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만에 대학로로 돌아온 연기파 배우 최종원
7년 만에 대학로로 돌아온 연기파 배우 최종원
  • 서영석
  • 승인 2009.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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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학로는 연극혼이 사라져” / 서영석



[인터뷰365 서영석] 파노라마 배우, 연극 무대와 방송, 영화를 넘나들며 다양한 연기력을 구사하는 배우 최종원을 대학로 원더스페이스 세모극장 연습실에서 만났다. 필자와는 오랜 기간 선후배로 막역한 친분을 유지했던 관계로 가벼운 인사를 나눈 후 향기로운 커피를 한 잔 하면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대학로에서 뵌 지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보시다시피 공연 연습에 정신이 없습니다. 하루 8시간씩 두 달의 강행군에 몸에 진이 다 빠질 지경입니다. 이전에는 그저 한 달 보름 남짓 두 어 시간씩 연습을 했는데 나이도 들고 후배들이 더 많아지다 보니 ‘연극을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프로로 살아남으려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연습을 해도 완벽한 공연이 이루어지기 힘든데 조금 바쁘다는 핑계로 연습을 소홀히 해서는 절대 프로가 될 수 없다는 강박감이 생겼어요.


어떤 공연입니까?

4월17일부터 공연하는 미국의 극작가이자 시나리오 작가, 감독으로 유명한 David Mamet의 <기막힌 사내들>(원작 ; American Buffalo)입니다. 1975년 초연된 이 작품은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자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동명영화로도 제작되어 크게 히트를 쳤지요. 내용은 어느 고물상을 무대로 벌어지는 공연으로 미국사회의 자본주의 사업윤리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으며 물질적 이익으로 빗어지는 현대인들의 왜곡되고 단절된 인간관계를 비판하고 있어요. 극중 고물상 주인(Don역)은 내가 맡았고 동료인 Teach 역은 윤여성(극단 로열씨어터 대표)씨가, 막내 Bob역은 연극과 뮤지컬을 넘나드는 유망주 최진호가 맡았습니다. 연출은 <나생문> <친정엄마>, <벚꽃동산>,<친정엄마와 2박3일> 등을 연출한 차세대 연출가 구태환이 맡았습니다.


굳이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면?

<기막힌 사내들>은 내가 1992년 바탕골 소극장에서 공연을 했던 작품으로 그 당시의 기억이 새롭습니다. 오랜 만에 대학로 무대에 선다는 설레임과 중압감에 많은 고민을 했지요. 허접한 코미디 공연이 판을 치는 대학로에 뭔가 자극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을 했어요. 또 연극계 선배로서 후배들과 관객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려면 연극적으로 완성도가 있고 배우 예술의 진가를 보여줄 수 있는 작품에 대한 조사를 여러 각도에서 심도 있게 조사를 하던 중 이 작품을 기억하게 되었어요.


오랜만에 대학로 무대에 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의도적이지는 않았지만 7년 만에 대학로 무대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네요. 배우는 무대에서 보여줘야 하는데 여건이 원만하지 못했어요. 언제부턴가 대학로에 진정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사라졌어요. 자연, 공연을 한다는 자체에 회의가 들 수밖에 없었어요. 제작기획팀이 약하고 장사에만 골몰하지 연극인이나 관객들을 배려하는 진실한 장인을 찾기가 어려워 당분간 몸을 사렸다고 할까요?


그 공백기간 동안 무엇을 하며 지냈습니까?

