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보이지 않지만 보는 일을 멈추지 않는 배우 이영호
[인터뷰] 보이지 않지만 보는 일을 멈추지 않는 배우 이영호
  • 김다인
  • 승인 2011.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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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를 무기삼지 않는다는 것이 내 신조, 앞으로 대중문화 평론 하고 싶어”

【인터뷰365 김다인】한동안 보이지 않던 사람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영화배우 이영호(60)씨.


70년대 청춘영화의 주인공이었던 그는 오랜만에 영화로 또 방송진행자로 언론에 근황을 알리고 있다. 영화는 중견 감독 다섯 사람이 만든 옴니버스 영화 ‘마스터클래스의 산책’, 방송은 국내 유일 시각장애인 전문 라디오 프로그램인 KBS 3라디오의 '우리는 한가족’을 통해서다.


‘산책’은 정지영 박철수 이두용 변장호 이장호 등 다섯 명의 중견감독들이 오랜만에 함께 만든 영화로 이영호는 이장호 감독의 ‘실명’에서 주인공을 맡았다. 알려진 대로 이장호 감독은 이영호씨의 형, 이 영화의 내용은 이영호씨의 삶 일부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눈이 안 보이는 극중 주인공은 그 자신이다.


그에게 이제 빛과 어둠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사위가 어두워진 밤에도 그는 밝을 수 있고 햇빛 찬란한 낮에도 그는 홀로 어두울 수 있다. 망막을 통과하던 빛은 차단된 채 그의 마음속에 켜고 끄는 빛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지금도 여전히 싱그럽다. 본인은 알아채지 못하겠지만 젊은 시절 볼에 움푹 패여 있던 보조개가 그대로 웃음주름이 되어 입가까지 이어졌다. 보이지 않는 눈의 표정도 훨씬 더 다양해져 흡사 성격배우의 움직임을 닮았다. 지금 배우 하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겨울이 깊어가는 늦은 오후 여의도 KBS 본관에서 라디오 방송을 마치고 나온 이영호씨를 만났다.


방송은 잘 되고 있나.

“이제 시작한 지 몇 주 지나지 않아서... 조금씩 익숙해져가고 있다. 방송 중 ‘이영호의 생각상자’라는 코너 글을 내가 직접 쓰기 때문에 바쁘다.”


오랜만에 영화에도 출연했다.

“이장호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에 출연했다. 서울을 모티브로 한 옴니버스 영화인데 이두용 변장호 박철수 정지영 감독 등 네 명과 함께 한 영화다. 그중 이장호 감독이 만든 ‘실명’에 출연했는데 실제 내 이야기가 많이 들어가 있다. 눈이 먼 전직 영화배우 애기니까.”


촬영할 때 힘들지 않았나.

“나도 걱정을 했는데, 반사적으로 카메라가 다가오는 느낌을 알겠더라. 나와 함께 연기한 아내, 딸 역의 배우들이 준비를 철저하게 해와서 촬영을 수월하게 끝냈다.”


말 나온 김에 이장호 감독 애기를 하자. 이 감독 때문에 영화에 데뷔한 걸로 알고 있다.

“1975년 ‘어제 내린 비’로 데뷔했다. 이장호 감독이 ‘별들의 고향’으로 큰 인기를 얻은 다음 작품이다. 어찌 하다 보니 출연하게 됐다.””


어찌 ‘어찌 하게’ 됐나.

“홍익대 조소과에 들어가서 6개월 다닌 후 휴학하고 동상 제작하는 일을 했다. 진흙을 빚고 위에 석고를 부어 틀을 만드는 일을 했다. 한 3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을 한 후에 다시 복학을 하려니 휴학 처리가 안돼 있었다.. 휴학계를 안냈으니까. 학교를 다니려면 다시 등록을 해야 했는데, 그 당시 등록금이 8만원이었다. 그 8만원을 이장호 감독이 가져가 버렸다.”


일설에는 이영호씨 등록금으로 이 감독이 쌍꺼풀 수술을 했다는 말도 있었다.

