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인터뷰] 별들의 축제가 된 배우 황해의 회갑연
[그때 그 인터뷰] 별들의 축제가 된 배우 황해의 회갑연
  • 김두호
  • 승인 2008.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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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전영록에 이어 손녀도 가수활동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본명이 전홍구(全弘璆)인 황해(黃海)는 가수이면서 배우인 전영록의 아버지이고 원로가수 백설희의 부군이다. 최근에는 황해의 손녀 보람 양이 가수활동을 시작해 연예가문 3대의 명맥이 이어졌다. 보람 양은 오래전 이혼한 부모 전영록과 탤런트 이미영 사이에 태어났다.


키가 작은 사람을 ‘5척단구’로 일컫는데, 황해는 153cm의 아주 작은 키였지만 몸집이 차돌처럼 단단하고 민첩해 액션배우로 이름을 떨쳤다. 1949년 <성벽을 뚫고>라는 영화로 배우활동을 시작해 <청춘 쌍곡선> <5인의 해병> <두남매> <지평선> <김약국의 딸들> <독짓는 늙은이> <도망자> <그들도 우리처럼> <독불장군> 등 1980년대까지 3백여 편의 주조연 작품을 남겼다.


황해는 만85세 생일을 한 달 앞둔 2005년 겨울에 타계했다. 그와 생전의 인터뷰는 1983년 봄 서울 필동에 있는 한국의 집에서 성대하게 치른 회갑잔치 자리에서였다. 요즘은 회갑을 가볍게 넘기고 고희연을 잔치로 생각하지만 당시는 회갑 날에 큰 상을 차리고 손님을 초대했다. 김진규 박암 장동휘 박노식 최무룡 노경희 석금성 황정순 한은진 신카나리아...지금은 대부분 유명을 달리했지만 은막과 가요계의 기라성 같은 큰 별들이 황해의 회갑자리에 운집해 그야말로 별들의 축배 향연이 벌어졌다.


부인 백설희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옛 동료들의 손을 잡고 포옹하는 황해의 표정은 감회에 젖어 두 눈에 이슬이 맺히기도 했다. 감수성이 예민해 금방 분위기에 동화되고 느낌을 쉽게 드러내는 배우들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자리였다. 건축기사인 장남(전영남)과 차남인 영록, 출가한 딸(옥)과 서울예대에 다니던 막내(진영) 등 3남1녀가 금반지 하나씩을 아버지 황해의 손가락에 끼우며 축가를 불러줄 때 하객들은 후회 없이 은막에 바친 주인공의 회갑연을 쉬지 않고 박수로 축하해주었다.



영화계 어른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 같군요.

옛날부터 우리 영화배우들의 가장 큰 자랑거리가 인정과 의리 아닙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선후배가 한마음이 됩니다. 좋은 일이든 굿은 일이든.


배우로 살아오신 보람을 오늘따라 더욱더 깊이 느끼실 것 같습니다. 평생 배우는 아무나 못하는 거라고도 합니다.

처음 기자에게 고백하는 이야기입니다만 난 사실 처음부터 배우가 된 것이 아닙니다. 경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우편집배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어요. 그게 직업으로 내 몸에 안 맞아 오래하지 못하고 새로 구한 직장이 미쯔고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의 전신) 점원이었지요. 그러다가 내가 노래를 잘 부르고 놀 때마다 흥을 잘 돋우자 주변에서 가극단에 들어가라고 등을 떠밀어서 연예인이 된 거랍니다.


그럼 연기보다 노래를 먼저 시작한 건가요?

노래도 부르고 연기도 했어요. 일제강점기 시절 소문난 성보가극단을 찾아가 입단을 했는데 그때는 가극단에 노래도 부르고 연기도 하는 만능 재주꾼들이 모여 있었어요. 나중에 국도극장으로 바뀐 극단인데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가수 신카나리아 현인 박단마 전방일 황정자 등 우리 기요무대의 선구자들이었지요.


부인(백설희)도 그때 만나신 거군요.

한참 뒤였지요. 1943년 말 가극단 멤버들과 신의주행 기차를 타고 중국으로 유랑공연을 떠났어요. 고생하며 떠돌아다녀도 그곳이 어디든 박수를 받으면 마냥 우쭐하고 행복했던 시절이었어요. 해방이 되어 돌아올 때까지 만주일대에서 상하이까지 중국대륙을 유전하며 떠돌이 가극단의 가수 겸 연기자로 활동했어요.


