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정 대사의 일본 역사기행](13) 백제 후손이 지배한 메이지유신 발상지, 야마구치

- '일본 서쪽의 교토' 역사문화 도시 야마구치를 가다 - 14세기 일본 서부 호령한 '백제 핏줄' 오우치 가문

2023-08-24     장시정 칼럼니스트

(12) 메이지혁명의 산실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이어서

인터뷰365 장시정 칼럼니스트 = 여행 12일차, 3월 29일 아침이다. 신야마구치 호텔에서 나와 지역 열차로 야마구치로 갔다. 야마구치는 한때 서부 일본에서 가장 번성했던 이 지역의 지배자였던 오우치(大內) 가문이 교토를 모방하여 도시를 설계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서쪽의 교토라는 의미의 서경(西京)으로도 불린다.  

오우치 가문은 백제 성왕의 삼남인 임성태자를 시조로 자처한다. KBS '역사추적'에서 백제의 후손 오우치 가문에 대한 탐사보도를 볼 수 있다. 2009년 임성태자의 45대 후손인 일본인 부부가 한국을 방문, 백제 왕릉을 참배하면서 너무 늦게 조상을 찾아뵈었다면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까지 보였다.

지금도 야마구치에는 백제부라는 마을이 있고 백제부신사(百濟部神社)의 도리이는 백제로 가고 싶다는 듯이 바다 쪽을 향하고 있다. 임성태자를 모시는 절인 조호쿠사(乘福寺)도 있고 임성태자를 못 잊어 일본으로 합류한 그의 어머니인 성왕비를 기리는 카모신사도 있다.

오우치가의 족보에는 시조가 타타라(多多良), 임성태자로 나와있고 문헌자료에는 그가 제철기술을 갖고 597년 구다라쓰(현재 이름은 구다마사) 해안에 도착했음을 알리고 있다. 바로 이 백제의 후손, 오우치 가문이 14세기 무로마치 막부시대에 일본 서부를 호령하는 세력가로 올라섰다.

일본의 3대 파고다, 루리코지 5층탑

루리코지溜璃光寺

나는 오우치가에서 세운 루리코지(溜璃光寺) 5층목탑을 보기 위하여 야마구치역에서부터 30여 분을 걸어갔다. 이 탑은 오우치 모리하루(大內盛見)가 1442년에 그의 형인 요시히로(義弘)를 기리기 위해 세운 탑이다.

4계절마다 철철이 변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일본의 3대 파고다로 간주된다. 마침 수리 중이라 탑의 하단부를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우리가 봤던 다보탑이나 석가탑과 같은 석탑보다는 더 섬세하다. 위로 갈수록 탑신이 좁아지는 목탑인데 노송나무껍질 지붕의 곡선이 부드럽다.

도쿄의 서북쪽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정착해서 세웠다는 고마향(高麗鄕)이란 도시가 있다. 멸망한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보장왕의 아들인 약광왕(若光王)이 1300년 전인 716년 일본으로 건너와 가나자와현 오이소에 상륙하여 지금의 고마향(메이지시대 히다카시日高로 개칭)에 고구려 도시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고구려신사(지금은 다카쿠신사)도 있고 약광왕의 일본 상륙을 재현하는 미후네 축제도 있다. 약관왕은 곤겐(權現, 부처의 화신)의 반열에 올랐다.

그런데 야마구치의 오우치가문 이야기나 고마향의 약광왕 이야기가 그저 구전으로만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사료에 일일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 역사가 아니라 일본 역사에 기록이 남아있는 건 그들이 우리나라에선 '사라진' 존재였지만 일본에서는 '나타난' 존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1300~1400년 전의 한반도와 일본은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가깝게 연결되어 있었다. 한국과 일본은 고래로부터 잘 알고 지냈던 친구와 같은 존재다. 친구는 가끔 싸우기도 하지만, 가까워지지 않을 이유는 없다.

우리는 조선왕조실록 같은 기록문화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기록문화에선 일본이 우리보다 몇 발 앞선다. 각 부락마다, 사찰마다, 가계마다 풍부한 기록을 갖고 있다. 지금도 유서 깊은 집안의 장롱에는 무진장한 분량의 에도시대 문서들이 잠자고 있다 한다. 40~50년 전 한국에서도 선풍적 인기를 모았던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莊八)의 대하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대망)'에서도 전국(戰國)시대 각 전투의 양상은 물론 심지어 전투에 임하는 장수들의 발언이나 마음가짐까지도 기록한 사료를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호후 텐만구에서 학습의 신을 불러내다

​루리코지를 보고 나서 길가의 벚꽃 향연을 만끽하면서 다시 야마구치역 앞으로 돌아왔다. 호후(防府)로 가는 JR 버스를 타기 위해서다.

호후에서는 텐만구(防府天滿宮, 904년 창건)부터 찾았다. 학문의 신으로 추앙받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管原道眞)를 모시는 텐만구는 일본 내 수 백 개가 있다. 그중 호후 텐만구는 교토의 기타노(北野) 텐만구(947년 창건), 후쿠오카의 다자이후(太宰府) 텐만구(905년 창건)와 함께 일본의 3대 텐만구라 한다.

