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는 영화평론가 1세대 김종원
시를 쓰는 영화평론가 1세대 김종원
  • 김두호
  • 승인 2008.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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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존경하는 인물’ 영화 부문 5위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최근 시사주간지 시사저널과 미디어리서치가 공동으로 조사한 30개 분야의 ‘존경받는 인물’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영화부문에서 배우 안성기가 1위, 다음은 임권택 감독, 유현목 감독,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공동집행위원장 순이고, 이어서 공동 5위로 영화평론가 김종원 씨와 이만희 이준익 이창동 봉준호 감독의 이름이 포함돼 있다.

김종원 영화평론가(71)는 작고한 이영일 평론가와 함께 1960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의 산파역을 한 영화평단의 1세대로 지금까지 40여년 넘게 정정한 현역으로 남아 활동 중이다. 체구는 작지만 별나게 짙은 눈썹에 형형한 눈빛이 무인의 기백을 느끼게도 하는 그는 검(劍) 대신 펜을 잡고 인생의 대부분을 영화평단에서 살아왔다.

 

그는 해방 후 현대 한국영화의 살아 있는 백과사전이며 영화평론가로 이름이 알려져 있으나 본인은 직업의 비중을 시인 쪽에 오히려 더 많이 두고 산다. 고향인 제주에서 자라 제주일중 3학년 때 국내의 대표적인 학생잡지 <학원> 창간호 문예작품에 응모, 조지훈 시인이 그의 시 <국화는 피어도>를 당선 시로 뽑았고, 1959년에는 월간 사상계 시 부문 추천을 받아 줄곧 시작활동도 멈추지 않았다.

 

한때 영화에 심취했던 이어령 문학평론가는 김종원 영화평론집 <영상시대의 우화>(1985년 발행) 책머리에 ‘뛰어난 직관력과 풍부한 서정적인 정감으로 쓰여진 그의 영화 이야기는 마법의 양탄자처럼 우리를 태우고 영화의 세계로 안내한다’고 소개했다.

창밖으로 한 해의 마지막 풍경들이 분주하게 돌아가는 대학로 찻집에서 영화와 더불어 살며 고희를 넘어선 김종원 영화평론가 겸 시인을 만났다. 한번 풀어 놓기 시작한 그의 지난 이야기는 깊은 밤까지 시간의 흐름을 잊게 했다.

 

영화관련 세 번째 저서인 <영상시대의 우화>에서 영화평에 관심을 갖게 된 시기를 ‘감수성이 예민한 20대의 발기된 혼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는 무서운 회오리바람’으로 표현하셨더군요.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시기는 언제부터입니까?

일곱 살 때 고향인 제주의 양철지붕 극장에서 일제의 국책영화 <마라이노 하리마오 = 말레이의 호랑이>(1943년)라는 영화를 처음 구경했어요. 개구멍을 통해 변소로 숨어들어가서 뜻도 모르는 영화를 신기하게 구경하며 영화를 동경하게 되었지만, 어릴 때 꿈은 시인이었습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동시를 쓰기 시작해 1952년 제주중학 2학년 때 학원사가 창간호를 준비하며 전국 학생문예 작품을 응모했지요. 아, 잊을 수 없는 순간이 그때 찾아왔어요. 제주 부두로 달려가 목포에서 책을 싣고 오는 연락선에서 학원 두번째 호를 펼쳐드는 순간 조지훈 선생의 선평(選評)과 함께 내가 응모한 <국화는 피어도>가 당선작으로 실려 있었으니 흥분해서 혼절이라도 할 뻔했지요.

 

어떤 내용의 시였습니까?

‘국화가 피기까지는 / 고향에 가자고 했다 / 노을이 고웁게 물드는 / 바닷가 언덕에 누워 /휘파람을 불면서 소년은 생각한다...’로 시작하는 시인데 4.3사건으로 집안이 어수선할 때 목포로 유학 가 목포상업학교(현재의 목포상고)를 다니며 고향을 그리워했던 기억을 살려 쓴 시였어요. 그 때 당선 동기가 정규남(목포중학) 시인과 최해붕(영덕중학) 입니다. 이듬해에 유경환 이제하 황동규 마종기 시인들이 문학소년들로 학원을 거쳐나갔지요.

6.25전쟁을 만나 영암으로 피난갔지만 바다 저편의 두고 온 고향을 잠시도 잊지 못해 유달산을 한라산으로 느끼며 향수를 달랬습니다.

내가 자라던 시절의 제주섬은 거친 광풍의 땅이었지요. 선비가문을 이어온 조용한 한학자 집안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4.3 사건과 6.25 전쟁이 터져 토벌군에 훈련군과 피난민까지 몰려든, 아수라장 같은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그래도 글씨 잘 쓰고 그림 잘 그리고 운동도 잘한다고 하여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고 ‘학원’지 덕분에 전국에서 팬레터도 많이 받았습니다.

