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원 365칼럼 | 노래하는 삼국유사](18) 치술성모가 된 망부석, 박제상의 부인 이야기

[정진원 교수의 인문학 놀이터 이야기]

2024-10-29     정진원 칼럼니스트
"망부석

(17)신라 명랑법사의 어머니 남간부인은 자장율사 여동생 법승랑 이어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치술공주의 노래

인터뷰365 정진원 칼럼니스트 = 치술령 고개에 가면 망부석이 된 여인이 서 있다. 삼국유사에는 김제상, 삼국사기에는 박제상이라 부르는 신라 충신의 부인 바로 치술공주이다. 신라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충신 남편 박제상의 이야기도 가슴아리고 절절하지만 그를 기다리던 아내에게 ‘선도산 성모’의 위상과 같은 ‘치술성모’로 또 ‘치술신모’의 칭호를 부여하고 백성들이 칭송하는 경우는 보기 드문 일이다. 도대체 그 둘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신라 내물왕 때 왜 하필 미해왕자는 왜의 볼모가 되었을꼬
맏이가 눌지왕이 되었을 때 왜 동생 보해왕자마저 고구려로 갔을꼬
왕이 되었어도 동생들을 데려오지 못하는 형의 마음 애절하나 
어찌하여 나의 낭군 제상만이 그 둘을 구출할 수 있단 말가 
나 치술공주와 세 딸은 어이하릿고 
공무도하公無渡河 공경도하公竟渡河 타하이사墮河而死 당내공하當奈公何 
낭군이여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낭군이여 끝내 건시네 
강에 빠져 돌아가시니 
장차 어찌하릿고 

치술령 바위에 올라가 빌고 또 빌며 기다리고 기다리다 돌이 되었네 
나와 딸들도 죽어서 새가 되니 치(鵄)와 술(述)이라 하네 
치술령 꼭대기 낭군을 그리다 죽어 치술신모가 되었네 

제상이여 그대가 박씨든 김씨든 나는 개의치 않네 
내가 실성왕의 공주였다가 낭군 제상을 만나 
치술부인이 치술성모가 되었든 눌지왕의 새 왕비가 되었든 
바위나 새가 되었든 시시비비 중요치 않네  
우리를 어여삐 기리는 사람들이 제상과 치술이 되어 
성모가 되었으면 신모가 되었으면 바위가 되었으면 새가 되었으면 
갈망한 그들의 바람이 지금도 우리 곁에 살아 숨쉬게 할진대

삼국유사 속 눌지왕의 두 동생 ‘라인언 일병 구하기’

먼저 ‘내물왕 김제상’ 조의 삼국유사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때는 내물왕 36년(390), 왜의 사신이 왕자를 인질로 청하자 당시 10살이던 셋째아들 미해(미토희,미사흔)을 보냈지만 30년이 지나도 돌려보내지 않았다. 신라왕자 미해는 40세가 되도록 신라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내물왕의 첫째 아들 눌지가 왕이 된 지 3년(419)에는 또다른 동생 보해(복호)를 고구려 장수왕에게 인질로 보내게 된다. 보해 또한 한 번 가서는 돌아오지 못한다. 그러자 눌지왕은 7년 후(425) ‘라이언일병 구하기’ 신라 버전인 ‘두 동생 왕자 구하기’ 작전에 돌입하고 그 특명을 김(박)제상에게 맡긴다. 눌지의 가슴 절절한 말을 들어보자.

“옛날 아버님께서 성심으로 백성들을 돌보셨기에 사랑하는 아들을 동쪽의 왜국에 보냈다가 다시는 보시지 못하고 돌아가셨소. 또 짐은 왕위에 오른 이래 이웃나라의 군사가 너무나 강하여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소. 고구려만이 화친을 맺자고 하기에 나는 그 말을 믿고 동생을 고구려에 보냈던 것이오. 그런데 고구려도 동생을 억류시키고 돌려보내지 않고 있소.

