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와 떡국’-1세대 재즈 보컬리스트 박성연의 야누스 노트
‘재즈와 떡국’-1세대 재즈 보컬리스트 박성연의 야누스 노트
  • 김다인
  • 승인 2008.07.1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가 30년 동안 야누스를 포기하지 않은 이유 / 김다인



[인터뷰365 김다인 / 사진 유성희]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1994년 초간된 장정일씨의 장편소설 제목이다.

재즈를 믿는 사람이 있다. 믿는 정도가 아니라 재즈가 인생인 사람이 있다.

재즈 보컬리스트, 재즈 클럽 야누스의 주인 박성연씨다.

박성연씨는 7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35년 동안 애오라지 재즈 외길을 걸어왔다. 그가 1978년 11월 23일 문을 연 야누스는 한국인이 연 최초의 재즈 클럽으로 올해로 그 역사가 30년이 된다.

필자에게도 야누스는 특별한 곳이다. 한시절과 그 시절의 친구를 떠올리면 거기엔 늘 야누스가 있었다.

행여 없어지지 않을까, 늘 조마조마했던 야누스가 달포 전에 서초동 교대 역 근처에 새 둥지를 틀었다. 언제든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발길은 뜸했던 것을 탓하며 박성연씨와 만날 시간을 정했다.

지하철 3호선을 타고 교대 역 1번 출구로 나와 오른쪽 골목, 다시 왼쪽 골목으로 꺾자 바로 야누스 간판이 보였다. 야누스의 상징인 ‘두 개의 얼굴’이 입구를 비추고 있었다.

약속시간보다 10여분 먼저 온 것은 우선 야누스를 만나기 위해서다.

지하에 위치한 야누스에는 작은 무대 앞으로 열 개 남짓한 테이블마다 작은 촛불이 타고 있었다. 청담동 야누스보다는 줄어든 공간이지만 분위기는 더 오붓해졌다. 무대에서 연주를 하면 한 공간이 통째로 선율에 휩싸일 것같다.

약속시간에 정확히 박성연씨가 나타났다. 약간 색깔있는 선글라스를 쓰고 몇십년 동안 변하지 않은 숏커트 헤어스타일 그대로다. 시원한 눈매로 활짝 웃는 모습도 여전했다. 박성연씨를 보면 늘 하는 생각이지만, ‘매력적’이라는 단어가 임자를 제대로 만난 듯하다.




청담동 때보다 작아졌지만 분위기는 더 야누스다워 보인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말해주신다. 청담동 터는 훨씬 더 컸는데 지금은 맨처음 야누스 시절과 가장 비슷한 분위기로 돌아온 것같다.


1978년 신촌역 부근에 처음 야누스가 생겼을 때는 당시로서는 문화적 사건이 아니었나 싶다.

야누스가 생기기 2년 전에 이태원에 ‘올댓재즈’라는 재즈 클럽이 생겼다. 클럽 주인은 외국국적을 가진 중국 사람이었고 외국인만 들어갈 수 있었다. 후에 중국 주인이 본국으로 가면서 한국인에게 인계를 했다. 야누스는 우리 손으로 연 첫 재즈 클럽이라 할 수 있다.


왜 재즈 클럽을 열 생각을 했나.

마음껏 노래 부르고 연주할 공간이 필요했다. 당시에는 재즈에 대한 인식도 별로 없었고 연주할 공간도 없었다. 다른 클럽에서 재즈를 하다가 해고를 당한 경험도 여러번 있었다. 손님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그래서 내가 직접 재즈 공간을 만들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내가 야누스를 한다니까 어머니는 크게 반대하셨다. 술집을 하는 거 아니냐고. 술집을 하면 지옥에 가서도 화롯불을 머리에 이고 있게 될 거라고 반대가 심하셨다.



신촌 야누스에서 현재 서초동 야누스까지 다섯 번을 옮겼다. 각각의 의미가 있지 않겠나.

