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고통이 숨 쉬는 세상 속 '붉은 실'...뮤지컬 '아가사'
[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고통이 숨 쉬는 세상 속 '붉은 실'...뮤지컬 '아가사'
  • 주하영
  • 승인 2021.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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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추리소설 작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실종 실화를 바탕으로 한 창작 뮤지컬
뮤지컬 '아가사' 공연장면. /사진=나인스토리
뮤지컬 '아가사' 공연장면. 1926년 12월 3일부터 13일까지 11일 동안 아가사가 실종된 사건은 언론의 뜨거운 관심과 추적, 독자들의 의심으로 인해 점점 더 많은 추문과 거짓된 소문들을 생산한다. /사진=나인스토리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신만의 ‘미궁’을 가지고 있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치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상처, 끔찍한 공포나 슬픔, 아픔과 관련된 나만의 어둠... 그것은 분노일 수도 있고, 두려움일 수도 있으며, 악의일 수도 있고, 광기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의 ‘고통’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악의를 표출하려는 욕망이든, 복수를 부르짖는 분노이든, 아픔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려는 집념이든, 모든 것은 결국 ‘고통’과 연결된다.

역사학자 바버라 H. 로젠와인은 ‘분노란 무엇인가’에서 본질적으로 “삶은, 모든 삶은, 모든 이의 삶은 고통을 의미한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분노를 고찰한 철학과 과학의 담론들을 소개하는 가운데 부처의 관점을 설명하면서, “분노란 나 자신을 주장하고픈 욕망”이며 “우리가 세상과 맺는 관계로부터 자라나는 번민”이라고 지적했다.

뮤지컬 '아가사' 공연장면. /사진=나인스토리
뮤지컬 '아가사' 공연장면. 13세 소년 '레이몬드 애쉬튼(김리현)'의 멘토이자 친구였던 '아가사(이정화)'는 "추리소설을 쓰는 일은 거대한 미궁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음을 강조한다. /사진=나인스토리

세상은 곧 나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과 맺게 되는 ‘관계’를 의미하며, 관계는 ‘나’를 평가하거나 바라보고 인식하는 잣대로서 기능하게 된다.

관계 속에서 상처입거나 분노하게 되는 사람들은 관계를 끊고 싶어서,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어서, 혹은 관계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복수를 꿈꾼다. 복수는 모든 것들을 바로잡고 관계에 있어 ‘나’를 드러내고픈 욕망인 동시에 상대를 무너뜨리고픈 폭력적 감정이다.

문제는 응징을 바라는 파괴적 욕망이 나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의 말처럼, “해를 입히는 것을 가장해 나 자신을 치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복수는 타인을 파괴하는 만큼 나 자신도 파괴한다.

“하나의 입구, 그리고 출구, 어둠을 따라 걷다 보면 그 끝에 도사리는 한 마리의 괴물을 만나지!”

뮤지컬 ‘아가사’의 인물들은 이렇게 노래한다. 1926년 12월 3일부터 12월 13일까지 11일 동안 행방불명되었던 영국의 추리소설 작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실제 실종 사건을 바탕으로 한 뮤지컬 ‘아가사’는 ‘미궁’ 속에 빠진 미스터리와 ‘미궁’ 속에 가둬 둔 복수의 마음을 연결시킨다.

작품은 아가사가 실종되기 전 스타일스 저택에서 마지막으로 티타임을 함께 했던 주변 인물들과 그녀의 미완성 추리소설 ‘미궁 속의 티타임’, 그리고 추리소설 작가를 꿈꾸던 13세 옆집 소년 레이몬드 애쉬튼의 잃어버린 기억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뮤지컬 '아가사' 공연장면. /사진=나인스토리
뮤지컬 '아가사' 공연장면. 추리소설 작가를 꿈꾸는 13세 소년 '레이몬드 애쉬튼'(강은일)은 1926년 12월 3일, 갑자기 실종된 아가사를 찾기 위해 그녀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을 관찰하고 탐문한다./사진=나인스토리