 

 

 

 

글씨 그림 운동도 잘하셨다고요?

크게 자랑할 만한 특기는 아니지만 좋아하는 건 다채롭게 모두 즐기며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장을 내가 쓴 붓글씨로 만들어 받았어요. 그 후 철필 글씨를 등사기로 밀어서 사용하던 시절이라 중학 시절 한때 필경사로 짭짤하게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운동도 중학 때는 축구(골키퍼), 고교 때는 배구선수로 전국 도대항 대표선수로도 뛰어 봤어요. 고3때는 일본에 계시던 아버지가 보내주신 글러브 덕인지 야구 포수로 뛰기도 했지요. 참, 중학 때는 좋아하는 여학생이 보고 싶어서 탁구에 빠진 적도 있어요.

그림도 초등학생 때 축구팀 마크를 도안한 것을 시작으로 잡지 편집자로 활동할 때 내손으로 컷이나 삽화 등 일러스트를 많이 처리했습니다. 이어령 문학 평론가의 첫 평론집 그림을 맡아 그 분은 그림도 내 직업인줄 알고 계세요. 하하하.

 

시와 영화는 통하는 게 많을 것도 같습니다.

정작 시인이 된 뒤에는 시보다 오히려 영화에 매달려 살았습니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시작(詩作)의 고통과 달리 영화적 상념들, 이를테면 르네 크렐의 <인생유전>, 캐롤 리드의 <심야의 탈주> 같은 오묘한 영상언어들에 매료되면서 시의 이미지를 편안하게 스크린 영상으로 연결시켰습니다. 표현 방식과 장르가 다르지만 느낌의 언어를 논리적으로 조직하고 표현하는 일은 시와 영화가 다를 게 없습니다. 내가 쓴 시중에는 ‘ET가 머물다 간 마을’ ‘나운규’ ‘분홍신’ ‘북치는 소년’ 등 영화를 소재로 한 것도 많습니다.

 

영화평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신 때는 언제부터입니까?

시는 1957년부터 59년 문학예술지와 사상계를 통해서 추천을 받았고 영화평론은 1959년 윤봉춘 고문 아래 하유상 씨가 만들던 시나리오 지를 통해 영화작품론 <금지된 장난과 10대의 반항 / 현실과 앙가주망(사회참여)의 계곡>이라는 주제의 글로 시작했어요. 그로부터 잡지와 신문에 평을 쓰기도 하고 1965년에는 학원사에 공채 사원으로 입사해 학원과 주부생활 지의 편집차장과 시인 김규동 선생이 경영하던 영화잡지의 편집장으로 일하며 부지런히 영화평을 썼습니다. ‘좋은영화 보기운동’같은 캠페인도 처음으로 시작하며 절반은 영화인이 된 셈이었지요. 그러다가 조선일보기자 시절인 1975년 자유언론수호 파동 때 해직되면서 영화사에서도 직장생활을 한 때가 있었지요.

 

영화평론가협회 초대 총무간사를 맡으셨는데 평론단체의 태동기 일화를 듣고 싶습니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의 전신인 한국영화비평가협회가 1960년 7월6일 서울 명동의 ‘대홍운’이라는 중국집에서 창립이 되었지요. 타계하신 이영일 씨가 대표간사, 내가 총무, 중앙대교수를 역임한 김정옥 씨가 기획간사를 맡았어요. 초기회원은 한양대의 노만, 프로듀서 출신의 이진형, 기자출신의 최성규 허창 씨와 변인식 정우영 시인 등 9명이었어요. 그런데 5.16과 함께 정부에 의해 해체되었다가 1965년에 그때의 멤버들이 모여 다시 창립한 것이 현재의 평론가협회입니다.

그러나 격랑의 시대를 함께 한 영화평론가 모임의 뿌리를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어요. 6.25전쟁 중인 1950년 9월 임시수도 부산에서 서울의 피난민이었던 오종식 오영진 김소동 허백년 이진섭 유두연 황영빈 등 언론인과 영화인들이 영화평론가라는 이름으로 모임을 만들기도 했고 1957년에는 호현찬 임영 이영일 신우식 이명원 김진찬 씨 등 주로 신문의 영화담당 기자들이 시네팬 클럽을 발족시킨 일도 있습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중년이후의 팬들은 원로 영화평론가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초기 회원들의 근황은 알고 계시는지요?

앞서 거명한 분 중에 허백년 이진섭 이영일 허창 이명원 김진찬 안병섭 황운헌 씨 등 많은 분들이 고인이 되셨습니다.