“그건 아니고. 최인호 소설 ‘별들의 고향’ 원작료 주는 데 썼다. 당시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신문 연재소설이었잖나. 등록금이 없어지는 바람에 잘됐다 하고 학교를 그만뒀다. 원래 나는 불문학을 전공하려 했는데 조소과를 가게 돼서 별 뜻이 없기도 했다. 그 일이 늘 마음에 걸렸던지 이장호 감독이 ‘별들의 고향’이 대히트를 친 후 ‘어제 내린 비’를 준비하면서 나한테 연기를 해보겠느냐 하더라. 내가 거절할 줄 알고 그랬을 수도 있는데, 내가 해본다고 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캐스팅 확정됐다는 언질을 안주는 거다. 아마 자기 동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기가 껄끄러웠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날 나한테 대본을 주더니 한 군데를 짚으며 연기를 해보라고 했다. 상대역인 안인숙씨에게 전화 걸면서 애원하는 장면인데, 내가 대사를 하면서 진짜 울었다. 그랬더니 이장호 감독이 “살았다”하면서 다음날로 나를 제작사 사장에게 인사를 시켰다. 그렇게 해서 연기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돈 벌어서 프랑스 유학 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사진 왼쪽으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오랜만에 출연한 옴니버스 영화 ‘산책’ 중 이영호씨가 주인공을 맡은 ‘실명’. 이청준 원작을 영화화한 ‘낮은데로 임하소서’, 재기작인 ‘바람불어 좋은 날’ 그리고 데뷔작인 ‘어제 내린 비’


‘어제 내린 비’는 히트작이 됐다.

“대단했다. 당시 내 얼굴이 전형적인 미남도 아니고 약간 혼혈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낯선 외모였는데 이 영화의 히트로 연이어 출연을 하게 됐다. ‘너 또한 별이 되어’(이장호 감독)에 이어서 다른 감독 영화 세 편에도 출연했다. ‘그래 그래 지금은 안녕’을 찍고 대마초에 걸려들어갔다.”


당시 영화계와 가요계 여러 사람들이 대마초에 연루됐는데.

“나는 좀 억울한 면이 있다. 당시 줄줄이 엮여 들어갈 때 희생양 차원에서 들어간 면도 없지 않다. 대학 다닐 때 실습실에서 피워본 애기를 순진하게 하는 바람에…어쨌거나 인기에 취해 나비처럼 날아다니던 시절이 대마초사건으로 종지부를 찍게 됐다. 돈도 적지 않게 벌었는데 호텔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며 노는 데 다 써버렸다. 나중에는 술값 외상이 밀려 아끼던 기타까지 팔았을 정도다.”


이영호씨는 대마초 사건을 겪은 후. 1980년 ‘바람불어 좋은 날’로 다시 영화계에 돌아왔다. 역시 형인 이장호 감독 작품이다. 이후 이영호씨는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 등에 출연했다. 특히 고 이청준 선생 원작의 ‘낮은 데로 임하소서’는 이장호 감독이 동생 이영호씨를 염두에 두고 원작자 이청준 선생을 만나 영화화를 논의했다.(참고로 현재 네이버 검색에 뜨는 이영호씨 정보에는 혼돈이 있다. 동명이인인 다른 조연배우와 이영호씨의 경력이 혼재되어 기록돼 있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는 원작의 유명세도 있고 해서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 이 영화를 끝으로 영화 출연을 그만뒀다.

“큰 역은 아니었지만 내 연기의 마지막을 잘 장식해준 작품이었다. 데뷔작과 마지막 작품이 가장 히트를 친 셈이다. 그리고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때가 83년이니까 내 나이가 서른이 넘었을 때다. 미국 가서 우선 샌프란시스코 아트 스쿨에 들어가 4년 동안 필름 프로덕션을 전공했고 이어서 NYU(뉴욕주립대학교)에 들어가 시네마 스터디를 전공했다. 석사를 마치고 박사학위를 준비하는 도중 눈이 안보여 그만두게 됐다..”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 건가.?.