짐이 아무리 부귀를 누린다 해도 단 하루도 이 일을 잊은 적이 없고 울지 않은 날이 없었소. 만일 두 동생을 만나 함께 선왕의 사당에 참배하게 된다면 나라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을 것이오. 누가 이 일을 이룰 수가 있겠소?”

당시 전쟁을 피하고 화친을 맺기 위해선 이처럼 왕족을 인질로 삼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삽라군(양산) 태수 김제상은 눌지왕에게 두 번 절하고 답한다.

“신이 듣기로,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가 욕되고,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그 일을 위해서 죽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일의 어렵고 쉬운 것을 따진 뒤에 행한다면 충성이 아니옵고, 죽고 사는 것을 헤아린 뒤에 움직인다면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신은 비록 불초하나 원하옵건대 명을 받들어 행하겠사옵니다.”

삼국유사 속 제상의 왕자 구출 작전

이 얼마나 마음 든든한 말인가. 왕에게 이런 신하 하나만 있어도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일 것이다. 제상은 그야말로 사나이 대장부. 용감할 뿐 아니라 지략도 뛰어난 특급브레인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먼저 고구려로 가서 고구려 사람들의 옷으로 변장하고 보해를 만나 탈출 계획을 감행하고 성공시킨다. 계획이란 미해가 병을 빙자하여 며칠 동안 조회에 나가지 않을 핑계로 방심하게 한 후 거사 날짜에 고성포구에 배를 대놓고 도망시킨 것이다.

눌지왕은 돌아온 보해를 보자 그 기쁨을 감출 수 없었지만, 또 그만큼 35년이나 떨어져 있는 동생 미해가 더욱 생각나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당시 그의 심경은 이러했다.

“마치 몸 하나에 팔 하나만 있고 얼굴 하나에 눈 하나만 있는 것 같구나. 비록 하나를 얻었지만 하나는 잃었으니, 어떻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는가?”

삼국사기 속 치술공주와 제상의 생이별

박제상유적

이때 제상은 다시 왕에게 재배하고 그 길로 말을 달린다. 우리는 현재 산 사람에게는 한 번 조상 제사에 두 번 절하는데 신라 시대에는 왕에게 재배를 하고 있다. 어쩌면 지금의 재배가 그때 왕에 대한 예의가 조상에 대한 예의로 전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때 바야흐로 제상의 아내가 등장한다.

당연히 집에도 들르지 않고 충성에 가득 차 떠난 제상의 이야기를 들은 아내 치술은 말을 달려 율포 해변까지 뒤쫓는다. 당시 신라 여인도 말을 탔었다는 사족을 귀띔해두고 긴박한 상황을 따라가 보자. 아뿔싸 제상은 이미 배를 타고 떠나고 있다. ‘임아 그 바다를 건너지 마오’라고 ‘공무도하가’를 불렀을 법한 그 장면에서 제상은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눴다고 전한다.

아내가 이 소식을 듣고 포구로 달려와 배를 바라보며 크게 통곡하고 말했다.

“부디 잘 다녀오세요.”

제상이 돌아보면서 말했다.

“내가 명을 받들어 적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당신은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지 마시오.”

그렇게 목숨 걸고 고구려에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돌아와선 또 다른 사지로 가는 남편이라니.. 치술은 어찌나 애달팠던지 망덕사 문 남쪽 모래밭에 이르자 드러누워 발버둥 치며 울부짖고 몸부림쳤다고 전한다. 치술은 꽤나 적극적이고 감정표현을 거침없이 하던 성격이었던가 보다. 그리하여 그 곳에 이름이 길게 드러누운 모래밭 ‘장사(長沙)’이라고 부르게 됐다는 이야기. 그런 그녀를 친척 두 사람이 부축해 일으키려 하였으나 치술은 다리 뻗고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벌지지(伐知旨)’

눌지왕의 ‘이산가족 찾기’에 사무친 한과 그리움을 풀기 위한 또 다른 가족의 생이별이 희비의 쌍곡선으로 흐른다.