창작 뮤지컬 ‘아가사’는 2013년에 초연된 후 2015년 재연을 거쳐 6년 만에 새롭게 삼연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실종 사건이 일어났던 1926년으로부터 27년이 지난 1953년을 ‘현재’로 설정하고 있는 뮤지컬은 천재 작가로 불렸으나 연이은 표절시비로 인해 슬럼프에 빠진 추리소설가 ‘레이몬드 애쉬튼’ 앞에 검은 망토와 모자를 쓴 누군가가 나타나 책 한 권을 던지고 사라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미궁 속의 티타임’이란 책의 서문에는 “실종된 아가사 크리스티를 찾기 위해 1926년 12월 3일, 레이몬드 애쉬튼이 완성한 이야기”라고 적혀 있지만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레이몬드는 매일 밤 자신을 괴롭혀 온 악몽과 그 책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한편, “죽음의 공작부인, 추리 소설의 여왕, 모든 범죄의 설계자, 살인의 여신”이라고 칭송받는 아가사 크리스티는 60번째 추리소설의 출판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추리 소설 속 완벽한 살인의 숨겨진 비밀을 알려달라는 사람들에게 아가사는 이렇게 묻는다.

“당신들은 살인이 재미있습니까?”

뮤지컬 '아가사' 공연장면. /사진=나인스토리
뮤지컬 '아가사' 공연장면. '아가사(이정화)'는 60번째 추리소설의 출판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살인의 비밀을 알려달라는 요구에 "당신들은 살인이 재미있습니까?"라고 묻는다./사진=나인스토리

여왕 폐하의 축전을 비롯해 여러 축하의 메시지가 전달되는 가운데 R이라고 서명된 카드에 살인자에 대한 추리를 요청하는 수수께끼가 등장한다. 명료한 추리로 모든 범인을 밝혀낸 아가사가 말한다.

“살인은 숨길 수 없어. 모두를 속인다 해도 항상 존재하는 유일한 목격자, 바로 자기 자신!”

추리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트릭이 아니라 사람이 왜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것인지, 무엇이 인간을 그토록 변하게 만드는 것인지와 같은 ‘동기’임을 주장하는 아가사 앞에 레이몬드가 나타난다.

그는 27년 전 아가사의 남편 아치볼드과 편집장 뉴먼, 기자 폴, 그리고 하녀 베스가 함께 있었던 티타임에서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가사가 실종된 진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를 날카롭게 묻는다.

‘미궁 속의 티타임’이란 책 서문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는 이유를 기억하지 못하는 레이몬드에게 아가사가 대답한다.

“너도 알고 있지 않니? 티타임이 있던 날 너도 거기 있었잖아. 홍차가 다 우러날 때까지 기억해보렴. 아주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야!”

뮤지컬 '아가사' 공연장면. /사진=나인스토리
뮤지컬 '아가사' 공연장면. 1957년 천재 작가로 불렸으나 연이은 표절시비로 인해 슬럼프에 빠진 추리소설가 '레이몬드 애쉬튼(김리현)'은 '미궁 속의 티타임'이란 책의 서문에 자신의 이름이 있는 이유를 기억하지 못한다. /사진=나인스토리

이야기는 1926년 12월 3일, 아가사와 남편, 출판사 편집장, 기자, 하녀, 그리고 열쇠구멍으로 그들을 엿보던 13살 소년 레이몬드가 함께 자리했던 스타일스 저택의 서재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 세계에 20억 부 이상의 소설이 판매된 추리 소설가, 성경과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범죄의 여왕, 에르퀼 푸아로와 미스 마플이라는 탐정 스타들을 배출한 추리의 천재, 2022년이면 70년 동안 지속적으로 공연된 연극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될 희곡 ‘쥐덫’의 작가, 66편의 추리소설과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쓴 14편의 단편소설까지 모두 성공시켰음에도 자신의 직업이 ‘작가’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는 여인, 75세의 나이에도 은퇴를 80세까지 미루고 싶을 만큼 글쓰기를 사랑했지만 작업실이 따로 없던 미스터리의 설계자... 그리고 1만 5천명의 자원봉사자들을 동원하고도 실종된 그녀를 찾아내지 못했던 1926년의 미스터리 사건!

