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간 휴전선을 지킨 민간인, 정성춘
35년간 휴전선을 지킨 민간인, 정성춘
  • 조현진
  • 승인 2007.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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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다리에서 분단의 시간을 찍어온 사진사 / 조현진




[인터뷰365 조현진] 세상엔 별별 사람이 다 있다. 정성춘씨(61세)도 분명히 일반인들이 볼 때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 그에겐 지난 35년간 대한민국 영토의 최북단이자, 분단의 상징적인 장소인 임진각 자유의 다리 앞을 지켜온 이력이 있다. 그가 스물 여섯이 되던 해 부터이다.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태극기를 팔면서 그는 이곳에서 청춘을 모두 보냈다.



여기 임진각에서 얼마나 계셨던 건가?

72년에 여기 임진각이 세워질 때부터 있었다. 벌써 35년이나 되었다.


35년을 여기서 보낸 특별한 이유가 있나?

내가 5살 때 6.25가 터졌고, 난 고향을 잃었다. 그런데 내 고향이 바로 저기 철조망 너머 보이는 <장단>이란 곳이다. 여기서부터 겨우 8km밖에 안 된다. 차를 몰고 가면 10분이면 충분히 가는 곳이지. 나도 여기서 인생을 다 보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었지. 그런데 아직도 여기에 첨 왔던 20대 중반의 그 날이 생생하다. 여기서 내 고향마을을 바라보는데 어릴 때 추억이 막 생각나는 거다. 그래서 몇 일을 계속 왔는데 올 때마다 추억들이 하나씩 하나씩 더 생각이 나더라. 그러다가 완전히 여기 정착한 거지.


그 사이에 저 앞의 휴전선도, 임진각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을 거다.

그럼. 이젠 관광지처럼 되었지만 그 전에는 굉장히 엄숙한 분위기였다. 실향민들 오시면 북녘 땅 바라보고 울기도 많이 울었고 아주 애절하고 슬픈 곳이었다. 지금은 세계 각국 사람들이 다 와서 각국 언어로 관광 가이드들이 떠들고 그러지만 예전에는 일단 여기 오면 모두들 침묵을 지키고 ‘아 저렇게 가까이에 보이는 땅에도 못 가는 구나.’ 하는 마음으로 엄숙하였다. 그랬던 곳이 이렇게 변한 거다.


72년도에 처음 여기 들어오실 때 어려움은 없었나?

특별한 법적인 규제 같은 건 별로 없었지만 또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사진을 찍고, 태극기를 파는 것도 일종의 영업행위니까 군이나 경찰서 등에 허락을 다 받으려고 다녔었다. 내가 실향민이기도 하고 실향민들의 애환을 달래주기 위한 일이라는 데에 이해를 해 주더라. 그렇게 몇 년 지나니까 나는 임진각에 당연히 있는 치울 수 없는 시설물처럼 된 거고.




물론, 그가 단순한 장사꾼이었다면 당국에서 그를 그대로 놔두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 이전에 본인이 35년이나 이 자리를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사진을 찍고 태극기를 파는 것도 먹고 살기위해서 였다기 보다는 분단에 대한 의미를 더 살리고 외국 관광객들도 많이 오고 하니 우리나라 태극기를 홍보도 할 겸 해서다. 그러니까 정성춘씨는 누가 뭐래도 흘러간 옛 노래를 틀어주면서 추억과 고향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더 흐뭇하게 열어주는 민간 홍보대사인 셈이다.



대단하시다. 하지만 생활이 쉽지는 않았을 것 텐데. 가족도 있으신가?

아내랑 3남매가 있다. 아들 둘에 딸이 하나. 생활은 어려웠지. 돈 벌어야 하는 가장이 매일 여길 오니 집사람도 처음엔 내켜하지 않아 했었다. 하지만 ‘난 여기가 고향이라서 오로지 여기가 좋다’ 하니 그렇게 좋아하면 어쩔 수 없다며 말리지 않더라. 어려운 고비 다 참고 견디고 이 나이까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자식들도 지금은 그런 우리 아버지가 존경스럽다고 한다.


그사이 남북관계의 큰 사건들이 많았다.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도 있었고, 육영수 여사 시해 사건 같은. 그런 큰 사건들이 있었을 때의 특별한 기억들이 있나?

