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의 스타 계은숙, 영광과 좌절의 삶 ①
파란만장의 스타 계은숙, 영광과 좌절의 삶 ①
  • 김두호
  • 승인 2008.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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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없이 자라며 신문 팔며 엄마 도와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다들 궁핍했고 시대의 변화가 많았던 시절에 자란 연예인들 중에는 작가가 상상력으로 만든 드라마보다 더 파란만장한 삶을 산 비화들이 많다. 미모의 가수 계은숙의 생애도 소설보다 더 기구한 희비의 반전과 굴곡의 사연들이 파노라마로 이어진다. 일본 법원에서 각성제 복용과 관련, 유죄 선고를 받아 비자 연장이 거부되어 지난 8월초 귀국한 그는 현재 조용히 심신의 안정을 되찾아가며 요양생활을 하고 있다.


습관성 두통증세가 있는 그에게 두통약이라며 소속사 스태프들이 주는 약을 복용하다가 습관성에 빠져 그런 사태가 발생했다고 한다. 초기에는 마약성 의약품인 줄 모르고 복용했던 모양이다. 또 그가 기자들에게 밝힌 사유 중에는 귀화를 요구하는 주변사람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아 미움을 산 것도 포함돼 있다. 어쨌거나 그는 23년간 일본에서 쌓은 화려한 엔카 가수의 빛을 잃어버리고 쫓겨나다시피 어두운 얼굴로 돌아왔다. 하지만 계은숙의 삶을 돌아보면 좌절이나 불행은 어릴 때부터 붙어다닌 그림자이기도 했다. 타고난 미모의 가수에게 신은 행운과 함께 불행도 안고 살게 했다.


1962년 7월 충남 서산의 특이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나 마흔 여섯까지 온몸으로 써온 드라마 같은 삶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우선 계은숙은 지금 힘없이, 슬픈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지만 흘러간 보통의 여자 가수와는 다르다. 엔카 가수로 활동했으나 일본에서 불기 시작한 한류대중문화의 불을 지핀 스타였고 그곳 공연무대에서 성취한 인기기반은 정상까지 올랐다. 매년 최고의 가수를 한자리에 모으는 NHK 연말 가요홍백전에만 7회 연속 출연하는 기록을 세웠다. 국내에서보다 일본에서 더 화려했던 톱스타 계은숙의 이야기는 남자가 없는 가정에서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고 자라난 환경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목구비가 선명하고 시원하게 잘 생긴 미모의 계은숙은 1970년대말 럭키샴푸의 CF모델로 발탁되어 얼굴이 알려졌으나 1980년대로 넘어가면서 디스코풍의 노래 <노래하며 춤추며>를 히트시킨 가수가 되어 인기 연예인의 울 안으로 들어섰다. 신인 가수로 신선한 바람을 안고 나타난 계은숙이 1981년 3월 기자들에게 고백한 자신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아주 옛날 어머니와 아버지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남남으로 갈라섰대요. 어머니는 나를 임신한 사실도 모르고 있다가 친정집으로 가서 나를 낳았나 봐요. 외갓집은 충남지방에서 꽤 소문난 집안이었던 모양인데 6.25 때 어머니와 외삼촌만 살아남아 내가 태어날 무렵은 어머니도 의지할 데가 없었던 것 같아요.”


계은숙은 축복보다 어머니에게 무거운 짐을 얹어주며 출생했다. 가족은 그때부터 어머니 송종열 씨와 언니 계미선 씨 등 세 식구였지만 아버지 없는 가정은 가난하고 외로웠다. 어머니가 생업을 위해 고달프게 사는 가정에서 딸은 소외감에서 헤어나지 못했고 학교생활도 평탄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명동 증권가에서 작은 매점을 운영하며 살 때 열두 살 계은숙은 우산이나 신문을 들고 행상을 하며 어머니를 돕는 시절도 있었다. 갠 날에는 석간신문을 소리치며 팔고 비가 오면 40원씩 주고 도매상에서 산 비닐우산을 60원씩에 팔기도 했다.


“어린 내가 나설 정도로 돈이 그렇게 궁하지는 않았어요. 그냥 고생하는 엄마를 돕는다는 생각에서 한 것이죠. 우리 어릴 때는 우리 또래 아이들이 신문이나 우산 파는 걸 흔하게 볼 수 있었어요. 엄마는 우리 자매를 고생 안시키려고 물질적으로는 걱정없게 뒷바라지를 했거든요.”



효심도 용기가 필요한 것인데 어린 계은숙은 활동적이면서 생각도 깊은 데가 있었다. 그래도 답십리초등학교와 성수여중을 다닐 때는 평범했으나 고등학교는 세 번을 옮겨 다니며 고생하다가 천호여상을 졸업했다.


“불량학생과 어울려 탈선을 한 것이 아니라 사이클 선수로 다른 학교 학생들과 경기를 하다가 운동장에서 선수들끼리 싸움이 붙었는데 좀 과격하게 싸워 처벌을 받았어요. 학교를 옮겼으나 또 소외감을 극복 못해 학교에 잘 가지 않고 산에 올라가 그림을 그리고 놀아 무단결석자로 처벌을 받았어요. 학교 다닐 때는 소풍을 안갔어요. 다른 친구들은 부모가 함께 오지만 난 바쁜 엄마에게 함께 가자고 할 수 없었지요.”


외롭게 자라던 그가 19살 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는 중학교 시절부터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 같은 아버지가 그리워 몇 년 동안 종로에 있던 계(桂)씨 종친회를 찾아다녔다.


“엄마는 내가 3살 때 돌아가셨다고 하셨지만 자라면서 어딘가에 살고 계실거라는 느낌이 싹트고 그것이 확신감으로 발전했던 것 같아요. 종친회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며 비슷한 사람만 있으면 집으로 찾아가기도 하다가 어느날 아버지가 생존해 있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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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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