아가사 크리스티는 늦은 밤, 차를 몰고 나가 채석장 근처에 사고의 흔적이 있는 차량만을 남겨둔 채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11일 뒤 요크셔의 온천 도시인 해러게이트의 하이드로패틱 호텔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 ‘테레사 닐’이란 이름으로 투숙해 있는 그녀를 알아본 호텔 직원의 제보로 발견되었다.

남편 아치볼드가 그녀를 데리러 호텔로 갔을 때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뮤지컬 '아가사' 공연장면. /사진=나인스토리
뮤지컬 '아가사' 공연장면. 음산하지만 매력적이고, 두렵고 위험해보이지만 낯설지 않은 '로이(고상호)'의 존재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 뮤지컬 '아가사'의 '미궁'을 해결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사진=나인스토리

그녀의 차가 발견된 곳은 “침묵의 연못”이라고 불리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물가 근처였고, 떠나기 전에 남겼다는 3장의 편지 중 비서에게 남긴 편지를 제외하고 남편 아치볼드와 형부 제임스에게 남긴 편지들은 공개가 거부되었다.

세간의 관심과 의심은 증폭되었지만 아치는 너무 사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편지를 공개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제임스는 요크셔의 스파로 간다고 했을 뿐 정확한 위치는 적혀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결국 요크셔의 스파에서 아가사를 찾은 것은 형부 제임스의 말이 사실임을 입증한 셈이었지만 사람들의 호기심은 아가사가 당시 남편과 불륜 관계에 있던 여자의 이름으로 투숙하고 있었던 이유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아가사가 실종되기 전 그녀에게 가장 안정을 주던 존재인 어머니를 갑작스런 죽음으로 잃었고,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됨과 동시에 이혼요구를 받았다는 사실은 그녀가 우울증으로 인한 신경쇠약 및 기억상실을 앓고 있다고 이해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소문과 추측은 끝없이 이어졌다. 결국 아가사와 아치볼드는 15개월 후 이혼했고, 아치볼드는 곧바로 테레사 닐과 결혼했다.

그리고 아가사는 실종사건이 있었던 2년 뒤인 1928년 ‘데일리 메일’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했다. 그녀는 당시 석회광산으로 돌진하고픈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고, 유체 이탈과 같은 기억상실을 경험했으며, 사고로 뇌진탕이 있었던 것 같지만 명확하게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후로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녀의 진실을 궁금해 했고, 실종사건을 그녀가 창조한 어떤 사건보다도 더 복잡하고 풀기 어려운 미스터리라고 생각했다.

뮤지컬 '아가사' 공연장면. /사진=나인스토리
뮤지컬 '아가사' 공연장면. 영국의 추리소설 작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옆 집 소년 '레이몬드 애쉬튼(강은일)'은 아가사의 갑작스러운 실종의 '동기'를 찾기 위해 노력을 다하지만 '진실'은 괴롭기만 하다./사진=나인스토리

1977년 출간된 ‘자서전’에서 아가사 크리스티는 이렇게 말한다.

“과거를 돌이켜 보며 자기가 싫어하는 추억은 무시할 권리가 있는 게 아닐까? ... 다 지난 일이다. 내 삶의 태피스트리 중 한 가닥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부분이니 인정해야겠지만 그렇다고 구구절절이 설명해야 할 필요는 없다.”

어머니를 잃은 깊은 슬픔과 고독, 배신이라는 상처와 충격, 이혼이라는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리던 아가사는 당시 차에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고 울음을 터뜨리거나 수표를 쓰려다가 수취인 이름이 기억나질 않아 몇 년 전에 읽었던 소설 속 조연의 이름을 썼던 일들을 언급한다.

또, 이혼에 공포심을 갖도록 교육받은 자신이 딸을 볼 때마다 얼마나 죄의식을 느꼈는지, 얼마나 죽기보다 이혼하기가 싫었는지를 토로한다. 남편이 질병과 죽음을 극도로 혐오할 뿐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지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을 무정하게 희생시키는 사람임을 잊고 있었던 아가사는 이렇게 말한다.