2005년부터 4년간 미국 달라스의 교민들과 함께 공연을 하며 시름을 달랬지요. 한국연극협회 달라스 지부의 교민들과의 공연이 있었어요. 모국의 혼을 보러 오는 느낌이 들어 여간 뿌듯하지 않았어요. 우리 창작극들만 공연을 했는데 교포라고는 고작 5만 명 남짓의 도시에서 매회 800명 이상의 관객으로 매진되는 진기록과 공연시 마다 기립박수에 우는 사람들...,(잠시 숙연)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자체에 배우로써 엄청난 보람을 느꼈던 소중한 시간들이었지요. 30년 넘게 고향을 떠나 미국에서 생활하신 교포들이 너무 좋아 눈물을 흘리는 모습과 우리말이 서툰 젊은 친구들이 우리 것을 보려는 의지를 확인하는 무대로 무한한 영광의 무대라고 할까요? 공연을 통해 더 열심히 살아가겠다는 교포들을 보며 내가 감격을 했습니다.


외국에서 장기공연은 개인적으로 득(得)과 실(失)이 있었을텐데요?

실은 없었어요. 교포들과의 공연은 배우로서 사명감을 가지게 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준 이벤트였어요. 처음 인연은 내가 연극협회이사장 재직 시 달라스지부의 초청으로 맺어졌지요. 2005년 달라스지부의 창립 16년 주년에 즈음해서 간곡한 출연제의가 왔어요. 고민할 그 무엇도 없었어요. 그들은 전문 연극인이 아니라 직업을 가진 교포들이었기에 퇴근 후 8시부터 늦은 새벽, 때로는 밤을 새며 연습을 했어요. 나는 그나마 낮 시간에 쉴 수 있었지만 그들은 아침 7시면 어김없이 직장으로 출근을 해야 했지요. 그 성취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듭니다. 정말 보람있고 뿌듯한 4년 이었지요.

연극을 시작하신지가 꽤 됐지요?

강원도 촌놈이 정말 출세했지요. 1970년에 대학(서울예술전문학교)을 입학했으니 햇수로 벌써 40년이네요. 프로 무대에서만 따져도 36년?


데뷔 작품은 기억하시는지요?

<어린왕자>란 작품으로 데뷔를 했어요. 주정뱅이 역이었는데 술을 좋아하다보니 자연 그런 역을 맡았나봅니다.


연극을 하기란 쉽지 않을 시기였는데?

동적인 면, 즐겁게 뒹굴고 뛰고 하는 그런 부분들이 적성에 맞았나 봐요.




연극을 하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었나요?

내 꿈은 정치가였어요. 시골에서 올라와 나름대로 정치학과에 입학을 위해 열심히 노력을 했지만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명문대 정치외교학과에 지원을 했는데 결과는 낙방. 보따리를 싸서 고향으로 가려는데 누님(당시 서라벌예대 문창과 재학)이 은근히 연극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하더라고요. 고2, 학예회 때 <금산의 피>라는 공연에서 연산군 역을 했는데 그때 누나가 유심히 지켜보았던 것 같아요. 앞으로는 개성의 시대가 올 테니 그쪽으로 진로도 괜찮을 것이라며 귀향하려는 저를 극구 만류하더라고요.

수많은 작품을 하셨는데,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연극 120여 편, 영화, 드라마, CF 등 파노라마처럼 살아왔지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왜 나에게 주인공을 주지 않을까?’, 배역에 욕심을 많이 내는데 자신을 위해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어릴 적 <리어왕>이란 작품을 연습할 때 너무 힘들었어요. 당시 연출을 하시던 안민수씨에게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듭니다. 배역을 바꿔주셨으면” 하고 간곡한 요청을 했지요. 하지만 배역을 바꾸지 않고 용기를 주셨어요. “1주일만 해보고 결정하자”, 1주일의 모든 시간을 선생님과 연습에 매달렸지요. 작품분석, 대사분석, 성격구축 등. 비로소 배우의 표현기법에 대한 자각이 생겼지요. 지금의 최종원의 탄생에는 그 작품의 영향이 지대하다고 할 수 있지요. 그 작품으로 선배들이 배우 최종원을 인정했으니까요. 아직도 대표작을 <리어왕>이라고 자랑삼아 얘기 합니다.


연극을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동료나 선배 배우들이 있을텐데요?

