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인터뷰] 전설이 된 독도 의용수비대장 홍순칠
[그때 그 인터뷰] 전설이 된 독도 의용수비대장 홍순칠
  • 김두호
  • 승인 2009.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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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마선 타고 일본군함과 싸웠다는 무용담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독도를 두고 일본인들은 틈틈이 우리의 감정을 뒤집어 놓는다. 잊을만하면 약을 올리듯이 분노를 촉발해왔다. 최근에 그들 자신이 1951년 공포한 법령에 독도가 자신들 부속도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기한 기록내용이 밝혀져 화제의 뉴스로 떠올랐다.
사람이 살지 않던 외로운 바윗덩이로 떠있던 독도를 우리가 별로 관심있게 지키지 못하던 시절에는 하마터면 정말 일본 땅이 될 뻔도 했었다. 해방 후 어수선하던 때, 전쟁까지 일어나 나라 안이 황망할 무렵 일본은 자기네 땅이라는 지역 명칭을 새긴 표지판을 세우고 수시로 독도 주변을 기웃거렸다.

2009년 2월 7일은 이제 서울 종로 파고다공원에서 동상으로나 만날 수 있는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장이 떠난 지 23주기 되는 날이다. 울릉도 주민인 그는 1929년에 태어나 1986년 57살 되던 해에 타계했다. 사재를 털어 의용수비대를 조직해 독도를 지킨 그의 무용담은 자신의 자서전 <이 땅이 뉘 땅인데>를 통해서도 남아 있고, 독도관련 각종 공사(公私) 기록물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도문제가 고개를 내밀 때마다 떠오르는 인물이 독도 지킴이였던 홍순칠 씨이고, 일본 함정을 소총으로 격퇴한 그의 이야기가 언제나 가슴을 후련하게 한다.
그의 나이 47살 때인 1976년 5월 당뇨병 치료를 위해 서울에 체류할 때 남긴 인터뷰 내용을 되살렸다.




의용수비대를 조직한 것은 언제 어떤 동기에서 비롯된 것인가?
원산 전투에서 탱크 타고 수색하다가 부상을 입고 24살 때인 1953년 봄에 상사로 제대하고 울릉도에 돌아왔을 때였다. 그 때 할아버지(홍봉제)는 일본인들이 독도에 자기네 영토라고 쓴 표지판을 세워놓았다고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계셨다. 국방경비가 유엔군사령부 지휘하에 있었던 때라 정부의 외교적인 해결이 쉽지 않을 때였으니 민간인의 힘으로 지킬 수 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도 울릉도 원주민인가?
우리 집안은 할아버지대부터 울릉도에 살았다. 본래는 서울서 살다가 호조참판까지 지낸 6대조 때 강릉으로 낙향했고 할아버지대에서 다시 울릉도로 이주한 것이 1884년이었고 그 당시는 울릉도에 주민이 별로 없는 빈 섬이었다고 들었다. 할아버지가 1890년 독도에 나갔다가 물개잡이를 하는 일본어부들을 만나 그들을 몰아내고 그 길로 일본까지 배를 타고 가서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항의를 하고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독도 수비활동을 시작한 대원들은 모두 울릉도 주민들인가?
그렇다. 대원들은 몇 사람을 빼고는 전쟁 때 내 부하였거나 나처럼 전쟁터에서 돌아온 상이군인들이었다. 1954년 3월27일 우리는 독도에 들어갔다. 초기에는 80여명을 모았지만 일부가 독도에 상륙해서 수비활동을 시작했다. 1956년 12월 경찰에 수비임무를 인계하고 수비대원들이 경찰로 특채될 무렵 마지막 대원은 32명이었다.



주거공간이 없는 무인도에서 침식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가?
간이막사를 짓고 어느 정도 다닐 수 있는 땅이 있는 곳이지만 식수가 가장 큰 문제였다. 빗물을 받아먹고 물개를 잡아먹거나 M1소총에 꽂은 대검으로 물고기를 잡기도 했다. 식수를 해결하기 위해 궁리하다가 솥뚜껑을 뒤집어 바닷물을 끓이면 목을 축일 증류수가 나온다는 것도 발견했다.

M1소총 등 무기는 어디서 구한 것인가?
우리가 독도를 지킨다며 할아버지를 설득했더니 돈 5천만원을 마련해 주셨다. 그 돈을 가지고 부산으로 가서 군부대 주변의 암거래 시장에서 무기를 구했다. 양공주들의 도움도 컸다. 전쟁통의 부산은 돈만 있으면 군수물자를 얼마든지 살 수 있었다. 박격포 1문에 포탄 2백발, 중기관포와 경기관포 1문씩, M1소총과 카빈소총, 수류탄과 권총까지 두 트럭분을 상자에 넣어 공사장으로 가는 물건으로 위장해 포항을 거쳐 울릉도로 운반했다.

