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끝으로 일군 치유의 삶] ⑦ ‘물펀치’ 대신 '헹가래', 정권보다 오래 살아남은 이름
[기획 연재 - 유환석 화백의 생애기록 치유기] - 노태우 정부 당시 ‘물통 사건’ 반영한 ‘물펀치’도 후보 - “정권 바뀌면 생명력 짧다”는 의견에 '헹가래' 선택 - 17년간 5000여 회 연재하며 한국 사회 희로애락 기록 - 작가가 캐릭터를 낳고 캐릭터가 작가의 50년 증언
한국시사만화가협회장을 지낸 유환석 화백은 강원일보와 조선미디어그룹 스포츠조선에서 시대와 서민의 삶을 따뜻한 풍자로 기록해 왔습니다. 강원특별자치도의 ‘2026 원로예술인 아카이브 전시지원’ 공모에 선정돼, 데뷔 50주년 특별전 '따뜻한 풍자'를 14일부터 25일까지 춘천예술마당 아트프라자갤러리에서 개최합니다. 이번 10회 연재는 시사만화가로 살아온 삶을 되짚으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생애기록 치유기’입니다. 유 화백의 성찰이 후배들에게는 작은 이정표가 되고, 독자에게는 자신의 삶을 비춰보는 따뜻한 거울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터뷰365 신향식 칼럼니스트 = 사람에게 이름이 운명이라면 만화에도 이름은 운명이다. 어떤 이름을 붙이느냐에 따라 작품의 성격과 수명이 달라지고, 독자의 기억 속에 머무는 시간도 달라진다.
유환석 화백이 조선미디어그룹 스포츠조선에서 17년 동안 5,000여 회 연재한 대표 시사만화 '헹가래'도 처음부터 그 이름을 갖고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자칫하면 '물펀치'가 될 뻔했다. '헹가래'의 탄생 과정을 묻자 유 화백은 카카오톡으로 짧은 답장을 보내왔다.
“만평 제목을 사내 공모로 했어. 노태우 물통시대라 물펀치와 헹가래가 젤 마니 나옴. 물펀치는 정권 끈남 좀 그러니 헹가래로 함. 요고빠게 읍음 ㅠㅠ;;;;”
맞춤법도 띄어쓰기도 자유로웠다. 장난꾸러기 '헹가래'가 직접 보낸 답장처럼 익살스러웠다. 그러나 몇 줄 안 되는 문장에는 당시 편집국의 고민과 시대의 공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물통 시대’가 낳은 후보 '물펀치'
스포츠조선이 창간된 1990년은 노태우 정부 시절이었다. 당시 사회적 화제가 된 이른바 ‘물통 사건’의 영향으로 사내 공모에서는 '물펀치'라는 제목이 많은 지지를 받았다. 권력과 시대 상황을 즉각 풍자할 수 있는 재치 있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특정 정치 상황에 기대어 만든 이름은 정권이 바뀌면 생명력도 끝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신문은 오늘의 사건을 다루지만, 작품의 이름까지 오늘에 갇힐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결국 '물펀치' 대신 '헹가래'가 선택됐다.
헹가래는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높이 들어 올리는 행동이다. 승리와 축하를 상징하지만, 풍자의 눈으로 보면 추락과 반전의 가능성도 품고 있다. 누구를 들어 올리고 누구를 내려놓을 것인지에 따라 세상의 희로애락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이름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옳았다. ‘물통 사건’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졌지만 '헹가래'는 살아남았다. 한 정권의 유행어가 될 뻔했던 만평은 시대를 건너는 장수 시사만화가 됐다.
날마다 새로운 삶을 얻은 캐릭터
만화가에게 캐릭터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자신의 손으로 태어나게 하고, 날마다 새로운 표정과 말을 입혀 세상으로 내보내는 자식이자 동료다.
'헹가래'도 한 번 그려놓고 반복해서 사용하는 고정된 인물이 아니었다. 정치권의 다툼 앞에서는 눈을 부릅떴고, 서민의 고단한 삶 앞에서는 함께 어깨를 늘어뜨렸다. 스포츠의 환희 앞에서는 누구보다 높이 뛰었고, 사회적 위기 앞에서는 독자의 답답한 마음을 대신 드러냈다.
유 화백은 매일 아침 뉴스와 마주하며 '헹가래'에게 그날의 삶을 입혔다. 복잡한 현실을 한 장면으로 줄이고, 긴 이야기를 짧은 말풍선에 담았다. 선 하나가 지나치게 날카로우면 비판이 미움으로 변했고, 말 한마디가 길어지면 풍자의 힘이 빠졌다.
마감시간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오늘 한 편을 잘 그렸다고 내일의 한 컷이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매일 빈 종이 앞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래서 5,000회라는 숫자는 단순한 연재 횟수가 아니다. 한 캐릭터에게 5,000번의 새로운 하루를 입혀 세상으로 내보낸 시간이다. 잘 그린 날의 뿌듯함과 마음에 차지 않았던 날의 아쉬움, 독자의 사랑과 항의, 마감을 마친 뒤의 안도감이 그 숫자 안에 겹겹이 쌓여 있다.
작가가 키운 캐릭터, 작가를 지킨 캐릭터
처음에는 유환석 화백이 '헹가래'를 만들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헹가래'도 유 화백을 시사만화가의 자리에 붙잡아두었다. 힘든 날에도 그려야 할 주인공이 있었고, 다음 날 아침이면 만날 독자가 있었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내일은 무엇을 그릴까”라는 질문이 따라왔다. 휴가지에서 큰 사건이 터지면 마음은 어느새 원고지 앞으로 돌아가 있었다. 자식이 부모의 마음에서 퇴근하지 않듯, 캐릭터도 작가의 생각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유 화백은 그 세월을 짐으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헹가래'를 보며 웃었고, 누군가는 답답했던 마음을 잠시 풀었다. 작가는 캐릭터에게 선과 표정을 주었고, 캐릭터는 작가에게 이름과 보람을 돌려주었다.
'헹가래'가 스포츠조선을 대표하는 시사만화로 자리 잡은 것은 이름을 잘 지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유 화백이 날마다 세상과 사람을 살피고, 자신의 희로애락까지 캐릭터 안에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오래 살아남는 것은 시대를 품은 것
생애기록치유는 지나간 성취를 자랑하기 위한 기록이 아니다. 오래된 기억을 다시 들여다보며 그 시간이 오늘의 자신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는지 발견하는 과정이다.
유 화백에게 '헹가래'는 대표작이라는 말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다. 치열했던 젊은 날의 분신이자, 수천 번의 마감을 함께 건넌 동료이며, 시사만화가로 살아온 시간을 기억해주는 증인이다.
1975년 공식 데뷔한 유 화백은 강원일보를 거쳐 1990년 스포츠조선 창간 멤버로 합류했다. '헹가래' 약 5,000회와 '공수래' 약 2,000회를 비롯한 작품을 통해 시대의 흐름과 서민의 삶을 유머와 풍자로 기록했다. 데뷔 50주년을 맞은 올해에는 8월 14일부터 25일까지 춘천예술마당 아트프라자갤러리에서 특별전 '따뜻한 풍자'를 열었다.
세월은 정권도, 사건도, 신문 지면도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헹가래'는 여전히 유환석 화백의 곁에서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뛰고 있다. 오래 남는 이름은 유행을 붙잡은 이름이 아니라, 시대를 품고도 그 시대에 갇히지 않은 이름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