신촌 시절에는 재즈가 뭔지도 모르고 문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선율에 이끌려 들어오는 젊은 예술학도들이 많았다. 재즈를 알아서라기보다 재즈가 흐르는 그 공간이 주는 자유, 해방감 등이 그 사람들을 이끌었던 것같다. 당시 야누스 출입문이 무거웠는데도 그 문을 어찌나 가볍게 열고 들어오는지. 혜화동 시절은 야누스가 가장 많이 대중에게 알려졌던 때다. 공연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이 가득 차고 열기가 넘쳤다. 그 다음에 옮긴 이대 후문 쪽은 약간 반칙이다. 야누스를 유지할 돈이 모자라던 터에 마침 주위에서 동업을 하라고 해서 남자 분 2명과 동업을 하게 됐다. 그런데 얼마 후 재즈로는 현상 유지가 안된다며 나더러 나가달라고 했다. 그래서 청담동으로 옮기게 됐는데, 사연이 참 많았다. 어쨌거나 이때는 오디오가 훌륭했기 때문에 음악 마니아들이 주로 왔다. 청담동 야누스는 규모가 큰 데다 적자가 계속돼 유지가 힘들었는데 어떤 분이 후원을 해줘서 이번에 서초동으로 옮기게 됐다. 건축 계통에 계시는 분들인데 나와는 특별한 친분이 없는데도 늘 야누스를 도와주신다.



헤화동에서는 왜 그만두게 됐나. 당시 재즈 선풍이 불면서 젊은 사람들이 공연을 보며 환호하던 모습이 선한데.

집주인이 나가라 그러더라. 하하. 그때 마음고생 많이 했다. 10년 동안 터를 잡았던 곳인데 일시에 나가라고 하니. 혜화동 시절을 접으면서 그동안 빚진 거 다 갚느라고 어머니 집까지 팔아야 했다. 그때 야누스에 술을 대주던 아저씨가 있었는데 내가 밀린 외상값 갚으려고 하니까 대개는 그런 경우 떼먹고 가버린다며 외레 외상값 일부를 깎아주더라.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경영에는 영 소질이 없다. 믿고 일을 맡겼던 주방장이 하루 매상을 정기적으로 빼간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도 30년 동안 야누스를 놓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8군 오디션을 통해 재즈를 시작한 후 무대에도 많이 섰고 공연도 많이 했다. 하지만 다른 클럽에 가서 노래 부르는 것은 싫었다. 내가 마음놓고 노래를 부를 공간, 후배들이 연주할 공간이 필요했다. 지금까지 야누스 없는 나는 생각할 수가 없다.


경영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국내 재즈층이 얇기 때문인가.

재즈는 대중적인 음악이 아니다. 한때 국내에서 재즈 붐이 일었던 것은 거품이라고 본다. 토양이 형성돼 있지 않다. 사실 어느 나라든 재즈 클럽 운영은 쉽지 않다. 뉴욕의 블루노트 정도가 유명한데, 거기는 관광객들이 많이 들르는 명소가 돼있기 때문이다. 국내에도 블루노트가 들어왔다가 망하지 않았는가. 유럽도 마찬가지다. 중국에도 재즈 클럽이 많이 있고 심지어는 북한에도 재즈 클럽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다. 어느 나라에나 재즈 클럽은 있지만 어느 나라건 메인 스트림에 들어있는 건 아닌 것같다. 게다가 내가 경영을 잘 못하는 부분도 있다. 30년 동안 해왔는데도 영 늘지 않는 것이 비즈니스 능력 같다. 하하.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무대에 라이트가 켜졌다. 9시가 되어 연주가 시작될 참이다.

드럼과 재즈피아노, 콘트라베이스로 구성된 트리오였다. 박성연씨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가 참 잘한다”며 잠시 자리를 뜨더니 무대에 올랐다. 박성연씨가 허스키하면서도 힘있는 목소리로 두 곡을 불렀다. 청중은 여섯 사람뿐이었지만 연주는 1천명이 치는 박수를 받아야 할 정도였다.



목소리가 여전하다. 야누스에서 늘 노래를 하기 때문인 것 같다.

노래를 하는 것이 내 삶이니까. 늘 연습을 한다. 작년 12월에는 LIG 아트센터에서 재즈피플 리더스풀에서 1위를 한 분들과 나흘 동안 연주를 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여전히 혼자인데, 꼭 결혼이 아니더라도 연애는...

어느 연인이 재즈처럼 나를 매료시킬 수 있을까만. 나는 보수적인 사람이다. 사람을 그냥 만나는 건 별로 내켜하지 않는다. 중간중간 좋아하는 사람이야 왜 없었겠는가. 아직은 그냥 이 상태다.