전무송 형이 있어요. 40대 초반 무렵, 연기가 너무 힘들고 인간적 회의가 들어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이렇게 연극을 계속해야 하나 하는 심각한 갈등을 하며 전무송씨와 소주를 마시며 신세한탄을 했지요. 서로가 해외 촬영과 공연을 막 마치고 돌아왔을 때라 현실과 상황에 서로가 너무 피곤했고 지쳐있었어요. 하지만 전무송씨가 우리에겐 서로가 사회적 책임이 있다며 극발연(극예술발전연구소)의 창단과 공연을 제의했어요. 극단을 창단해 <북어대가리>를 함께 공연을 했는데 속칭 대박이 났지요. 매회매진이라는 진기록을 남겼고 연기자로 좋은 공연을 했다는 희열과 연기에 대한 새로운 정체성 각인의 계기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오늘에 이를 수 있었어요. 작품으로는 아까 언급했던 <리어왕>과 <격정만리>를 들 수 있겠는데 <격정만리>는 좌우익의 극한 대립을 극화했는데 김장관 역을 맡았지요. 공연 중 관객이나 동료들이 최종원이 빨갱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가질 정도로 역에 몰입을 했어요. 공연 후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게 해 준 작품이지요. 이 후에 진정한 좌우익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드러내는 사상적인 작품, 국민의 입장에서 화합의 장으로 건드려 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연극뿐 아니라 영화와 방송활동도 많이 하셨는데?

너무 오래 전이라 정확한 연도나 작품은 기억나지 않지만 우연한 기회에 영화 출연을 했어요. 연극 연습 중에 어느 영화사의 조감독이라며 차에서 기다린다는 연락이 왔었죠. 당시 신성일씨가 운동권 학생으로 출연했던 영화였어요. 다른 배우들 점심시간을 빌어 조감독의 차를 타고 촬영장으로 가니 신성일씨가 취조를 받는 장면이었습니다. 대사는 단 4마디. 동시녹음이라 수많은 배우들이 다녀갔지만 OK가 안나 저를 모시러(?)왔다고. 10분 여, 순식간에 촬영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봉투를 하나 주더라고요. 봉투 안에는 그때 내가 두 세달 공연을 해야 받을 수 있는 거금이 들어있더라고요. 그 때 짭짤한 아르바이트로 영화에 대해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지요.


특히 임권택 감독과의 영화에서 중요한 단역을 독차지하다시피하셨는데요?

태흥 영화사와 많은 작품을 했지요. 굳이 이유를 들자면 연극인의 자존심을 챙겨주었어요. 다른 영화사는 싼 맛에 연극배우들을 기용했는데 태흥은 좋은 작품을 위해 돈을 아끼지 않고 연극인들을 기용했지요. 당시 400만원이란 돈은 연극인들에게 꿈의 금액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한 컷의 단역을 위해서 그런 거금을 들이는 영화사는 드물었죠. 하지만 태흥은 제가 요구하는 대로 개런티를 지급했어요. 나도 400만원이라고 불러 놓고 속으로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내가 그 정도 받지 않으면 나이 어린 후배들은 그야말로 무료 출연을 해야 할 경우에 처할 지경이라 미친 척하고 불렀는데 대우를 해줍디다. 아마 그 계기로 연극인들의 개런티가 많이 올랐지 않나 싶어요. 또 방송에서는 김종학 감독의 <동토의 왕국> 촬영 때 많은 연극배우들이 출연을 했어요. 난 비록 한 컷짜리 단역이었지만 연극배우들의 위상과 입지 구축을 위해 노력을 많이 한 기억이 납니다.

공연이나 영화, 방송을 하면서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면?

