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 시장도 부러워하는 배우 겸업 변호사 홍승기
오세훈 시장도 부러워하는 배우 겸업 변호사 홍승기
  • 김두호
  • 승인 2009.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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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행복 지수 92%의 서초동 배우”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배우와 변호사는 활동영역이 다르고 일의 성격도 서로 판이해 겸업을 하는 사람이 드물다. 아마도 홍승기 변호사(50)는 그 두 가지의 직업을 가진 국내 유일의 인물일 것이다. 연극무대에서 아역배우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법조인이 되겠다는 꿈도 함께 키워 마침내 두 가지 꿈을 모두 성취한 그의 삶은 스스로 ‘행복지수 92%를 유지하며 산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인생을 즐기며 사는 비결은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요즘 홍 변호사는 자신의 출연 영화 <공공연한 비밀>(조경득 감독)이 금년도 전주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되었다고 흐뭇해한다. 미국 유학을 거쳐, 박사과정을 끝내고 모교인 고려대 로스쿨에서 겸임교수로 활동하며 뉴욕주 변호가 자격까지 가진 능력있는 변호사와 한적한 주택가의 벚꽃공원에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신문에 칼럼도 쓰고 정신없이 사는 모습을 보고 있다.

다음 주에 내가 번역한 책 한권이 나온다. 백악관 인권담당차관보가 된 예일대 로스쿨 학장 고흥주 교수에 관련한 <치열한 법정>이라는 책이다.


어떤 내용의 책인가?

아이티 군사정변 때 보트피플이 된 난민들을 부시정부, 클린턴 정부가 해상봉쇄를 하면서 벌어진 비극을 사실 그대로 기록한 내용이다. 고 교수가 예일대 학생들을 이끌고 미국 행정부를 상대로 난민 인권 소송을 전개했고, 그 사건을 계기로 고 교수는 인권문제에서 뚜렷이 주목을 받게 됐다.

그 전에도 책을 낸 적이 있잖은가?
2003년에 법정영화를 법률적으로 분석한 <시네마 법정>을, 2004년에 <엔터테인먼트와 저작권>을 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글을 쓰고 있으니, 실무가 중에서는 논문이든 잡문이든 좀 쓰는 편에 속한다.

단체 일도 많이 맡고 있는 것 같다.

대한변호사협회 공보이사와 저작권위원회 위원, 엔터테인먼트법학회장을 맡고 있고,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예술경영지원센터, 아르코시티문화재단 등에도 이사나 감사로 이름이 올라가 있다. 서울문화재단, 방송작가협회 등 예술단체와 SBS프로덕션 JYP 등 10여개 제작사의 법률자문을 담당한다.

저작권 관련 외부 강의도 시간이 허락하는 한 거절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주위사람들에게는, “과로사가 예정되어 있으니 있을 때 잘하라”고 겁을 준다.

연기활동은?

2년쯤 전에 촬영을 끝낸 장애인 인권 영화가 이번 전주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들었다. 종전에는 ‘장애인 이동권’ 쟁점이었다면, 이 영화는 ‘장애인의 성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다. 함께 참여한 분들 각자가 활동분야에서의 역량이 만만찮고, 중견 연극인들도 취지에 동참하여 무료 출연을 해주신 것으로 안다.


임권택 감독의 <축제>에도 출연했지 않았는가?

주연배우 안성기 씨의 친구역이었는데 눈에 띄는 배역은 아니었다. 저예산 영화 <비디오를 보는 남자>에서는 ‘거지’ 역을 하기도 했다.


데뷔는 언제 어떤 작품이었나?

데뷔라기는 뭣하지만, 1993년 미국에서 촬영한 이석기 감독의 <아주 특별한 변신>이었다.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배우가 됐다면 우연인가, 특별한 계기라도 있는가?

대구에서 계성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아역으로 연극을 했다. 초등학교 6학년때 이창동 감독의 친형 되는 이필동 선생(작고)이 연출한 <따라지 향연>에서 ‘뻬뻬니에로’ 역으로 무대에 처음 섰고, <춤추는 벌레>의 ‘스친키’, <배비장전>의 ‘서동’으로 무대 맛을 알았다. 그러나 꼬맹이 때부터, 연극하는 분들 지갑에 돈 대신 전당표가 가득한 실상을 보면서 ‘연기’가 생업으로는 문제가 있겠다고 느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 이미 무대에 한 발을 걸치되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져야 겠다는 ‘비겁한’ 생각을 한 것이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면서도 나는 농담처럼 주변사람들에게 ‘합격하면 배우 하겠다’고 했지, ‘훌륭한 법조인이 되겠다’ 고는 한적이 없다. 이제 돌아보니 얼치기 배우에 고만고만한 변호사가 되어 있다.


