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옥도 부러워한 코미디 거장 심우섭감독(상)
신상옥도 부러워한 코미디 거장 심우섭감독(상)
  • 김두호
  • 승인 2012.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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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영화 <유관순> 연출의 꿈 못 버려”

【인터뷰365 김두호】심우섭(85) 원로 영화감독의 활동경력은 우리나라 코미디영화의 역사다. 1960년대 한국영화 충무로시대의 황금기를 이끈 주역 감독의 한사람이다. 그의 연출 작품 79편의 대부분이 관객들을 웃기는 희극물이다. 흥행영화의 대부였던 신상옥 감독도 “나는 당신의 재주가 부럽다”고 코미디 영화 분야에서는 심우섭 감독의 탁월한 능력을 인정했다.

심 감독의 <남자식모> <팔푼며느리> <남자기생> <꿩먹고 알먹고> <귀하신 몸> <팔도주방장> 등의 흥행영화를 통해 김희갑 구봉서 곽규석 양훈 서영춘 배삼룡 송해 등 코미디 1세대들이 무비스타로 인기를 누리며 영화관 앞에 관객들의 줄을 세웠다.
심우섭 감독의 활동기는 웃음을 잃어버린 가난한 눈물의 시대였다. 사는 것이 힘들었고 즐거운 일이 없었던 사람들은 대다수 음울하고 굳은 표정으로 살았다. 유모어나 웃음은 천박한 문화로 눈총을 받았다. 세상 분위기가 그랬다. 그러나 컴컴한 극장 안에서 영화를 보며 웃는 것은 허물이 되지 않았다. 웃겨주는 영화는 무겁고 재미없는 세상의 긴장을 풀어주는 청량제와 같았다.

웃음의 세상을 만들어 가던 영화의 가장자리에 심우섭 감독이 있었다. 그는 아무나 만들 수 없는 희극영화 연출의 귀재였고 대가(大家)로 이름을 날렸다. 자신의 젊음을 남을 웃기는 영화에 바쳤지만 지금 그의 곁에는 웃겨줄 사람이 없다. 부천의 전셋집에서 외롭게 살고 있다. 몇 해 전 부인과 사별 후 자취생활을 하면서 영화인들을 만나기 위해 서울을 오가는 일이 일과가 되고 있다. 건강할 때는 카메라를 들고 크고 작은 영화인들의 행사를 자료 필름으로 빠짐없이 담아왔으나 걷는 것이 불편해서인지 근래들어 영화인 모임에도 모습을 잘 나타내지 않는다. 심우섭 감독을 만났다. 칼바람이 부는 차가운 겨울 낮 충무로에서였다.

걸음걸이가 불편해 보입니다.
다리를 수술했어요. 관절이 좀 시원찮아 지팡이를 사용해 왔는데 수술을 해 당분간 걷기가 더 불편하게 됐어요.

오래전부터 영화와 관련된 모든 행사장을 찾아다니시면서 기록 사진을 찍어오셨는데 자료 물량이 엄청날 것으로 짐작됩니다. 어떻게 보관하고 계세요? 그걸 어떻게 하실 건가요?
지난 26년간 내 손으로 찍은 영화행사 현장자료 사진을 모두 부천문화재단에 기증했어요. 일본에서 가져온 영화서적까지 내가 아끼던 귀한 자료를 모두 함께 넘겼어요. 알고 있는 교수들이 대학교에 기증해 달라고 했으나 어느 한 곳에 줄 수도 없어서 고민하다가 내가 사는 부천시에 기증했어요.

왜 그렇게 오랜 세월을 두고 영화인들의 활동이나 행사 기록 사진을 자료로 모으셨어요?
난 카메라를 평생토록 손에서 놓은 적이 없습니다. 카메라를 손에 들고 다니다가 보니 찍게 되고 그러다가 영화인들의 기록사진을 찍는 일이 취미가 아니라 임무처럼 생각이 바뀐 거예요. 디지털 카메라가 나오기 전에는 직접 현상하고 인화작업까지 했어요.