수비활동 중 일본인과 충돌한 사건은 모두 몇 건인가?
1954년 7월4일 새벽 5시쯤이었다. 내가 서도(西島)의 초소를 순시할 때 안개 속에서 거대한 물체가 보였다. 마스트에 일본기가 펄럭이는 해상자위대의 1천톤급 함정이었다. 나는 전대원을 전투태세로 집결시킨 후 나와 두 명의 대원이 결사대가 되어 1톤짜리 배에 기관총을 걸고 함정을 향해 달려 나갔다. 다른 대원들에게는 지상에서 엄호사격을 지시했다. 전쟁터의 혈기가 살아있던 때라 겁도 없이 기관포를 갈겨댔지만 철판구멍이 안 뚫렸다. 수류탄을 던지려고 배에 기어 올라갈 참에 놈들은 기관총소리에 놀라 기겁을 하고 스크류를 전속 회전시키며 달아났다. 우리 배가 거대한 함정의 스크류가 뿜어낸 산더미 같은 파도에 뒤집힐 뻔도 했었다. 그들이 사라지고 우리는 너무 감격해서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그런 사태가 몇 번 더 있었다.



3명이 탄 1톤 배와 1천톤짜리 군함의 대결이라면 새우와 고래싸움 아닌가. 또 어떤 일이 있었는가?
그로부터 1주일 뒤였다. 비슷한 새벽 시간에 하얀색의 거대한 일본 선박이 독도 앞에 정박해 있었다. 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우리 대원들이 전마선을 타고 접근해 줄사다리로 배에 올라 “손들었!”하고 외쳤다. 일본 수산학교의 실습선이었고 선원들과 교사와 학생 등 30여명이 타고 있었다. 그들을 구명선에 실어 모두 섬으로 나포한 뒤 독도가 한국령임을 주지시키고 선박 안에 있는 모든 식품물자를 압수, 3시간만에 돌려보냈다. 덕분에 그것을 보급품으로 활용해 한동안 도움이 됐다.

그 후 일본 자위대의 보복이나 위협은 없었는가?
우리는 그런 걸 예상하면서 각오를 하고 준비를 했다. 절벽 위에 국방색을 칠한 모형 위장 야포를 설치하고 상륙하는 적을 돌과 바위를 던져 통로를 차단하는 방어벽까지 마련해 더 큰 사고에 대비했다. 예상대로 8월 24일 새벽에 일본 군함 3척이 출현해 정찰을 하고 돌아 갔다. 한 달이 지난 9월 23일 새벽에는 이윽고 일본 군함 3척이 나타나 섬을 삼각으로 포위해 금방 무슨 일을 벌일듯이 위협을 주었다. 우리는 박격포를 날리고 기관총으로 위협 사격을 개시했다. 그러면서 가짜 소나무대포를 조준하는 듯이 연기를 해대자 5분쯤 뒤에 모두 기관총의 사정권밖으로 사라졌다.
그 얼마 후에 일본 자위대의 비행기 두 대가 독도 상공으로 나타났다. 절벽 꼭대기에서 폭탄 6개가 달린 것이 육안으로 보였다. 모두 참호 속에 피신시키고 나 혼자 기관총으로 대공 사격을 했다. 10분쯤 위협 비행을 하다가 일본 쪽으로 사라졌다.
함정이 사라지고 두 시간 뒤 일본 방송을 통해 ‘죽도(일본측의 독도 명칭) 위문대 1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로인해 일본 정부가 주일한국대표부(주일 한국대사관의 전신)에 우리의 무력도발을 항의했고 그것이 문제가 되어 국회국방위원회의 독도조사단(단장 김상돈) 6명이 우리 의용수비대를 조사하고 돌아갔다.

독도 수비임무가 경찰로 넘어가면서 대원들이 모두 경찰로 특채된 것인가?
경찰이 된 대원은 20명이었다. 나를 비롯한 다른 13명의 대원은 울릉도 주민으로 다시 돌아왔다.

독도를 떠났지만 지금도 독도를 고향처럼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독도란 말만 나오면 가슴이 울렁거린다. 내 마음 복판에는 수평선에 붉게 떠오르는 태양과 거친 파도소리, 갈매기 소리가 떠나지 않고 있다. 5백kg짜리 황소보다 큰 물개도 살고 있다.




홍순칠 씨는 인터뷰 당시 생활이 여유롭지 못했다. 부인 박영희 씨의 친구가 사는 서울 정릉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신병 치료를 받고 있었다.
홍순칠 씨와 관련된 일부 보도 기록 중에는 그가 조직을 만들어 독도로 향할 때는 미역 등 해산물을 체취할 목적이 있었고 독도에서 체류한 기간도 홍 씨가 밝힌 기간보다 짧다는 취재 기사가 있다. 그러나 어떤 계기에서 독도로 갔던 그는 독도에 체류한 최초의 주민이었다. 독도 방어 비화도 어디까지를 진실로 받아들여야 할지 기자가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국가에서 두차례 훈장을 주고 그의 기록이 정부기관의 문서에 남아 있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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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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