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원 교수의 인문학 놀이터 이야기] (1)튀르키예,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 7천 년 전 사람이 살았던 튀르키예 큘테페
인터뷰365 정진원 칼럼니스트 = 2000년도에 처음 큘테페에 갔었다. 그때만 해도 사람들은 4천 년 된 유적지라고 이야기했다. 2022년에 가니 발굴 조사 결과 7천 년 된 유물이 나와 3천 살을 더 먹은 유적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신석기 시대를 돌도끼 들고 수렵이나 채취로 동굴 속에서 생활할 것이라고 배웠다. 큘테페를 가보면 그동안 우리의 조상들을 얼마나 얕보았던 것인지 깊은 반성이 생긴다.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넓은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몸과 마음이 크디 컸던 그야말로 초인들의 시대를 살았음을 유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핸드폰같은 손바닥만한 기계 나부랭이에 스물네 시간 덜미 잡혀 사는 21세기 현대인들, 심신이 종잇장처럼 허약해진 우울한 후손들을 보면 그들은 과연 뭐라고 할까. 이육사의 시처럼 광야의 초인들이 살았던 시절, 튀르키예 카이세리 근교 큘테페로 신석기 초인들을 만나러 떠나 보자.
7천 년 전 사람이 살았던 곳...튀르키예 큘테페 가는 여정
큘테페는 카이세리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약 20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곳을 종종 ‘돌무쉬’라는 작은 마을버스를 타고 갔었다. 에르지예스대학교 인문대 같은 층에 근무하던 일본학과 여선생님들과 샌드위치며 과일을 싸 들고 다섯 살 딸아이와 소풍처럼 다녀오곤 하였다. 당시 한국학과의 젊은 고 선생은 우리 딸아이가 잘 따랐는데 같이 끝말잇기를 해가며 그 큘테페 길을 걷곤 하였다. 어느 날 아이가 시작하자마자 ‘사슴’이라고 해 고 선생을 당황시켰던 일이 떠오른다.
그때를 떠올리며 한국말을 곧잘 하는 1학년 학생 제이넵과 같이 답사를 떠났다. 예전에는 돌무쉬로 한 15분 정도 갔던 것 같은데 이제 20년이 지난 카이세리는 그야말로 상전벽해가 되어 전혀 가는 방법부터 도무지 알 길이 없어 난감하였다. 허허벌판에 들개만 쏘다니던 황무지는 이제 모두 한국식 뉴타운 아파트단지로 변하였고 당시에 없던 트램이 생기고 도로도 터널, 고가, 고속도로화 등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번에 큘테페 가는 여정만도 한 회분량의 글이 될 만큼 길고 먼 여정이었다.
큘테페를 가는 날 아침, 우선 대학교 캠퍼스 안 ‘에르지예스대학교 아동병원 역 Erciyes Üniversitesi Hastaneler’에서 2번 트램을 타고 ‘Tuna’ 역에 내린 다음 거기서 1번 트램으로 갈아타고 ‘동부시외버스 역 Doğu Terminali’에서 내린다. 그리고 돌무쉬 정거장을 찾아 동네를 누빈다. 택시 정류장과 재래시장, 가게들이 즐비한 읍내를 걸어가다 보면 조금 세련되어진 돌무쉬 마을버스 몇 대가 눈에 띈다.
제이넵이나 나나 둘 다 초행길이었기에 일단 택시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서 길을 묻는다. 세상 친절한 기사 할아버지는 우정 따라와서까지 길을 가르쳐 주신다. 우리를 형제로 여기는 튀르키예 후예답다.
돌무쉬는 정족수가 되어야 떠난다. 우리는 아침 일찍 서두른 마련으로 오전 11시쯤에 도착했다. 점심때 떠난다는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오면서 봐둔 동네 맛집 ‘아다나 케밥집’에 갔다. 식탁은 두어 개에 길가 간이 테이블이 있는 작은 케밥집이었지만 주방장과 직원들이 네다섯은 된다. 그리고 식당 주인은 내가 한국인인 걸 알고 나서는 예의 남한인가 북한인가를 묻는다. 공식이다. 그러더니 우리 집이 유명한 걸 알고 왔느냐고 한다. 아니 그냥 지나가다 맛있을 것 같아 들어왔다고 하니 우리 집이 줄 서서 먹는 맛집이라고 자랑이 늘어진다. 자부심이 대단하니 맛도 좋을 것임은 일러 무삼하리.
