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인터뷰] '1세대 PD' 강현두 서울대 명예교수...언론방송학의 태두(泰斗)
- 원로 언론학자 강현두 명예교수 2일 별세 - 강단 떠나 화가로 활동한 언론방송계 원조
인터뷰365 김두호 기자(/인터뷰어) = KBS TV 개국 1세대 프로듀서 출신이자, 언론방송학의 태두(泰斗) 인 강현두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명예교수가 2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88세.
1937년 평양 출신인 고인은 라디오시대에서 TV시대로 접어든 1961년 KBS-TV 개국을 준비한 공채 1기 프로듀서 출신이다. 방송 현장의 제작활동을 거쳐 미국 유학을 하고 돌아와 대학 신문방송학 창립 초기의 학자로 참여한 뒤 대중매체와 언론학을 전공하는 후진을 위해 일생의 대부분을 바쳤다. 그는 한국방송개발원 이사, 한국언론학회장, 한국방송학회장, 한국디지털위성방송 대표이사 사장, 서울대 교수 등을 역임했다.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은퇴 후에는 독창적인 화풍의 서양화가로도 활동하며 주목받았다.
다음은 강단을 떠나 예술인의 길을 걷던 강현두 명예교수와의 인터뷰(2012.7.30일자) 일부를 소개한다.
정년을 앞두고 전공을 새롭게 선택해 당당하게 서양화가의 길로 들어선 언론학의 태두(泰斗) 강현두 서울대 명예교수(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이른바 인생 2모작 시대를 개척한 이 시대의 성공한 1세대 모델이다.
그의 제2 인생 설계는 서울대에서 정년퇴직을 몇 해 앞두면서 시작됐다. 연구실을 벗어나 자유롭게 일하는 직업을 동경하며 정년을 또하나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생각한 끝에 선택한 직종이 전공과 전혀 다른 분야인 미술이었다. 기초과정부터 배우기 시작해 미술공모전에서 입상작품을 내고 단체미전 참가를 비롯해 전업(轉業) 10년 만에 두 차례 큰 규모의 개인전을 열었다. 풍경화 중심의 수채화에서 작가의 감성과 느낌을 표현하는 인물화로 옮겨가며 독창적인 예술성의 아티스트로 주목을 받고 있다. 서울대를 비롯한 공공기관의 벽에 그의 작품이 걸려 있다.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강현두’라는 명함은 지금도 언론학 뿐만 아니라 방송 저널리즘과 한국 텔레비전의 역사를 상징하는 이름이지만 이제 그는 ‘화가 강현두’라는 이름의 예술인으로 신분을 바꾸어 머릿속에 늘 무엇을 그릴지 열심히 그림 소재와 주제를 찾아 여행을 즐기며 살고 있다.
새 직업을 택한 동기
- 언제부터 새로운 직업에 대한 고민을 한 것인가?
"마음속으로 화가를 결정한 것은 정년을 3년쯤 앞둔 1999년 무렵이다. 본격적으로 연필 쥐는 기초부터 공부를 시작한 것은 정년 2년을 앞두고 한국디지털 위성방송 창립사장으로 갔을 때부터였다. 매주 하루씩 일과를 끝낸 저녁시간 다른 일정을 잡지 않고 동네 부근의 예술의 전당 문화강좌를 다녔다."
-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 해서 미술을 선택했다는데 고명한 교수님이 기초반 그림공부를 하려면 주변의 눈치부터 살폈을 것 같다.
"솔직히 가족에게만 알렸다. 퇴근할 때 비서실 직원에게도 행선지를 밝혀두었지만 나의 그림공부를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 2004년에는 코엑스 전시장에서 ‘지구촌 풍경기행’이란 주제로 수채화를 전시했고, 2010년 세종문화회관 전시장에서는 ‘인간, 일상 소통’이라는 주제로 인물화를 발표했다. 그동안 선보인 작품은 모두 몇 점이며 그림 소재와 형식을 풍경화에서 인물화로 바꾼 동기는?
"두차례 개인전에서만 모두 100여 점을 내놓았다. 풍경화는 국내가 아닌 아프리카에서 동남아, 미국 영국 등지를 여행하며 소재를 찾았다. 역사와 문화, 서로 다른 세계인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그러다가 사람에게 다가갔다. 삶의 흔적, 저마다 다른 느낌의 이야기가 들어 있는 인간의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역시 나는 평생 머릿속에 찍어온 저널리즘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인물화 작업은 그림을 통한 일종의 스토리텔링을 시도하는 것이다. 인물의 표현은 쉽지가 않다. 나는 공부하고 연구하는 데는 끝장을 보는 집중력이 있지만 그림은 아직도 어렵다."
