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시장'의 장총찬은 자살을 생각했었다
'인간시장'의 장총찬은 자살을 생각했었다
  • 김두호
  • 승인 2008.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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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감독 제작자, 만능 엔터테이너의 휴먼 드라마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진유영 감독은 만날 때마다 분위기가 다르게 느껴지는 독특한 인물이다. 카리스마가 넘쳐 금세라도 천하를 호령할 듯하다가도 삽시간에 순박한 시골 총각 같아지기도 한다. 불의를 보면 주먹을 움켜쥐지만, 가슴 아픈 사연 앞에선 대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진실한 사람에게는 머리를 조아리고 거만한 자에게는 눈초리를 치켜뜬다. 그러나 그의 영혼에는 늘 향기 좋은 꽃이 핀다.”


위의 말은 진유영을 인터뷰한 기자의 표현이 아니다. 한 때 옳은 말을 마구 토해내는 국회의원이었지만 지금은 본래 있던 자리, <인간시장>의 작가로 돌아 온 김홍신이 최근에 진유영이 펴낸 자전적인 에세이집 <카메라 앞뒤의 30년, 라스베이거스 짬뽕사건>의 추천사에서 꺼낸 앞글이다. 빅 베스트셀러로 출판사(史)에 기록된 <인간시장>의 주인공이 장총찬이다. 법을 무시하는 폭력 앞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고 폭력에는 폭력으로 호쾌하게 제압하는 사나이가 장총찬이다. 일지매 같은 정의를 품고 있었지만 검열문화가 시퍼렇게 살아 있던 시절은 폭력성 소재로 미움을 사기도 했다.


소설의 인물 장총찬에 인간 진유영을 포개는 것은 과장이 따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유영은 그 가공의 인물과 운명의 괘를 함께 했다. 연기자로 톱스타의 인기를 점하고 감독으로 변신했다가 자살까지 시도하던 그를 건져 준 작품과 배역이 <인간시장>과 장총찬이었다. 그는 영화 바깥에서도 소설이나 영화 같은 또 하나의 작품을 몸으로 써왔다. 기자는 그가 배우 겸 감독일 때 만나다가 이제 중년을 넘어 선 2008년 여름에 다시 만났다. 진유영은 지금 다큐멘터리 제작자이면서 연출가로 본업이 바뀌어 있다.



영화와 TV에서 연기자로 본 지 오래 된다. 그 후 어떻게 지냈는지?

화제에 오른 작품이 드물긴 했지만 꾸준히 연기를 했다. 2004년 변영주 감독의 <발레 교습소>, 김상진 감독의 <귀신이 산다>, 작년에 손태웅 감독의 <해부학교실>에도 출연했다. 그러나 10년 전부터 KBS TV 다큐멘터리 프로의 외주제작사를 차려 주로 연출을 했다. 세계 오지를 찾아다니는 <도전 지구 탐험대>로 시작해 <바다는 살아있다> <조영남이 만난 사람> 등 50여 편을 만들었다. 얼마 전에는 우리나라의 씨름과 함께 터키(야윌귀레시) 일본(스모) 몽골(부흐) 등을 찾아다니며 4개국의 민속 경기를 다큐로 제작했다.



<조영남이 만난 사람>은 최근에는 못 본 것 같다.

그가 친일 논란에 휩싸이면서 3년간 만들던 프로가 죽었다. 이런저런 일로 틈이 생겨 내 책을 준비했다. 사실 책을 만들려면 수십 권을 만들 자료가 있다. 나는 1975년 MBC 공채로 연기활동을 시작하면서 부딪치고 겪고 느낀 기록들을 메모해온 습관이 있다. TV드라마 <제3교실>, 영화 <고교얄개>시대부터 수없이 출연한 촬영 현장의 기록을 버리지 않았다.





나를 절망시킨 예술영화의 꿈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진유영의 모습은 역시 70, 80년대 영화와 TV 드라마의 화려했던 주역 스타 시절이다. 대체로 반항아적인 기질과 액티브하고 야무진 캐릭터의 배역이 많았다. 한국형 제임스 딘이라는 소리도 따랐다. 행복했던 순간보다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이야기부터 듣고 싶다.