터키는 어느 식당이든 기본은 한다.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터키 동네 식당의 클라쓰. 자칭 세계 3대 요리국가라고 하지 않는가. 나는 우리나라 한식이 3대 요리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튀르키예의 맛은 인정. 명품 맛집 여부는 디테일한 2%에서 드러났다. 우리가 맛있는 아다나 케밥을 먹고 나자 차이를 서비스해주는데 찻잔을 먼저 더운물로 덥힌 뒤 차를 따라주는 것이 아닌가. 내가 커피나 차를 마실 때 하는 습관이다. 역시 터키 맛집으로 인정.
큘테페 가는 길에 만난 사람들
점심을 먹고도 한참 기다려 1시가 다 되어 떠난 큘테페. 큘테페가 이렇게 멀었다니 새삼 놀라운 일이다. 거의 고속도로 같은 새 길을 30분쯤 달려 우리를 도로 갓길에 떨구어 주었다. 거기에는 ‘큘테페 2㎞’라는 이정표만 덜렁 서 있었다. 동서남북 어디로 가야 할지 감도 잡을 수 없는 도로 한복판에서 쩔쩔매다가 마침 길 건너에서 차를 세워놓고 곡식을 파는 아저씨를 발견했다. 이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누가 곡식을 사갈지 내가 더 걱정이 되는 아저씨. 길 묻는 사람조차 반가운지 친절하게 설명해주신다.
기찻길 있는 쪽으로 걸어가면 되는데 들개가 많아 물릴 수 있으니 히치하이킹을 해서 차를 얻어타고 가라는 조언이었다. 이 허허벌판 선사시대 유적지를 자동차 타고 가는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한 것일까. 어디서 히치하이킹을 할 수 있을까. 의구심 가득한 채로 지나가는 차를 기다려보았으나 허사. 결국 우리는 걸어가다 지나가는 차가 있으면 잡아타기로 하고 걷고 있는데 정말 거짓말같이 신이 보낸 것처럼 차 한 대가 지나간다. 텃밭 농사를 지으러 가는 노부부였다.
우리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들개가 있는 곳만 지나가게 해달라고 부탁하니 뒤에 타란다. 그런데 이미 귀한 손님이 타고 있었으니 새로 파종할 모종이 점잖게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칠세라 모종을 소중히 부여안고 무사히 근처까지 갈 수 있었다. 텃밭 가는 갈림길에 할아버지가 차를 세우자 할머니는 큘테페까지 데려다주자고 옥신각신. 우리는 여기면 충분하다고 부부싸움을 말리고 조그만 기념품을 하나 드린 뒤 얼른 내렸다. 나는 이럴 때를 대비해 늘 열쇠고리 등 한국을 기념하는 소품들을 챙겨 다닌다. 오늘도 튀르키예인들의 친절은 변함없이 줄을 잇는다.
큘테페에 생긴 안내경비소와 ‘일포스티노’ 소장님
이제 한낮이 된 땡볕 길을 몇백 미터쯤 걸어가니 예전에는 없던 새로 지은 경비실이 보인다. 아무도 없는 벌판에 녹슨 표지판 하나 있을까 말까 하던 옛날의 큘테페가 아니었다. 종횡무진 돌아다니며 ‘여기가 부엌이었군, 이게 화덕을 놓았던 자리래’하고 있으면 한 30분쯤 지나 자전거를 끌고 어떤 아저씨가 자기 아이들까지 데리고 입장료를 받으러 왔었다. 우리는 어떻게 알고 왔지 하면서 입장료를 내는 게 맞나 반신반의하는 눈초리를 하고 있으면 무슨 버스표 티켓처럼 생긴 종이 한 장을 주곤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번듯한 경비실과 맞은편에는 발굴유물을 건사하고 연구하는 큘테페 고고학 연구소까지 생긴 것이 아닌가.
게다가 경비소 관리소장님(?)은 직업정신도 투철하여 뒷주머니에 수갑까지 차고 있었지만 이곳에서 발굴된 함무라비 법전 같은 쐐기문자 힛타이트 점토판 모형을 개인적으로 준비해 친절히 설명까지 해주었다. 그리고는 터키 차이를 대접한다. 약간 영화 ‘일 포스티노’의 시인 우체부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그 친절한 안내에 차까지 얻어 마시고 우리는 힘을 내 다시 땡볕으로 나와 씩씩하게 걸어갔다.
▶이어서 (2) 큘테페 가는 길과 카니쉬 왕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