도끼 만행사건 때는 전쟁 일어난 줄 알았다. 어느 날 갑자기 여기에 사람들을 못 들어오게 했으니. 그 정도만이 아니다. 2000년도 이전만 해도 바로 저 밑에까지 간첩들이 수영하고 오는 것까지 봤는걸. 나 뿐만 아니라 전망대에서 사람들이 다 내려다보기도 했었다. 그러니까 세상이 이제 많이 바뀐 거지. 예전에 이 휴전선은 죽음의 선이었는데 이젠 우리 대통령도 넘어가는 화해의 선으로 바뀐 것 아닌가?



80년대 중반에는 젊은 대학생들이 여기 와서 데모는 많이 했다. 저 땅이 우리 땅인데 왜 못 가게 하느냐며 휴전선 넘어 북으로 가겠다고 소리치면 군인들이 제지하고. 지금은 안 그렇다. 가라고 해도 안가지. 원래 민간인들이 들어올 수 있던 건 저 앞에 망배단 까지였다. 여기(자유의 다리 앞)까지는 못 들어왔었다. 그러던 것이 2000년 1월 1일부터 자유의 다리가 개방 된 거지. 그러니까 나도 저 망배단 앞에 있다가 그 날 이후 이 앞으로 전진해 온 거다.


예전에는 명절이 되면 망배단에서 실향민들이 제사도 많이 지냈다는데.

그랬었지만 지금은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 예전엔 평일에도 실향민들이 많이 왔었는데 그 수도 이제는 확 줄었고.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철조망을 붙들고 하염없이 북녘 땅 먼 산을 바라보곤 했었는데 그 실향 1세대들이 이제 많이 돌아가셨고 연세가 드셨으니 이젠 예전처럼 많은 실향민들은 오지 않는다. 도리어 아주 어린 유치원생, 초등학생들을 더 많이 만난다. 아이들이 이 ‘자유의 다리’가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채 여기서 뛰어노는 걸 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뭔가 아쉽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래. 너희들은 그런 비극을 모르는 것이 더 좋지.’하는 생각도 들고. 간혹 실향민 2세들도 찾아오는데 원래 부모님들 마음하고는 아무래도 다르지. ‘우리 아버지 어머니 고향이 저쪽이니까' 라는 마음으로 가볍게 들르는 거지 절실함은 느껴지질 않는다.


국토의 최북단에 존재하는 ‘사진사’이신데, 여기를 찾아오는 분들의 사진을 찍어 오면서 특별했던 사진 모델이나 에피소드도 있었나?

백발의 노인이 된 어느 할아버지가 이 망배단 철조망 앞에 털썩 주저앉아서는 ‘엄마...아빠...’를 부르며 다리를 비벼가면서 아이처럼 엉엉 울던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결혼식을 막 끝낸 신혼부부가 와서는 그 아들이 철조망을 부여잡고 ‘어머니. 나 장가갔어요. 이 며느리를 데리고 북에 계신 어머니를 만나게 되면 꼭 모시고 살께요.’ 하면서 우는 모습도 찍었고. 또 북에 남기고 온 처를 영영 못 만나고 돌아가신 어느 분의 자식들이 와서 인형에 한복을 입혀서 부모의 영혼결혼식을 올리는 모습 등 그런 기억들이 내 사진 속에 다 있다.



평일의 임진각은 외국인 단체 관광객들만 간간히 오갈뿐, 한산했다. 어쩌면 이런 오늘의 임진각 풍경은 ‘이념’이라는 단어가 점점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져가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테다.



6.25가 발발한지 50년도 더 넘었고 지금 젊은 세대들의 통일이나 안보에 대한 의식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 통일이 반드시 되어야 한다고 생각 하는가?

난 통일이 반드시 된다, 안 된다는 생각보다도 서로 자유롭게 오고 가면서 몇 일씩 잠도 자고 그럴 수 있다면 그게 통일이라고 본다. 그러면 그 쪽에 가서 사람들 생활하는 것도 구경하고 또 거기서도 여기 와서 보고 가고. 그러면 서로 뉘우치는 게 있을 거고. 그렇게 1년, 2년 가다보면 순수하게 섞여져서 철조망이 있어도 그게 별 의미가 아닌 게 되겠지.


자유의 다리에서 바라 볼 때 점점 그런 시대가 오고 있다고 보여 지나?

