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청객 구영탄은 갔지만 악질로 일어선다’
‘불청객 구영탄은 갔지만 악질로 일어선다’
  • 김우성
  • 승인 2008.06.2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만화계의 빅3, 만화 ‘불청객 시리즈’ 고행석 작가 / 김우성



[인터뷰365 김우성 / 사진 방혜원] 80년대 동네 어귀에는 어김없이 ‘대본소’라 부르는 만화가게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의 책 대여점과는 다른 형태의 그곳에는 수십 권씩 묶인 일정한 두께의 만화책이 천장에 닿을 듯 가득 차 있었다.


그 시절 만화가게와 오락실은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골목에서 다방구, 오징어술래잡기, 짬뽕, 고무줄 등으로 시간을 보내던 아이들은 해 질 무렵이 되면 엄마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가거나, 또 다시 만화가게와 오락실로 몰려들었다. 미디어가 발달하고 성인과 아이들이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지금에 이르러 볼 때 그렇게 불량(?)하지도 않았건만 엄마들의 고민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집집마다 “만화가게 오락실 다니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말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하지만 아이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만화가게에서 ‘불청객 시리즈’의 인기는 대단했다. 구영탄은 당시 아이들은 물론 청소년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우수에 젖은 까치(공포의 외인구단)의 눈빛에 비하면 구영탄의 꺼벙한 눈은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었다. 행동거지도 무척 엉뚱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기에서 구해내고 홀연히 사라졌다가 그녀의 결혼식장 기념사진에서 목격되는 식이었다.


‘불청객 시리즈’를 그린 고행석이라는 작가가 늘 궁금했다. 구영탄의 아버지로 나오는 캐릭터와 똑같이 생겼을 거라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리고 실제 그를 만났다. 강서구 화곡동에 자리한 화실에는 문하생들의 손놀림이 분주했다. 가장 고참 격 만화가의 안내로 고행석 작가의 방에 들어섰다.




뉴스를 찾아봤는데 최근 근황을 알아내기가 힘들었습니다.

대본소 만화만 하니까 많이 안 알려졌을 겁니다. 지금 대본소 자체가 굉장히 줄었거든요. 한때 대본소가 제일 많았을 때가 1만6천여 개 정도였는데 대략 1천군데 남았다니까 많이 줄었지요. 대본소 작가라는 건 대본소에서만 만화를 팝니다. 대여점에는 못 들어가요.





왜 못 들어가죠?

이유는 여러 가지예요. 우선 책 자체가 너무 많은 양이 나오기 때문에 대여점에서 받을 여력이 없습니다. 좁은 공간이기 때문에. 일본만화처럼 1편 나오고 그다음 2편 나오는데 한 달씩 걸리고 하면 장사도 될 텐데, 우리는 한 달에 서른 권씩 쏟아 붓거든요. 그래서 우리 시장은 대본소로 국한되어 있습니다.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하는 작가들이 아니고서는 대본소밖에 판로가 없다는 얘기죠. 점점 우리같은 대본소 작가들은 시야에서 사라지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소식이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구영탄과 은하를 기억하는 팬들이 상당합니다. 이제는 그 독자들의 나이도 30대를 훌쩍 넘겼지만요.

맞습니다. 나이들이 30대 40대 그렇더라고요. 40대가 제일 많고.


팬들로부터의 요청이랄까, 호응은 완전히 사라졌나요?

인터넷으로 유료서비스를 하고 있는데 거기 들어가서 본다는 분들은 아직 조금 있는데 이제 만화 볼 나이들이 다 지난 것 같습니다. 제가 한동안 건강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가면 이름 적어낸 거 보고 의사들이 거의 다 알아봐요. “요즘도 만화 그리느냐”고 물어보고. 난 계속 만화 그려왔습니다. 다른 부업도 해본 적 없고 만화만 35년째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대본소 만화만 그렇게 해온 겁니다.


대본소의 몰락을 피부로 느껴왔을 텐데, 대여점용 만화를 그려보겠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나요?

대본소 때문에 제가 이렇게 먹고 살게 됐으니까, 저는 대본소 만화가 최우선이라고 얘기하고 다녔습니다. 그랬던 것이 대본소 만화만으로는 먹고 살기 힘들게 되니까 이제는 후회가 들죠. 지금 잡지나 신문에 연재한 작가들은 수입이 괜찮을 겁니다. 한때는 우리도 좋았었지. 대본소 만화가들이 그 사람들(잡지 신문 연재)보다 수입이 좋았었어요. 대본소가 1만개, 7, 8천개로 줄어들 때까지만 해도 수입이 짭짤했었습니다. 그때 돈을 모으지 못하고 허투루 쓰는 바람에...


