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서 죽고 싶다” 뮤지컬 스타 최정원
“무대 위에서 죽고 싶다” 뮤지컬 스타 최정원
  • 김선
  • 승인 2008.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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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살 먹은 뱀파이어 연기에 도전 / 김선



[인터뷰365 김선] 뮤지컬 무대의 간판 스타 최정원은 “나는 뮤지컬 배우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한다. 뮤지컬이 지금처럼 인기를 끌지 않았던 시절에도 최정원은 줄곧 뮤지컬 무대를 지켰다. 1989년 <아가씨와 건달들>에서 ‘6번 아가씨’로 데뷔해 20여 년간 <시카고><맘마미아><지킬앤하이드><브로드웨이42번가> 등 대작 뮤지컬의 히로인으로 톱스타의 인기를 누려왔다. 올 가을에는 창작뮤지컬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뱀파이어로 변신, 코믹연기에 도전장을 내고 있다.

인터뷰를 위해 마주 앉은 순간, 무대 위에서 파워 있고 도도하고 카리스마 넘치던 배우 최정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최정원은 아주 부드럽고 편안한 보통 여자로 돌아와 있었다.


다른 뮤지컬 배우들과는 달리 TV에서 자주 보기 힘들다. 출연 기회가 없는 건가, 아니면 애써 하지 않는 건가?

언젠가 카메오로 단편드라마에 등장한 적은 있다. 지금은 공연장에서만 볼 수 있는 배우이고 싶다. 방송출연보다 콘서트에서 멋진 공연을 보여주는 조용필 씨의 모습도 소중하게 보였다. 뮤지컬배우라면 TV나 영화에서보다 뮤지컬 무대에서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500살 뱀파이어가 됐다. 뱀파이어로 살아보니 어떤가.

인간이 아닌 뱀파이어로 처음 살아본다. 하하. 인간이 아닌 뱀파이어 입장에서 많이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지하철이나 피를 봤을 때 뱀파이어는 어떤 생각을 할지, 어떤 동작을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뱀파이어와 관련된 영화도 많이 봤는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역시 좋은 배우가 되려면 모방보다 독창적인 연기세계를 보여주고 구축해야 하는데 아직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해 쉬지 않고 노력하고 있다.




드라마에서는 심혜진이 프란체스카 역을 맡아 인기를 끌었다. 같은 역을 맡는 것에 대한 부담은 없나?

드라마에서 심혜진 씨가 강렬한 눈빛과 흡인력 있는 연기로 멋진 프란체스카의 모습을 보여줘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공연 제작에 참여했던 극단 갖가지의 심상태 대표가 2년 전부터 내게 ‘한국의 프란체스카는 당신’이라며 용기를 심어주어서 진작부터 자신감을 가졌다.


드라마와 비교해서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드라마는 매주 다른 에피소드로 진행된 단막극 형식이었고 뮤지컬은 드라마의 짜여진 줄거리에 따라가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이 있다. 뱀파이어가족 이야기를 다룬다는 큰 틀과 등장인물은 같지만 소소한 에피소드나 줄거리는 변형돼서 보여진다. 외국에 내놔도 손색없을 만큼 좋은 음악들과 댄스들이 더해졌다.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작품과 배역 선택일 것이다. 작품 선택의 기준은 무엇인가?

나이가 들수록 작품이나 배역 선택에 한층 신경이 쓰이고 창작뮤지컬에 대한 애착이 더 강해진다. 나는 마음에 드는 역이면 굳이 주인공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지난 5월에 공연한 <소리도둑>에서는 조연으로 출연했다. 이번에도 서울 공연이 끝나고 지방순회공연 예정이었던 <시카고>나 <맘마미아>를 포기하면서 <안녕,프란체스카>를 택했다. 다행히 이 두 작품을 제작했던 제작사 신시뮤지컬컴퍼니의 박명성 대표도 창작에 대한 욕심이 강한 분이라 내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시카고>에서 함께 공연했던 가수 옥주현씨가 가지말라고, 같이 계속 공연하자던 말이 귀에 맴돌더라. 너무 미안했다. 이렇게 많은 것들을 포기하면서 선택한 작품이어서 더욱 애착이 간다.