내가 예전에 여기 앉아서 ‘봄이 오는 민통선’이라는 시를 쓴 적이 있다. “강 건너 민통선에 들려오는 새소리는 / 누구를 기다리다 새가 되어 날아왔나 / 망배단에 앉은 까치 우렁차게 울어대니 / 봄바람에 고향소식 산 너머로 올 것 같네” 이 시를 써서 우리 가계 앞에 붙여놓았었지. 사람들이 그 글을 보고 많이 울었다. 그런데 그 후 얼마 안 가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양에 간 거다. 그 이후로 북한 사람들과의 왕래도 빈번해지고, 금강산도 열리고. 그러다 보니 내가 자유의 다리에서 평생을 보낸 게 잘했는지도 모른다는 자부심이 든다.



인터뷰를 나누던 중간에도 사진을 찍어달라는 중년의 손님들 몇몇이 정성춘씨를 찾았다. 자식들한테 간편한 ‘디카’ 하나쯤 빌려왔을 법 한 그들이 굳이 며칠이 지나서야 사진을 받아볼 수 있는 번거로움에도 불구하고 거리의 사진사를 찾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질문에 ‘내가 사진을 잘 찍으니까.’ 라면서 정성춘씨는 환하게 웃었다.



댁은 그럼 파주시에 있겠다.
아니. 서울 모래내다. 그 동네에서 평생 살았다.


그럼 거기서 매일 여기까지 왔다는 것인가?

그렇다. 경의선을 35년 탔다. 여기 임진강역은 2000년부터 열린 거니까 35년중 거의 대부분을 가좌역에서 기차타고 문산역에 내려 버스타고 들어왔었다. 지금은 집에서 1시간 15분이면 오는데 그 전에는 3시간씩 걸렸었다. 장마철이든 명절이든 다 나왔었다. 그래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한 결같이 임진각 자유의 다리를 지키는 아저씨라고 소문이 났다. 내가 생각해도 대단하다.



정부나 지역(경기도, 파주시)에서 받은 도움 같은 것이 있나?

없다. 전혀 없다. 그런 게 좀 아쉽다. 내가 이렇게 했는데도, 여기 오는 사람들은 나를 이렇게 알아주는데 그 분들은 왜 나를 외면할까 하는 서운함이 든다. 서운함이 드는 것도 아마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걸 꺼다. 물질적 지원을 해 달라는 말이 아니라 뭔가 이렇게 보낸 내 일생에 대해 정부나 지자체가 공식적으로 가치가 있었다는 평가를 좀 내려줬으면 고맙겠다는 말이다.


환갑이 넘으셨지만 절대 그렇게 안 보인다. 건강도 좋아 보이고.

내가 며느리가 둘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놀라더라. 할아버지란 소리가 아직 싫다. 아저씨는 그렇게 명랑하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니까 젊어 보이는 것 같다는 말을 듣는다. 솔직히 내가 요즘 부처님에게 기도하는 것이 있다. 이건 진짠데 ‘부처님. 나 인간문화재 되게 해 주세요.’ 라는 거다.


인간문화재?

여기 자유의 다리도 문화재(경기기념물162호)로 지정이 되었거든. 그러니까 이 앞에서 평생 얘(자유의다리)랑 지내온 내가 인간문화재가 안 되면 자유의 다리가 좀 섭섭할 거 아닌가.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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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일어나자 아무것도 모른 채 남으로 내려왔을 다섯 살 꼬마. 그리고 ‘잘 살아보자’며 산업화가 되던 시절 청년이 된 꼬마는 사진기 하나를 둘러메고 고향땅이 지척에 보이는 임진각으로 향했다. 그리고 35년. 그는 그 자리를 지키며 노년의 사진사가 되어버렸다. 정성춘씨의 말대로 이내 남과 북은 자유로이 서로 오가며 그동안 살아왔던 얘기를 나누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빨리 그 날이 와서 고작 8km 떨어진 그의 마을에서 양지바른 잔디밭은 여전히 푸른지, 유년의 언덕은 그대로 남아 있는지, 아직도 아이들이 까치밥을 까먹고 있는지를 낡은 카메라로 찍는 이 사진사를 다시 만나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슴에 ‘인간문화재 정성춘’이란 이름표를 단 사진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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