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장애 소나무화가 최영식 화백
청각장애 소나무화가 최영식 화백
  • 한동수
  • 승인 2011.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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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마다 다른 삶 읽어내 화폭에 담는 것이 내 소명”


【인터뷰365 한동수】북한강이 마르지 않고 사계절을 그렇게 괴괴히 흐를 수 있는 것은 소양호가 있기 때문이다. 높디높은 산중에 맑디맑은 물을 가두고 탯줄처럼 남으로 남으로 생명수를 흘려보내는 소양호 선착장에서 동면행 배를 타고 20분을 채 못가면 삼막골이다.
집들은 눈에 띄나 인적은 드물고 동네 개들이 이방인을 향해 한번씩 짖어대는 소리만이 정적을 깰 뿐이다. 그러나 물굽이들을 돌고 돌아내린, 고즈넉하다 못해 적막이 흐르는 이 산골에 웬 문화가 있으랴 생각하면 오산이다.
우안(牛眼) 최영식 화백. 이 깡시골의 늘 푸른 소나무 숲에, 소양호 굽이굽이 늘 푸른 물줄기에 붓 한 자루로 문화의 향기를 채색하는 사람이다. 소의 눈을 닮았다하여 우안이다. 첫눈에 봐도 우안(牛眼)이다. 화낼 줄도 모르고 어디 하나 맺힌 곳 없는 순박한 소의 눈빛과 다름아니다.


13세 때 청각 잃어…베토벤 전기 읽고 그림 시작

최영식 화백은 청각장애 화가이자 소나무 화가로 강원도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려져 있다.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청각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집안이 찢어지게도 가난해 날품팔이로 근근이 생계를 잇던 어느 날이었다. 어른들도 감당하기 힘겨운 만큼의 보리타작을 마치고는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런데 그 잠에서 깨어나니 세상이 고요했다. 감당하기 힘든 열세살 때의 일이었다.
좌절과 시름의 나날 속에 몽당연필로 달력그림을 베끼며 지내던 그에게 있던 어느 날 베토벤이 가슴으로 들어왔다. 형이 건네준 로망 롤랭의 베토벤 전기 ‘운명을 넘어서’를 읽고 난 후였다. 이 책은 그의 인생을 바꿔준 희망의 빛줄기였다. 장애를 이겨내고 지휘봉을 들었던 베토벤이 어린 최영식에게 붓을 들게 한 것이다.

“이 깊은 산중에서 외롭지 않으십니까?”
첫 질문치곤 다소 상투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상투적이지 않은 답변이 날아들었다.
“외로우려고 들어왔는데요?”
그가 홀연히 편안한 잠자리와 사랑하는 가족들을 춘천 시내에 남겨둔 채 화구를 챙겨들고 이 산막골 폐교로 들어온 것은 12년 전이었다. 그는 ‘혼자 무섭지 않느냐’는 질문만 받아오다가 ‘혼자 외롭지 않느냐’는 질문을 들어보니 생소하다고 했다.
그런데 우안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영화 ‘여고괴담’이 갑자기 생각나면서 정말 밤이면 무서울 듯했다. 화장실도 ‘푸세식’ 그대로인 폐교에 30여 가구가 골짜기에 드문드문 떨어져 살고 있는 오지 마을이니….


부귀리 물안마을의 노송(老松). 우안이 특별히 애정을 갖고 있는 소나무이며 우안이 알려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우안 최영식 화백이 부귀리 소나무. 강원도지사 사무실에 걸려있다.

소나무마다 지문 달라…살아온 삶의 궤적이 투영된 것


우안이 원래부터 소나무를 그려온 것은 아니다. 2007년 강원일보 창간 기념 초대전을 전후해 그는 소나무에 푹 빠져들었다. 그가 소나무를 본격적으로 그린 시간이 그리 길지도 않은데도 소나무작가로 불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강원일보 창간 기념 초대전 타이틀은 ‘소의 눈, 솔의 눈을 보다’였다. ‘소의 눈’을 닮은 그가 ‘소나무의 눈’을 본다는 의미다. 우안의 소나무 그림은 중국이나 국내의 다른 한국화가들이 그리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가 그린 소나무엔 항상 ‘눈’이 있다. 씨눈이 앉았으면 씨눈을 그려 넣고 때로 송화가루가 있으면 송화가루를 그려 넣는다.
그의 소나무엔 또한 ‘지문(指紋)’이 있다. 그의 눈에 소나무 각각의 수피(樹皮)는 절대로 같을 수 없다. 마치 사람의 지문처럼 다 다르고, 그 지문은 소나무 한그루 한그루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처럼 소나무의 삶을 읽어내고 이것이 화폭에 투영된 그의 그림은 자연스럽게 그를 소나무화가로 자리잡게 했다.
그의 소나무 그림은 멀리 이탈리아까지 알려져 있다. 2008년 9월 이탈리아 로마 국립동양예술박물관에서 가졌던 우안의 작품전시회는 현지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초 일주일 정도 머무를 예정이었지만 이탈리아의 미술관계자들의 반응은 물론 이탈리아 일반 관람객들의 열정적 관심으로 한 달이 넘게 한국화를 알리고 돌아왔다. 전시회가 이토록 성황을 이룬 것은 로마의 상징수(象徵樹)가 소나무였던 점도 작용했다.
우안은 서로 지구 반대편에 자리한 동양의 반도국가 한국과 서양의 반도국가 이탈리아가 소나무를 주제로 문화적 교감을 나눴다는 점에서 감격스러웠다. 특히 서예 강의 및 한국화 시연 등으로 현지 한인들은 물론 이탈리아 정재계,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찬사를 받았다. 로마 국립동양예술박물관의 로베르토 챠를로 박사는 우안의 소나무 그림에 감동해 자작시를 지어 선물하기도 했다.