돈이 되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사진에 나온 사람 중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만날 때마다 찍은 사진을 전해주곤 했는데 돈 달라고 할 수는 없지요. 그저 내 나름의 봉사활동이랍니다. 돈을 생각하지 않고 살면서 보람을 느끼는 일이 있다는 것도 즐겁게 사는 방법입니다.

현장을 떠난 감독들이 대다수 다른 일을 해도 평생 머릿속에 영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더군요.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란 말처럼 ‘한번 감독은 영원한 감독’이라는 표현이 적절합니다. 아직도 작품 연출에 대한 꿈이 있으시지요?
아무렴요. 맞는 소리입니다. 나도 아흔을 바라보고 있지만 지금도 영화로 만들 소재가 있으면 눈이 번쩍 뜨입니다. 내가 새로 만들 작품이 없는가를 찾는 작업은 평생 못 버리고 사는 거지요.

지금 준비하거나 생각하고 있는 작품이라도 있으신지요?
있어요. 3.1 독립운동의 표상인 유관순 열사를 선교영화의 시각에서 나의 마지막 작품으로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기약이 없지만 틈틈이 스토리를 구상해 보고 있어요.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의 심감독


과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교류관계에 있는 일본 유바리국제영화제에 참석하셨을 때 활동 모습이 인상적으로 기억됩니다. 한일 영화평론가 작품 세미나에서 일본어 통역을 맡으셨지요? 원래 일본에서 공부하셨다면서요?
일본 야마구치현 오노다시에 인접한 우시로가타라는 시골에서 태어나 1945년 해방되기 전까지 일본에서 살았어요. 어릴 때 나는 우리 가족이 한국 사람인 줄 몰랐어요.

부모님과 가족 분들이 일찍부터 일본에서 사셨군요.
아버지가 사업을 위해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아요. 별세하셨지만 아버지(심상윤)는 제재소를 경영하시면서 탄광에 갱목을 납품해 어려움을 모르고 살았어요. 경주마 6마리를 키우며 취미생활을 할 정도였지요. 어머니(박동팔)는 10남매를 낳으셨는데 그 중 아들이 6형제, 내가 아들로는 둘째랍니다.

그때는 영화공부를 할 수 있는 곳도 없었는데 어떻게 영화인이 되셨습니까?
나는 일본에서 공업학교 토목과를 졸업했고 귀국 후에는 대동공업이라는 토목회사의 측량기사로 지방공사장을 다니며 일한 적도 있어요. 그러나 그 직업은 잠시였고 사진관을 하면서 영화로 발길을 옮긴 건데 10살 때인 1930년대에 아버지가 선물한 소형 카메라 하나가 내 운명, 내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 준 셈이었어요.

1930년대의 카메라라면 아무나 만져 볼 수 없는 아주 귀한 물건 아닙니까?
유리 원판을 끼워 넣고 빼고 하던 이름 그대로 초창기 활동사진기인데 나는 그걸 손에서 떼지 않고 가지고 다니며 사진을 찍었어요. 해방으로 가족과 함께 귀국해 부산에서 살 때는 사진관을 운영하게 됐지요. 그 시대에 사진관 운영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꿈의 사업이었어요. 그 때는 영화 촬영기사도 카메라를 만지던 사진사 출신이 많아 우리 집에는 영화인들이 많이 출입을 했어요. 6.25 전쟁으로 피난민들이 몰려든 부산에서 나의 사진관은 카메라맨들의 사랑방 구실을 했고 다들 힘들 때라 주인인 내가 주로 술값을 내고 도움을 주었어요.

사진관 덕분에 영화인들을 알게 되고 영화로 발길을 옮긴 것이군요.
그런 셈이지만 영화 쪽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나중의 일입니다. 서울이 수복되어 나도 1953년에 부산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왔어요. 카메라 기사로 프로 대접을 받았던 나는 서울 명동의 허바허바사진관에서 다른 직원들 보수의 2배쯤 되는 60만원의 월급을 받기로 하고 상경한 것인데 나의 억센 사투리에 싫은 표정을 하는 주인을 보고 욱하는 성격에 그만 두었지요.