 

오래전부터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고 계시지요?

겸임교수라는 이름이지만 강사를 겨우 면한 직책입니다. 인하대에서 1988년부터 16년간 강의를 하며 1만2천여 전교생을 대상으로 대강당에서 매주 금요영화감상회를 마련해 보람이 있었습니다. 나의 작품 특강에 곁들여 보여주는 영화는 모두 우리 영화사에 기록할만한 작품들이었고 상영 때마다 출연배우와 감독들이 나와서 출연 및 연출 일화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아마도 200회는 했던 것 같아요.

청주대는 1988년부터 영화비평과 시나리오 작법, 한국영화사를 강의하고 나의 모교인 동국대에서는 석박사 과정 학생들에게 한국영화사 강의를 하고 있어요.

 

 

 

 

비평분야 중 영화는 민감한 상업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작품에 대한 평가가 혹평이나 부정적일 때 제작 스태프의 항의나 반발을 살 때도 많습니다. 평론가로 겪어야 하는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은데 비교적 그런 소문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평론가로 양식에 반하는 작품 평가는 없었습니까?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혹평을 쓰는 괴로움보다 아예 작품평을 포기하는 경우들이 있는 곳도 영화평단일 것입니다. 때로는 신문의 고정 평란에 기고한 내 평을 담당기자가 두루뭉술하게 바꿔놓아 항의를 한 적도 많아요. 혹평을 심하게 하면 광고수주에 지장이 따른다는 거죠. 그래서 혹평을 쓰기는 괴롭지만 우회적으로 문제점을 지적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도 아닌 걸 좋다고 하는 식의 거짓말은 독자들을 우롱하는 처사이니 비평의 기본 룰은 지켜야지요. 영화평은 첫째 독자에게 정보전달의 의미, 둘째는 작품으로서의 가치판단, 셋째는 연출 연기 촬영 등 참여 스태프들이 어떻게 메시지를 전달하는지의 분석을 토대로 저널리즘의 용광로 속에 녹여 만드는 작업입니다. 결국 주관적인 시각이기 때문에 오해를 살 때가 많아 용어와 문장 하나하나에 신경이 쓰입니다.

 

우리 영화사에 좋은 연기자로 기록할 만한 연기자는 누구누구라고 생각하세요?

좋아하는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요. 나는 1960년대에 활동한 성격배우 김승호 허장강, 여배우로 한국적인 아내상의 최은희와 어머니상의 황정순, <만추>의 명연기자 문정숙, 아역 출신으로 유일하게 성공한 안성기, <올드보이> <취화선>의 연기자 최민식, <씨받이>의 강수연, <박화사탕>의 설경구, 깊은 내면의 연기를 끈끈하게 잘 끌어내는 <밀양>의 전도연 등이 우선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평생 영화비평가의 시선으로 국내외 영화를 접하며 꼭 권하고 싶은 명화들을 꼽는다면 어떤 작품들입니까?

연대별 구분 없이 생각나는 대로 밝히면 우리 영화로는 이강천의 <피아골>, 유현목의 <오발탄>, 신상옥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김기영의 <하녀>, 이만희의 <만추>, 임권택의 <서편제>, 배창호의 <깊고 푸른밤>, 김수용의 <안개>, 이성구의 <장군의 수염>, 이장호의 <바보선언>,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 김호선의 <영자의 전성시대>, 허진호의 <8월의 크리스마스>, 배용균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이창동의 <오아시스> 등이 떠오릅니다.

외화는 쟝 가방 주연의 <망향>,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앤터니 퀸 주연의 <길>, 말론 브란도 주연의 <대부 1편>, 그리고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시네마천국>과 레오까락스 감독의 <퐁네프의 연인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ET]등이 내가 꼽을 수 있는, 잊을 수 없는 작품들입니다.

 

문학세계에 영향을 준 인물이 있는지요?

있습니다. 6.25 때 제주로 피난 온 <백치 아다다>의 작가 계용묵 선생을 만나 문학 수업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문장은 물론 토씨 하나 틀려서는 안 되는 완벽주의 표현 노력도 그 분에게서 배웠습니다.

 

 

 

 

비평의 세계에는 어려운 일 못지않게 희열을 느끼실 때도 있지 않으신지요?

