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하영 365칼럼] 웃기면서 슬픈 삶이 전하는 교훈...연극 '바냐 삼촌'

[주하영 평론가의 짧은 단상] - 손상규 각색 및 연출, 배우 이서진·고아성의 첫 연극 무대 - LG아트센터의 제작 연극 시리즈 세 번째 작품

2026-06-08     주하영 칼럼니스트

심층 문화 비평 칼럼 <앨리스 박사의 문화로 보는 세상풍경>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주하영 칼럼니스트가 또 다른 칼럼 <주하영 평론가의 짧은 단상>을 선보입니다. 짧은 형식 속에 담긴 자유롭고 날카로운 문화적 통찰을 기대해 주세요. [편집자주]

연극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웃기면서 슬프다’는 뜻의 ‘웃프다’라는 단어보다 삶을 더 잘 표현한 말이 또 있을까? 미국의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이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한 말은 누구나 쉽게 공감하는 사실이다.

나에게는 수치스럽고 절망적이며 눈물 흐르는 비극이지만, 저만큼 떨어져서 그 장면을 바라보는 다른 이에게는 우습고 사소하며 대단하지 않은 일이 되는 경험은 삶에서 종종 겪는 순간들이다.

러시아의 극작가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날씨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있는 그대로의 삶”을 무대 위에 구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웅의 이야기가 아닌 평범한 일상 속 사람들의 이야기, 실패와 무능, 무지와 반감, 지루함, 불만, 방황 속에 갇혀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과 같은 전통적인 구성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무대 위 모든 것들이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복잡하면서도 단순”하고, “그저 저녁을 먹는 와중에 행복이 자리할 수도 있지만 삶이 산산조각 나기도” 하는 현실을 내용으로 담고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연극

지난 5월 31일, LG아트센터 서울에서는 130년 전 체호프의 고전 원작을 시대적 배경에서 벗어나 현대적으로 느끼도록 각색한 연극 '바냐 삼촌'의 막이 내렸다.

손상규 연출이 각색 또한 맡은 '바냐 삼촌'은 배우 이서진과 고아성의 연극 데뷔작으로 개막 전부터 대중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제작발표회에서 이서진 배우는 작품을 “어둡게 풀지 않고 가볍게 웃을 수 있도록 풀려고 노력하는 중”이라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 손상규 연출은 원작을 “코미디로 보고 있지만, 슬프기도 하고 감동도 있다”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따라서 손상규 각색의 '바냐 삼촌'은 질식할 듯 답답하게 느껴지는 유예와 정체, 무기력, 실패의 감각보다는 상황을 모면하거나 벗어나려고 애쓰는 인물들이 ‘웃음’을 낳으며 교훈을 전하는 ‘시트콤’과 유사한 느낌이 있다.

원작이 초연된 19세기 말의 시대적 배경은 의도적으로 제거되었으며, 무대는 “시골 삶의 장면들(Scenes from Country Life)”이라는 부제가 붙은 원작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현대적인 공간으로 변경되었다.

연극

체호프의 작품 속 시대를 현재로 옮겨 원작의 언어를 다듬고 희극성을 강조한 현대적 각색의 역사는 영미권의 경우 이미 수십 년에 이른다.

'바냐 삼촌(Uncle Vanya)'은 최근 십여 년 동안 각기 다른 현대적 각색이 자주 시도된 경향이 있는데, 그 중 고전의 현대화를 시리즈로 선보였던 로버트 아이크의 2016년 버전과 BBC와 PBS로 영상이 송출되기도 했던 코너 맥퍼슨의 2020년 버전, 배우 앤드류 스캇의 1인 8역으로 올리비에상을 수상한 사이먼 스티븐스 각색의 2023년 버전이 큰 주목을 받았다. ▶[관련기사] 유보된 삶을 향한 위로의 메시지...英 트래펄가(Trafalgar) '엉클 바냐' 

손상규 각색의 '바냐 삼촌'은 몇몇 조연 캐릭터를 삭제하고 현대적 의상과 ‘지금’이라는 배경을 강조했다는 점에서는 아이크의 버전을, 희극적 측면의 부각과 마지막 장면의 감동을 겨냥했다는 점에서는 맥퍼슨의 버전을, 아스트로프와 엘레나의 관계에 있어서는 스티븐스 버전을 닮은 듯 느껴지는 측면이 있다.

연극

'바냐 삼촌'에는 ‘무언가를 원했지만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 가득하다. 아니,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분명 이룬 것이 있음에도 그것이 하찮게 여겨지고, 쓸모없게 여겨져서, 자신에 대한 ‘불만’이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 채 들끓는 내면의 감정을 누르고 있는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삶에는 끝없이 앞만 보고 내달리던 길에서 벗어나 문득 무엇을 향하고 있었나, 왜 그토록 열심히 달리고 있었나를 생각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바냐와 그의 조카 소냐가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며 관리해 온 영지에 은퇴한 매제 세레브랴코프가 젊고 아름다운 아내 엘레나를 데리고 오면서, 반복되던 일상은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죽은 소냐의 엄마가 결혼 지참금으로 마련한 영지에서 딸인 소냐와 외삼촌 바냐는 교수가 되어 도시로 간 소냐의 친부인 세레브랴코프의 생활비를 대왔다.

