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쓴 편한 연필, 이홍렬
오래 쓴 편한 연필, 이홍렬
  • 조현진
  • 승인 2007.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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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다음 페이지를 쓰고 있는 사람 / 조현진



[인터뷰365 조현진 / 사진 김준모] 이홍렬은 작다. 아니 짧다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방송에서 다른 연예인들 사이에 서있는 그를 보면 어떤 때는 단정한 키의 연필들 사이에 짧은 몽당연필 한 자루가 끼어있는 듯 한 기분을 주기도 한다.


비단 키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분명히 동시대를 나눈 고 김형곤, 심형래나 서세원처럼 보기만 해도 웃긴 외형적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다. 작은 키보다 더 큰 걸림돌은 특색 없는 얼굴이었다. 물론 그에겐 ‘같은 이야기라도 재미있게 말을 할 줄 아는 재주’는 있었지만, 그가 처음 희극인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시기는 살살이 서영춘, 바보 배삼룡, 땅딸이 이기동 같은 슬랩스틱 코미디언들의 전성기였다.


“한양중학교 다닐 때부터 개그맨이 되고 싶었어요. 그땐 뭐 개그맨이란 단어가 없었으니까 그냥 희극인이죠.”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꿈꾸던 연극영화과를 진학할 수 없었기에 그는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서 돈을 벌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희극인의 꿈을 버릴 순 없었다. 공장을 다니며 연예인이나 MC를 뽑는다는 소식만 들리면 그곳이 방송국이건, 나이트클럽이건, 음악다방이건, 놀이공원이건 앞 뒤 재지 않고 돌진했다. 그렇게 좌충우돌 뛰어다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상처와 입대영장 뿐이었다.


“뭐가 그렇게 하나도 안 되더라고요.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상 그건 말 그대로 꿈일 뿐이고, 신문에 연예단원 모집한다는 광고보고 찾아갔었는데 유령회사고...뭐 그런 식인 거죠. 그러다가 당시에 굵직한 연예인들이 많이 출연하던 무교동에 ‘월드컵’이라는 극장식당 MC로 뽑혔어요. 그래서 교육까지 다 받았는데 일이 안되려고 그랬는지 월드컵이 바로 내부수리공사 한다고 휴점을 했어요. 얼마나 실망스럽던지.”




군대를 제대했지만 꿈을 향한 그의 열정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밤새도록 카세트에 녹음버튼을 누르고 자신의 만담개그를 녹음한 테이프를 들고 하루 종일 방송국 PD들을 귀찮게 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임성훈과 최미나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일주일에 두 번 등장하는 고정 게스트가 된 것이다. 무려(?)4,500원이나 되는 출연료도 생겼다. 이때부터 그는 조금씩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웃기는 소리 잘하는 ‘라디오스타’가 되었다. 이 일을 시작으로 TBC-TV에 코미디 프로그램이었던 <청춘대합창>에 몇 번 출연했지만, 특색 없는 이홍렬의 얼굴로 소위 뜬다는 것은 당시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군대까지 다녀왔으니까 이젠 정말 제가 돈을 벌어야 했는데 잘 안되니까 많이 힘들었지요. 아버지가 특별히 하시는 일이 없으셨고, 어머니가 삯바느질 하시면서 가계를 끌어 나가고 계셨어요. 참 아쉬워요. 어머니는 제가 데뷔하는 거 못 보시고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도 그 후 1년 있다가 가셨고. 두 분 다 몇 년만 더 사셨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MBC가 대학생들을 타겟으로 야심차게 기획한 <영11>에서도 스포트라이트는 항상 그가 아닌 서세원의 몫이었다. 서세원이 무대의 중앙을 차지하면서 슬랩스틱 코미디로 관객을 웃길 때 이홍렬에게는 조명도 잘 비치지 않는 구석자리와 변사의 마이크 뿐 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처음엔 자빠지고 넘어지는 서세원의 몸과 동작을 보고 웃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스튜디오의 방청자들과 시청자들은 그 동작에 추임새나 넣어준다고 생각하던 ‘변사 이홍렬’의 말 개그에 까무러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해 연말에 MBC가 주는 신인상을 탔다. 이홍렬은 그토록 꿈꾸던 진짜 개그맨이 된 것이다.


부모님이 몇 년 만 더 사셨더라면 아들의 좋은 모습을 보셨을 거라는 이홍렬의 아쉬움은 사실이었다. 80년대 초반, 한국 코미디 계는 대대적인 세대교체가 일어난다. 서영춘, 배삼룡이 퇴장하고 전유성, 김병조 등이 주도하는 젊은 개그맨들이 브라운관에 전진배치 되며 슬랩스틱 코미디의 시대에서, 스탠딩 개그의 시대로 바뀐 것이다. 말 그대로 이홍렬에게 딱 맞는 시대가 온 것이다.


