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도령 역의 배우였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김수용 감독
“나는 이도령 역의 배우였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김수용 감독
  • 김두호
  • 승인 2008.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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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째 양심백서 쓰는 영화인 출신 회장의 인생 예술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김수용 영화감독은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비롯해 109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국내 최다 기록이다. 1980년대부터 대학에서 영화학 교수로 16년간 봉직했고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도 역임했다. 지금은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이다. 원로 학자들이 회원인 학술원과 함께 한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인들을 국가에서 예우하는 예술원 사상 첫 영화인 출신 회장이다.


하던 일이 바뀌고 자리와 책임이 무거워졌지만 그래도 변했다는 말을 듣지 않는다. 선생님이 되려다가 영화감독이 된 그는 충무로에서도 선생님처럼 엄격하고 예의바른 신사의 법도를 지켜왔다. 창작 예술인의 광적인 실험성이나 자유분방한 생활을 경계하고 흔들리지 않는 반듯한 언행과 전업 영화작가의 전문성으로 승부해온 김 감독의 생애는 일흔아홉까지 빈틈을 보이지 않고 있다. ‘배우보다 더 매력 있게 느끼며 살았다’는 조강지처를 한평생 사랑하며 2남 1녀를 훌륭한 사회명사로 키워낸 가장으로서의 모습도 소중한 성공담이다.


30여 년을 두고 틈틈이 김 감독을 인터뷰해 왔으나 일생 이야기를 장시간 차분하게 들을 기회는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 반포동 국립도서관 뒷산 숲속에 있는 예술원은 권위만큼 육중하게 느껴지는 대리석 3층 건물이다. 김수용 회장실에는 한창 오색의 꽃이 만발한 양란을 비롯해 30여개의 난화분이 초록빛 윤기를 발하고 있었다.




방안에 난화분이 많군요. 난들이 싱싱해 보입니다. 원래 원예와 시작(詩作), 여행이 취미셨지요?

찾아오는 분들에게 꽃 보시(布施)를 한다는 생각으로 내가 직접 정성을 쏟아 키우고 있어요. 2년간 저렇게 변하지 않고 싱싱하게 키울 생각이라오.





회장 임기가 2년입니까? 회원은 몇 분이나 되고 회장은 어떻게 선출합니까?

그래요. 연임을 할 수 있지만 취임하면서 2년만 하겠다는 생각을 미리 밝혔어요. 문학 미술 음악 연극 영화 무용분야까지 회원이 77분입니다. 54년 전 개원 당시는 25명이었지요. 그동안 회원 121명이 고인이 되셨어요. 회장은 회원총회에서 투표로 결정합니다. 나는 회원이 된지 20년이지만 아직 연조도 말석이고 입후보도 안했는데 작년 12월 20일 총회에서 3차 투표 끝에 선출이 되었어요.



예술원 회원이 되는 것이 예술인들에게 마지막 꿈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인으로 처음 회장까지 되셨으니 영화계의 경사입니다. 고향이 경기도 안성이시지요? 꿈 많던 어린시절 부터 영화 100여 편을 만들기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시지요.

한글을 모르고 일본어로 공부를 하던 시절에 학교를 다녔으니 일제 강점기를 제대로 체험한 마지막 세대입니다. 5년제인 안성공립농업학교 3학년 때 해방이 됐어요. 그 무렵 사색을 좋아하고 시도 쓰고 문학서적을 많이 읽었어요.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은 대부분 읽었지요. 김세중(조각가)이가 나와 한 반이어서 함께 어울려 문학과 예술을 탐닉했었지요.



그 때부터 연극 활동을 시작했다고 하셨지요?

그래요. 안성시내에 있는 애원극장의 빈 무대를 이용해 김세중과 공동으로 삼일운동과 관련된 연극 <대지의 노을>을 공연했어요. 내가 희곡에서 주연, 연출까지 하면서 제법 많은 관객들을 불러 모았어요.



일찍부터 공연예술에 대한 취향과 끼가 있었군요.

그렇다고 봐야죠. 1947년 서울로 올라가 서울사범학교(서울 교육대학) 본과에 다니면서 연극부를 맡아 유치진의 <춘향전> <조국> 등을 공연했어요. 나이가 들어도 수줍어지는데 사실 <춘향전>에서 이몽룡 역을 내가 맡았지요.



하하하, 이제 보니 배우 출신이군요.

아, 참. 엊그제 모교(서울교육대)의 초청을 받아 후배들에게 ‘자랑스러운 교대인상’을 받았어요. 그 자리에서 말했어요. 단군시대 동문을 불러다가 감동을 주어서 고맙다고 하고 교육의 힘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한 것인데 정치와 경제 우선에 밀려난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지요. 또 교육을 이대오르기와 연계시켜 학교가 이념교육의 대립 장소로 변질된 것은 있을 수 없다며 페스탈로치의 숭고한 교육정신을 되찾아달라고 말했어요.