데뷔 작품의 캐스팅 과정은?

1990년 말 사법연수원을 수료할 무렵 신작 <낙타는 울지 않는다> 제작사가 신인배우를 찾고 있다는 신문기사가 나왔기에 제작사에 가명으로 지원서를 냈다. 물론 어릴 때의 연기 경력을 소개하고. 소식이 없어서 영화사에 전화를 했더니 이석기 감독이 연락하려던 참이었다며 ‘친구하자’고 하셨다. 이 감독은 제작자가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에 신인을 쓰기 부담스러워 한다고 다음 작품을 꼭 같이 하자고 했고, 그게 <아주 특별한 변신>이었다.



대학시절은 공부만 했는가?

아니다. 고대법대학생회장으로 내 생애 가장 힘들고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다.


운동권 학생이었나?

투쟁경력이 약하므로 ‘활동권’학생이라는 말이 적절하다. 3학년 2학기인가에는 아예 학생회관에서만 지내며 수업에 들어가지 못했고, 휠체어로 등교하는 친구가 계단을 오르지 못해 대신 업고 강의실 들어간 한 시간이 그 학기 수업에 들어간 전부였다. 4학년 때는 학생처에서 불러서 ‘학교 나오지 않으면 졸업은 될 테니 나오지 말라’고 권했다. 학교에 나타나지 않을 때도 학장님이 호출하셔서 “동맹휴학을 도모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는데, 아니지?” 하시곤 했다. 서슬이 시퍼렇던 5공 때 얘기인데 우리 세대 많은 이들이 비슷한 상황을 겪었을 게다. 정말 제대로 한판 붙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느끼면서도 행동에 못 옮기니 힘들 수 밖에. 평생 월급쟁이 하시던 아버지가 뇌출혈로 회사에서 쓰러져 거동이 불편하셨고, 둘째 형님이 외무고시에 막 합격해서 의욕적으로 사무관 생활을 시작 하던 때라 고민이 심했다.

예술 쪽보다는 정치적인 기질이 더 많았던 것은 아닌가?

아니다. 나는 감수성이 별나게 예민한 사람이고, 돌이켜보면 그래서 군사정권 시절 더 마음고생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 동기동창인 오세훈 시장이 강남구 국회의원 시절 여러 번 강남구청장 공천을 줄 수 있다고 출마를 권유하더라. 한번은 술집으로 불러내 “강남구청은 재정자립도가 100%라 시장한테 머리 숙일 일 조차 없다”면서 종용했지만 “정치는 너나 해라, 나는 예술 한다”고 튕겼다. 오 시장은 친구들에게 ‘그걸 왜 거절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더라.


잘나가는 오세훈 시장이 부럽지 않은가?

당연히 부럽다. 그러나 그 지위에 따르는 고통이 있지 않겠나. 오 시장은 그 직업상의 권한과 책임을 잘 인식하고 이를 즐기는 인물이고,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정치인의 덕목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오 시장이 당선된 날 집사람이 “세훈씨는 시장하는데, 당신은 뭐하나”고 조롱하더라. 한 호흡도 쉬지 않고 “서울시장 친구하지 뭐해” 하고 받아 넘겼다. 지금 생각해도 아주 명쾌한 대답이었다.


가족 분 얘기를 더 듣고 싶다.

아버지는 타계하셨고 어머니는 올해 79세시고 나는 아들 5형제 중 넷째다. 둘째 형(홍승목)이 네팔 대사로 계시고 동생이 무용가 홍승엽(‘댄스 씨어터 온’ 대표)이다. 집사람은 느지막에 향학열이 올라 시카고에서 방문학자(visiting scholar)로서 사회체육학을 공부 하고 있다. 버몬트에서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은 몸이 받쳐 주어서 배우를 했음 싶은데 본인이 관심이 없고, 성균관대 의상학과 3년생인 딸이 느닷없이 휴학을 하고 뮤지컬 배우 수업을 받고 있다. 지금 안하면 평생 후회할거라기에 승낙했다. 이렇게 늘어놀고 나니 ‘럭셔리’ 냄새가 나는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어려운 때 세집 살림하느라 몽땅 거덜났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하고 싶은 일도 열심히 하는 집안 분위기로 보인다. 미국 유학은 어땠나?

