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인터뷰] 배우 최지희, 소녀가장에서 톱스타로, 사업가로 살았던 '아름다운악녀'
[그때 그 인터뷰] 배우 최지희, 소녀가장에서 톱스타로, 사업가로 살았던 '아름다운악녀'
  • 김두호 기자
  • 승인 202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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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악녀' 배우 최지희 꿈과 야망의 세월
17일 고(故) 최은희 배우의 빈소를 찾은 영화 '아름다운 악녀(1958)'의 원로 배우 최지희 
2018년 고(故) 최은희 배우 타계 소식을 듣고 빈소를 찾은 원로 배우 최지희.

인터뷰365 김두호 기자 = 17일 81세 일기로 별세한 최지희 전 원로영화인회 회장은 1960년대 한국영화 중흥기를 이끈 은막의 스타였다. 

대표작인 1958년 영화 '아름다운 악녀'를 비롯해 '자매의 화원'(1969), '애모'(1959),  '김약국의 딸들'(1963), '말띠 여대생'(1963), '말띠 신부'(1966), '단벌신사'(1968), '화분'(1972) 등 200여편의 작품에서 활약했다. '김약국의 딸들'을 통해 제1회 청룡영화상과 제3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배우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1966년 재일동포와 결혼하면서 은막을 떠난 그는 이혼 후 음식점 사업을 시작해 도쿄의 아카사카에서 크게 성공, 한 때 아카사카 거리에 코리아타운을 조성하는 한국 여성 사업가의 성공 모델이 되기도 했다. 또 영화제작자이자 공연기획 제작자로 다방면의 재능을 드러내기도 했다. 

강남에서 큰 식당을 경영하기도 했으나 후반기 인생은 순탄하지 않았다. 기업인수에 잘못 참여해 많은 재산을 잃었고 그에 앞서 미국에서 만난 배우 출신 희극인의 영화제작에 거액을 투자했다가 실패하는 등 불운을 겪기도 했다. 2019년에는 합병증으로 쓰러져 장기 치료를 받고 요양병원으로 옮겨 투병 중인 근황을 본지가 보도하기도 했다.  

다음은 2012년 8월 원로영화인회 회장으로 활동했을 당시 인터뷰365와 만나 인터뷰한 내용이다.  

'아름다운 악녀' 배우 최지희 꿈과 야망의 세월

최지희 여사

하고 싶은 일, 즐기고 싶은 것, 갖고 싶고 누리고 싶은 것 모두를 후회 없이 이루고 살았다는 1960년대 은막의 별 최지희 여사. 데뷔 영화 <아름다운 악녀>(1956년)가 평생의 닉네임이 되어버린 그는 지금 원로영화인회 회장으로 은퇴한 영화인들과 추억의 충무로에 사무실을 두고 ‘의리의 최지희’로 돌아와 그들의 따뜻한 후견인이 되어 정을 나누며 살고 있다.

영화인 중에는 인생도 영화처럼 산 분들이 있다. 최지희 여사도 빼놓을 수 없는 그 중의 한사람이다. 성품이 솔직담백하고 분명하다. 둘러대고 꾸미고 감추는 것을 싫어해 남자 이야기가 나오면 부정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털어놓고는 해 그의 고백을 통해 수시로 이름난 남자들이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재벌가문의 2세로 한 때 미국에서 로비스트로 떠들썩하게 물의를 일으킨 박동선 씨나 재미동포 코미디언 쟈니윤 씨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최지희 여사의 삶에서 남자는, 사랑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의 머릿속에도 그를 사랑했던 남자들의 모습은 깨어진 거울속의 일그러진 얼굴로 남아 있을 뿐 누구도 아쉬움과 그리움을 남겨주지 못했다. 남자 인연이 불운한 것은 타고난 운명이라고 했다. 화려한 인생이었지만 조용히 돌아서 홀로 있으면 언제나 외롭고 슬펐다는 그는 쉬지 않고 일을 하며 그런 고독과 잡념을 씻어내고 살아왔다.

일본에서 결혼생활에 실패했지만 씩씩하게 소매를 걷어 올린 그는 도쿄의 아카사카에 코리아타운을 조성하는 한국 여성 사업가의 성공 모델이 되기도 했다. 미국에서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고 한국으로 돌아와 한남체인을 인수하고 88올림픽 때 국제행사인 서울프레올림픽쇼의 기획자로 역량을 보여주기도 했다.

