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 어깨 들썩이게 하는 글로벌 광대 김덕수
세계인 어깨 들썩이게 하는 글로벌 광대 김덕수
  • 유성희
  • 승인 2008.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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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빌보드차트에 우리 리듬이 올라갈 수도” / 유성희



[인터뷰365 유성희] 종로구 사직동에 위치한 광화문 아트홀 지하 1층 한울림 예술단 공연장. 공연이 없는 월요일 텅 빈 무대 뒤편에서 단단한 풍채를 지닌 김덕수가 등장했다. 김덕수는 지난 9월 9일부터 시작된 ‘김덕수의 전통연희상설극장 ‘판’ 공연으로 하루도 쉴 틈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김덕수는 1959년 불과 일곱 살의 나이에 ‘전국농악경연대회’에 참가해 대통령상을 수상, 일찍부터 장구의 신동으로 불리게 됐다. 여러 명인들로부터 남사당 전 종목을 사사했고 아버지의 남사당패를 따라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다. 1964년 남사당패가 해체된 이후 김덕수는 최초로 사물놀이를 만들어 현재까지 전세계에 한국의 신명나는 리듬을 전파하고 있다.
바쁜 시간을 잠시 쪼개 인터뷰에 응한 김덕수와 아직은 비어있는 극장 객석에 나란히 앉았다.


여전히 공연으로 바쁘시군요.
평생 한 일이 장구치고 꽹과리 친 일뿐이니까.(웃음) 많이 바쁜 것 같아도 의미는 간단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른들에게 배운 우리 것을 기본으로 하는 공연, 그리고 제가 배운 것을 후학들에게 전하기 위한 교육입니다. 저는 어딘가에서든 그 두 가지를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50년 동안 크고 작은 공연을 해오셨습니다. 남사당 시절부터 기억나는 일들이 많을 걸로 압니다.
남사당 공연을 다니며 걸어서 이동하던 시절부터 털털대는 쓰리코터로 이동하며 변화하는 시대를 느끼며 유랑을 다녔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실시되면서부터 우리나라가 한창 여러 가지 개발제품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어요. 그때 양은솥이 처음 출시됐는데, 난 아직까지도 잊어먹지도 않았어요. 브랜드 이름이 돼지표 양은솥이었어요. 치약과 밀가루가 처음 나오던 시기였고, 일종의 기획상품 이벤트라고 할까요?(웃음) 그 시절에 김덕수가 있었다고 생각해보세요. 4.19가 나던 해 북아현동에 있었는데, 서울신문사가 불타는 현장을 본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나라의 사정을 잘 알지 못했던 코흘리개 시절부터 남사당 현장에 있으면서 시대의 변화 속에 항상 있었던 겁니다.

어린 시절 남사당 속에서 배운 것은 무엇입니까?
예인들의 정신이었죠. 더군다나 제가 남사당패가 된 것은 한국전쟁을 겪은 이후부터였으니 그때가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을 시기 아니겠어요? 배 곯지 않기 위해 먹고 사는 게 당장의 문제였던 때였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에 어른들에게 배웠던 실기적인 기술뿐만 아니라 예인들의 기본정신, 예인의 길이 그때 다 제 몸속에 각인이 됐던 것 같아요. 그 버팀목으로 저는 현재 젊은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고요. 우리 역사의 전통적 문화계승은 지난 몇천년 동안 이러한 교육의 반복 아니었을까요?

사물놀이라 이름붙여진 것은 1978년 공간극장에서 이뤄진 공연 이후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시 얘기를 해주십시오.
1970년대 .당시 박종철, 이한열 등 대학생들이 데모로 인해 죽게 되면서 예인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의식이 무엇일까 생각했죠. 연우무대에서 ‘바람맞이’ 공연을 했는데 큰 호응을 얻으며 연세대 노천극장으로까지 이어지게 됐죠. 물고문, 불고문을 타악기 소리로 표현했는데 잡아가지는 않더라고요.



사물놀이가 현대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이라 보십니까?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우리 부모님 세대들에게는 어려웠던 시절의 가난이 DNA처럼 박혀 있을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생활의 근본이 돕고 나누는 온돌방 같은 따뜻한 인정 위에 피어났어요. 옛날에는 거지가 밥을 얻으러 와도 먹다 남은 거 퍼주는 게 아니었어요. 제 기억에도 저희집에 그분들이 오시면 김치와 밥을 주더라도 상에 차려주고 대접했어요. 이처럼 더불어 사는 우리 사회의 좋은 문화적 정서가 사라지고 있어요. 현재 이기주의가 만연한 사회 속에서 이제는 뒤돌아 생각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잊었던 우리의 옛 문화, 정신을 되찾게 되면 선진국형의 사회, 문화강국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요즘 집들 리모델링 하는 거 보면 나무로 기둥세우고 흙을 발랐던 옛날의 문화로 다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건강 때문입니다. 전통문화, 전통예술 역시 우리의 자연입니다.

사물놀이를 해오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개성에서 평양까지 운행되는 특별열차를 타고 북한에 공연을 갔었어요. 도착하니 제가 아는 사람들이 사물놀이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일본에서 제가 사물놀이를 가르쳤던 조총련 식구들이었습니다. 근데 조총련 민단이 어딨겠습니까. 꽹과리, 징, 장구, 북이 민족의 상징인데. 하하. 이념을 초월한 금방 하나가 된다는 걸 느꼈어요. 진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거...

이제는 외국에도 사물놀이가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공연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지요?
지난 30년간 세계를 누비며 공연을 해온 덕에 꽹과리, 징, 장구, 북이 오대양 육대주에 보급이 됐습니다. 아프리카 오지에서부터 시작해 세계 곳곳에서 외국사람들이 우리 소리를 배우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태권도가 그랬듯이 이제는 꽹과리, 징, 장구, 북의 차례입니다. 열심히 하다보면 미국의 빌보드차트에 올라가는 음악이 우리 리듬일 수 있다는 거죠. 이러한 도전이 세계인에게 진정한 우리의 에너지를 전해줄 수 있는 일이고, 앞으로 해야 할 역할이라고 봅니다.



앞으로 개인적 바람이 있으시다면?
전통예술을 하는 다음 세대가 대우를 받을 수 있게끔 토양을 가꾸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겁니다. 자랑스럽게 장구통 메고 압구정동을 활개하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거죠. 난 그런 시대가 와야 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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