제상의 미해왕자 구출작전

그렇게 왜국으로 떠난 제상은 이번에는 더욱 과감한 지략을 쓰기 위해 기꺼이 자기 한목숨을 던진다. 왜왕에게 눌지왕을 배반하고 온 비운의 신라인 연극을 완벽하게 해내 왕의 신뢰를 얻는다. 미해와 가까이하며 바다에 나가 낚시를 해 왜왕에게 바쳐 환심을 사는 데까지 성공한 제상.

삼국사기에는 좀 더 구체적인 신뢰를 쌓는 내용이 전한다.

왜왕은 제상과 미해(미사흔)의 관계를 처음에는 의심했으나 제상보다 바로 전에 백제인이 들어와 첩보를 전한다. 신라와 고구려가 왜를 치려한다는 정보와 함께 신라에서 제상과 미해의 가족을 박해한다는 내용을 듣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또한 제상의 솜씨라고 봐야 할 것이다. 백제인을 스파이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드디어 안개가 자욱한 어느 날, 미해를 신라로 떠나보내고 자기가 대신 미해인 체하며 병으로 앓아누워 시간을 번다. 물론 미해는 제상과 함께 돌아가기를 간청했지만 실패 가능성이 높은 수를 제상은 감행하지 않는다.

왜왕이 알았을 때는 이미 미해가 탈출에 성공한 뒤, 왜왕은 분노해 미해왕자를 보낸 까닭을 묻는다.

“나는 계림의 신하이지 왜국의 신하가 아니다. 이제 우리 임금의 뜻을 이루려고 했을 뿐이니, 어찌 감히 무엇을 그대에게 말하겠는가?”

왜왕은 마지막으로 제상을 회유한다. 왜왕도 제상과 같은 신하를 왜 몰라봤겠는가.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될 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寧爲雞林之犬㹠 不爲倭國之臣子). 차라리 계림의 매질을 당할지언정 왜국의 벼슬을 받지는 않겠다.”

제상은 왜왕에게 그 유명한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되겠다’는 말을 남기고 온갖 고문과 처참한 화형 속에 장렬히 전사한다. 삼국사기에는 이 내용도 자세하다. 왜왕은 믿었던 만큼 배신감도 컸기에 아주 잔혹하게 그를 죽인다. 칼로 베고 불에 달구고 그러고도 모자라 목을 베었다고 한다.

눌지왕은 두 형제를 만난 뒤 향악(鄕樂)인 우식곡(憂息曲)을 지어 그 기쁨을 노래하고 있는데 말이다.

눌지왕의 보은 : 치술 국대부인 책봉

그렇다면 두 동생을 얻은 눌지왕은 제상에게 어떻게 하였을까. 제상의 아내를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책봉하고 그의 둘째 딸을 미해 공의 부인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어쩌면 제상에게는 눌지왕이 김 씨였으므로 왕의 성(姓)을 하사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박제상이 김제상이 되었다고 보는 설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박제상이 박혁거세의 후손이요 파사이사금의 5세손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제상 또한 왕족이었다.

또 미해를 왜에 보낸 것이 삼촌인 실성왕이었다고도 한다. 실성 또한 왕자 시절 고구려 볼모로 갔는데 그것을 허락한 그의 형 내물왕에 대한 복수였다고. 내물왕이 죽고 아들 눌지가 너무 어려 삼촌인 실성왕이 즉위했다는 것이다. 고구려 인질로 보내진 일에 원한을 품고 있던 실성은 내물마립간의 태자였던 눌지도 고구려군을 마중 나가게 한 다음 고구려인을 시켜 은밀히 죽이려 하였다. 하지만 고구려인은 범상치 않은 눌지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 417년(실성 16) 눌지는 오히려 실성마립간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 얽히고설킨 가족관계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화랑세기에는 아내 치술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다. 그 실성왕의 딸이 치술공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뭔가 이 얽히고설킨 왕가의 미스터리가 설명이 되는 것 같다. 게다가 눌지의 왕비 아로부인도 실성왕의 딸이다.