1970년대부터 최지희 여사의 활동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가족처럼 지내온 기자는 모처럼 인터뷰365의 독자를 위해 최지희 원로영화인회 회장과 허심탄회한 인터뷰 자리를 마련했다.

소녀가장에서 톱스타로, 사업가로 성공한 삶의 이면

- 요즘 근황을 전해 달라.

"난 집(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있어도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한다. 해야 할 일이 없으면 키우는 개를 목욕시키는 일이라도 해야 마음이 편하다. 오늘 아침에는 부침개를 만들어 그 녀석과 함께 먹고 나왔다. 낮에는 주로 충무로에 있는 원로영화인회 사무실에서 회우들을 만난다."

- 사무실에 찾아오는 원로영화인들은 어떤 분들인가?

"일생을 영화제작 분야에서 영화를 만든 분들로 60대 후반을 넘어 은퇴한 분들이다. 최은희 황정순 선배가 고문으로 있고 이해룡 이경희 이무정 박동룡 문미봉 씨 등 배우를 비롯해 심우섭 설태호 정인엽 씨 등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 촬영, 기술, 기획, 녹음, 스틸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영화인이면 누구나 회원으로 만남의 자리를 함께하고 있다. 가끔 한국영화의 전통 살리기와 화합을 주제로 한 세미나를 개최하는 순수한 친목단체로 운영하고 있다. 젊은 세대와 소통이 멀어지고 있는 중진 영화인들의 소외감을 들어주는 행사를 지속적으로 개최하고 싶지만 젊은 세대들이 다들 바쁘게 살아 기회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

- 지희필름을 설립해 영화 사업을 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도 개인적으로 하고 있는 사업체가 있는가?

"하하하. 나도 일할 수 있는 나이를 넘어섰다. 영화사 간판은 남아 있지만 사업에는 이제 욕심을 내지 않고 산다."

- 다시 충무로에 살고 있는 당신의 모습을 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충무로는 당신의 청춘을 바친 곳이다. 가장 아름답게 활짝 피어난 청춘의 절정기에 개성이 강렬한 은막의 요정으로 만인의 사랑을 받던 곳이 아닌가?

"이제는 추억만 남아 있지만 충무로는 모든 영화인의 거리였다. 내가 살던 집도 저쪽 인쇄골목에 있었다. 이젠 기계소리만 나지만 가끔 옛 생각이 나서 그 집 앞을 지나가며 기웃거려 본다. 세월은 무정하고 무상하다. 그립고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 옛날 얘기를 하며 사는 게 좋아서 지금 내가 이곳으로 다시 온지도 모르겠다."

■ 데뷔시절

최지희 여사의 데뷔영화 <아름다운 악녀> 포스터. 1957년 화제작이다. 

- ‘최지희’ 하면 지금도 영화의 올드팬들은 데뷔영화의 제목 <아름다운 악녀>를 떠올린다.

"1958년 3월 1일 지금 명보극장의 뒤편에 있는 수도극장에서 개봉했다. 그 날부터 내 운명이 달라졌다. 가난한 시골 가정에서 서울로 온 18살짜리 소녀가 일곱 빛깔 무지개를 잡은 것이다. 동갑내기 김지미와 1957년 같은 시기에 연기활동을 시작했다."

- 어린 시절 힘들게 성장했다는데.

"나는 신데렐라를 꿈꾸며 배우가 된 것은 아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가족을 도와야 하는 소녀가장이었다. 우선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직업이 매력적이었다. 첫 작품이 화제에 오르면서 현대적인 개성과 도발적이고 육감적인 매력의 신인 배우로 알려지면서 출연 요청이 밀려들어 왔다. 수입이 늘었고 충무로에 있던 감사원에 다니는 분 집에 전세로 살다가 어머니를 모셔와 집 한 채를 장만하게 했다. 어머니는 서울역 뒷동네 만리동 근처에 독립가옥 한 채를 장만했다. 왜 그곳에 집을 샀느냐고 했더니 고향을 가려면 기차역이 가까운 곳이 좋다는 말씀이었다. 어머니도 나도 순박했다."