6.25 때 육군 장교로 참전하셨지요?

전쟁일선에서 총들고 싸우지는 않고 통역장교 생활을 했지요. 영어를 하니까 입대하자 중위 계급장을 달아주더군요. 부산항에서 LST 함정을 오르내리며 영어 통역을 하고 일본 노역자들까지 있어서 일본어 통역도 했지요. 휴전이 되면서 국방부 정훈국으로 배속되어 6개월간 전사편찬 작업을 하고 창설된 영화과로 소속을 옮기면서 인생의 진로가 영화로 길이 잡혔어요.



그럼 국군 홍보영화를 만드는 일이었겠군요.

충무로가 제대로 영화를 돌리지 못할 때 촬영 제작 시스템이 갖추어진 국방부로 영화 인력이 몰려들었지요. 단편 기록 홍보용도 만들었고 장편 극영화도 찍었어요. 영화과 과장이 선우휘 대령(소설가)이었고 나는 대위로 문관인 양주남 감독이 연출한 오영진 시나리오 <배뱅이굿>의 조감독으로 참여했지요. 온양(현재의 아산시)에서 촬영할 때 주연배우로 나온 이은관이 타고 다닌 당나귀 고삐를 잡고 다니며 연출수업을 시작했어요.



김 감독의 연출 작업을 보면 반드시 찍을 장면을 수백 장의 삽화로 그려 둔 콘티뉴이티(continuity)를 활용하더군요. 언젠가 런던에서 <007 시리즈> 촬영현장을 취재한 일이 있는데 그때도 감독이 사방 벽에 붙인 수천 장의 콘티뉴이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완벽한 준비 작업의 하나로 생각됩니다. 언제부터 그렇게 작업을 했습니까?

바로 연출현장에 첫발을 들여 놓은 1956년 <배뱅이굿> 조감독 시절부터였죠. 양감독은 엄청나게 꼼꼼한 성격이었어요. 그의 지시로 4백장이 넘는 그림 형식의 촬영대본을 내가 준비했었지요. 그러나 막상 촬영이 시작되면 조감독은 사람 취급 못받아요. 육군대위 모자를 감추고 잡부 노릇을 하며 눈물도 많이 삼켰어요.



1958년 <공처가>가 첫 작품이신데 그럼 <배뱅이굿>에서 조감독하고 이듬해 독립하셨군요.

맞아요. <배뱅이굿>을 제작한 김보철이란 분이 나를 눈여겨보고 연출을 요청해왔어요. 러시아 민화를 소재로 월남작가 이태환이 쓴 <공처가>로 나도 감독이 되었지요. 영화음악은 김동진이 맡았는데 그가 <가고파>의 작곡가란 것을 나중에 알았어요.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어 만원사례 봉투를 7장이나 받았으니 시작이 좋았어요. 이어서 구봉서 김희갑을 주연으로 불러내 코미디로 울려주는 <3인의 신부>, 방송극으로 히트한 조흔파의 <구혼결사대>를 잇달아 연출했어요. 군복을 안 벗고 감독활동을 하는 것에 문제가 생겨 제대를 신청했지만 오히려 더 문제를 삼으려고 해요. 곤경에 처했을 때 우연히 정일권 참모총장의 비서로 있는 고향친구를 만나 제대를 했습니다.





1981년 김혜자가 마닐라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만추>를 연출할 때 100편 기념 인터뷰를 한 기억이 납니다. <굴비> <청춘교실> <저 하늘에도 슬픔이> <갯마을> <유정> <빙점> <안개> <사격장의 아이들> <무영탑> <토지> <사랑의 조건> <달려라 만석아> <물보라> <도시로 간 처녀> 등 109편 가운데 특별히 기억하고 싶은 작품은 어느 영화입니까?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1965년 서울인구가 280만일 때 국제극장에서 29만5천 명이 보았고 실제주인공 윤복이의 고향인 대구에서는 인구 60만 명인데 80만 명의 기록을 세웠어요. 한사람이 몇 번씩 본거지요. 남정임의 데뷔 영화인 <유정>도 국도극장에서 50일간 33만 명이 관람했어요. 그 무렵 제작자들이 나를 잡기 위해 난리를 피울 때인데 어쩌다 배우도 아닌 감독이 처음으로 <니가 잘나 일색이냐> <막내딸> 두 작품을 겹치기 연출했어요. 역시 내가 만든 영화의 절반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고 또 나름의 예술성을 추구했어요.