소위 말하는 재테크를 안 하셨다는 말이지요?

만화가들이라는 게 돈을 모을 줄 모릅니다. 만화가들 성격상 저축이라는 걸 모르는 것이지요. 생기면 생기는 대로 술 마시고 여기저기 돈 퍼주거나 그러고. 만화가들은 돈이 있으면 일이 안 돼요. 돈 떨어지면 할 수 없어 하는 거지. 근데 나는 워낙 가난하게 살아와서인지 지금 61세인데 35년 만화 그리면서 15년 전쯤부터는 저축에 대해서 조금씩 알았어요. 하하. 이제 대본소 만화가가 열 명도 안 남았지. 다른 만화가들은 지하 월세방에 살면서 마누라 어디로 사라졌다는 소식도 간간이 들려오고. 아주 안 좋게 됐지요.


그래도 80년대에서 90년대 중반 대본소 최고 전성기 때는 이런 생활을 상상할 수 없었겠습니다.

아무렴. 그때는 전부 자가용 끌고 다녔지. 보통 만화일 한다고 하면 공무원들 두세배 이상의 수입을 올렸으니까요. 그때 공무원들의 월급이 적긴 했어도 우리 스스로가 많이 번다고 느낄 정도였으니까. 15년 전부터 침체기가 오기 시작했고 딱 그때부터 돈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한 게 나로서는 다행이었죠. 그것도 술 먹고 남은 돈 조금 모으기 시작한 거지만.





대본소 만화의 몰락은 여러 가지 요인이 지적된다. 첫째는 일본만화의 개방이다. 대본소 만화를 먼저 접하고 이후 일본만화를 접한 세대에게는 덜 할 수 있으나 그보다 더 어린 세대, 즉 한국만화가 자생력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만화를 동시에 접한 세대들은 포켓몬과 짱구를 보며 열광하게 된 것이다. 둘째는 재개발과 함께 등장한 책 대여점이다. 어두침침하다는 선입견이 있던 만화가게는 신도시의 등장과 함께 자연스레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 자리에는 책 대여점이 들어왔고 그들로서는 공간을 지나치게 차지하는 대본소 만화를 들여올 수가 없었다. 스토리의 부재도 빼놓을 수 없다. 대량으로 승부하는 대본소 만화의 특성상 스토리의 고갈은 늘 고민이었다.



예전부터 구영탄이라는 캐릭터는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하지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은하라는 캐릭터도 그렇고, 항상 등장하는 캐릭터가 네 명 정도죠?

주요인물은 꽤 많아요. 한 열 명 정도 될 겁니다. (이 대목에서 그는 기자와 번갈아가며, 또는 동시에 캐릭터 이름을 읊었다) 삼식이도 있고 구만이 있고 종구 있고, 옛날에 불청객 했을 때 그랬죠.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는 후에 이어진다) 지금은 불청객 안 합니다. 불청객을 너무 남발해서 독자들이 식상해하면서 안 보더라고. 모든 제목에 불청객이 들어가니까 제목 짓기도 어렵고, 매번 불청객을 등장시켜야 하니까 이야기도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요. 그래서 인기가 우수수수 떨어졌지. 그래서 10여 년 전에 대본소 만화가가 스물한 명 남았을 때 내 판매랭킹이 19위였습니다. 한때 이현세, 박봉성, 고행석이 빅3 이었는데 그렇게 불청객이 한 번 가기 시작하니까 출판사에서도 쫓겨나다시피 했습니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려고 했는데 받아주려는 곳도 없었고요.


불청객을 다시 못 보는 건가요.

지금은 악질 시리즈로 다시 일어났습니다. 물론 악질이나 불청객이나 가만히 따져보면 동질성이 있습니다. 악질스런 표정하며 하는 짓도 불청객처럼 하는 게 아니라 악질답게 하는데도 결론은 또 불청객과 닮아있어요. 남 좋은 일 다 시켜주고 자기가 욕은 얻어먹고 남는 거 하나 없이 살아가는 게 불청객이었거든. 얼굴은 많이 바뀌었지. 눈은 꺼벙이 눈에서 아주 날카롭게 바뀌었고 표정은 고약해졌죠. 또 다른 게 있다면 그전에는 코믹 만화만 했었는데 지금은 액션 만화를 그려요. 그렇게 악질 시리즈로 다시 살아났죠. 살아났는데 아직도 그때 불청객에서 무너진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청객 이미지를 말하는 건가요. 불청객에서 무너졌을 때를 말하는 건가요.