“눈앞이 하얘지면서 거짓말처럼 글자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눈에 뭐가 낀 건가 하고 비벼도 봤지만 글자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미 ‘낮은 데로 임하소서’을 찍을 당시에도 영화계에서는 이영호씨가 눈이 잘 안보인다, 야맹증이다 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망막색소 변성증이라 해서 서서히 눈이 보이지 않는 선천성 병이다. 우리가 5남매(3남2녀)인데 넷째인 나만 이런 병에 걸린 걸 보니 유전은 아닌 것 같고… 한국전쟁이라는 상황 때문이라 해두자. 내가 전쟁이 끝난 직후(1952년) 태어났으니, 전쟁통에 무슨 일인들 없었겠나 싶다. 나는 내가 걸린 병을 잘 몰랐다. 어머니만 알고 계셨다. 내가 요강에 소변을 보는데 조준을 잘 못하는 걸 본 어머니가. 여덟살 때 연세 세브란스병원에 데려가 망막에 이상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내게 간유구를 무진장 많이 먹이셨다. 학교 가서는 칠판 글씨를 제대로 본 기억이 한번도 없다. 쉬는 시간에 친구 공책을 베껴쓰면서 외웠다. 그때부터 오히려 기억력이 비상해진 것 같다. 내가 병명을 알게 된 것은 군 입대 신체검사를 받으러 가서다. 면제 판정을 받고 자료를 찾아보면서 내 병에 대해 알게 됐다. 서서히 눈이 안 보이게 된다는 것을.”


그러면 영화를 찍을 때도 눈이 안 보이는 증상이 진행중이었던 건가.

“그때만 해도 눈이 많이 나쁜 정도였다. 밤에 안보이고.”


결국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못 받고 귀국했나.

“더 이상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아내, 아들과 함께 고생했는데… 6년 만인 1989년에 귀국했다. 귀국해서도 5년 동안은 사물을 식별할 수 있었다. 서울예전에서 강의도 하고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장애인 프로그램 진행을 하기도 했다.”


귀국 후 그는 1989년부터 8년 동안 맹인 극단 ‘소리’를 운영했다. 맹인 배우들을 데리고 연극을 하고 8편을 무대에 올렸다. 하지만 어느날 열심히 하던 배우 하나가 연기를 못하겠다고 나섰다. 그 이유를 물으니 “연기를 하려면 상대배우와 눈을 맞추면서 해야 하는데 보이지가 않으니 연기를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그 일을 기화로 극단은 해체됐다. 그는 “장님이 연기하는 것은 너무 어려웠다”고 말한다.

인사동으로 자리를 옮겨 인터뷰를 계속하던 중 고등학교 동창 이종천씨를 만나 함께 사진을 찍었다

묻기 좀 그렇지만… 본인을 스스로 장님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에게 눈이 안보인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스틱을 짚고 길을 나설 때부터다. 아마 많은 장님들의 공통된 경험일 것이다. 나는 어느날 갑자기 세상이 캄캄해진 것이 아니라 서서히 눈이 나빠지는 것에 익숙해진 경우다. 충격이 덜하다면 덜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스틱을 들고 나가면서 느끼는 감정은 다른 이들과 같을 것이다.”


완전히 세상이 보이지 않게 되면서 어떻게 지냈나.

“1995년부터 2003년까지는 통영에 내려가 있었다. 아무 연고도 없던 곳인데, 단지 서울에서 가장 먼 곳이라 택한 곳이 통영이었다. 인생을 다시 살고 싶었다. 기타 하나 들고 통영에 내려갔다. 기타만 치며 지내자니 무료해서 어느날 사람들에게 ‘장님도 낚시를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낚시는 감으로 하는 거라서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손재주가 좀 있거든. 낚시줄 매는 것을 배운 후 보이는 사람보다 더 줄을 잘 매자 ‘서울서 온 장님이 낚시바늘 줄을 기가 막히게 감는다’고 소문까지 났다. 하하. 허름한 배를 하나 사서 낚시를 하며 통영 뱃사람들과 어울려 하루하루를 지냈다.”