내 생애 최악의 시간은 감독 데뷔 작품인 <지금은 양지>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다가왔다. <매춘> <고금소총> 등의 에로영화가 쏟아져 나올 무렵, 나는 상업영화를 거부하고 예술작품을 만든다며 첫 작품을 준비했다. 죽은 친구의 영안실에서 힌트를 얻은 시나리오를 준비하면서 의리를 앞세운 선후배 연기자들이 대거 출연을 약속했다. 박중훈 최재성 유동근 이계인 김성찬 강남길 정해선 윤일봉 윤양하 선후배 등 스타만 30여명이 넘었다. 그런데 그 작품은 당시 3억 원, 지금 가치로 50억 원 쯤의 빚을 안겨주고 나를 파산시켰다.



실패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나? 그 때 자살 여행을 했다는 건가?

만들기도 전에 이미 성공한 기분에 취해 있었으니 잘 나가던 시절의 오만이 첫째 원인이고, 다음은 많은 출연자를 배려하다가 오히려 드라마의 완성도에 주름이 갔다. 결국 제작비를 빌려준 흥행업계의 주먹들이 그냥 있지 않았다. 1988년 초 삭풍이 부는 길거리를 헤매다가 야간 열차편으로 무작정 서울을 벗어나 남쪽으로 야반도주했다. 어디서 어떻게 죽는 것이 좋을까 하고 자살 길을 찾아 떠난 막다른 여행인데 육지 끝에 있는 해남인가 어디 작은 도시의 허름한 극장에서 결심이 바뀌었다.



극장에서 살 길이?

낡은 필름을 가져다가 동시 상영을 하던 극장이 마침 내가 출연한 영화 <불타는 욕망>을 돌리고 있었다. 스크린에서 내 모습을 그토록 진지하게 쳐다 본 적이 없었다. 불의를 향해 포효하는 내 젊은 청춘을 스스로 죽인다는 것이 억울했다. 나는 공중전화통으로 달려가 평소 나를 아끼는 지방 극장의 상무 백정호 형을 찾았다. 형, 나 죽으려고 하는데 살 수 있는 길은 없을까 하고 물었다. 그 형은 대뜸 “너한테는 <인간시장> 밖에 없어. 그걸로 다시 덤벼봐”라고 살길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그길로 걸인행색의 옷을 벗고 깔끔한 모습으로 김홍신 작가를 찾아갔다. 그는 원작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이면 판권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원작료도 돈을 벌어 갚으라며 기를 살려주었다. 그게 재기의 기회가 됐다.



1983년에 개봉한 <작은 악마 스물두 살의 자서전>이나 그 뒤에 나온 <불타는 욕망>도 소설 <인간시장>을 소재로 한 영화가 아닌가?

그렇다. 모두 내가 주인공 장총찬으로 출연했다. 소설이 연작으로 나와 소재는 무궁무진했으나 모두 원작의 이름을 검열당국이 못쓰게 해 제목이 다르게 만들어졌다. 이번에는 원작명을 그대로 쓰려는 나의 시도가 뜻을 이루었다. 나의 신작 <인간시장> 연출 기사가 처음으로 스포츠서울에 터지면서 죽인다고 협박하던 빚쟁이들이 앞 다투어 돈을 더 갖다 쓰라고 아우성이었다. 기적은 계속되었다. 촬영이 시작되자 하늘은 두 차례 절묘한 영상을 만들어주었다.



절묘한 영상이란 어떤 건가?

양평에서 촬영할 때 내용으로 보아서 눈이 내리는 장면이 필요했다. 10월이라 눈이 올 턱이 없었는데 바로 그걸 바라던 날 신기하게 하얀 눈송이가 흩날렸다. 그 지역에서도 처음이라는 눈발이 카메라 앞에서 휘날렸다. 또 한 번은 출연 인물의 황폐한 분위기를 담으려면 비바람이 거칠게 불어야 좋은데 그것도 그 순간 하늘이 장엄하게 연출해 주었다.