요즘은 젊은 연예인들까지 다 대학 강의를 나가는데, 강의는 안 나가나.

작고하신 작곡가 길옥윤씨가 함께 강의를 나가자고 권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난 그런 일을 하기 싫다. 강의를 나가면 아무래도 딴 생각이 생길 것 같기 때문이다. 난 그냥 목소리가 나올 때까지 재즈 뮤지션으로 살고 싶다.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안해봤나.

그만두는 건 나더러 죽으라는 소리다. 재즈는 멋있고 아름다운 음악이고 내 생명의 원천이다. 재즈와 야누스를 하는 30여년 동안 힘들었지만 내내 행복했다.


박성연씨는 미8군 오디션을 통해 재즈를 시작했다. 선천적으로 음악을 좋아하는 집안에서 자라났지만 재즈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고등학교 졸업 후 미8군 오디션을 봤다. 당시 국내에는 재즈에 대해 아는 사람이 드물었지만 미8군에서는 재즈가 선풍적인 인기였다. 자신이 들어왔던 음악이 재즈인 줄도 모르고 미8군에 가서야 그것이 재즈인 줄 알았다는 박성연씨는 오디션에서 ‘스타더스트’를 불렀다. 집안 형편으로 대학 진학을 하지 않았던 박성연씨는 미8군에 들어간 후 음악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뒤늦게 숙명여대에 입학해 작곡을 공부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재즈 뮤지션으로 살고 있는 박성연씨는 한국의 빌리 할리데이(전설적인 흑인 재즈 보컬리니스트), 한국 재즈의 1세대 혹은 한국 재즈의 대모라 불리고 있고 재즈전문월간지 ‘Doobop'에서 정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후배 뮤지션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모두들 열심히 하고 재즈적인 냄새가 많이 나서 좋다. 우리 때와는 달리 재즈만 할 수 있는 것만 해도 행복할 거란 생각이다. 우리 때는 캬바레에 나가 돈을 벌면서 재즈를 연습하던 사람들도 많았다. 지금도 넉넉하지는 않겠지만 공연을 하면서 재즈에만 몰두하는 후배들이 많다.


앞으로 계획은?

야누스를 잘 운영해 나가고 후배들과 더불어 열심히 노래 부르는 것뿐이다. 조금 욕심을 부리자면 젊은 친구들이 야누스에 많이들 와서 재즈와 친해졌으면 한다. 그러면 젊은 뮤지션들이 더욱 힘을 얻을 것이다. 재즈는 어려운 음악이 아니다. 와서 듣고 느끼면 되는 음악이다. 재즈의 매력은 한 번 빠지게 되면 마니아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야누스에서 아르바이트하는 학생들도 재즈를 줄곧 들으니까 다른 음악은 심심하게 느껴진다고 하더라.


‘세월이 흐른 후에’나 ‘물안개’ 같은 곡은 대중적으로도 충분히 어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새 앨범을 낼 생각은 없나.

앨범은 1985년, 99년 두 차례 냈다. 올해 앨범을 내볼 생각이다. 어떤 평론가 선생이 내 목소리는 오케스트라가 어울린다고 하시더라.


내년 설날에도 야누스표 떡국을 먹을 수 있을지.

하하. 물론이다. 단 돈가스는 안한다.(박성연씨는 신촌 야누스 시절부터 새해가 되면 손님들과 함께 떡국을 나눠 먹었다. 크리스마스 때는 갈 곳 없어 야누스 근처에서 놀던 아이들을 불러 돈가스를 해먹이기도 했다) 요즘은 그때처럼 아이들이 굶주리지 않아서. 하하.




인터뷰를 마치고 바에서 사진을 찍는 동안 다시 연주가 시작됐다. 드럼 소리가 현란하다. 야누스가 전율하고 있는 가운데 박성연씨는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빛 속에서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기사 뒷 이야기가 궁금하세요? 인터뷰365 편집실 블로그

김다인

영화평론가. 인쇄매체의 전성기이던 8,90년대에 영화전문지 스크린과 프리미어 편집장을 지냈으며, 굿데이신문 엔터테인먼트부장, 사회부장, LA특파원을 역임


관심가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