연극

바냐는 죽은 여동생이 결혼할 수 있도록 자신이 받아야 할 유산의 몫까지 포기하면서 25년 동안 매제를 뒷바라지해 온 자신의 삶이 헛된 것이었음을 인지한다.

모든 기회와 시간을 흘려보냈다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는 바냐는 일은 뒷전으로 미뤄둔 채 젊은 시절 마음에 두었던 엘레나를 뒤쫓으며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달라졌을 현재를 안타까워한다.

한편, 엘레나는 통풍을 앓고 있는 남편 세레브랴코프가 고통을 호소하면서 늙음과 죽음의 임박을 강조하는 일상이 되풀이되는 현재가 끔찍하다. 젊은 나이에 늙은 남자와 결혼한 자신을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이 느껴지는 영지에서 엘레나는 의사 아스트로프에게 매력을 느낀다.

소냐의 엄마가 아직 살아있을 때부터 소냐와 바냐가 있는 이곳을 적어도 매달 한 번씩 들려온 아스트로프는 의사로서의 삶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 술과 숲을 만드는 일을 도피처로 삼은 그에게 아름다운 엘레나는 새로운 자극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아스트로프는 6년째 자신을 마음에 품은 채 설레고 있는 소냐의 마음에는 완전히 무심한 상태에 있다.

소냐는 자신이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사랑받기 어려울 것이라는 열등감에 괴로워하고 있다. 또한 세레브랴코프는 여전히 성공하고 싶은 욕구가 가득함에도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좌절을 느끼고 있다.

연극

모든 인물은 자신의 속내를 숨긴 채 타인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사실은 자신을 향해 내뱉어야 할 말들을 남들에게 조언으로 건네는 인물들은 모두 자기만의 허무와 좌절, 불만, 상처 속에 갇혀 있다.

손상규 각색의 '바냐 삼촌'에는 삶에 대한 불만으로 인한 ‘분노’의 감정이 지배적이다. 대부분의 인물이 알 수 없는 무언가에 화가 난 상태에 있으며, 다음 순간 해야 할 일을 잊은 채 당혹감에 겉돌거나 엇나가는 심정으로 돌발적인 행동을 한다.

서로의 대화는 좀처럼 소통으로 연결되지 않으며, 타인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이기적인 발언과 행동을 이어간다. 어쩌면 오랜 세월 함께 걸어온 소냐와 바냐만이 서로가 무언가에 품었던 기대를, 희망을, 좌절을, 상처를 마음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소동이 가라앉고, 자괴감과 절망감, 막막함만이 남아 주변을 감도는 속에서, ‘너 괜찮아?’라고 물으며 괴로움을 드러내는 삼촌 바냐에게 소냐가 전하는 마지막 대사가 울림을 낳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갖는 ‘연민’을 관객이 느끼기 때문이다.

연극

벨기에의 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는 수필집 '꽃의 지혜'에서, “삶의 절정을 지나 인생이라는 경이로운 시간이 그 마지막을 고할 때, 우리가 회귀하는 곳은 아주 단순한 추억의 세계”라고 말했다.

마테를링크는 우리 각자가 마지막 순간에 마주하게 되는 추억의 이미지들 가운데 “아마도 순수하고 변함없는 이미지 두세 개쯤은 마지막 잠 속으로까지 가져가고 싶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승을 넘어 저승으로 가는 문턱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가져가고 싶을 만큼 소중한 추억, 그것은 무엇일까? 분명 성공이나 명예, 부를 축적하고 정점에 이르렀던 순간의 기억은 아닐 것이다.

허망한 듯 보이는 선택에도 분명 얻는 것이 있다. 마찬가지로 최상인 듯 보이는 선택에도 잃는 것이 있다. ‘만약’을 가정하는 순간, 우리는 쉽게 모든 것을 얻거나, 모든 것을 잃는 것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얻기만 하는 일도, 모든 것을 잃기만 하는 일도 없다. 그 어떤 순간도 의미 없이 흘러가지 않는다. 다만 내가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내가 마지막 잠 속으로까지 가져가고 싶은 추억의 이미지, 그것이 무엇일지 미루어 짐작해 본다면, 허투루 흘려보낸 듯 보이는 시간 속에도 소중한 무언가가 있음을 깨닫게 되지 않을까? 바냐의 마지막 순간에 가장 깊게 남게 될 추억은 소냐가 삼촌을 위로하며 ‘계속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자’라고 말했던 바로 그 순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