창작뮤지컬이라고 해서 모두 좋은 작품으로 볼 수는 없지 않는가?

창작물은 기존에 인정받았던 작품의 대본과 노래로 표현해 내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짜내 만들어진다. 여기엔 배우인 내 아이디어도 포함된다. 아무래도 작품 속에 내 이야기가 담겨있다는 생각을 하면 정이 더 갈 수밖에 없다. 내가 한 배역은 내 분신이나 자식처럼 느껴진다. 남이 만든 것을 예쁘게 키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산고의 고통을 겪으면서 낳는 것이 바로 창작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새로 심고 물을 줘 키워낸 식물을 볼 때 더 각별한 애정이 느껴지는 법 아닌가.


남의 공연도 자주 보는 편인가?

관객의 입장에서 공연을 즐긴다. 슬픈 공연인 경우엔 손수건을 챙겨가서 펑펑 울기도 한다.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저 무대 위에 내가 설 수 있는 배우라는 점이 뿌듯하다. 좋은 대사나 인상 깊었던 장면들은 노트를 하면서 '언젠가 저런 느낌을 꼭 써먹어야지' 생각한다.


닮고 싶었던 배우가 있었다면 누구인가?

나의 멘토가 됐던 분은 가수 윤복희 선배님이다. 어렸을 때 그 분의 노래만 들으면 눈물이 났고 소름이 끼쳤다. 나도 저런 뮤지컬 배우가 될 수 있을까 하면서..

(이어 최정원은 윤복희의 <사랑의 찬가>중 첫소절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노래를 불렀다)

뮤지컬 배우가 되길 결심했던 고등학교 3학년 때 개척교회를 다니게 됐다. 팝가수 휘트니 휴스턴이나 마이클 잭슨도 성가대를 통해 좋은 가수가 됐으니 다녀보라는 지인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다니게 된 성가대에 윤복희 선배님이 계시더라. 윤복희 선배님이 부르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울음이 나왔다. 어떻게 저렇게 영혼을 울려서 노래를 할까.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나 <시카고>에서 윤복희 선배님이 부르시던 창법을 떠올리며 노래를 부른다. 나도 50대가 됐을 때 내 목소리를 듣고 관객들이 울 수 있게 될 날을 꿈꾼다.


벌써 뮤지컬 배우 20년이다. 후배들에게 자신은 어떤 선배라고 생각하는가?

난 후배들과 격의없이 잘 지낸다. 열심히 하는 후배들을 볼 때마다 잘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내 옛날의 모습을 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주변에서 묻는다. 이쁘고 연기 잘하는 신예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질투 안나냐고. 하지만 그들을 보면서 자극도 되고 배우기도 한다. 늘 앙상블하는 후배들의 컨디션은 좋은지 고민은 없는지 하나하나 챙겨주려고 노력한다. 오늘도 배우들에게 내가 입었던 연습복이나 딸 수아가 입었던 애기옷이라도 주고 싶어 옷을 한 보따리 가지고 왔다.

원래 사람들을 잘 챙겨주나.

사람들을 좋아한다. 내가 태어난 이유도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인생 뭐 있나. 알몸으로 태어나서 알몸으로 갈 건데. 명예나 돈보다 중요한 것은 나를 생각해주고 아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는 힘이 남아있다면 인생으로 살아갈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내 공연으로 인해 최소 몇명은 (인생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음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공연을 본 관객들이 이와 비슷한 내용을 적은 후기를 보면 행복해진다. '배우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구나' 하고.