불청객에서 무너졌을 때의 고행석이라는 작가의 이미지, 악질이라는 작품으로 다시 몸부림 치면서 일어서보려고 하는데, 어느 정도 일어섰는데, 그 때 무너진 고행석이라는 이미지가 아직 대본소 주인들이나 소비자들에게 남아 있다는 겁니다. 앞으로 자꾸 이야기를 바꿔가면서 해야지요.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으니까 재밌게 해서 버텨봐야죠. ‘고행석이가 정말 재밌게 열심히 하네’라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요즘 유명인들을 두고 ‘호감’이다 ‘비호감’이다 하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 ‘호감’이라 하는 인물들을 보면 구영탄과 닮아 있습니다. 어딘지 모자라 보이면서 자신이 손해보고. 구영탄이라는 캐릭터를 보면서 그 당시 독자들이 많은 힘을 얻고 위안이 되고 즐거워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입니다.

영탄이가 그랬습니다. 잘난 척해도 바보처럼 잘난 척하니까 전혀 잘나 보이지 않잖아요. 거기에 사람들이 웃게 되고 그런 거지. 나는 어려운 인생 문제를 갖고 사회의 골치 아픈 것들을 끄집어내기보다는 내 만화를 보고 돌아서서 사람들의 마음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불청객을 보고 나면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이 ‘에이 그냥 대충 살지 뭐’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작품을 만들기 원했죠.


실제 내용이 그런 것 같습니다. 영탄이는 때로 찢어지게 가난한데 그 가난한 정도가 너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가난하기도 하고. 잘 난 것도 없고, 주어진 상황이 우울할 수밖에 없음에도 항상 희망적으로 행동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사람들이 영탄이를 보면서 ‘지금 나의 고뇌가 사치에 불과하구나’하고 느끼게 해주는 겁니다.





영탄이는 스포츠를 무척 잘합니다.

내가 스포츠를 워낙 좋아합니다. 운동 하는 건 별로 없지만, 스포츠는 거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작가들은 스포츠를 다룰 때 깊지 않다는 생각을 했어요. 스포츠도 꽤 학문적입니다. 내가 스포츠 규칙이라든지 운동선수의 심리상태까지 표현하면 재밌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자랑하고 싶기도 해서 스포츠를 많이 다루었죠. 하하.


만화를 위해서도 실제 규칙 등을 많이 공부하고 봤을 것 같습니다.

제일 실감나야 하는 게 주인공이 링 위에 올라갔을 때의 마음 같은 것이거든요. 링 위에도 올라가봤습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기분을 느껴봤죠. 야구 축구는 단골이었고.


제일 극에 달했던 게 <스포츠 가족>이었지요?

그때가 올림픽이 열리기 전이었는데 인기가 굉장했습니다.


그리고 90년대 초반 상당히 진지했던 전개의 만화가 기억납니다. 그 전까지는 구영탄이 코믹하게 나오다가 대본소 아주머니가 “고행석의 야심작이 나온다”고 일러줄 정도였는데요. 고아로 자란 영탄이가 축구 선수로 성공해 이례적으로 은하와 결혼을 하고, 영탄이가 은하에게 죽음을 맞고.

러브 스토리 말하는구나. 제목이 <불청객의 러브스토리>예요. 지금도 대표작 중의 하나로 내놓습니다.


<폭설 속의 불청객>도 기억에 많이 납니다.

아 그거 ‘오 헨리’ 작품을 각색한 건데 전혀 모르더라고. 하하. 원래 폭설과는 관계없는 은행 금고털이를 끝까지 쫓는 형사 이야기인데 그걸 폭설 속에 갇힌 사람들로 만들어서 꾸몄죠. 가장 많은 분들이 기억하는 작품입니다.


그 장면까지 기억납니다. 식량이 없어서 눈을 녹여서 마른 오징어를 끓여 먹고.

원래 그런 장면을 잘합니다. 채플린 영화에서 많이 봐서. 영화에서 많이 배웁니다.


영화도 상당히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작업실을 얼핏 둘러봐도 영화서적이 상당하네요.