제작자나 감독 중에는 자신들의 작품이 개봉되는 첫날은 가슴이 두근거려 극장 앞에 못 간다는 사람도 많다. 흥행에 성공한 작품인데 개봉 첫날 어떤 느낌이었나?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터질 것 같다. 밤새워 검열에 잘린 필름을 편집해 개봉 첫날 9시에 필름을 들고 피카디리극장으로 달려갔다. 10시에 시작하므로 한 시간 전이다. 아, 그런데 극장 앞 길거리에 인파가 붐비고 줄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사고가 터진 줄 알았는데 그게 내 영화 <인간시장 오! 하나님> 관객들이었다. 하하하. ‘부산도 터졌습니다.’ ‘ 광주도 터졌습니다..’ 전국에서 난리가 났다.





체구가 작은 편이지만 빈틈을 보여주지 않는 당차고 단단한 몸놀림, 때때로 분노가 섞인 시선과 젊은 기백이 넘치는 당돌한 말투의 진유영을 스크린의 재목으로 처음 발견한 사람은 <낙동강은 흐르는가>를 준비하던 임권택 감독이었다. 1970년대 제3공화국 시절 6.25 때 육탄으로 북한군의 탱크를 막아낸 전쟁 영화 <낙동강..>에서 스물한 살 진유영은 첫 주연 배우로 충무로에 입성했다. 대작 국책영화로 제작되었으나 그 영화는 고증이 부족하다는 고위층의 평가로 그 해 대종상 시상식에서부터 외면을 받았다는 얘기가 따른다.


진유영의 연기자로서의 진가는 청소년영화의 흥행 대표작으로 꼽히는 석래명 감독의 <고교얄개>부터 윤기를 발했다. 70년대 하이틴 영화의 주역인 임예진의 파트너였다. 그 후 배창호 감독의 대표작인 <깊고 푸른 밤> 등 출연 영화가 40여 편에 이른다.



<깊고 푸른 밤>에 출연할 무렵 그 작품의 소재를 제공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잘 나갈 때 왜 미국으로 떠났나?

나에게 아픈 구석이 많다. TV드라마에 출연하면서 프로듀서와 격투를 한 적이 있다. 나이가 동갑이고 입사 1년 된 조연출 PD인데 매사에 너무 도도하고 연기자를 함부로 대했다. 선배까지 선생님으로 호칭하던 그를 엘리베이터 안에서 시비가 붙어 두들겨 팼다. “당신 배우하기 싫어?”란 협박에 분노가 폭발했다. 방송 출연정지 3개월의 처벌을 받았다. 여기에 그 폭력사건을 사실보다 더 과장시켜 수사프로에서 흉악범 연기를 했던 얼굴까지 조롱하듯이 게재한 신문기자까지 찾아가 한 방 갈겼다. 그런저런 일로 멀리 떠나고 싶었다. 유학을 꿈꾸던 미국으로 간 것이다. 유학 비자는 한계가 있고 장기 체류를 위해서는 영주권이 절대 필요해 머리를 굴리며 살아야 하는데 내 주변에 <깊고 푸른 밤>의 실존 인물들이 많았다. 배창호 감독과 안성기 형이 미국에 왔을 때 그런 소재를 제공했다.



눈물 젖은 추억 <깊고 푸른 밤>


책 제목으로 쓴 ‘라스베이거스 짬뽕 사건’은 무슨 사연의 이야기인가?

미국은 추수감사절이 되면 어딜 가나 칠면조 요리만 먹게 된다. 친구들과 돌아다니며 빵조각과 칠면조만 질리게 먹다가 라스베이거스에서 중국요리집을 발견했지만 문을 닫고 있었다. 다행히 한국에서 있었다는 요리사가 미국에 없는 짬뽕요리를 만들어 포장해 주었다. 그걸 세워둔 자동차로 가져가다가 아스팔트길에 엎질렀다. 나는 미친 듯이 그걸 핥아 먹었다. 그야말로 눈물 젖은 추억이다.



영화 이야기처럼 영주권 때문에 미국에서 결혼했다는 소문은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빈손으로 미국에 가 바닥 생활부터 시작해 열심히 어학공부와 함께 영화전문학교(AFI)에서 청강도 하며 꿈을 만들어 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영주권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꼈고 그 무렵 선배가 소개한 동포 시민권 여성도 알게 됐다. 그녀도 나의 사정을 알고 있었지만 서로 속 이야기는 하지 않고 만났다.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순수하지 못한 상태의 괴로움 속에서 우리는 아들 원석이를 낳았다. 영주권을 받았지만 내 삶의 엉뚱하고 예기치 않았던 운명들이 지금까지 나를 아프게 만든다.