- 출생지는 일본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일본과 내 인생의 연이 깊다. 1940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해방 이듬해인 여섯 살 때 가족과 아버지의 고향인 경남 하동으로 귀국했으니 일본에 살던 어릴 때는 기억에 남아 있는 게 별로 없다. 어릴 때 아버지가 별세하셔서 어머니와 4남매가 힘들게 살았다."

- 배우의 길로 들어선 데뷔 초기 얘기부터 들려 달라.

"1956년 <산적의 딸>이라는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지방에 내려온 윤예담 감독의 여동생을 알게 되면서 서울로 오게 되고 영화인들을 만나게 됐다. 나의 본명이 김경자인데 예명인 최지희가 된 것도 <인걸 홍길동>이란 영화를 기획하고 제작했던 최남용 씨가 그 작품에 나를 발탁하면서 수양딸로 삼고 성까지 바꾸어 지어준 예명이다. 그 분은 시골소녀인 나에게서 배우의 재질과 가능성을 발견하고 미용실로 데려가 헤어스타일까지 바꾸어 주셨다. 김일해 감독이 연출한 <인걸 홍길동>은 개봉이 늦어져 비슷한 시기에 출연한 이강천 감독의 <아름다운 악녀>가 나의 데뷔 작품이 된 것이다.

첫 작품에서 나의 상대역은 지금 연기자로 활동하는 조형기의 부친인 연극배우 출신의 조항 선배였다. 연극무대를 통해 노련한 연기력을 인정 받았던 조항 선배 덕분에 배우면서 연기를 할 수 있었다. 추운 겨울에 명동과 종로통에서 촬영할 때는 심신이 오들오들 떨려 연기를 할 수 없었다. 그 때 나에게 감독이 춥지 않을 거라며 물 한잔을 마시게 했는데 그게 양주를 탄 물이었다. 그런데 배역인 주인공 은미가 비틀거리는 연기를 보여줘야 하는데 제대로 취중 연기를 하게 됐다. 영화가 살아나려니 그런 것들이 저절로 맞아떨어진 것이다."

- 출연 영화 목록을 보니 출연 작품이 200여편에 이른다. 애착이 가는 영화는 어떤 작품인가?

"1957년 <아름다운 악녀>에 이어 <애모> <오부자>에 출연하고 홍콩과 한국의 합작영화 <애정무한> <길 잃은 철새> 등에 출연하면서 당시 최대 영화제인 아시아국제영화제가 개최된 필리핀에 한국대표로 갔을 때 배우로 자부심을 느꼈다.

1961년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부터는 <김약국집 딸들> <말띠여대생> 등 나의 연기 캐릭터에 화음이 된 작품으로 관객들의 갈채를 받았던 화제작들이 먼저 떠오른다. 유현목 감독의 출세작인 <김약국의 딸들>은 원작 소설가인 박경리 여사가 내가 맡은 배역의 인물 성격을 집에까지 찾아와 설명을 해주셨다.

1973년 <캐서린 탈출> <사나이 훈장>까지 주로 흥행성이 있는 애정영화와 액션물이 많아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다. 출연 작품 중 수십 편이 만들어진 ‘용팔이’시리즈에서 주인공 건달역의 박노식 씨를 압도하는 성깔 있고 매력 있는 애인역을 도맡았다. 애정물에서는 신성일 씨와 공연한 작품이 많은데 그는 내게 맞는 배역까지 엄앵란 씨에게만 주려고 해서 내가 한번 따진 적도 있다. 하하하."

■ 첫사랑과 유학

- 한창 인기가 피어오를 때인 1961년 느닷없이 미국유학을 떠났다. 공부를 위한 열정 때문인가?

"직접적인 동기는 아니지만 학업을 계속하지 못한 불만이 있는 사람에게 불을 지른 사람이 있었다. 그의 권유와 도움으로 조지 타운대 랭귀지스쿨을 거쳐 뉴욕의 네이버후드 플레이 하우스 아트스쿨에 다닐 수 있었다."

- 유학을 주선한 사람이 1978년 미국 하원에서 코리아게이트라는 로비사건으로 화제를 남겼던 사업가 박동선 씨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가 첫사랑이라는 이야기도 따른다.