배창호 감독과 <꿈>을 영화할 당시 감독이 주인공인 안성기씨와 심혜진씨와 한 시간 이상을 의논하더라고요. 자존심이 상하더라고요. 장난식으로, “이 영화는 주인공만 있으면 되니 난 갑니다. 둘이 하는 영화 아냐? 난 갈래” 하고 자리를 떴던 기억이 납니다. 연극배우라고 찬밥대우 받고 기죽을 순 없지 않습니까?(웃음) 또 다른 영화에서 몹시 당황했던 적이 있었지요. 지금이야 에피소드라 할 수 있지만 그때 상황을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합니다. 그 친구가 지금이야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한 영화배우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그야말로 막 데뷔하는 신인이었어요. 내가 주인공으로 전라의 그 여배우를 등에 업고 촬영을 하다가 조명기가 떨어져 그 여배우의 머리를 정통으로 때리는 돌발상황이 벌어졌어요. 갓 20대 어린 여자가 개구리(?)처럼 벌거벗은 몸을 사지를 뻗고 드러누웠는데 어찌해야 하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아 그저 멍하게 처다만 보고 있었던 사건이 있었지요. 가끔 보면 멀리서 조분하게 인사만 하고 사라져 버립니다.(웃음) 박중훈씨와 영화를 할 때 뒤통수를 때리는 장면이 있었는데 어떻게 주인공을 마구 때립니까? 알아서 연기하라고 살살 때리니까 박씨가 감정이 안산다고 제대로 때려달라고 요구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몇 번 NG가 나고 감정을 실어서 때렸더니 OK 사인은 났어요. 연기를 하면서 현장에서 너무 다양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친분도 많이 쌓았을 텐데...

영화계에서 이명세, 곽지균 감독은 연극인들을 챙겨주고 자존심을 세워주는 감독들로 유명해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특히 이명세 감독과는 <남자는 괴로워>를 같이 했는데 절대 자신의 그림을 양보하지 않는 왕고집 감독으로 존경할 만 합니다. 배창호 감독의 푸근함,. 김대승 감독의 아기자기한 연출 기법도 재미있었지요. 안성기씨를 배우로 존경할 만합니다. 영화정신이 소박하고 철저한 자기관리와 엄청난 노력, 연기에 대한 순간 디테일 뛰어납니다. 연극 연기는 연습과 토론이 중요하지만 영화는 역시 순발력인 것 같습니다.



연기를 하면서 어려운 상황도 숱하게 많았을 텐데요?

가장 어려운 것이 방송 중 대사 외우기를 꼽을 수 있겠지요. 특히 사극은 우리말도 아니고 외국말도 아니고 도무지 헛갈려서 외우기가 너무 힘들어요. “성은이 망극 하옵니다 인지 통촉하시옵소서” 인지, 그 말이 그 말 같아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연극협회 이사장 재직 시 많은 업적을 이루었는데?

개인보다는 연극과 연극인을 위해 정신없었습니다. 당시 60억에 불과했던 국고 지원을 110억으로 늘렸고 소극장개선사업, 목동천막극장의 국고지원 등 열심히 뛰었습니다. 또 지방 연극인들을 위해 도지사나 시장을 만날 때 적극적으로 동참을 하기 위해 전국 로드도 마다 않았고 포항바다연극제 태동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지난 나의 세월보다 후배들에게, 모든 연극인들에게 더 풍족한 여건 마련에 최선을 다했다는 부분에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현재 대학로를 한마디로 진단한다면?

연극혼(정신)의 상실입니다. 유치한 말로 헝그리정신이랄까요? 정부의 지원금이 우리의 연극계를 지탱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데 대해 이견은 없습니다만 너무 의지하는데 문제가 있지요. 자생력을 상실해 버렸어요. 모든 연극인들이 지원금만 바라며 스스로의 자구책 마련에는 열과 성을 다하지 않는 현실입니다. 물론 지원없이 공연자체가 어렵다는 건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지만 용기마저 잃어버린다면 우리의 예술은 무덤으로 갈 밖에요. 지원금이 예술의 혼을 좀먹는다면 지원금의 활용방안에 대해 검토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배고픈 시절에 더 철저히 노력했다는 씁쓸함이 들어요. “풍요는 예술을 갉아먹는 세균”입니다.