연출 작품과 관련해 논쟁도 여러 번 겪었지요? <도시로 간 처녀>는 공연윤리위원회의 가위질, 중광스님을 출연시킨 <허튼소리>도 불교단체가 문제를 삼아 시끄러웠지요. 그런데 한때 비판의 대상이었던 그 자리 (공윤의 후신인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에 가셨으니 묘한 기분을 느끼셨지요?

정부 인사가 나를 그 자리에 보내면서 그러더군요. 아프게 당한 사람이 아픔을 안다고. 사실 만감이 교차하더군. 만드는 사람들 시각에서 심의기구를 운영하려고 애를 썼어요. 문제가 생긴 것은 한 두 건인데 노부부의 성행위를 다룬 <죽어도 좋아>는 표현의 자유를 넘어 선 작품이라 고민을 많이 했었지요.



수많은 연기자와 감독을 발굴하고 스타덤에 올리셨지요. 그들과 관련해 재밌는 이야기는 어떤 것들입니까?

그건 천일야화를 시작해야지 시간이 짧아요. 우선 남정임 홍세미 윤양하 여수진 금보라 전영록 강석우 이훈 등이 떠오르고 감독은 조문진 임원식 이원세 황용하 김종원 정지영 장길수 신승수 감독들이 나와 함께 일했던 친구들이지요.



그런데 한 번도 여배우와 관련해서 염문이 나온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충무로에서는 오히려 그것이 비정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나간 일들이니 솔직한 고백을 듣고 싶습니다.

여배우가 이성으로 안 느껴져요. 함께 일하는 사람이지. 예를 들면 한 때 인기를 모았던 여배우 이빈화가 집사람의 중학교 후배로 우리 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지만 그녀보다 우리 마누라가 더 매력 있게 느껴지는데 어떡합니까? 여자라면 마누라밖에 생각 안나니 그런데 신경 안 쓰고 시간도 안 뺏기고 일만 했지요. 또 집사람이 학교 선생인 것을 남편이 잊을 수는 없지요.





리라국민학교에 오래 계셨던 공숙영 여사님(부인)은 정년 퇴직을 하셨지요?

정년퇴직했지만 평생 키운 제자들이 각계각층에 구름처럼 많아 나보다 노후가 더 즐겁고 행복한 사람이죠.



자녀분들이 종종 신문이나 잡지에 등장하더군요. 모두 사회 명사들이지요?

장남은 서울의대 성형외과 김석화 교수로 며느리가 경찰병원 소아과 이인실 과장입니다. 차남은 용인대 생명공학과 김세화 교수인데 물만 연구하고 있어요. 딸도 유학을 다녀왔지만 사위가 해양연구소에서 해양생산학을 연구하는 허회권 박사이니 집안이 좀 학구적인 분위기가 됐어요. 여기에 큰아들이 낳은 장손인 민철이가 서울의대 본과 2학년이고 둘째가 낳은 손자가 고려대에서 환경공학을 전공해요.



아까 꽃 보시라고 말씀하셨는데 독실한 불교신자로 알고 있습니다. 여전하신지요?

그럼요. 보시에 대해 매우 깊이 생각하고 삽니다. 그동안 내가 배운 것이 영화 작업인데 이제 그 알고 가진 것을 동원해 보시를 할 수 없을까도 생각합니다.



중광스님과도 인연이 깊었지요?

백담사 오현 스님, 신흥사 마근 스님, 대흥사 월우 스님 모두 가깝게 지내는 분들입니다. 집사람은 보문사 신도회장입니다.



참 오래도록 변함이 없는 것이 또 생각납니다. 30여 년 전에도 주소가 지금 살고 계시는 서울 장충동 1가 36번지였던 것 같은데요.

맞아요. 30년이 아니라 50년째 살고 있어요. 정원수가 고목이 되어 지금은 아주 녹지공원입니다.



변함이 없는 것은 또 무엇이 있습니까?

40여 년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써왔습니다. 일기는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보여주는 양심의 백서입니다. 삶의 기록이기 때문에 나쁜 행동을 하면 참회의 글을 쓰게 됩니다. 잘못을 자꾸 범하는 것을 스스로도 용납 않게 만드는 것이 일기입니다. 나는 죽는 날까지 일기를 쓸 생각입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예술원 회장실을 나와 10분 쯤 걸어 어느 음식점을 찾았다. 그 음식점 현관에는 ‘영화감독 김수용’이라고 크게 쓴 이름과 사진 밑에 사인이 붙어 있었다. 주인에게 왜 ‘예술원 회장 김수용’이라고 적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주인은 말했다. “에이, 예술원이 뭐하는 곳인지 누가 압니까? 김수용 감독님은 유명한 영화감독이신데 그걸 적어야지요”라고 대답했다.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88서울올림픽 공식영화제작전문위원, 97아시아태평양영화제 집행위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대종상 및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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