“방송을 많이 했지요. 정신 차릴 수 없을 만큼의 무대가 저에게 돌아 왔고요. 개그 프로그램만이 아니라 라디오 방송 DJ와 각종 대학 축제의 MC자리는 다 제가 1순위였어요. 그렇게 대학들을 돌아다니며 축제사회를 보다보니 ‘아 나도 대학을 나와야 된다.’라는 욕구를 참을 수 없게 되었지요. 33살 되던 86년 겨울에 15살 이상 어린 친구들 틈에 껴서 체력장도 하고 대입시험을 봤어요. 한 여고생이 제 수험표에 <힘내라 이홍렬.>이라고 써준 것이 아직도 기억나네요.”


다음해 봄 이홍렬은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입학하며 <87학번 대학생>이 된다. 중학교 동창이었던 <73학번 전영록>의 까마득한 후배가 되었지만, 그런 것 따질 것 없이 이홍렬은 너무 기뻐서 펑펑 울었다. 대학생이 되어서 가장 행복한 이유는 7년 전에 점찍어 놓은 여성에게 이제 당당하게 프로포즈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다음해인 87년에 바로 그 여성 박인규씨와 대학교 2학년짜리 이홍렬은 결혼을 한다. 신랑 35살. 신부 26살.




91년 대학 졸업장을 받았을 때 이홍렬은 이미 두 아들의 아빠였다. 방송도 가정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이홍렬은 대학을 졸업하고 2달 후 혼자서 돌연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버렸다.


“난 전형적인 A형 이예요. 아시죠? A형 성격이 어떤지. 즉흥적인 법이란 결코 없죠. 모든 일이 철저하게 준비되어져야 하고, 준비된 일은 완벽하게 결과가 나와야 하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너무 내가 습관적으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거창하게 도전의식이라고 말 할 수는 없지만 늘 ‘이건 어떻게 할까? 이렇게 풀어야 겠구나.’ 그리고 일이 끝났을 때 ‘아! 다음엔 이렇게 하는 게 옳겠구나.’같은 것을 진단하며 살아야 하는데 내가 그러질 못하고 있더라고요. 물론 학교, 방송, 가족 등 핑계 댈 건 많았지만 이럼 안 된다는 위기감 같은 게 왔어요. ‘그럼 어떡하지? 내 안에 뭔가를 더 채워야 되는구나.’ 이런 결론을 내린 거죠. 그래서 2년 동안 사서 고생 한 거죠. 하지만 결과적으론 옳은 판단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이홍렬은 호기 만만하게 떠났다. 하지만 언제나 새것을 만들고 찾는 방송이라는, 대중적 인기라는 괴물이 이홍렬을 그냥 기다려줄리 만무했다. 예전 같으면 10년은 지나야 바뀔 일들이 2년 사이에 벌어졌다. 93년도에 귀국했을 때, 대부분의 옛 동료들은 무대의 뒤편으로 물러나 있었다. 대신에 MBC엔 이영자, 이휘재, 최성훈 같은 얼굴도 낯 설은 까마득한 후배들이 방송의 전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개그 무대로 돌아가는 것보다 라디오 진행을 맡는 것이 더 유리할 거라는 조언들이 쏟아졌다. 이홍렬에게 그런 조언은 일선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으로 들렸다.


“무엇보다도 개그는 섬세하죠. 어제까지 웃겨주더라도 오늘 안 웃기면 하루아침에 외면당하는 거예요. 가수는 히트곡 하나 내면 평생 노래 부를 무대가 있고, 영화배우는 필름이라도 남는데, 개그맨은 그렇지 않죠. 못 웃기면 끝이니까. 그럼에도 웃겨야죠.”


그래서 그는 안정적인 라디오가 아닌, 스무살 쯤 어린 후배들과 싸워야 하는 개그프로그램으로 돌아온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후배들이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어려워하는 것이었다. 모두가 개그맨들이지만 쉽게 같이 웃기 어려웠다. 아이디어 회의를 하면서도 그 보이지 않는 벽이 묵직하게 그를 괴롭혔다. 나이 40에 맡을 수 있는 배역을 찾기 어려웠다. <귀곡 산장>의 할머니 역할도 이홍렬 밖엔 그 역을 맡을 나이 때의 개그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겉으론 웃고 있지만 속으론 복잡하죠. 나이 40에 치마입고 할머니 노릇이나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자식들이 사춘기로 접어들고 있었는데 아빠가 그런 역 하면 학교에서 놀림 받지나 않을까 걱정도 되고. 이홍렬이 일본 갔다 왔다더니 별걸 다하네 하는 소리 들을까 염려도 되고. 그런데 마음을 다시 먹었어요. ‘어차피 개그맨으로 계속 간다는 것은 내가 결정하고 선택한 일이다. 그럼 되던 안 되던 한 번 해 보자. 1~2주 나가고 짤려도 제대로 한번 해보자. 이홍렬을 진짜 재밌는 할머니로 한번 바꿔보자.’ 라구요.”