죽어 치술신모가 된 제상부인과 세 딸

 잠시 복잡한 가족관계를 정리할 동안 죽은 제상의 아내 치술의 행적을 살펴보자. 그렇게 헤어질 때도 역사에 길이 남을 드라마틱한 장면을 보여주던 공주가 아니었던가. 당연히 오랜 시간이 지나도 치술부인은 남편을 그리는 마음이 더해 갔다. 그녀는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 위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하다가 죽었는데, 죽어서 치술신모(鵄述神母)가 되었다. 지금도 사당이 남아 있다. 이것이 삼국유사의 결말이다.

화랑세기와 구전의 또 다른 치술의 결말

"망부석

 그러나 화랑세기는 반전의 기록을 쏟아놓는다.

눌지가 실성왕의 첫째 딸을 왕비로 삼고 둘째 딸 치술은 제상이 죽자 위로차 성은을 베풀어 그 사이에서 황아를 낳았다고 한다. 그리고 둘째 딸이 아니라 첫째 딸이 청아인데 미해와 결혼했다고 전한다.

또 다른 구전으로 울주 두동 치술령에 제상의 아내에 대한 설화가 전해온다. 제상의 아내가 죽어서 치술산 신모로 추앙받아 사당을 세웠는데 바로 신모사라는 것이다. 신모사는 원래 치술령 정상에 있었는데 제상과 그의 부인을 함께 제사 지내기 위해 치산원이 세워졌는데, 지금의 치산서원이 그것이다. 치산서원에는 박제상을 모신 충렬묘, 부인을 모신 신모사, 두 딸을 기리는 쌍정려 등이 있다.

한편 다른 구전에서 제상은 대마도 국경을 지키러 가면서 아내에게 혹시 대마도를 보다가 그 산에 검은 구름이 끼면 자기가 죽은 줄 알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몇 해가 지나도록 매일 부인과 세 딸이 치술령에 올라가 대마도를 보는데 어느 날 검은 구름이 꽉 덮여 산이 보이지 않았다. 부인은 남편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거꾸로 떨어져 죽어 그 몸은 망부석이 되고 혼은 한 마리의 새가 되어 날아갔다. 아내는 죽어서 ‘치’라는 새가 되고 같이 기다리던 세 딸은 ‘술’이라는 새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 새가 날아든 암자가 있었는데 그 절의 이름이 바로 은을암(隱乙庵)이다. 이 암자는 절벽에 떨어져 죽을 때 새〔乙〕가 되어 숨어서〔隱〕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국어학의 입장에서 보자면 향찰식 표기로 ‘숨을 암’이 더 유력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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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한 가지 역사적 사실에 다양한 변주로 전해지는 이야기는 당시 사람들의 염원을 투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애닯게 죽었는데 성모나 신모가 되었으면 좋겠고 망부석이라도 남아 기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도 결국 당나라에서 볼모로 있다가 죽는데 그 죽음의 장소가 각기 다르다. 삼국사기에서는 당나라에서 죽은 것으로, 삼국유사에는 귀국하다 바다에서 죽어 그를 위한 관음도량 인용사가 미타도량으로 용도가 변경되었다는 후일담으로 남는다.

이렇게 같은 이야기도 삼국유사, 삼국사기, 화랑세기, 구비설화 등 텍스트를 겹쳐 촘촘히 정독하면 중첩되기도 하고 빠진 부분이 보충도 되지만 상반된 갈래나 결말로 읽힐 때도 있다. 어쩌면 이것이 스토리텔링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묘미일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제상의 부인이 치술성모가 되었든 눌지왕의 새 왕비가 되었든지 바위나 새가 되었든지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제상과 치술이 되어 그렇게 되기를 갈망한 그들의 바람이 이처럼 여러 갈래의 이야기를 낳고 지금도 그녀를 우리 곁에 살아 숨 쉬게 한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