인생을 다시 사는데 성공했나.

하하하.


서울로 다시 올라온 후에는 거의 두문불출 했다.

“8년 동안 방에 처박혀 책만 읽으며 지냈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환경이 좋지 않아서 사람이 읽어주는 책만 들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컴퓨터로 책을 읽게 되지 않았나. 하루 세 권 이상 미친 듯이 읽었다. 잠도 안 자고. 지금까지 읽은 책이 한 5천권은 될 것이다.”


그럼 가정경제는 누가 책임졌는지, 부인께서?

“아내가 의류업에 종사하는데, 줄곧 가정을 지켰다. 아들도 반듯하게 키우고. 그래도 집안 청소는 내가 다 한다. 고장난 가전제품도 고치고.. 어떨 때는 부속을 잃어버려 일일이 침을 묻혀 찾아가며 고친 적도 있지만.”


부인이 대단한 미인이던데, 어떻게 만났나.

“내가 프랑스문화원을 잘 드나들었는데, 하루는 문화원에 근무하는 친구의 책상 위에 아주 잘 만들어진 카드가 한장 놓여있는 거다. 누가 만들었냐고 물었더니 당시 앰배서더 호텔에서 비서로 근무하던 내 아내가 만들었단다. 소개 받고 일년 사귀다가 결혼했다.”


일탈도 해봤고 칩거도 했었지만 이제 다시 세상 속에서 일을 시작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일단 장애를 무기 삼지 말자, 그걸 앞세워 무엇을 하지 말자는 것이 내 신조다. 우선은 지금 하는 일들을 열심히 하겠다. 장차 하고 싶은 것은 팝스 잉글리시 진행이나 대중문화 평론 같은 것이다. 팝스 잉글리시는 KBS 제3라디오를 통해 한동안 진행한 적이 있는데, 난 내 영어발음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영어 발음이 가장 좋다고 자부한다. 하하하. 또 한 가지는 그동안 내가 읽은 책, 들었던 음악 등을 바탕으로 대중문화 평론을 해보고 싶다. 영화 출연? 후배가 내 배역을 놓고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는데, 아직 모르는 일이다.”


이영호 웃다, 그리고 기타 치며 노래 부르다


이영호씨의 컴퓨터 안에는 여태까지 읽은 책들이 수십 개의 분류로 나뉘어 저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음악도 수백 곡 저장돼 있었다. 이영호씨가 그중 한 곡을 직접 기타를 치며 들려줬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러브 미 텐더’. 녹음도 했단다. 이 곡이 녹음된 CD를 들은 정현종 시인이 그랬단다. “이러니 여자들이 안 넘어가고 배기겠냐”고. 그 말을 확인하자 대답이 돌아왔다. “난 까탈스런 사람이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은 싫다. 인류학과 철학을 함께 이야기할 정도의 사람(여자도 물론!)이 아니면 끌리지 않는다.”

이영호씨와 인터뷰를 시작하면서는 조금 조심스러웠다. 눈이 안보이게 된 일들을 물을 때 특히 그랬다. 하지만 이영호씨는 시종일관 명쾌하고 유쾌하게 자신의 시간들을 이야기했다. 검은 안경을 썼지만 그는 귀로 상대편을 응시했다. 그리고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아차렸다. 쓰는 단어들도 적확했다. 조금 시간을 더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면 신랄한 문화비평이 이어질 기세였다. 조심은, 눈이 안 보이는 것을 물으며 실례할까봐 할 일이 아니었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가지고 있는 지식이 바닥날까봐 조심해야 할 일이었다. 보이지 않지만 보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는 그의 시계(視界)는 두 눈으로 다 보는 사람들이 미처 보지 못하는 것들에까지 넓혀져 있었다.





김다인

영화평론가. 인쇄매체의 전성기이던 8,90년대에 영화전문지 스크린과 프리미어 편집장을 지냈으며, 굿데이신문 엔터테인먼트부장, 사회부장, LA특파원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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