그 <귀곡 산장>이 터졌다. 요즘 분위기로 말하자면 <무한도전>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이홍렬 할머니’는 전 국민의 사랑을 독차지 하게 된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코너였던 <이홍렬의 한다면 한다>로 그는 연타석 홈런을 친다. 특히 94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시도한 스카이다이빙과 뉴질랜드에서 부들부들 떨며 이홍렬이 감행한 번지점프는 이전까지 코미디 쇼가 보여주었던 영역에 새로운 트랜드를 만들어내기까지 이른다.


“그 이후 부터죠. 제가 번지점프를 하기 전까진 연예인 스스로도 그런 일을 안 하려고 했고 괜히 그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니까 PD들이 그런 걸 시키는 건 꿈도 못 꿨죠. 요즘은 연예인들이 번지점프 하는 정도로는 시청자들에게 아무런 자극도 못주지만 그땐 센세이션 했어요. 특히나 자기보다 작고 약해보이는 제가 뛰어내리는 모습에 40대 이상의 남성들이 큰 용기와 자극을 얻었다고 할 때 참 감사하더라고요.”



94년과 95년 두해동안 이홍렬은 개그맨에게 주는 굵직한 상은 거의 모두 독식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 96년 1월. SBS의 <이홍렬 쇼>가 첫 전파를 탄다.


“그 감동이란 건 말로 표현 못해요. 스튜디오에 들어갔는데 세트 벽에 ‘이홍렬’이란 이름이 제일 크게 써져 있는 것을 봤을 때, 울컥 하더라고요. 아. 내가 이제 여기까지 왔구나. 내 이름의 쇼가 생겼구나...하고요.”


무려 6년간 177회 방송. <이홍렬 쇼>는 밤11시에 방송되는 토크쇼로는 유례없는 장수기록을 세웠을 뿐 아니라 시청률 1% 일희일비하는 방송사가 177회를 진행할 만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특히나 이전까지 <쟈니윤 쇼><주병진 쇼>등 심야 토크쇼가 적당한 성적, 시사적 농담으로 구성되었던 것과 달리 이홍렬 쇼는 게스트와의 진솔한 토크(TALK)문화를 이끌어냈으며, 특히나 이홍렬과 게스트가 함께 음식을 만들며, 뿅망치를 들고 즐기는 <참참참 코너>는 다이어트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겐 ‘공공의 적’이 될 만큼 유혹적이었다.


“아마도 제 연예계 인생 최고의 황금기였을 거예요. 이때는 제가 CF를 제일 많이 하는 연예인이었죠. 욕실 관련 CF가 들어와도 샴푸는 하지만, 욕조 청소제는 안한다...뭐 이렇게 거절할 때니까. <이홍렬 쇼>는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제 성격과도 잘 맞았죠. 기존 개그 프로그램처럼 제가 어떤 캐릭터를 가지고 참여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이홍렬 쇼>니까 작가나 PD들에게서 나온 아이디어에 그것이 이홍렬적이냐 아니냐를 최종적으로 제가 결정하면서 할 수 있었으니까. 제가 원하던 방송을 할 수 있었던 거지요.”


이홍렬 적 성격. 우리는 SBS에서 방송되었던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라는 시트콤을 기억한다. 처음에 시청자들은 이홍렬이 시트콤에 나오자 이전까지의 시트콤들이 그랬듯 (‘순풍산부인과’의 표인봉, ‘남자셋 여자셋’의 신동엽 등) 웃음을 가미하기 위해 한 두명의 개그맨을 투입시키는 것으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회가 거듭 될수록 시청자들은 ‘웃기지 않는’ 이홍렬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예상외로 신구와 노주현은 웃음보를 폭발시키는데 반해 이홍렬은 까칠하고 예민한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A형이라니까요. (웃음)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 제 본 모습 그대로가 많이 묻어나온 역할 이예요. 그 프로그램을 만든 김병욱 PD가 처음부터 ‘이홍렬씨 성격 그대로만 보여주세요. 그래야 더 재밌어요. 시트콤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하나 있어야 되요.’라고 하더군요.