“살면서 진실로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남편이라는 것을 많은 여성들이 그랬듯 나 역시 깨달았다. 다른 사람은 그만큼 가까이 있을 수 없다. ... 나는 다시는 ‘타인’의 손에 좌지우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뮤지컬 '아가사' 공연장면. /사진=나인스토리
뮤지컬 '아가사' 공연장면. 스타일스 저택 서재 밀실에서 '아가사(백은혜, 가운데)'와 함께 (왼쪽부터) 하녀 '베스(이아현)', 남편 '아치볼드(임별)', 편집장 '뉴먼(김남호)'. 기자 '폴(안두호)'이 티타임을 즐기고 있다. 아가사의 주변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행복을 위해 아가사를 희생시키는 일을 꺼리지 않는다./사진=나인스토리

뮤지컬 ‘아가사’는 실제 사실에 ‘허구’를 더해 갈등 관계를 보다 복잡하게 만든다.

남편 아치볼드와 불륜에 빠진 사람은 오랫동안 집안일을 돌봐주던 유모와 다름없는 존재 베스의 딸이며, 하이드로 호텔에서 아가사가 사용한 이름 ‘테레사’는 레이몬드가 자신만의 추리 소설을 위해 만들어낸 허구 속 인물이다.

아가사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행복을 위해 아가사를 희생시키는 일을 꺼리지 않는다.

남편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아가사와 딸을 버리고 떠나고 싶어 하며, 하녀 베스는 자신의 친딸을 도와주기 위해 딸처럼 아끼던 아가사를 속이고 외면한다.

편집장 뉴먼은 소설 속 살인이 자극적이지 않은 점을 못마땅하게 여겨 살인의 묘사를 잔인하게 할 것을 강요하고, 기자인 폴은 베스를 통해 얻은 정보로 아가사의 비밀을 폭로하고 소설이 출간되기 전 살인의 트릭을 알아내고자 음모를 꾸민다. 또 어린 소년 레이몬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멘토이자 친구인 아가사의 숨기고픈 비밀을 폭로하는 중심에 서 있게 된다.

뮤지컬 '아가사' 공연장면. /사진=나인스토리
뮤지컬 '아가사' 공연장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아가사(이정화)'를 희생시키는 일을 꺼리지 않는 그녀의 주변 인물들을 '로이(김재범, 가운데)'는 바라본다. /사진=나인스토리

아가사는 자신만의 추리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레이몬드에게 말한다.

“모든 살인에는 ‘동기’가 있고, 동기는 ‘관계’ 속에서 발견할 수 있어. 평범한 사람이 왜 살인자가 되는가, 그것이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붉은 실이야!”

아가사는 “추리소설을 쓰는 일은 거대한 미궁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음을 강조한다.

인간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깊은 어둠을 엿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몸에 황소의 얼굴을 한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갇혀 있는 미로, 입구가 곧 출구인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에 제물로 바쳐진 사람들은 죽음 외에 벗어날 방법이 없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가 선물한 “한 자루의 칼과 붉은 실”을 손에 든 채 끝까지 실을 풀어내며 미로의 중심으로 들어간 뒤 괴물을 죽이고 붉은 실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미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두려움을 이겨내는 용기, 괴물을 죽여 사람들을 구하겠다는 집념, 모든 것을 바로잡으려는 정의의 마음, 아가사는 그것이 추리소설 작가가 살인을 다루는 이야기를 창작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극도의 분노와 증오의 감정으로 인해 살인의 충동을 느낄 수 있다.

뮤지컬 '아가사' 공연장면. /사진=나인스토리
뮤지컬 '아가사' 공연장면.  '로이(고상호)'는 '아가사(백은혜)'가 결말을 쓰지 못한 '미궁 속의 티타임'을 완성할 것을 촉구하며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면, 타인에게 고통을 준 사람이 아닌가?"라고 되묻는다./사진=나인스토리