"내가 묻는 말에 거짓말을 못해 덮어버린 남자 얘기까지 시인을 해 그런 모양이다. 부인하지 않겠다. 나는 친구와 차 한잔 나누는 자리에서 그를 알게 됐다. 당시 미국의 명문인 조지타운대 학생회장까지 하던 활동력 있는 남자였다. 그는 나를 알게 되면서 가정교사까지 보내주며 공부할 기회를 만들어주다가 유학을 권했다."

- 혼을 염두에 두고 연애를 하지 않았는가?

"교제기간이 길었다. 결혼할 수도 있었지만 기회를 만들지 않았다. 헤어지기는 아쉽고 결혼생활을 하기에는 서로 확신을 갖지 못했다. 우선 내가 너무 어렸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최 여사가 일본에서 귀국해 박동선 씨의 기업이었던 한남체인을 인수했을 때는 그와 사업상 이해관계가 계속된 것으로 알려졌다.

"남자관계에서 나는 참 박복하고 인연이 없다. 내가 만난 남자들은 모두가 나에게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손해와 상처를 남기고 떠났다. 한남체인은 내가 그에게 빌려 준 많은 액수의 돈을 받기 위해 갔다가 부도낸 기업을 선뜻 인수한 것인데 결국 말썽만 나고 고생만 했다."

- 지금 그의 근황을 알고 있는가?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만났다. 지금도 만나면 서로 옛 친구 만나듯이 편안한 느낌이지 다른 감정은 없다. 그는 기본적인 인품을 가진 신사다."

(좌)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한 코미디언의 원조 보브 호프와 함께 한 최지희 여사. (우) 프레올림픽쇼에 참석차 한국에 온 1980년대 미국의 톱스타 브룩 쉴즈(맨 오른쪽)와 최지희 여사

- 요식업으로 사업을 하기 시작해 도쿄의 아카사카 거리를 한국 거리로 만들며 치열하게 살아온 얘기는 지금도 아카사카 한국타운의 전설이다.

"앞치마를 두르고 사장에서부터 종업원 노릇, 주방 일까지 하며 씩씩하게 살았다. 목적지를 향해 앉지 않고 쉬지 않고 달리는 마라톤 선수와 같이 꼭 성공하겠다는 정신으로 일을 했다. 어려울 때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우리 어머니였다. 어머니처럼 가난하고 힘들게 살지 않겠다는 것인데 힘들 때 그런 생각을 하면 인내심이 강해지고 힘이 솟는다."

- 고생하던 어머니의 모습 중에 한 커트만 떠올린다면 어떤 장면인가?

"직접 농사를 지은 농산물을 보따리로 묶어 장터에서 팔아 살림을 꾸려 나가셨다. 어린 눈에 어머니의 모습은 언제나 고달프고 애처러웠다."

- 그 어머님은 지금?

"오래전 별세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산소가 있는 하동으로 매년 한두 번씩 내려간다. 그곳에 가면 내가 또 무엇을 새롭게 개척하고 인생을 보람 있게 살아야하는 지를 느끼게 한다."

■ 아카사카 시절

- 과거 일본 방문 길에 가 본 아카사카의 소문난 음식점 지희네는 간판도 한글로 달아 이색적이었다. 그 식당이 성공하면서 한국인들이 모여들었고 그로부터 한국인 식당타운이 형성된 것으로 알고 있다.

"1973년에 문을 열었다. 이름을 한글로 단 것은 일제 강점기에 우리가 우리말을 사용 못한 유래도 있지만 그 무렵 신문에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게 한 어떤 조치에 반감을 느껴 내손으로 한글 지희네를 그려 넣어 간판을 달았다. 아카사카는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인 도쿄 복판에 있는 거리에 한글 간판이 생기자 한국인은 물론 일본인들도 신기하다고 생각해 화제 거리가 됐다.

특히 우리 동포들의 격려를 많이 받았다. 그러나 유명해지려면 간판보다 음식으로 승부를 봐야하는 데 요리와 손님에 대한 서비스에는 자신이 있었다. 하루하루 번창하면서 우리 집을 거쳐 나간 여성들이 하나둘 독립 점포를 개업하기 시작한 것이다. 초기에는 내가 도와준 사람도 많고 내가 몇 개의 점포를 더 늘이기도 했다."