만화가는 영화를 모르면 만화를 그릴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만화가는 즉 영화인이라는 생각입니다. 기회가 되면 꼭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지금 조금씩 진행이 되는 곳도 있습니다. 크게 기대를 안 했는데 상당히 열의를 보이고 진지하게 접근하더군요. 영화화를 제의한 사람들은 불청객이라는 타이틀을 반드시 붙이고 싶어합니다.





‘구영탄’의 경우 독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다고 했는데 ‘은하’라는 캐릭터는 어떻게 탄생했나요.

구영탄은 말씀드린 대로 그런 취지에서 만든 완전 가공인물이고, 은하는 내 여동생 친구의 이름 그냥 쓴 겁니다. 은하 역시 가공인물인데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를 만들어봤죠. 왈가닥이고 거칠고 그러면서 솔직하고 맹하고. 그리고 ‘마구만’이니 ‘장치섭’이니 하는 캐릭터들은 화실에서 같이 일하던 사람들을 모델로 갖다 붙였습니다. ‘장민’ 역시 가공인물입니다. 구영탄의 라이벌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형을 만들어봤죠.


은하는 가장 좋아하는 인물, 장민은 가장 싫어하는 인물, 구영탄은 가장 닮고 싶은 인물인가요?

나는 구영탄 같은 사람 닮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조용히 아무도 몰래 행복을 느끼면서 살고 싶은 성격입니다.


자제분들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큰애는 결혼했고, 둘째, 셋째, 딸만 셋입니다. 작년 11월 말에 손주를 봤는데 아직 갓난아기라서 어루만지기도 힘들지요. 조금 크면 업어주고 어디 데리고 다니고 싶습니다.


독자들도, 영탄이도 나이가 들었습니다. 소회 한 말씀 해주시죠.

기억해 주시는 분들께 그저 고맙습니다. 나는 할 줄 아는 게 만화밖에 없습니다. 죽는 날까지 만화를 그릴 겁니다. 지금 대본소 만화가들이 갈 곳 없이 비참하게 된 게 가슴 아픕니다. 다시 한 번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문화든 소비자들의 패턴은 돌고 돌지 않습니까. 80년대 복고에 대한 향수가 수년전부터 올라오기 시작하듯, 디지털화가 된다고 하지만 구영탄을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올 거라 생각합니다. 아직 구영탄의 독자들은 정말 많거든요.

일본만화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한국만화가 국가의 보호를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태한 면이 있었지요. 개방 후 10년이 지난 지금은 굉장히 많이 발전했습니다. 허영만, 이현세 등 여기저기서 영화화 얘기가 들리고, 좋은 작품이 참 많습니다. 굉장히 스피드감 있고요. 하지만 독자들은 아직 ‘한국만화의 수준이 이럴 거야’라고 합니다. 지금의 한국만화는 예전 한국영화를 ‘방화’(邦畵)라고 해서 낮잡아 보던 시절 정도가 될 것입니다. 영화처럼 만화도 다시 일어설 거라 확신 합니다. 신문이나 잡지 연재도 기회가 닿으면 하고 싶어요. 유명도를 키워 현재의 독자들과 만나고 싶습니다. 저 아직 멀쩡합니다.





그의 작업실 가득 반가운 작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 대본소의 빽빽한 진열대 앞에서의 벅참과 흥분이 다시금 느껴졌다. ‘공부는 언제 하지’라는 고민은 없었다. ‘저 만화를 언제 다 읽지’라는 고민이었다. 행복한 고민이었다. 잠은 집에서 자야 했기에 수십 권씩 빌려 오곤 했다. 아예 이불 옆에 간식거리와 함께 쌓아두고 두문불출 만화만 읽던 시절이었다. 그 집중력으로 공부를 해봤으면 하고 우스갯소리를 많이 하지만 그때의 독자들은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만화를 보고 있을 것이다. 구영탄은 그 누구에게도 오라는 손짓을 않지만, 지금도 어느 귀퉁이에서 꺼벙한 얼굴을 드밀고 우리들을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기사 뒷 이야기가 궁금하세요? 인터뷰365 편집실 블로그

김우성
김우성
press@interview365.com
다른기사 보기


  • 서울특별시 구로구 신도림로19길 124 801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737
  • 등록일 : 2009-01-08
  • 창간일 : 2007-02-20
  • 명칭 : (주)인터뷰365
  • 제호 :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명예발행인 : 안성기
  • 발행인·편집인 : 김두호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문희
  • 대표전화 : 02-6082-2221
  • 팩스 : 02-2637-2221
  • 인터뷰365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interview365.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