아들은 어디에 살고 있는가?

미국에 산다. 결국 제대로 아버지 노릇을 하지 못하고 헤어졌고 영주권자의 재입국 시기를 넘겨 영주권이 무효가 됐다. 영주권에 대한 미련은 없지만 아들과 어머니에게 인연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것이 내 인생의 그늘이다.



지금은?

귀국해 아들 하나를 새로 낳아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됐다. 지금 다시 평온한 가정을 두고 있다.



고 신상옥 감독이 마지막으로 연출했던 <마유미>에서 조감독으로 활동하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인간시장>으로 번 돈이 모두 <마유미>의 제작비로 묻혀 들어갔다. 동유럽 지역 등 해외 촬영을 다니며 1년간 모든 것을 바친 힘들었던 시기였다. 그 때 다시 생각난 것이 <인간시장3>이었다. 최소한 <인간시장 오! 하나님>의 절반만 성공해도 재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술자리에서 만난 가수 최백호 씨의 아이디어로 지금은 성직자가 된 개그맨 김정식을 가짜 장총찬으로 출연시키면서 촬영을 시작했다. 그러나 전처럼 순탄하지 않고 여배우의 교통사고 등 악재가 겹쳤다. 흥행도 실패하고 나는 다시 좌절에 빠졌다.



영화를 만들며 영화 같은 실존 드라마도 나란히 체험한 것처럼 보인다. 그처럼 희비와 굴곡이 많은 줄 몰랐다.

<인간시장3>의 실패는 나에게 신중하고 겸허하게 살라는 교훈을 남겼다. 성공했다면 오만하고 더 큰 실수를 범했을지도 모른다. 실패하고 또 스스로의 정체성에 의문을 던지며 좌절의 여행에 올랐다. 하룻밤을 묵게 된 어느 시골마을에서 시끄러운 축제를 구경하게 됐다. 중증 장애인들의 모임이었다. 그들 중 한 소녀가 행복한 표정으로 나의 슬픈 표정을 보고 위로했다. 그들보다 더 모자랐던 각성이 나의 재기를 도왔다.



그 후부터 다큐멘터리 연출 작업에 눈을 돌린 것인가?

그렇다. 우연히 KBS의 <도전 지구탐험대>의 첫 출연자가 되면서 새로운 호기심과 욕구가 생겼다. 영화에서 익힌 것을 활용할 수 있는 소박한 일거리라고 믿었다.



영화나 드라마의 제작 환경도 많이 변했고 연예인 사회의 인간관계나 분위기도 과거와 달라졌다. 꾸준히 지켜 본 연예계의 과거와 현재의 세태를 비교한다면?

오르지 상업성에만 치우쳐 활동하는 이기적인 시대다. 인정머리도 없고 의리도 없고 선후배도 없는 시대 같다. 영화계가 어려움을 돌파하는데 연기자들의 협조와 배려도 큰 몫을 차지한다. 빈부 격차가 가장 심한 곳도 연예인 사회라고 본다. 명심할 것은 인기도 오르면 반드시 떨어질 날이 온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아무리 스타라 해도 인간적인 정이 있었다. 오만하고 도도한 인물은 설 자리가 없었다.





바른 소리, 하고 싶은 말 감추지 않고 욱하고 폭발하는 진유영의 기질과 패기는 아직도 힘이 빠지지 않고 있다. 그는 <인간시장>의 ‘장총찬’과는 숙명의 동심일체로 살아온 것 같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 가공의 인물이 자신의 캐릭터라는 심리적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온 것도 같다. 알고 보면 소설의 장총찬은 김홍신 작가가 탄생시켰지만 영화 속에서 생명이 있는 장총찬의 이미지와 캐릭터는 진유영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이었다.


진유영을 만나면 아직도 법이 통하지 않고 법을 무서워하지 않는 무리를 통쾌하게 소탕하는 실존 장총찬으로 둔갑을 시키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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