- 이제 친구도 학자보다 화가들이 많을 것 같다.
"사실 개인전을 서둘러 준비한 것은 내가 새로운 직업을 택했다는 일종의 알림 기회로 삼을 생각이었는데 찾아온 손님들은 대다수 동료 교수들과 방송관계 지인이나 제자들이었다. 굳이 미술인들을 만나야할 이유는 없지만 아직은 이력이 그들 속에 들어가 내가 잘난 척 할 수 없는 일이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그림 그리는 명사들과 어울릴 때는 있다."
- 그림 소재로 선택한 사람은 모두 양해를 해준 사람들인가?
"인물화는 실물 앞에서 직접 그릴 수도 있지만 사진을 찍어서 그리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허락 받고 그리는 게 예의다. 나는 그림 도록을 들고 다니며 신분을 소개하고 허락을 받기도 하는데 때로는 외국에서 망원렌즈로 담아와 양해 없이 그릴 경우도 있다. 꼭 그리고 싶은데 이야기할 기회가 안 되거나 소통이 힘들 때는 불가피하다. 한번은 일본 여행길에 공원에서 찍은 노인의 모습을 그려 전시회에 내놓았더니 그 인물의 이웃에 산다는 분이 나타나 자신이 너무 잘 아는 분이라고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세계가 좁다는 걸 실감했다. 다행히 그 인물화는 본인의 양해를 받았었다. 허락 없이 그렸다가 초상권 문제를 걸어오면 난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동안 팔린 작품은 몇 점인가?
"판매된 그림도 있지만 헤아려 보지 않았다. 기증을 한 작품도 많다. 나의 모교이고 내가 재직한 서울대 캠퍼스 여러 곳에 나의 작품이 걸려있다. 태안 환경오염 때 자원 봉사자의 인물화와 연암 박지원이 머물렀던 중국 승덕의 풍경화, 시위하는 정신대 할머니 인물화 등 주로 시사적이거나 역사적인 인물사진들이 대학과 여성역사박물관 등에서 소장하고 있다."
TV프로듀서 1세대
- 졸업 후 KBS의 TV방송 창설 맴버로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
"1961년 가을 학기에 졸업을 하고 바로 정부기관의 공채시험에 응시해 수백 대 1의 경쟁률에서 1차 합격을 했다. 5.16이 일어난 해인데 알고 보니 채용기관이 중앙정보부(지금의 국정원)였다. 정보요원으로 뽑아 밀봉교육을 시킨다는 소문도 있고 해서 2차 면접에 응하지 않고 포기했다. 이어서 국가재건최고회의 이름으로 TV방송 요원을 모집하는 광고를 보고 응시해 합격했다."
- 개국 초기에는 해프닝도 많았을 것 같다.
"첨단 매체를 가동했지만 방송 제작 업무는 그렇지 못했다. 새로운 시스템에 새로운 원칙을 만들어 가며 일을 했지만 업무방식은 관례를 만들어가야 했으므로 실험적이고 엉성한 게 많았다. 프로그램 편성표를 칠판에 적어서 바람막이 창으로 활용했는데 그 후 방송국 편성표는 어디서나 칠판을 사용하는 것이 전통처럼 됐다. 창문공사가 안 된 방에서 초겨울의 삭풍에 떨며 작업했던 일은 지금도 잊지 못하겠다. 서울에서도 방송국이 있었던 남산 바람은 별나게 매섭다. 칼바람이었다."
- TV 방송 초기 특기할만한 사건이나 중계현장에서 겪은 일화를 들려 달라.
"드라마센터에서 '밤으로의 긴여로' 연극공연을 TV카메라로 담아 낸 것이 현장 중계의 효시로 볼 수 있다. 아찔한 경험은 서울운동장에서 3.1절 행사 중계를 할 때 카메라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앉아 있는 연단 무대를 찍다가 웅성거리는 군중을 보고 카메라맨이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돌린다는 것이 그만 대학생 시위 현장을 찍고 말았다. 중계 책임은 나한테 있어서 그 일로 한동안 불안했다. 미국 유학을 준비할 때라 여권이 안 나올 수 있어서 걱정했는데 무사했다."
- 좋은 직장을 버리고 유학을 떠난 데는 어떤 동기가 있어서인가?