그 방법론이 있다면?

최선을 다한 공연은 절대 관객이 외면하지 않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정말 어려웠던 시절을 상기하며 더 열심히 노력해야지요. 극작가, 연출, 배우 모두가 한마음으로 좋은 공연을 위해 전력투구를 해야 합니다.


이제 나이 61, 연기자, 선배로서 할 말도 많을텐데요?

연극인이나 배우, 남자이기 이전에 인간의 나이 61에 지나 온 시절, 어떻게 살아왔느냐 하는 부분의 옳고 그름을 정리해야지요. 뭔가 내 인생을 조금씩 정리, 정돈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죠. 베풀 수 있다면 베풀고 어울리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뿐입니다. 내 시절 가지지 못했던 조건들을 후배들에게 만들어 주는 역이 내 할 일이 아닌가 합니다. 이제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연극의 발전을 위해 올인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올인 하십니까?

나름대로 이사장 재직시부터 꾸준하게 준비하던 과제가 있었어요. 4년의 공을 들여 작품을 구상했지요. 아직 전부를 공개할 시기는 아니지만 조금씩 그 모습이 드러나기에 언급을 한다면 고향인 강원도에 국내 유일의 종합 예술촌(2011년 완공예정)건립에 전력투구하고 있어요. 강원도 정선의 폐광을 이용 10,000평 정도의 부지를 확보했습니다. 전체 111억의 예산 중 2009년 예산 34억을 배정받았습니다. 조만간 설계 공고가 나갈 겁니다. 모든 문화예술인들의 창작활동에 적극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며 창작품 페스티발, 전시실, 소극장 등을 마련해 전천후 축제의 마당으로 만들 계획입니다. 또 충청도 공주에 공연예술체험마을도 건립하고 있어요.


연극을 하면서 가슴 시린 시절도 많았지요?

가슴 시리다면 영원한 화두가 어머니 아니겠어요? 배우를 하다 보니 남들처럼 돈으로는 효도를 못하고 그저 얼굴 보여드리는 것만으로 떼우고 있지요. 일전에 돌아가신 아버님께도 평소 못다 한 효도가 가장 가슴 아프지요. 죄지은 자식으로서 그 마음은 항상 어머니가 더 많이 살아주셨으면, 내 곁에 더 오래 계실 수 있다면 내 복이고 행복 아니겠습니까? 9년 열심히 벌어 부천에 생전 처음 아파트를 마련했는데 연극협회이사장하면서 회비 아끼느라 내 돈 쓰다가 3년 만에 날리고 다시 전세 집에 어머니를 모시는 것도 가슴 아프지요.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자신을 추스르는 노하우가 있는지요?

대학로에 박스 노인이 있어요. 겨우 150cm가 넘을까 하는 아주 자그마한 키에 왜소한 몸을 부지런히 놀려 일 년 열두 달, 하루 24시간 쉼 없이 대학로 골목골목의 가게를 돌며 박스를 수집하는 노인을 보면 ‘나는 너무 행복하게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분은 집에서 자식들에게 제대로 대접을 받을까하는 연민이 생겨 괜시리 눈물이 글썽거리기도 합니다. 인간의 욕심에 한계가 있겠습니까? 높은 곳의 사람을 보면 화가 날지도 모르지만 그런 분들을 보면서 스스로 현재의 위치에 만족하려 자위를 하곤 합니다.


앞으로 해 보고 싶은 희망이나 꿈이 있다면?

아직은 청춘이라 가끔은 멋진 로맨스에 대한 공상을 하기도 합니다. 하와이나 괌 같은 이국에서 멋진 여자와 재회를 하는 로맨스를 꿈꾸죠.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는 한국에서, 그녀는 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하와이나 괌 같은 국제휴양지에서 도킹을 하는 만년의 로맨스를 말입니다. 해변에서도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는 제3국에서의 낭만을 그려보곤 합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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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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