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 꼬리표 떼고 뮤지컬 연출가로 성공한 백재현
‘개그맨’ 꼬리표 떼고 뮤지컬 연출가로 성공한 백재현
  • 김선
  • 승인 2008.12.3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혼에 자살 기도까지, 돈 10원도 없던 시절” / 김선



[인터뷰365 김선] 15년 전 홍록기, 송은이, 이병진 등과 함께 <청춘스케치>라는 프로그램을 이끌며 대학시절부터 인기몰이를 하던 재주꾼 백재현. KBS 특채로 개그맨이 된 이래 탄탄대로를 걷던 그는 지난 2001년 별안간 방송을 접고 뮤지컬계로 뛰어들었다. 줄곧 꿈꿔왔던 연출에 대한 욕심에서였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차가운 무대였다. 그는 뮤지컬 제작에 손을 댄 후 순식간에 빈털터리가 됐다. 이어진 2년만의 파경과 그에 따른 극심한 스트레스로 안면근육마비와 난청까지 찾아왔다. 게다가 ‘개그맨 출신 연출가’라는 주변의 편견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며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을 그가 아니었다. 2004년 제작한 창작뮤지컬 <루나틱>이 5년간 무려 70만 명을 동원하는 대히트를 기록하며 그는 당당히 일어섰다. 또 넌버벌 퍼포먼스 <패밀리>를 연출해 2008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USA 위클리 어워드 스타상’을 수상했다.



2008년은 당신에게 최고의 해였다고 할 수 있겠다. <패밀리>로 해외에서 상도 받고 12월 30일로 2천회를 넘긴 <루나틱>의 반응도 좋고.

이런 불경기에 좋은 일들이 많이 생겨 감사할 따름이다.


명성을 뒤로 하고 홀연히 개그계를 떠났던 것이 2001년이었다. 모든 것을 버릴 만큼 뮤지컬에 대한 애착이 그렇게 컸나.

방송을 하면서 점점 허기지기 시작하더라. 방송의 구조적인 문제로 1주일마다 아이디어를 짜내야 하니 개그가 가벼울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몸개그’ 중심으로 이어졌다. 그런 날들이 계속되니 방송이라는 것에 상당한 염증이 생겼다. 예술을 배웠고 창작을 전공했던 나의 본래 역할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음도 있지만 관객에게 깨달음까지 줄 수 있는 코미디를 하고 싶었는데, 그런 코미디는 방송에서 보여주기가 쉽지 않기에 뮤지컬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렇다면 하나라도 제대로 해야 되지 않겠느냐 해서 방송을 접었던 거고.


창작을 전공했다고 했는데, 진작부터 뮤지컬에 관심이 많았나.

어렸을 때 우연히 <아가씨와 건달들>이란 뮤지컬을 보고 막연히 뮤지컬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다가 대학(서울예술대학)에서 뮤지컬 연출을 전공하게 됐다. 연출 공부를 하면서 무대에 자주 서기도 했다. 대학교 2학년 때 결국 <아가씨와 건달들>에서 주역을 맡아 나름대로 멋지게 해냈다. 하하. 그 이후 ‘싸고 잘하는 놈’으로 정평이 나서 배우로 한창 활동하게 된 거다.


그렇다면 배우 대신 개그맨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군대 가기 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기에 제대 후 생업에 봉착하게 됐다. 당시 뮤지컬 배우로 돈을 벌기란 쉽지 않았기에 취미이자 특기였던 개그로 전향하게 됐다. 대학교 때 개그동아리 회장이기도 했고. 다행히 글 쓰는 것도 좋아해 후배들과 매일같이 아이디어를 짜고 대학로에서 옴니버스 형태의 개그콘서트를 선보이게 됐다. (그가 대학로에서 기획한 개그콘서트는 그로부터 3년 후 선배 개그우먼 김미화의 도움으로 전파를 타게 된다.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첫 선을 보였던 개그콘서트는 곧 정규 프로그램으로 고정 편성됐고, 7주 만에 시청률 1위를 기록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2~3년 개그 콘서트를 하면서 상상치도 못했던 관심을 받게 됐다. 당시에는 정말 사람들이 붙잡고 놔주질 않아 길거리를 돌아다닐 수 없을 정도였으니. 모자 푹 눌러쓰고 숨어 다니고.. 행복했다.




