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끝으로 일군 치유의 삶] ② 숫자가 사람으로 걸어 나왔다…소년 유환석의 첫 신문 만화

[기획 연재 - 유환석 화백의 생애기록 치유기] - 중학교 3학년 때 그린 ‘선생님’, 생애 첫 신문 게재 - 다양한 예체능 경험, 시사만화가로 성장한 밑거름 - “창의성은 평범한 것을 다르게 보는 데서 시작”

2026-08-19     신향식 칼럼니스트

한국시사만화가협회장을 지낸 유환석 화백은 강원일보와 조선미디어그룹 스포츠조선에서 시대와 서민의 삶을 따뜻한 풍자로 기록해 왔습니다. 강원특별자치도의 ‘2026 원로예술인 아카이브 전시지원’ 공모에 선정돼, 데뷔 50주년 특별전 '따뜻한 풍자'를 14일부터 25일까지 춘천예술마당 아트프라자갤러리에서 개최합니다. 이번 10회 연재는 시사만화가로 살아온 삶을 되짚으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생애기록 치유기’입니다. 유 화백의 성찰이 후배들에게는 작은 이정표가 되고, 독자에게는 자신의 삶을 비춰보는 따뜻한 거울이 되기를 바랍니다.

유환석

① “계속 만화를 그려라”…꾸중 대신 건넨 격려, 소년의 인생을 바꿨다 이어서

인터뷰365 신향식 칼럼니스트 = 유환석 화백의 작품과 이름이 신문에 처음 실린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1971년 춘천 강원중학교에 다니던 유환석 군이 그린 ‘선생님’이 강원일보 독자만평란에 채택된 것이다. 훗날 세상을 한 컷에 담아낸 시사만화가의 출발점은 숫자로 사람을 그린 작은 작품 한 장이었다.

언뜻 보면 안경을 쓰고 양복을 입은 선생님이 걸어가는 모습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평범한 그림이 아니다. 머리는 숫자 3, 안경은 6, 코는 2, 팔은 7, 몸통은 1로 이루어져 있다. 다리와 발에도 숫자가 숨어 있다. 교과서 속에 가만히 누워 있던 숫자들이 소년의 손끝에서 얼굴과 몸을 얻어 종이 위를 걷기 시작했다.

유환석은 숫자를 계산을 위한 기호로만 보지 않았다. 숫자 속에서 사람의 얼굴을 발견하고, 선을 더하거나 방향을 바꾸어 하나의 캐릭터로 만들었다. 익숙한 것을 조금 다르게 바라본 순간 숫자는 그림이 되었고, 그 그림은 소년의 이름을 처음 세상에 알렸다.

숫자를 살아 있는 사람으로 바꾼 눈

유환석

춘천 출신인 유환석 화백은 훗날 강원일보와 조선미디어그룹 스포츠조선에서 '공수래'와 '헹가래' 등을 연재하며 시대의 표정을 그린 시사만화가가 됐다. 복잡한 정치·사회 현상과 서민의 애환을 한 컷에 압축해 웃음과 풍자로 전했다. 그 오랜 작업의 출발점에는 숫자에서 사람을 발견한 소년의 눈이 있었다.

우리는 창의성을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특별한 재능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유 화백의 첫 그림은 조금 다른 사실을 보여준다. 창의성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라기보다, 모두가 보는 것에서 남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모습을 찾아내는 힘에 가깝다. 유 화백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창의성은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평범한 것을 다르게 바라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구름에서 동물의 형상을 찾고, 나뭇가지에서 사람의 몸짓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익숙한 것을 잠시 낯설게 바라볼 때 상상력의 문이 열립니다.”

여러 경험이 소년의 재능 키워

그런 눈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그의 곁에는 미술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음악부와 밴드부, 웅변부와 연극부, 야구부와 서예부 등 다양한 활동을 경험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공부만 강요하지 않았다. 여러 세계를 보고 듣고 말하며, 몸으로 부딪쳐 보도록 이끌었다. 당시에는 서로 관계없어 보이는 경험들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흩어져 있던 점들이 하나의 선으로 이어졌다. 음악에서 익힌 리듬은 그림의 호흡이 됐다. 웅변에서 얻은 표현력은 만평의 짧고 힘 있는 문장으로 이어졌다. 연극에서 익힌 표정과 몸짓은 몇 개의 선만으로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밑거름이 됐다. 야구는 함께 호흡하는 법을, 서예는 집중력과 인내를 가르쳐 주었다. 이 모든 경험은 훗날 세상을 읽고 사람을 그리는 시사만화가의 자산이 됐다.

어린 시절의 경험은 씨앗과 닮았다. 흙 속에 묻힌 씨앗만 보고서는 어떤 가지를 뻗고 무슨 열매를 맺을지 알 수 없다. 당장은 쓸모없어 보이는 놀이와 호기심도 한 사람의 삶 속에서 오래 숙성된 뒤 뜻밖의 재능으로 피어날 수 있다.

아이의 엉뚱한 선을 너무 빨리 고치지 말라

유 화백의 어머니도 아들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가 수천 회의 시사만화를 그리고 한국 사회의 웃음과 눈물을 기록하는 만화가가 되리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다만 어머니는 아들 안에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가능성이 있음을 믿었다. 한 길로 몰아세우기보다 여러 개의 창문을 열어주었다. 그 창문으로 들어온 빛들이 훗날 한 장의 그림에서 만났다.

돌이켜보면 소년 유환석이 숫자에서 사람을 발견한 것은 단순한 재치가 아니었다. 세상을 정해진 이름과 용도로만 보지 않으려는 태도였다. 숫자는 계산에만 쓰인다는 고정관념에 그는 그림 한 장으로 작은 틈을 냈다. 그 틈으로 상상력이 들어왔다.

시사만화에도 바로 그런 눈이 필요했다. 모두가 같은 사건을 보고 같은 뉴스를 읽을 때 남들이 놓친 모순과 사람의 감정을 찾아야 했다. 긴 기사와 복잡한 현실을 하나의 장면으로 바꾸고, 무거운 문제 속에서도 독자가 생각할 수 있는 웃음 한 줄을 건져 올려야 했다. 숫자를 사람으로 바꾼 소년의 감각은 그렇게 시대를 한 컷으로 압축하는 힘이 됐다.

낯선 답 함부로 지우지 않는 게 창의성 교육의 시작

유환석

오늘날 아이들은 점수와 등수, 합격률 같은 숫자로 평가받는다. 어른들은 그 숫자가 미래를 보여주는 지도라고 믿기 쉽다. 그러나 지도에 없는 길이 더 아름다운 곳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창의성은 지식만으로 자라지 않는다. 질문할 시간과 실패할 여유, 서로 다른 경험을 연결할 기회가 필요하다. “왜 남들과 다르게 보느냐”고 나무라기보다 “너는 거기서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어야 한다. 아이가 찾아낸 낯선 답을 함부로 지우지 않는 것, 그것이 창의성 교육의 시작이다.

유환석 화백의 이력에는 데뷔 50년, '헹가래' 약 5,000회, '공수래' 약 2,000회라는 숫자가 남아 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숫자보다 그 뒤에 가려진 사람을 그렸다. 경제지표 뒤의 서민과 경기 점수 뒤의 선수, 선거 결과 뒤의 시민을 보았다.

1971년 숫자에서 사람을 발견한 소년은 훗날 시대 속에서 사람을 발견하는 시사만화가가 됐다. 아이의 작은 낙서 한 장에는 아직 아무도 읽지 못한 미래가 숨어 있을 수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