언론의 기초를 닦고 수많은 언론인재를 양성한, 저널리즘의 양심을 상징하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의 프로그램은 라디오 저널리즘이 TV로 옮겨가면서 세계 방송계의 교본이 된 역사적인 작품이다. 월터 크롱카이트, 후래드 프랜드리도 그의 휘하에서 성장했다.


나는 일이 잘 안 풀릴 때 마음속으로 그와 대화를 나눈다. 당신이 내 입장일 때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면 그는 항상 양심과 진실을 위해 싸워야한다는 지침을 들려준다.


실존 멘토가 없으면 자신이 존경하고 따르고 싶은 가상의 멘토를 정해 그를 본받아 가면 누구나 좋은 성과를 획득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그리고 내가 1960년대부터 좋아하던 크롱카이트가 88 서울 올림픽 무렵 서울을 방문했을 때 방송관련 인사 몇 분과 워커힐에서 만나 학술적인 대화의 시간을 가진 적이 있다. 나는 그때 방송기자가 되려면 신문기자로 활동한 경력이 필요하다는 당신의 과거 생각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는가를 물었을 때 그는 변하지 않았다는 대답을 했다. 그것은 방송 저널리즘이 신문 저널리즘보다 한 단계 더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쓰는 것과 말하는 것을 함께 필요로 하는 것이 방송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대는 난세일지는 모르나 권모술수가 횡행하는 시대인 것 같다. 삼국지 인물 중 사람들은 대다수 주유나 제갈량을 좋아할지 모르지만 나는 노숙을 더 좋아한다. 요즘 삼국지의 온갖 유형의 리더와 그들의 책사(策士)들이 우리 젊은이들의 멘토가 되고 교과서가 되고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다. 젊은 후진을 양성하는 교수도 군자의 길을 버리고 책사의 지혜를 먼저 배우게 해야 인정을 받는 사회가 되고 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환경의 변화가 생겨도 인간의 진리는 양심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끝없이 진실을 추구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젊은이들이 자각해야한다.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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