또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에 갇힌 괴물처럼 복수의 욕망에 불타올라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분노와 증오, 복수를 향한 욕망에는 그러한 감정에 이르게 된 ‘이유’가 존재한다. 다른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배신당하거나, 상처입거나, 버림받거나, 이용당한 데 대한 분노는 온 몸에 스며드는 ‘독’처럼 조금씩 퍼져나가 마음과 정신을 모두 마비시킨다.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분노와 복수의 이야기를 담으려던 소설 ‘미궁 속의 티타임’을 끝내지 못한 채 집을 뛰쳐나온 아가사는 스타일스 저택을 벗어나 차를 타고 질주하기 시작한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뛰어든 한 남자로 인해 정신을 잃은 아가사는 하이드로 호텔방에서 눈을 뜬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고 낯선 분위기의 ‘로이’라는 남자는 독에 관한 임상실험 정리와 추리소설의 마무리를 호텔방에서 함께 할 것을 제안한다. 아가사는 자신과 공통점을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매우 다른 그에게 매력을 느낀다.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미운 사람들은 죽이면 된다”는 섬뜩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거나 누군가를 독살하는 일을 ‘해방’이자 ‘처벌’이라고 주장하는 로이가 두렵고 위험하다고 느낀다. 한편, 레이몬드는 아가사가 사라진 ‘동기’가 무엇인지를 추적하던 끝에 마침내 아가사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의 ‘진실’에 이르게 된다.

뮤지컬 '아가사' 공연장면. /사진=나인스토리
뮤지컬 '아가사' 공연장면.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분노와 복수의 이야기를 끝내지 못한 채 집을 뛰쳐나온 '아가사(백은혜)'는 차를 타고 질주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갑자기 뛰어든 '로이(고상호)'로 인해 정신을 잃고 하이드로 호텔방에서 눈을 뜬다./사진=나인스토리

‘자서전’에서 아가사 크리스티는 추리소설을 쓰게 된 이유를 “도덕적 교훈 때문”이라고 말한다. 심리학이 등장하기 전 추리 소설은 악인을 밝혀내는 ‘추적’의 과정을 담고 있었고, “무고한 자를 구해내려는 열정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녀는 “살인은 공동체의 악”이며 살인자는 본래 어떤 결함을 갖고 태어났다고 믿지만 그러한 “결함을 인간의 속성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무고한 사람들’이 악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실이고, 추리소설 작가는 범죄자보다 희생자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뮤지컬 '아가사' 공연장면. /사진=나인스토리
뮤지컬 '아가사' 공연장면. '로이'라는 낯선 남자로부터 독에 관한 임상실험 정리를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은 '아가사(백은혜)'는 추리소설의 마무리 작업을 위해서도 하이드로 호텔에 머물기로 결정한다./사진=나인스토리

뮤지컬 속 아가사 역시 살인에 관한 이야기를 쓰는 이유를 “세상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결코 완벽하지 않은 세상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의 끝에 매달려 발버둥치고 있다. 몸에 좋은 ‘약’이 상황에 따라 ‘독’으로 변할 수 있듯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입는 상처와 고통에 분노한 나머지 끔찍한 괴물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살인자는 심판을 받아야 하고, 정의는 구현되어야만 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사람들은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자신만의 ‘붉은 실’을 찾아 미궁을 빠져나올 수 있는 용기와 현명함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만이 “아름답지만 처절한 고통”이 곳곳에 숨 쉬고 있는 세상으로부터 우리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뮤지컬 '아가사' 공연장면. /사진=나인스토리
뮤지컬 '아가사' 공연장면. '아가사(이정화)'는 분노와 어둠, 공포, 증오를 표출하는 '로이(김재범)'의 존재가 무엇인지 깨닫는다. 로이는 아가사를 향해 "타인에게 고통을 준 자를 처벌하는 것이 정의가 아니냐"고 다그친다./사진=나인스토리

아가사 크리스티는 ‘자서전’을 통해 이렇게 토로한다.

“나는 삶을 사랑한다. 때로는 나락으로 떨어진 듯 절망하고, 날카로운 비참함에 온몸이 꿰이고, 슬픔에 몸서리치기도 했지만 ‘살아 있다’는 것은 위대한 것임을 여전히 확신한다.”

삶은 ‘고통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또, 분노는 “근절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근본 요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분노로 인해 미궁 속의 괴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절망감과 비참함에 무너지고 슬픔과 증오가 넘쳐흐르는 속에서 모든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면 ‘평화’는 찾아오지 않는다.

고통으로 점철된 세상 속에서 미궁을 빠져나올 수 있는 ‘붉은 실’을 찾으려는 노력, 그것만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지 않을까? 11월 14일까지 대학로 유니플렉스 1관.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하영
주하영
jhy02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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