산책길에 만나는 소나무들과 대화하는 게 낙

산막골에서 그의 유일하고도 가장 큰 낙은 산책. 부귀리까지 소양호가 내려다보이는 길을 따라 거의 매일 십여리씩 걷곤 한다.
우안의 소나무 사랑은 특별하다. 인터뷰 겸 산책을 하는 중에도 나무 한그루 한그루를 가지가 뻗은 모양과 수피의 상태, 주변의 지세(地勢) 등을 통해 마치 사람을 보듯이 나무의 과거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 소나무가 현재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고 어떤 소나무가 지금 얼마나 힘든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까지 읽고 있었다. 그가 그린 소나무 중에는 생태계 속에서 사투를 벌이다가 고사한 나무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조금만 도와주면 살아날 수 있는 경우에도 절대로 도와주지 않는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것이니까. 다만 그는 자신의 화폭에 그러한 소나무의 삶을 영원한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다.
몇해 전 어느 봄날 그는 산책길에서 만난 ‘낙엽새’들의 군무(群舞)에 넋을 잃고 말았다. 잔잔하던 주변에 돌연 작은 돌풍이 일고 그 바람결에 따라 춤추듯 화려한 스텝을 밟는 낙엽들이 마치 영감이 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그때부터 그는 이 ‘미발견종 새’들을 ‘낙엽새’라고 이름 짓고 그날의 감동을 자주 떠올리곤 한다. 그에 따르면 낙엽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가을에만 지는 것이 아니라고. 어떤 종류의 나무들은 죽은 잎들이 겨울 동안 그대로 붙어 있다가 봄에 새순이 나오면서 떠밀려 떨어지는 ‘봄낙엽’도 있다는 것.
그의 산책코스는 승호대(勝湖臺)까지 이어진다. 승호대는 사실 우안이 ‘발견’하고 이름 지은 곳이다. 마을에서 2.5㎞쯤 떨어진 곳에 소양호의 속살을 보는 듯한 절경이 펼쳐지는 길가 벼랑 위 작은 공간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정월 대보름이면 달집태우기를 하며 건강과 마을의 평온을 기원한다. 승호대에서 굽어보는 소양호의 파노라마는 휘엉청 보름밤의 풍경도, 함박눈 내리는 날의 풍경도, 바람 부는 가을 날 ‘낙엽새’들의 벼랑 위 비상도 모두가 눈을 뗄 수 없는 비경이라고 귀띔한다. 입소문을 타고 사진작가들의 단골 촬영장소가 되어가고 있다. 주변의 산에는 단풍이 곱게 드는 수종이 많아 가을 풍경이 유난히 아름답다. 좁은 공간이지만 단단한 암반으로 형성되어있어 그 위에 정자를 하나 세우고 싶은 것이 그의 바람이기도 하다.


송화가루 묻은 ‘눈’이 그려져 있는 우안의 그림.

로마 국립동양예술박물관 로베르토 챠를로 박사가 우안의 그림에 감동을 받아 우안에게 선물한 자작시와 그 한글 번역.

그가 ‘듣는’ 베토벤의 ‘월광’은 어떤 색일까

우안은 한여름엔 그만의 비밀스런 ‘취미’가 있다. ‘월광욕(月光浴)’이다. 저 멀리 산세까지 실루엣을 드러내는 달 밝은 밤에 홀로 집밖에 나와 달빛에 몸을 맡긴다. 아무도 볼 이 없다. 옷을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를 묻는 것은 촌스런 질문이다. 그냥 상상에 맡긴다. 달빛과 바람결이 전해주는 촉감, 그리고 자연의 모든 것들이 그에게 말하려는 느낌들이 전율로 전해져온다.
보청기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그의 베토벤은 어떤 느낌일까? 우안의 작업실 한쪽엔 큼지막한 아주 오래된 ‘전축’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자신에게 붓을 들게 해줌으로써 오늘의 우안을 있게 해준 베토벤의 곡을 가끔 듣는다. 주로 한밤에 창문을 모두 열어놓고 볼륨을 크게 올린다. 이때 느끼는 행복감. 앞마당의 키 큰 자귀나무도 뒷마당의 주목들도 처마 밑의 풀 한포기도 모두 귀를 기울인다. 뒤꼍의 개들도 귀를 쫑긋거리며 조용히 엎드려 경청한다. 물아일체(物我一體)의 환희다. 그는 아주 확신에 차서 식물도 생각할 줄 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가 이런 날 자연의 모든 것들과 함께 듣는 ‘월광소나타’는 어쩌면 정상인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그만의 특별한 월광곡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 화백은 소양호의 속살을 볼 수 있는 승호대까지 매일 십여리를 걷는다

부귀리 물안마을의 소나무는 길가에서 보면 평범한 모습이어서 눈에 크게 띄지 않았지만 가까이 가보면 가지가 마치 뿌리처럼 기이한 모습으로 뻗어 있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소나무는 사연도 수난도 많다. 일제시대 때 송진을 채취하기 위해 절반이나 도려낸 나무 밑둥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렇게 패여진 절반 두께의 밑둥으로 거대하고 울창하게 뻗은 가지들을 지탱하고 있는 모습은 한편 불가사의하고 대견해 보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들에 의해 잘릴 뻔했으나 마을 주민들의 적극적인 제지로 위기를 넘겼다. 예전엔 한때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들이 찾아와 빌고는 했다. 2009년 5월에 주민들의 요청으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수령 230년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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