여기서 소원을 빌면 시험에 잘 붙는다는데, 내가 이번 여행에서 많은 신사를 다녔지만 불현듯 이곳에서는 소원을 빌어보고 싶었다. 지금 내 나이에 합격을 기원할 일은 없지만, 어쩐지 여기선 그런 마음이 일어났다. 일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두 번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 100엔 동전을 던진 후 박수를 두 번 쳐서 학습(學習)의 신이라는 이곳 신사의 가미(神)를 불러내고선 다시 두 번 허리 숙여 인사하였다.

일본의 중세 영주, 모리가(毛利家)의 저택과 정원

​텐만구를 나오니 벌써 12시가 되어 점심시간이 되었다. 마침 신사 입구에 라멘 가게가 있어 라멘을 먹었다. 일본 라멘집에서 먹는 라멘은 인스턴트 면이 아니다. 탄탄면이라고 하든가, 암튼 가락국수를 먹는 기분이었다.

식사 후 다시 30여 분을 걸어서 모리씨정원(毛利氏庭園)으로 갔다. 모리 가문은 오우치가문을 몰아내고 전국시대를 거쳐 에도시대까지 이 지역을 지배한 가문인데, 마지막 영주였던 모리 모토노리는 메이지혁명에 적극 가담한 공로로 공작 작위를 받았다. 모리가문은 세키가하라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군(西軍) 편에 섰던 만큼 동군(東軍)의 총수 격인 도쿠가와 가문의 에도 막부 타도에 누구보다도 앞장섰을 듯하다.

이곳에 그 저택과 1916년 완공된 25,000평 규모의 정원이 있다. 꽤 크고 근사한 정원이다. 저택은 서원조(書院造)의 화풍(和風) 건축 양식으로 설계되어 상, 하수도와 발전, 급탕설비를 완비하고 수세식 화장실까지 갖춘 당시 최고의 저택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다시 호후역으로 40여 분을 걸어서 돌아와 시모노세키행 JR 기차를 탔다.

겐페이 전쟁의 최후 격전지 간몬해협을 가다

​시모노세키역에서 내려 시내버스를 타고 가라토(唐戶) 지역으로 갔다. 시모노세키역에서 가라토로 가는 도로는 좌우에 해변과 산을 끼고 있어 부산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본 시내버스는 데이 티켓 같은 승차권이 없더라도 내릴 때 현금을 내면 된다. 그러니 버스를 한, 두 번 정도 이용하기에 편하다. 우리나라 버스에서는 최근 현금을 받지 않기로 했다는데, 교통카드가 없는 외국인들이 불편할 것 같다.

아카마신궁(赤間神宮)은 겐페이전쟁(源平戰)을 종결지었던 1185년 단노우라(檀之浦, 시모노세키) 해전에서 패하여 다이라家의 외할머니의 품에 안겨 바다로 몸을 던진 안토쿠(安德)천황(당시 8세)을 기리는 신사다. 이때 외할머니는 "바다에도 왕궁이 있다"라고 천황을 위로했다고 한다.

단노우라 해전에서 승리한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쇼군이 되어 일본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막부를 세웠다. 역사적인 단노우라 해전의 무대는 혼슈(本州)와 규슈(九州) 사이에 놓여있는 간몬(關門)해협이다. 양안 간 최단 거리는 600m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혼슈는 규슈까지 그대로 연결된 하나의 땅이라는 생각도 든다.

조선 독립을 선언한 시모노세키 강화조약 회담장

회담장

아카마신궁 바로 옆에는 일청전쟁 후 1895년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을 맺은 기념관이 있다.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은 제1조에서 조선을 독립국으로 선언했다. 개국 이래 오백 년 동안 중국의 속국이었던 조선의 독립이 일본의 힘으로 보장된 것이다.

유리로 둘러쳐진 당시 회의장을 찬찬히 보니 풍문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일본 대표단의 단상을 높게 하여 청나라 대표단을 하대했다는 정황은 보이지 않았다. 평평한 회의장 바닥에 다만, 양측의 수석대표인 이토 히로부미와 리훙장이 앉았던 의자가 다른 대표단원의 그것보다 상당히 큰 것이었다.

조선통신사의 상륙지 시모노세키

리훙장은 강화회담 중 귀갓길에 한 일본인의 습격을 받았고, 그 후로 큰 길 대신 산길로 다녔다는데, 그 산길이 지금 '리훙장의 길'로 관광상품화되었다.

강화회담장 길 건너 편에서 조선통신사 상륙비를 볼 수 있었는데, 이것은 김종필 총리(한일의원연맹회장)가 이곳을 방문해서 세운 것이다. 조선의 선진문물을 전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 만보기를 보니 지난 22일 도쿄 시내에서 고쿄(皇居) 둘레길을 걸었던 날에 이어 두 번째로 3만 보 이상을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