최정원 하면 열정적인 배우란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 원동력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가족들 덕분이다. 나의 상황을 이해해주고 적극 지지해준다. 너무 고맙다. 결혼 전 나의 팬이었던 남편은 내가 무대에 오르는 것을 무엇보다도 좋아한다. 공연 직후 내 손을 잡은 남편의 손이 결혼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떨고 있더라. 처음 시댁에 인사를 하러 갔는데 남편이 시댁식구들을 다 모이게 하더니 "정원씨가 비록 내 아내가 됐지만 공연 때문에 명절이나 집안행사에 참석하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정원씨가 해야 될 설거지를 대신 해줄 식기세척기를 사왔습니다"라고 말하더라. 그런 마음이 너무 이뻤다. 이런 것들이 내가 무대 위에서 연기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10년째 아이를 봐주고 있는 친정엄마도 평소에 친구들이랑 놀러도 가고 당신의 인생을 즐기고 싶다고 말씀하시다가도 내 공연을 보고 나면 항상 편지를 써놓으신다. '대한민국 최고 여배우의 연기를 봤고, 그녀의 딸을 키우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니 수아 걱정은 하지 말라'고. 그 편지를 읽고 펑펑 운다. 하지만 다음날은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엄마에게 이것저것 챙겨달라고 말한다. 하하.


공연일정 때문에 가족들에게 소홀할 수밖에 없어 늘 미안하겠다.

딸과 남편에게 항상 미안하다. 자식이 있다는 것은 배우로서 도움이 많이 된다. 오감을 다 건드리기 때문에 감정이 풍부해진다. 하지만 엄마로서는 함께 보내는 시간이 부족한만큼 항상 미안한 마음이다. 그래도 나의 행복이 곧 수아의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길을 포기하면서 수아를 원망하는 것보다 슬픈 일은 없을 테니깐. 쉬는 날에는 수아에게 탭댄스도 가르쳐 주고 둘이 공연도 하며 논다.

(그는 주섬주섬 지갑에서 딸의 사진을 꺼내 보여줬다. 초등학교 3학년인 딸 수아는 국내 최초로 수중분만을 통해 낳아 화제가 된 바 있다. 사진 속 그는 딸과 함께 무용을 하고 있었다. 그는 딸이 노래도 너무 잘해 커서 뮤지컬 배우를 했으면 좋겠다고 웃었다.)

수아는 엄마가 밤마다 공연하러 나간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 같다. 항상 첫 공연을 보고 나서 '우리 엄마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자랑처럼 들린다.

자랑이지만 진실을 얘기하는 것이다. 하하. 이렇게 행복하게 사랑을 받기 때문에 무대 위에서 죽을 만큼 에너지를 쏟아낼 수 있는 것 같다. 춤 잘추고 노래 잘하는 배우들은 정말 많지만, 목숨을 걸 만큼 열정을 가지고 무대에 오르는 배우는 많지 않을 것 같다. 내가 뮤지컬에 쏟는 열정 하나는 정말 자신있다. 무대 위에서 죽고 싶다. 그러면 얼마나 행복할까란 생각이 든다.


단 한 번도 뮤지컬배우가 된 것을 후회한 적이 없는가?

없다. 오히려 연습을 하면서 스스로를 자책한다. 무대에 오르고 커튼콜 박수를 받으면 고민한 만큼 해냈다는 뿌듯함이 있다. 커튼콜은 다 빠져나갔던 열정과 에너지가 다시 들어오는 시간이다. 커튼콜이 끝나고 나면 100번도 더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공연이 끝나면 룰루랄라 노래를 부르며 집에 가고 그 피곤한 와중에서 집안일도 한다.

경력이 쌓인다는 것은 그만큼 나이를 먹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배우로서 어떤 느낌이 드는가.

서운하고 우울할 거라 생각했다. 39세 때는 40세가 된다는 것이 너무 싫었다. 하지만 막상 40세가 되니깐 오히려 당당하게 내 나이를 말하게 됐다. 50, 60대가 더 기대된다. 나이가 들수록 하고 싶은 것도 많이 생긴다.




앞으로 맡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

매 작품 비슷한 이미지의 작품은 피해왔다. 최정원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다. 될 수 있으면 변신을 할 수 있는 공연을 선택하려 한다. 앞으로 더 몇 명의 인생을 끄집어 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 나이와 상황에 맞는 새로운 역할을 도전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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