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정 대사의 일본 역사기행](7) 도쿄 시내를 발로 누비다
- 뚜벅뚜벅 나홀로 도쿄 도보여행 - 진보초 책방 거리 거쳐 고쿄(皇居)와 주위 둘레길, 그리고 신주쿠와 시부야 여행기
▶(6) '고속철 세계 챔피언' 신칸센...에도시대 여행문화 전통을 느끼다 에 이어서
인터뷰365 장시정 칼럼니스트 = 여행 5일차 3월 22일이다. 아침에 호텔을 나와서 도쿄 진보초 책방 거리를 거쳐 야스쿠니신사까지 걸어갔다.
야스쿠니 신사와 부속 박물관인 유슈칸을 천천히 둘러보고 나와서 키타노마루 공원과 천황궁인 고쿄(皇居)를 해자 왼쪽 너머로 끼고서 국립극장, 최고재판소, 국회의사당을 거쳐 고쿄 정문쪽으로 걸어 내려왔다. 마침 활짝 핀 벚꽃이 화사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벚꽃놀이를 나온 일본 사람들로 붐볐다.
사쿠라다몬(櫻田門) 게이트로 들어가 고쿄가이엔(皇居外園)을 거쳐 사카시타몬(坂下門) 게이트 앞까지 갔다가 마루노우치 빌딩가를 가로질러 도쿄역에서 JR을 타고 호텔로 돌아오니 5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지도를 보니 고쿄 주위 둘레길 3/4 정도를 온전히 도보로 걸어서 돈 셈이었다.
진보초 거리·야스쿠니신사를 돌아보다
중고책 서점이 몰려있는 진보초(神保町) 거리는 생각보다는 덜 매력적이었지만 길거리에 전시된 책들의 면면을 보면서 역시 일본이 독서와 기록의 왕국임을 새삼 깨닫는다.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는 쉽게 표현하자면 우리의 현충원 같은 곳이다. 운영 주체가 국가가 아니라 신사인 점이 다를뿐이다.
안내 팸플릿을 보니 "조국 수호를 위한 공무로 희생된 사람들의 영혼"을 모신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메이지 유신 당시의 내전이었던 보신, 세이난전쟁부터 일청, 일러, 일중전쟁을 거쳐 태평양전쟁까지의 전몰 군인과 민간인 등 총 246만 6천여 명의 영혼을 안치했다. 태평양 전쟁 전범으로 처형된 이들의 영혼도 안치되어 있다.
야스쿠니신사는 매년 일본 총리가 참배를 했다느니, 공물을 바쳤다느니 하는 뉴스로 우리의 이목을 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본다면 어쨌거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전몰 영령들이니 이들을 어디선가는 거두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일본은 죽은 이의 영혼을 숭배하는 신도의 나라다. 그래서 이런 역할을 이곳에다 떠맡긴 것이 아닐까? 신도가 민간 차원의 종교라지만 야스쿠니신사를 그렇게만 보기는 어렵다.
2차 대전을 함께 일으킨 독일에는 전몰장병들을 위한 이런 국가적 차원의 국립묘지나 영령 안치 시설은 없다. 지방에 전쟁 당시 세워진 그들의 참전을 기리는 비석 같은 것들이 동네별로 남아 있을 뿐이다. 대다수 독일의 전몰장병들이 홀로코스트라는 제노사이드 범죄에는 간여하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일종의 연대 책임을 지운 셈이다. 그래서 똑같이 2차대전을 일으키고 전쟁범죄를 저질렀지만 독일의 군인들은 일본처럼 국가 차원의 예우가 없다.
그러고 보니 많은 일본 시민들이 이곳을 방문해서 동전을 던지고 참배한다. 우리 시민들은 여기 야스쿠니신사를 방문하는 일본인들 만큼 평시에 우리 현충원을 방문하는가? 아닌 것 같다.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일본의 정치인들을 비난하기 전에 우리부터 현충원을 대하는 태도를 돌아보면 좋겠다.
일본의 신도는 메이지유신과 함께 일본 정부가 국책으로 진흥시켜 대중화에 성공했다. 천년 이상 이어져온 일본의 고대 전통에 결합시켜 천황이나 국가를 일반 시민과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선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이 말한 '만들어진 전통'의 가장 전형적인 사례인듯하다.
유슈칸(遊就館)이라는 신사의 부속 박물관에는 주로 전몰장병과 함께 무기 등 전쟁에 관한 기억이 전시되고 있었다.
재미있는 건 일본 군인들이 나라를 "지키기(defend)" 위하여 전몰했다고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봐도 이건 너무 주관적인 관점임을 토로치 않을 수 없다. 오사카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도 침략 대신 출병이란 말을 쓰고 있음을 보았다. 왜 이들은 침략을 침략으로 부르지 못할까? 국제적인 공동 인식과는 한참이나 떨어진 것이다. 문명국 일본의 아쉬운 대목이다.