사시 30회로 서초동에서 7,8년 변호사 업무를 하다가 1997년 미국 가서 펜실베니아대(U'of Penn)

로스쿨에서 공부하고 뉴욕 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환란사태를 온 몸으로 맞느라 쉽지 않았지만, 사건에서 해방되고 다시 학생으로 돌아간 신나는 경험이었다.


진정으로 하고 싶은 연기는 어떤 연기인가?

카리스마 넘치는 아역이면 좋겠는데. 사악한 지식인이나 암흑세계의 보스역 같은. <대부>의 말론 브랜도나 알 파치노의 역할 멋지지 않나.


연극무대에도 관심이 있는가?

물론이다. 2003년 예술의 전당 자유 소극장에서 박희순 백종학과 <아트> 초연에 출연할 때 비서가 “요즘 날아다니신다”고 하더라. 낮에는 변호사 업무를 처리하고, 오후 늦게부터 새벽까지 연습을 하느라 3,4시간 자는 생활이 반복되었는데도, 아드레날린이 넘쳐서 지칠 줄 모르더라는 얘기다. 그러고 보니 2005엔가 <말들의 눈에는 피가>라는 현대무용의 해설자 배역으로 호암 아트홀 무대에도 섰었다.


좋아서 하는 연기지만 그래도 불만이나 허전한 일들이 생길 때도 있지 않는가?

데뷔 작품을 찍을 때 무척 추운 날, 얼어붙은 뉴욕 허드슨 강변에서 손창민 씨와 고생스레 촬영한 장면이 편집과정에서 모두 날아가 허탈했다. 윤기나는 배역을 제대로 못했으니 배우라는 소개를 받으면 무척 쑥스럽다. 아주 가끔 <아트>를 봤다고 아는 체 하는 분들을 만나면 정말 기쁘다.



자신의 직업과 하는 일에 만족하며 사는 것이 부럽다. 스스로의 행복지수를 100% 만점에 몇 %로 보는가?

92%로 본다. 드물게 출연료를 받기도 하지만 여전히 아마추어 연기자이다. 그러나 대학로 연극인들, 심지어는 무용하는 분들도 ‘우리 쪽 사람’이라고 인정할 때 흐뭇하다. 그들과 어울릴 때가 참 마음 편하다.

앞으로의 인생 설계나 계획하고 있는 일은 없는가?

문화정책 분야에서 활동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정치권에 줄을 대지 않고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 그럴 기회가 올지는 모르겠다. 10여 년간 매학기 대학 강의를 하고 있다. 대학교수가 얼마나 좋은 직업인지를 요즈음에야 깨닫고 있다. 언젠가 대학으로 본업을 옮겨야 겠다는 생각이다.



홍승기라는 인물의 독특한 삶의 깊은 곳에는 열심히 노력하는 자의 성취기록들이 알알이 박혀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봄날 한꺼번에 눈부시게 피었다가 봄날 한꺼번에 눈부시게 피었다가 아름답게 눈송이처럼 날리는 벚꽃의 열정처럼 그는 젊은 시간을 아주 유용하게 활용하며 꿈을 법꽃같이 눈부시게 꽃피우며 살고 있다.

[인터뷰이 나우] 영화배우 활동을 해온 홍승기 변호사가 로펌을 떠나 최근 인하대학교 로스쿨 교수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국내 변호사이면서 미국 뉴욕주 변호사 자격을 가진 국제변호사, 한국 엔터테인먼트법학회 회장으로 다방면서 정력적으로 활동해온 홍승기 변호사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고대 법대 동기이면서 단짝 친구 사이로 소문나 있다.

홍승기 변호사는 현재 (재)신영균예술문화재단 감사를 비롯해 국가기관과 공기업의 고문과 위원 등 비상임 임원 자리만 10여개가 넘을 정도로 능력과 덕망 있는 법조인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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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88서울올림픽 공식영화제작전문위원, 97아시아태평양영화제 집행위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대종상 및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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