방송활동을 접은 백재현은 <염라국의 크리스마스>(2001)를 시작으로 <세븐 템프테이션>(2002), <루나틱>(2004), <페이스오프>(2006), <비애로>(2007)등의 창작 뮤지컬을 잇따라 연출했다. 또한 지난 5월에는 2008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참가해 현지 언론으로부터 호평을 받은 익스트림 댄스뮤지컬 <스카이 워크>의 예술 감독을 맡기도 했다.



처음 제작자로 나섰을 때 주변의 반응은 어땠나.

한국 사회에 깊숙이 뿌리박힌 편견에 너무 힘들었다. 개그맨 출신 연출가에겐 곱지 않은 시선이 쏟아졌다. 다른 것도 아니라 ‘백재현 연출’이라는 타이틀이 작품에 대한 반감을 사게 한 부정적 요소였다. 오죽하면 다른 연출가가 만들었으면 더 잘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봤다. 2004년 <루나틱>의 초연 당시에는 ‘개그맨이 만든 뮤지컬은 비싼 입장료 내면서까지 볼 필요 없다’는 인식이 팽배했었다. 뮤지컬을 보고 재미있다고 말한 관객들까지도 폄하되는 분위기였으니까. 당시 공연 예매가 2~4명 정도였다.


뮤지컬 <루나틱>이 7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등 인기를 모으지 않았나. 얼마 전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도 했고. (<루나틱>은 2004년 1월 초연한 이후 장기 앙코르 공연을 이어왔다. 2007년 4월에는 대학로 루나틱 전용관을 열었으며, 올 8월에는 국내 창작 뮤지컬로는 이례적으로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에서 12번째 앙코르 공연을 가졌다.)

정말 기분이 남달랐다. 어린 시절 연출 공부를 하면서 내 작품이 언젠가 세종문화회관에 오르게 될 날을 꿈꿔왔다. 눈앞에서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다니, 너무 감사하고 행복했다. 현재의 <루나틱>이 있었던 건 어쩌면 내 스스로 작품에 대한 신뢰가 높았기 때문이다. 시기나 타이밍에서 문제일 뿐, 언젠가는 될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뮤지컬을 제작하면서 힘든 일도 많았을 텐데.

초반에 친하게 지내던 방송국 PD들한테 100만원만 꿔달라는 전화를 했다. 뮤지컬을 제작하면서 그동안 방송으로 번 돈을 모두 날렸다. 37평 아파트도 처분하는 등 수중에 10원도 없어서 쩔쩔맸으니까. PD들이 차라리 방송을 다시 시작하라고 했다. 건강상의 문제도 많았다. 스트레스로 안면 근육 마비가 왔고 난청에도 시달렸다. 결혼 2년 만에 이혼했고, 자살도 시도해봤을 만큼 심적으로 너무 고통스러웠다. 이 모든 것들이 2004년 뮤지컬 <루나틱> 제작을 할 무렵부터 1년 안에 일어난 일이다.


말 그대로 삼중고라 할 만하다. 어디론가 도망쳐도 모자랄 힘든 상황에서도 뮤지컬 제작의 끈을 놓지 않았던 이유는 뭔가.

나는 못생기고 뚱뚱하지만 뮤지컬이 세련되고 품위 있어 보이잖나. 하하. 예술이 이 사회를 반영하는 언어라면, 뮤지컬은 그와는 또 다른 세련된 언어다. 예술뿐 아니라 춤, 연기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으니까. 예술학도 출신으로 가장 세련된 언어인 뮤지컬을 버릴 수 없었다. 한 가정의 남자이기 전에 예술학도의 길을 걷고 싶었다.


지금까지 역경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나를 믿고, 작품을 나보다 더 사랑해준 배우들과 후배들, 스탭들 덕분이다. 돈에 계속 쪼들릴 때는 내 작품이 원망스러울 때도 많았다. 순전히 백재현과 작품을 끝까지 믿어준 이들 덕분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지금도 빚이 있나. 예전에 비해 재정적으로 좀 나아졌을 것도 같은데.

난 아직도 월세집에 살고 있다. 워낙 창작 뮤지컬에 돈이 많이 들어간다. 들어온 돈보다 나가는 돈이 배로 많다고 보면 된다. 한마디로 빚잔치다. 그래도 예전에는 끝이 안 보이는 빚이었다면 지금은 끝이 보인다. 또 다른 빚을 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빚이랄까. 뮤지컬을 종합 예술이라고 하잖나. 뮤지컬 한편 제작할 때 몇 억씩 들어가는 거 보면 ‘다른 장사를 하는 게 낫지’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하하.


방송 했던 시절이 그립지는 않나.