명동의 허바허바사진관이라면 정말 오래도록 서울에서 가장 유명했던 대형 사진관이었습니다. 카메라맨으로 최고 직장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부산에서 나의 사진관 직원이었던 사람이 종로4가에 사진관을 운영해 한동안 그곳에 머물었어요. 임권택 감독의 작품 파트너로 좋은 작품을 많이 남긴 정일성 촬영감독도 그곳에서 자주 들렸어요. 그는 나보다 일찍 영화 촬영 쪽으로 길을 돌렸지요.

국회 전속 사진사 경력도 있으시지요?
생활에 쫓겨 살다가 입대시기를 놓쳐 병역기피자로 체포되어 동대문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간 적이 있어요. 일주일 만에 2층 난간에서 오줌 누다가 탈출해 그길로 부산에서 친분을 나눈 황성수 국회부의장을 찾아갔어요. 국회사진부에 추천을 해주었지만 곧 사채를 얻어 종로 견지동에 백양사진관을 개업했어요. 이곳에서 친분을 나누어 온 영화인들을 다시 만나게 되고 이어서 중앙일보 종군기자 출신의 이승모 촬영기사의 조수로 영화 촬영부에 입문하게 되었지요.

심감독이 연출한 코미디물들


연출보다 촬영을 먼저 시작하셨는데 1950년대 함께 활동하던 영화인들은 어떤 분들입니까?
신상옥 감독에 앞서 홍성기 감독이 한창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이었어요. 전택이, 최훈, 박종호 감독이 홍성기 감독 연출부 조감독으로 활동할 때 일을 함께 했지요. 나는 종군기자 출신이기도 한 이승모 기사가 떠나면서 주촬영기사가 되었지만 1955년 홍성기 감독이 <애인>을 연출할 때부터 홍 감독의 영화 편집 작업도 내가 주로 했어요.

영화의 편집은 화면구성과 완성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작업과정이어서 연출자인 감독이 직접 편집전문가와 함께 매달려 하는 일이 아닙니까?
홍성기 감독은 워낙 놀기를 좋아해서 촬영이 끝나면 편집에 매달리는 것을 힘들어했어요. 초기 서너 편을 편집할 때는 홍 감독에게 뒷통수를 얻어맞기도 했으나 <실락원의 별> <길은 멀어도> <금단의 문> <에밀레종> <재생> 등의 작품은 모두 편집을 나에게 맡겼지요.

촬영과 편집을 통해 결국 감독으로서의 소양을 탄탄하게 쌓은 셈이었군요.
최훈 감독의 <모녀> <사모님> <느티나무 있는 언덕> 등 3편을 촬영한 뒤부터 주위의 권고도 있었지만 내 스스로도 연출을 시작할 때가 됐다는 결심이 섰지요. 그 첫 작품으로 준비한 것이 <장마루촌의 이발사>였어요. KBS 연속극으로 화제에 오른 걸 내가 원작료 50만원을 주고 미리 점을 찍었지만 그 제목으로는 영화화 하기가 힘들다고 해서 정진모 제작자에게 넘겼는데 뒤에 최훈 감독이 연출을 했어요. 나는 다시 방송드라마로 인기를 모았던 <백년부인>을 첫 작품으로 감독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불편한 걸음걸이로 오랜만에 충무로 나들이를 한 심감독과 필자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장마루촌의 이발사>는 최훈 감독의 대표작이 됐지만 <백년부인>은 명보극장에서 개봉했으나 흥행에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어요. 그때 홍성기 감독은 내게 말했지요. 당신은 머리가 비상하니 자신처럼 흥행에 쫓겨 살며 상업성 영화만 만들지 말고 좋은 예술 작품을 만드는 감독이 되라고 하더군요.

감독들은 대다수 예술영화를 꿈꾸지만 결국 살아남기 위해 흥행영화에 무게를 두지 않을 수 없는 갈등 속에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감독활동을 하는 동안 흥행보다 예술에 치중하며 연출활동을 한 유현목 감독을 부러워했습니다. 유감독과 가깝게 지내기도 했지만 내 작품세계에도 영향을 많이 준 사람이지요. 주로 관객을 염두에 두고 희극영화를 만들면서도 나 역시 그냥 웃어넘기는 흥행영화가 아닌, 작품마다 페이소스의 감동적인 여운을 남기려고 노력했어요. <계속>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김두호
김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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