대부분의 전시실에선 사진 촬영이 금지되었고 기념품 가게의 판매 책자들도 일어본 외에 영어본은 없었다. 야스쿠니신사를 일본인들을 위한 국가 내부적 시설물로 이해해 달라는 메시지인듯하다.
일본 천황이 사는 곳, 고쿄(皇居)
고쿄(皇居)는 천황이 사는 곳, 황궁이다.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신정부가 막부정권을 접수하고 이듬해 3월에 교토에 살던 천황이 쇼군이 살았던 에도성으로 옮겨왔다. 천도(遷都)한 것이다.
정문 앞 안경다리가 고색창연하다. 고쿄 바깥 정원(外園)의 넓은 잔디밭에 조성된 소나무들을 보니 이 소나무들이 예사가 아니다. 적당한 크기로 찍어낸듯 일정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본사이(盆裁)의 확대형이라 할까. 단조로운듯하면서도 아름답다.
고쿄를 제대로 보려면 궁내청 홈피에 들어가 예약을 해야 하는데 이번에 보니 3월의 많은 날들이 아예 방문을 받지 않는 날들이었다.
1914년 준공된 도쿄 마루노우치 역사...주변 고층 건물과 신구(新舊)의 조화
고쿄의 해자 건너편 서쪽에 최고재판소, 국회의사당, 국립극장 등 주요 건물들이 몰려 있다. 역시 건축은 그 나라의 국격이다. 일본의 최고재판소를 보니 우리 대법원 건물이 생각났다. 멋없이 키만 큰 서초동의 그 건물 말이다. 김수근씨의 작품인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적어도 그 외형만큼은 일본의 국회의사당에 견주어도 그다지 손색이 없을듯하다.
도쿄역의 마루노우치 역사 건물은 1914년 준공되었는데 적벽돌의 외양이 아름다웠다. 인근 마루노우치 빌딩가의 고층 건물들과 신구의 대조와 조화가 빚어내는 아름다움이 돋보였다.
호텔로 돌아와서 시간 반을 쉬고 다시 나갔다. 우선 우에노(上野) 공원으로 갔다. 이 공원은 1873년 일본 최초로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공원 안에 동물원, 박물관, 미술관이 있다. 때마침 벚꽃 구경하러 나온 인파로 걷기 힘들 정도였다.
이번 일본 여행에서 보니 특히 인도 관광객들이 많이 눈에 뜨였다. 이들은 자신의 전통복장을 하고 다니니 금방 알 수 있다. 여행을 한다는 건 형편이 나아졌다는 것이리라.
24시간 잠들지 않는 거리, 신주쿠와 시부야...'혼술'의 소소한 행복
다음 행선지는 신주쿠(新宿)였다. 꼬치거리라는 오모이데요코초 선술집 골목에서 닭고기, 돼지고기 꼬치구이로 삿포로 맥주 한 병을 비웠다. 여행 중 마시는 맥주맛은 일품이다.
체코에서 왔다는 미국 유학생과 옆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이 친구는 한국도 몇 번을 다녀왔다고 한다. 술값도 싸고 술집 분위기도 참 좋다. 그러다가 가부끼초(歌舞技町)를 보고 시부야(澁谷)로 넘어왔다. 그 유명한 스크램블 교차로를 건너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오니 밤 10시가 넘었다. 오늘 총걸음걸이가 3만 보를 넘었다.
신주쿠나 시부야는 도쿄의 또 다른 모습이다. 24시간 잠들지 않는 거리다. 신주쿠에서도 가부키초(歌舞伎町)는 가장 활기 넘치는 곳이다. 음식점, 영화관, 노래방, 게임방 같은 유흥시설이 밀집되어 있다.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는 세계에서 가장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교차로라 한다. 그런데 가만 보니 대각선 얼룩말 선이 두 방향으로 교차하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그어져 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서로 부딪히지 않고 잘 걸어 다닌다. 시부야역 앞에 충성스러운 개, 하치의 동상이 있다는데 놓치고 보지 못해 아쉽다.
그곳엔 세계의 사람들이 다 모여 있었다. 일본의 거리나 지하철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우리보다 훨씬 국제적이다. 다양한 인종, 국적의 사람들이 거침없이 부딪힌다. 국적만 다양한 게 아니다. 어딜 가나 남녀노소의 비율이 훨씬 균형적이다. 그런 만큼 사람들의 모습도 다채롭다.
일본 사람들은 외모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요즘 서울에선 대머리를 볼 수 없다. 가발을 쓰거나 머리를 심기 때문이다. 여기선 꽤 많은 대머리를 볼 수 있었고 복장도 가지각색이다. 서울에선 이제 볼 수 없는 통넓은 바지나 넥타이도 드물지 않게 보인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꾸밈의 생활이라기보다는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자유분방한 개성과 멋, 그리고 인간적인 매력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