"개국요원으로 일본 NHK나 미국의 방송시설을 보고 온 분은 개국의 책임 리더인 최창봉 씨와 기자직의 유인목 씨 정도뿐이었다. 당시 일본 TV방송도 초기단계였다.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TV방송의 본고장인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것이 이상적인 선택이었다. 개국 후 방송국 운영조직도 관료화 되어 초기 인력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TV방송의 총책임자가 라디오의 하부 직제로 출발했으나 개국 후 국장직제로 신설 승격되자 군 출신 인사가 그 자리에 취임해와 창립직원들과 미묘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TV방송국은 창설인재들이 한사람씩 떠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드물게 미국서 영화와 TV관련 유학을 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스카우트 되어 온 정일몽 씨 같은 분은 아침 조례 때 포켓에 손을 넣었다가 상부에 밉보여 결국 방송국을 떠난 일로 신문 가십에 오르기도 했다. 방송국 분위기가 싫어서 유학을 떠난 것은 아니지만 꿈꾸던 생각을 보다 빨리 실천하게 한 동기는 됐다."
150달러 들고 미국 유학
- 지금은 유학을 쉽게 생각하지만 1960년대는 해외여행도 하기 힘들었던 시대였다. 그 시대 유학을 다녀온 분들에게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귀감을 주는 사연들이 많다.
"나도 단돈 150달러를 주머니에 넣고 떠났다. 대다수 유학 가서 접시 닦으며 공부할 때였다. 그때는 미국의 친지가 재정보증을 해야 유학 비자가 나왔다. 나보다 먼저 간 대학동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여의도 미군 비행장에서 프로펠러 항공기를 타고 일본에 가서 국제선을 타던 때인데 나는 비행장이 김포로 옮긴지 얼마 안 된 1963년 서북항공기로 불렀던 노스웨스트 편으로 일본에 가서 도쿄 아카사카 호텔에 묵고 태평양 횡단 국제선 보잉 707기를 갈아탔다. 호텔이 우리나라에는 반도와 조선호텔 밖에 없던 시대에 일본에서 호텔 구경도 처음 했었다.
나는 떠나기 전 유학중인 친구에게 프로듀서라는 직업이 미국사회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 전해 달라고 했더니 그는 비서도 함부로 만날 수 없는 엄청난 위치에 있다는 말을 했다. 미국의 프로듀서는 연출 기획 제작을 총괄하는 우리의 CEO 수준이었다. 나는 다행히 친구를 통해 미국의 3대방송사로 알려진 보스톤의 WGBH TV에 이력서를 제출해 취업 장학생으로 선발됐다. 한국에서 방송업무를 본 경력을 인정받아 방송국 일을 하면서 장학금을 받고 보스톤 대학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당시 미국전역에서 선발한 10명의 워킹 스칼라쉽 학생 중 외국인은 나혼자였으므로 KBS TV 연출 실무 경험이 행운을 안겨준 셈이었다."
- 방송의 실무와 이론을 나란히 배울 수 있는 이상적인 유학생활을 한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다. 오전은 대학에 가고 오후는 방송국에서 일했다. 첫 해는 스튜디오에서 카메라, 조명, 마이크 등 기술 조작 일을 했고 이듬해부터는 조정실에서 스위칭과 영상기술을 담당하거나 간단한 뉴스 프로를 연출했다. 세계를 충격 속에 몰아넣은 케네디 암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조정실에서 월터 크롱카이트 앵커가 비장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멘트를 하던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의 방송생활에서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는 장면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샌드위치를 먹으며 전철을 타고 밤늦게 귀가해 다시 밤을 새워 과제물을 준비하는 일상을 반복하면서 나는 미국의 전설적인 저널리스트 에드워드 머로나 프로듀서 후래드 프랜드리 같은 방송인이 되려고 다짐했다."
- 유학 후 대학으로 간 것은 계획하고 생각했던 진로인가?
"귀국 후 바로 대학으로 가지 않았다. 대학보다 다시 방송현장에서 일할 생각을 했고 바라던 대로 신생 민방 TBC로 가게 됐다. 그곳에는 옛 KBS 동료들이 이미 많이 와 있었다. 대학에서 학위과정을 끝낸 나는 2년 더 방송 일을 하고 귀국에 앞서 캐나다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여러 나라의 방송 현장을 방문해 기술적인 실상을 연구하고 관찰하는 기회를 가졌다."
- 대학에 강의를 하게 된 계기가 있는가.
"프로듀서로 힘들게 일하는 것보다 후학을 가르치며 미래에 기여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 기자출신의 신문학 박사로 미조리대 출신인 한양대 장용 교수의 요청을 받아들여 1968년부터 한양대에서 전임교수로 강의를 시작했다. 한양대에 간지 2년 만에 고려대와 서강대 양쪽에서 프로포즈를 받았으나 서강대 존 미첼 교수가 먼저 임용절차를 끝내고 요청해 1970년 서강대로 옮긴 것인데 대학의 신문방송학 분야의 창설초기는 방송학자가 없어서 나에게 여러 대학이 교수 임용 제의를 해왔다. 내가 서강대로 갔을 무렵부터 TV 보급률이 늘어나 대학의 방송학 연구 분야도 활기를 띄었다."