그럼 백 여사는 언제 만나셨어요?

아하, 귀국해서 바로 그 사람을 만났어요. 처음에는 무대 뒤켠으로 집사람을 불러내 동료 단원들의 눈을 피해가며 마음을 주고받았습니다. 연애는 소문나면 아무리 선남선녀라도 곱게 보지 않는 시절이었지요. 숨바꼭질 연애로 눈을 맞추다가 뜨거워져 결혼식도 안올리고 동거생활부터 시작했으니 용감했지요. 사실 내가 집사람을 사귈 때는 새별이라는 악극단의 단장으로 기반을 잡았을 때였으니 좀 당당했지요.


그럼 혹시 아직까지 결혼식은 안 올린 건가요?

하하하. 동거생활 15년 만에 연극인 박진(작고) 선생 주례로 서울 백련사에서 결혼식을 올렸답니다.


두 분이 별 소문 없이 다복하게 살아오셨는데 그렇게 잡음이 안 난 연예인 가정이 많지 않습니다. 혹시 위기는 없었습니까?

에이, 위기 없는 가정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도 사람인데 갈등이 있었지요. 그러나 서로 감정이 대립하면 나는 세 번을 참는 습관이 있어요. 그것도 안되면 열 번을 참아야 한다고 다짐해요. 그래도 안되면 두 사람 중 누군가가 지방 공연을 떠나요. 한동안 떨어져 있으면 다시 마음이 가라앉고 용서를 하게 됩니다. 우리 집 현관에는 인내 노력 창조라는 세 마디의 가훈을 걸어두고 있습니다. 그게 내 인생의 길잡이였고 자식들에게 가르쳐준 아버지의 정신입니다.


고향은 강원도이시지요?

강원도 고성 최북단인데 아버지가 정어리 기름공장을 경영해 제법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려 홀어머니 모시고 어릴 때부터 서울서 살았어요.



출연하신 영화가 대충 2백여 편이 넘으시지요?

3백여 편이 넘을 겁니다.


사춘기 때 <5인의 해병>을 매우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그 많은 작품 중 어떤 작품을 자신 있게 내세우고 싶으세요?

배우에게 출연 작품이 많다는 소리보다 좋은 작품이 많다는 소리가 듣기 좋은 말이지요. 그냥 기억하고 싶은 영화는 <독짓는 늙은이> <심봤다> 같이 힘들게 하고 욕심을 많이 부린 작품들입니다. 비록 조연 배역이 대부분이지만 마음에 드는 역할을 맡으면 출연 장면이 많지 않아도 행복해집니다. 촬영이 끝나도 오래도록 느낌이 남아 혼자 대사를 반복하며 연기 희열을 맛볼 때도 있답니다.


주로 시대물이나 액션영화를 많이 남기셨지요?

내 배역은 액션물보다 향토색 짙은 한국인의 토속적인 표정을 보여주는 배역이 맞는 것 같아요. 나도 그런 역을 하면 보람을 느낍니다. 젊을 때는 어떤 배역이든 다 열심히 하면 되는 거로 생각해 위험한 연기도 대역 없이 몸을 날렸어요. 얼마 전에는 20여년 전 전쟁영화를 찍다가 몸에 박힌 파편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어요. 아프지 않으니 잊어버리고 산 것이지요.


회갑을 맞아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며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지금도 움직이지 않으면 몸에 병이 나는 성격입니다. 자가용 차 몰지 않고 이 나이에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는 것도 젊음을 지키기 위한 욕심에서지요. 나는 평생 돈 욕심은 안 부렸어요. 일에 욕심은 많았지만 돈 많이 받겠다는 생각은 안해 봤어요. 물욕이 많으면 고생도 그만큼 많이 하고 인생의 굴곡도 더 많이 겪는다고 생각해요. 나는 서울 보문동에 있는 작은 집을 30년째 살고 있어요.



그는 회갑연이 끝나고 하객들이 물러간 빈자리를 바라보며 독백처럼 말했다.


“나보다 먼저 떠난 내 단짝친구 허장강이 몹시 그립네요. 언젠가 그 친구를 하늘에서나 만나겠지요.”






결국 건강하게 보이던 황해도 그로부터 22년 후 떠났다. 아마도 지금은 그가 그리워하던 허장강을 다시 만나 우정을 꽃피우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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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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