물론 있습니다. 이황림 감독이 아직도 어린 티를 벗어나지 못한 무명의 신인 박중훈과 김혜수를 출연시켜 <깜보>라는 영화를 내놓았을 때 나는 박중훈을 두고 안성기의 대를 이을 만한 재목으로 극찬을 했습니다. 서슴없이 큰 배우가 될 만한 유망배우로 찬사를 늘어놓고 난 뒤 늘 그가 나오면 걱정이 따랐습니다. 빛을 못보고 사라지면 나의 안목이나 발견이 허사가 되는 일이었으니 후회도 되더군요. 그런데 1988년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를 보고 무릎을 기분 좋게 탁 쳤던 일이 있습니다. 그는 분명 좋은 연기자로 성숙해 있었거든요. 더욱 기분 좋은 일은 어느 자리에서 만났을 때 “김종원 선생님이 일찍 나의 장래를 예견하고 발견한 분”이라고 기억해줄 때였습니다.

또 최근에 일본의 온천휴양 도시 뱃푸에서 개최된 ‘한일 차세대 교류 영화제’에 초청받아 일제강점 말기에 제작된 안석영 감독의 <지원병>과 양주남 감독의 <미몽>과 관련한 주제발표와 해설을 했어요. 그때 나의 어린 시절 영화에 눈이 뜨게 한 일제 강점기를 생각하며, 평론가가 되어 우리 영화를 당당하게 그들 앞에서 자랑하게 된 묘한 감회에 젖었습니다. 작년에도 오이타에서 일제 강점기에 제작된 우리 감독들의 영화 <반도의 봄>(1941년 이병일 감독), <집없는 천사>(1941년 최인규 감독), <지원병>(1941년 안석영 감독), <조선해협>(1943년 박기채 감독) 네 편을 그들 스스로 찾아내 ‘발굴 코리아 과거 영화 상영회’라는 이름으로 영화제를 개최해 나에게 해설을 맡겼어요.

이제는 영화도 문화재로 선정이 됩니다. 작년 윤용규 감독이 1949년에 만든 <마음의 고향>과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 등 여덟 편이 근대문화재로 선정됐는데, 선정위원 으로 참여한 데에 보람을 느낍니다.

 

 

제주대 교수였던 후배 문충성 시인이 김종원 시집 <광화문행>의 발문에 쓴 글을 일부 옮긴다.

 

<형은 50년대 제주섬에서 일류로 꼽던 제주북초등학교 제주일중 오현고교를 다녔고 나는 형의 1년 후배가 된다. 초 중 고교 시절의 형은 문학소년으로 제주섬의 유일한 존재였다. 4.3사건이 참담하던 시대, 6.25동란...이런 참담한 시대에 우리의 중학시절은 문학에서 꿈을 찾았고 깊숙이 빠져들어갔다......자그마한 키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형은 문학분야 말고도 그림이나 붓글씨까지 예술이라면 음악, 연극까지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었다. 어째서 영화배우는 안해보셨는지 하는 생각이 들지만, 뒤에 영화평론가가 된 속사정도 그 때문인듯 내게는 이해가 된다...>

 

김종원 평론가는 달변가이기도 하다. 말이 많은 것이 아니라 설득력 있는 언변을 가지고 있다. 그의 주장은 언제나 논리를 앞세워 토론이 있는 자리에서는 늘 주목을 받는다. 그는 재주가 많아 어느 한 곳에서 오래 머물지 못하고 평생을 자유인으로 사는지도 모른다.


 

 

 

 

끝으로 고향과 한학자인 조부를 그리워하며 고향말투로 쓴 김종원 시인의 <봉개동>(奉蓋洞)이라는 제목의 시 한편을 소개한다.

 

 

봉개동

 

타버려싱게*

아홉 살 적 풋대추 찾아 기어오르던

안마당의 대추나무도

다 타버리고 어싱게*

 

날만 새면 거르지 않던 동네 식개*

영장집* 가마솥도

인젠 찾아 볼 수 어싱게

 

가을이면 갈중이* 풋감 물들이고

겨울 한낮엔

푹푹 내려쌓인 돌담 눈길로

키보다 큰 꼬리연 입김처럼 날리던

중산부락 나의 봉아오름*

 

할아버지는 오척 단구

술담배 입도 못 대신 대쪽 같은 선비

집 한 채 다타고 잿더미만 남던

사삼 사건에도

눈시울 한번 안적시더니

 

안방 다락

이불 베개 삼던 한서적(漢書籍) 다타고

불꽃되어 날을 땐

손주처럼 발을 구르신

김해 김씨 문중의 어른

아, 그 법 없이도 살 수 있던

내 할아버지는

지금 봉아오름을 떠나고 어싱게

 

타버려싱게

글만 알고 곡식 모르던

툇마루의 버선발

꿈심던 뒷마당의 죽순도

다 타 버리고 어싱게



*타버려싱게(타버렸네) / 어싱게(없네) / 식개(제사) / 영장집(초상집) /
갈중이(갈옷) / 봉아오름(봉개동 산 이름)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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