- 모교인 서울대로 돌아가 후배를 제자로 마지막 교직에 봉직한 시기는 매우 의미 있는 기간이었을 것 같다.
"1986년에 언론정보학과 교수로 갔지만 모교인 서울대는 나의 전공은 물론 관련 교수들과도 오랜 연고관계가 있었다. 언론분야가 전공학과로 등장하기 전인 1950년대부터 매스컴 전공은 사회학 분야에 포함되어 있었다. 일찍 언론을 주요 학문으로 분류한 사회학의 대학원 과정에도 A코스가 사회학, B코스가 매스컴이었다. 내가 대학 사회학과 시절에는 동양통신 김규환 기자의 강의를 듣기도 했는데 내가 서울대로 옮겼을 때는 언론학 교수로 계시다가 타계하신 뒤였다. 또 그곳에는 사회학과 은사로 신문대학원장을 지낸 이만갑 교수를 비롯해서 이상희, 차배근 교수 등 인연이 깊은 분들이 많이 계셨다.
자신의 모교에 선생이 되어 돌아가 후배를 제자로 만나 가르친다는 것은 모든 교직자의 바람이며 보람일 것이다."
- 정년 퇴임을 앞두고 서울대에서 명예퇴직을 신청한 것은 자의인가?
"물론이다. 정년을 앞두고 다가올 여생의 새로운 계획을 세울 때 KBS 박권상 사장이 위성방송사업체의 창설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나는 고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대학에는 휴직 절차를 밟을 수도 있었으나 옳은 처신 같지가 않아 께끗하게 명예퇴직을 결심했다."
무형의 멘토는 에드워드 머로
- 이제 많은 업적을 남긴 성공한 언론학자로 젊은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씀을 해달라.
"내 인생은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이 인정을 받은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행운도 따랐다. 6.25전쟁 중 인민군에 끌려갈 뻔했으나 나이가 좀 어린 탓으로 운명이 달라진 것도 행운이었다. 나는 과욕을 싫어한다. 욕심을 자제하고 살다보니 사회생활에서도 과격한 경쟁이나 충돌이 없었다. 욕심이 크고 꿈이 원대할수록 성취하는 결실물도 그만큼 크다는 말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다. 내가 해야 할 일에 충실하면 행복해진다는 단순한 말이 진리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언론학 교수의 길잡이로 삼은 인물이 있다고 했는데 세계 방송저널리즘을 대표하는 미국 CBS의 에드워드 머로(1965년 타계한 전 뉴스담당 사장)가 바로 정신적 멘토의 한 사람이다. 한마디로 미국 방송언론의 기초를 닦고 수많은 언론인재를 양성한, 저널리즘의 양심을 상징하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의 프로그램은 라디오 저널리즘이 TV로 옮겨가면서 세계 방송계의 교본이 된 역사적인 작품이다. 월터 크롱카이트, 후래드 프랜드리도 그의 휘하에서 성장했다.
나는 일이 잘 안 풀릴 때 마음속으로 그와 대화를 나눈다. 당신이 내 입장일 때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면 그는 항상 양심과 진실을 위해 싸워야한다는 지침을 들려준다.
실존 멘토가 없으면 자신이 존경하고 따르고 싶은 가상의 멘토를 정해 그를 본받아 가면 누구나 좋은 성과를 획득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그리고 내가 1960년대부터 좋아하던 크롱카이트가 88 서울 올림픽 무렵 서울을 방문했을 때 방송관련 인사 몇 분과 워커힐에서 만나 학술적인 대화의 시간을 가진 적이 있다. 나는 그때 방송기자가 되려면 신문기자로 활동한 경력이 필요하다는 당신의 과거 생각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는가를 물었을 때 그는 변하지 않았다는 대답을 했다. 그것은 방송 저널리즘이 신문 저널리즘보다 한 단계 더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쓰는 것과 말하는 것을 함께 필요로 하는 것이 방송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대는 난세일지는 모르나 권모술수가 횡행하는 시대인 것 같다. 삼국지 인물 중 사람들은 대다수 주유나 제갈량을 좋아할지 모르지만 나는 노숙을 더 좋아한다. 요즘 삼국지의 온갖 유형의 리더와 그들의 책사(策士)들이 우리 젊은이들의 멘토가 되고 교과서가 되고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다. 젊은 후진을 양성하는 교수도 군자의 길을 버리고 책사의 지혜를 먼저 배우게 해야 인정을 받는 사회가 되고 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환경의 변화가 생겨도 인간의 진리는 양심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끝없이 진실을 추구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젊은이들이 자각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