물론이다. 인간은 한 가지 명제로만 살 수 없지 않나. 돈이 절실한 때가 오면 방송에 대한 그리움이 들다가도, 관객들이 뮤지컬을 보고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 뮤지컬에 더 애착이 간다. 방송을 떠난 이후 이런저런 고민이 들곤 하지만 그래도 역시 뮤지컬이 우선이다.



현재 마샬 아츠 태권 퍼포먼스 <패밀리>의 연출을 맡고 있다. <패밀리>배우들과 함께 합숙한다던데.

밥도 먹이고 빨래도 해준다. 인생이 연극이라고 하지 않나. 후배들에게 인생을 많이 가르쳐 주고 싶다. 내가 후배들에게 혹독한 편이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하거나 근면 성실하지 않으면 가차 없이 혼을 낸다. 사실 성공하는 것은 쉽다. 100명 중 99명이 하지 않는 방식으로만 살면 된다. 99명이 아침 일찍 일어나기 싫어할 때 일찍 일어나면 되는 거다. 난 자동차에 기름을 가득 넣어본 적이 없다. 왜냐고? 기름을 넣는 동안 내가 얼마를 내야 되는지 몰라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아깝고, 기름을 넣고 카드 긁고 받고 하는 2~3분이란 시간이 너무 아깝다. 항상 정해진 가격만큼만 넣는다.


원래 성격이 그렇게 계획적인가?

보기와는 달리 치밀하고 예민해서 주변에서 깜짝 놀랄 때가 많다.


당신은 유독 창작뮤지컬만을 고집해왔다. 대형 라이선스뮤지컬에 대한 욕심도 가져봤을 법 한데.

창작만이 예술이다. 해외에서 이미 인정받은 유명 작품을 수입해 공연을 하는 것은 진정한 연출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연출가는 할 말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들고 내 색깔을 담아 관객에게 무엇을 얘기해 주고 싶은 것인지 표현해내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본다.


7년간 연출 하면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을 꼽자면 언제인가.

매일이 뿌듯하다. 방송하면서 알지 못했던 행복을 느끼고 있다. 방송할 때는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다. 지금은 매일 자발적으로 편하게 일하고 있다.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더 행복한 것 같다. 지금도 나는 뮤지컬 배우와 뮤지컬 연출로 유명해진 삶을 사는 게 더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개그맨이란 꼬리표가 여전히 신경이 쓰이지 않는가.

개그맨도 엄연히 내가 했던 일 아닌가. 별로 신경 안 쓴다.


연출가로서 꼭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면.

뮤지컬 역수출이다. 현재 세계 공연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미국 라스베이거스 최고의 쇼가 부럽지 않은 공연을 만들어 수출하고 싶다. 그래서 한국의 태권도를 소재로 한 <패밀리>를 기획했던 것이다. <패밀리>는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탔지만, 라스베이거스에 올릴 만한 쇼가 되기 위해선 10년 이상 장기투자를 해야 한다. <패밀리>는 지난 10월 미국 공연을 위해 브로드웨이 극장까지 대관했다. 하지만 공연을 뒷받침해 줄 제대로 된 무대 메커니즘이 부족했다. 세계적 히트쇼인 <태양의 서커스>는 20년이 걸려 완성한 거다. 나는 10년 내에 그들과 겨룰 쇼를 세계 시장에 내놓을 계획이다. <패밀리>는 세계시장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패밀리>가 가지고 있는 한국적 요소와 화려한 퍼포먼스, 그리고 무대 매커니즘이 결합된다면 최고의 공연이 될 것이다. 한국에서는 2009년 즈음 최대한 빨리 선보일 예정이다. 그리고 2~3년 내에 뉴욕에 진출해 그로부터 10년 안에 라스베이거스 무대에 올릴 포부를 갖고 있다. <루나틱>도 역수출 계획이 있다. 현재 영작 중에 있으며, 미국 배우들로 오디션을 치러 ‘미국판 루나틱’으로 미국에 올릴 예정이다.



어떤 제작자로 기억되고 싶나.

주변에서 나더러 뮤지컬배우냐 제작자냐 아니면 개그맨이냐고 많이들 물어본다. 나는 영화나 드라마 등 장르를 불문하고 ‘코미디 아티스트’가 되는 것이 꿈이고 희망이다. 코미디를 업그레이드 시키고, 코미디라는 요소를 넣을 수 있는 모든 작품이라면 제작할 것이다.







기사 뒷 이야기가 궁금하세요? 인터뷰365 편집실 블로그



관심가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