노련한 시트콤 연출자인 김병욱 PD의 생각은 옳았다. 시청자들은 그대로 걸려들었다. 신구와 노주현이 웃기는 사이에 이홍렬은 안 웃기면서 그들의 뒤를 받쳤다. 시청자들은 ‘내일은 이홍렬이 웃겨 줄 거야.’ 하면서 다음 회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홍렬은 다음날도 천사 같은 딸 김민정에게 짜증을 부리는, 귀찮다는 배종옥의 뒤를 졸졸 따라 다니는, 그리고 아버지 신구에게 짤짤이 개평을 가지고 싸우는 까칠함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끝까지.


“이때부터 아마 개인적인 투쟁기가 시작된 거 같아요. 내 인생의 다음 목표를 어디에 설정해야 하는 가 였죠. 저도 그랬지만 많은 연예인들의 꿈인 ‘자기 이름을 건 쇼’를 난 이미 끝냈으니까. 그 현실을 마주하니까 갑자기 겁이 나더라고요. 어쩌지? 이젠 어째야 하지? 난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사람인데 내가 꾸던 꿈을 이룬 이후에는 뭘 해야 하는지의 준비는 덜 되어 있었던 거죠.”


그래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보기도 했다. 대형 노래방도, 애완동물 관련 사업을 해보기도 했다. 만족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가봤던 연예인으로서 정상자리에 후배들을 보낼 수 있다면 ‘나의 만족’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리센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고 김학도, 강성범, 강유미, 심현섭, 염경환 같은 재주 있는 후배들을 불러 모았었다.


“3년 4개월인가 하고 문을 닫았어요. 제일 크게 배운 것은 하나님이 제게 경영자로써의 재능은 주시지 않았구나 하는 거였죠. 후배들과 아이디어 회의는 몇 일 밤을 새면서라도 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회사를 성공시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죠. 사업을 잘 한다는 건 아주 다른 영역이더라고요.”


다른 일과 사업도 다음 목표, 다음 도전과제를 찾는 이홍렬의 갈증을 해소시켜주지 못했다. 물론 그 사이에 방송을 쉰 것도 아니다. KBS에서 <이홍렬 박주미의 여유만만>을 3년이나 진행했었고, 여전히 그는 <체험, 삶의 현장>의 메인MC다.


“두 프로그램 모두 좀 아쉬움이 있어요. <여유만만>의 경우엔 프로그램 하나에 여러 제작사가 아웃소싱 형태로 들어와 있는 방식이어서 프로그램을 활성화하는 아이디어 회의 같은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어떤 발전적 발상을 끌어내지 못하고 제가 가지고 있는 것만을 자꾸 재탕하는 형태가 되어서 방송으로도, 저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많이 있었죠. <체험, 삶의 현장>의 경우는 오프닝에서 제가 준비해간 재밌는 말을 많이 해도 프로그램 자체가 워낙 체험자들의 꼭지들을 중요시 하게 되니까 다 편집되고 ‘얼마 벌어 오셨습니까?’ 만 반복해서 보여줄 뿐이고. 그러니까 아쉽죠.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는데. 보여줄 것이 있는데.”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는데. 보여줄 것이 있는데.’ 그렇다. 지난 몇 년간 인기의 정점에서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다음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이홍렬은 분명히 찾아낸 듯 했다. 그것은 인기와 인생의 길이가 결코 같지 않으며, 자신이 맞추어야 하는 시간은 인생이라는 답을 발견한 것이었다.


“다행이 송해 선생님 같은 좋은 롤 모델이 있잖아요. 얼마나 보기 좋아요? 그렇게 가야지요. 그렇게 가기 위해 노력하고, 준비해야지요. 쉬지 말아야지요. 한꺼번에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한 문제, 한 문제를 풀어야지요. 그러다보면 관객이나 시청자들의 시간 또한 이홍렬의 인기가 아니라, 이홍렬의 인생에 맞추어 질 런지도요.”


개그맨으로써 타고난 재능이 없었던,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언제나 무대의 중앙이 아니라 무대의 구석에 서있었던. 어린 후배들과 밤을 새워가며 아이디어 회의를 할 지언 정 즉흥적인 애드립으로 연기해 본 적이 없었던. 그리고 그 여러 번의 실패를 좌절이 아니라 바른 답을 찾기 위해 필요한 오류로 받아들여 온 사람 이홍렬.



오늘 그를 만나 이홍렬의 시계는 인기의 초침이 아니라, 인생의 분침을 향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래서 그에겐 여전히 질문지와 숙제가 많다. 새로 시작한 홍대 앞 햄버거 가계도, 중학교 동창친구 전영록과 연말에 ‘저지르기로 약속한’ 디너쇼 <동창>도 - 물론 그의 수첩을 빼꼭히 채우고 있는 방송 스케쥴도.


오래된 편안한 연필같은 사람 이홍렬을 만났다. 그는 오늘도 담담(淡淡)히 그 문제 앞에 선다. 그리고 해답을 써보기 시작한다. 틀리면 지우개로 지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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