- 지희네에는 일본에 오는 한국의 사업가와 명사들이 모여드는 비즈니스 회식장소로 소문이 났었다.

"한국인만 아니라 일본의 명사도 단골이 많았다. 특히 여수 석유산업과 현대중공업 등 1970년대 일본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만나는 한일 기업인이나 공직자들이 주로 회식 장소로 우리 집을 찾았다. 또 남북관계가 살벌할 때인데 조총련 사람들도 몰려왔다. 일본 주재 언론인 단골도 많아 지금도 친분을 나누며 산다. 뒤에 서울 강남에서 대형 음식점을 개업했을 때 고위 관료가 된 분이 과거 일본에서 힘들 때 신세를 많이 졌다면서 자주 찾아와 매출을 늘려주기도 했다. 소설가 이병주 선생 같은 분과는 살아계시는 동안 친 가족 같이 지냈다. 나를 무척 아껴주셔서 새로 쓸 소설의 구상도 먼저 들려주셨다. 서울에서 중국어신문을 인수하실 때는 나도 주주로 참여한 일이 있다."

- 지희네 음식점을 뒤에 선배 배우였던 이민자 여사에게 물려주었다는데.

"이민자 언니는 내가 연기생활을 하면서 가장 도움을 많이 받았고 나를 정말 아껴주신 분이다. 좋은 작품이 들어오면 나를 한 작품에서 공연하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아카사카에서 어느 정도 재산을 모았던 나는 미련 없이 지희네를 민자 언니에게 돈을 벌면 갚아달라는 조건 만 제시하고 소유권을 넘겨주었다. 또 다른 점포들도 후배들에게 넘겨주고 아카사카 사업을 정리했다."

- 고인이 되셨지만 명배우 김진규 씨의 첫 부인이었고 매력적인 글래머 스타로 한국 영화사에 이름을 남긴 이민자 여사의 만년 인생 이야기를 들려 달라.

"일본으로 건너오셔서 고생을 많이 하셨다. 지희네를 운영하면서 지금 자신이 가장 행복할 때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난다. 7년간 운영하다가 고혈압으로 쓰러져 운명하셨다. 장례를 아카사카의 한국여성들이 모셨을 정도로 만년은 외롭게 사셨다."

젊은 시절의 최지희 여사

- 배우보다 정치를 했으면 여성 지도자로 뛰어난 리더십의 활동을 보여주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교 폭이 넓어 알고 있는 분도 많지 않았는가?

"사실 나는 왕초 기질이 있다. 하하하. 어딜 가나 앞장을 서고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하고 실행하는 데는 물불을 가리지 않아 오해를 받을 때도 많았다. 정말 교분을 가진 저명인사가 많다. 고 정주영 현대 회장님은 아카사카 시절 단골손님이다. 함께 온 참모들에게 일본 오면 지희네에서 음식을 들게 하셨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김성곤 쌍룡그룹 창업주를 비롯한 경제인에서 정치인도 실세로 알려진 분들을 대다수 만났다. 아카사카에서 만난 분보다 내가 미국 유학에서 귀국해 다시 인기 배우로 살아났을 때 여러 모임과 초청된 자리에서 정부 핵심인물은 대다수 알게 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최고회의의장 때 통신사 일일기자로 인터뷰를 하면서 알게 됐고 그후 김종필 이후락 차지철 씨 등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 야당지도자였던 김상현 선생도 특별히 친분을 나눈 분이다."

-지금 가장 보고 싶은 분은 어떤 분인가?

"이병주 선생님이다. 남자 복이 없고 한 때 인기배우였다가 일본에 건너가 뜬구름처럼 살아가는 나에 대한 소설을 쓴다고 하셨던 분이다. 아카사카의 한국타운을 만든 나의 눈을 통해 자유당 정권 때부터 현대 정치 비사를 쓰시겠다고 하셨다. 고향이 같고 어머니 끼리 아는 분이었다는 것 등 인연이 깊어 더욱 가깝게 정을 나눈 분인데 돌아가셨을 때는 눈물이 쏟아졌다."

■ 인생은 고독과 싸움이다

- 일본에 사는 재일동포와 결혼하면서 영화계를 떠났는데 왜 첫 결혼에 실패한 것인가?

"남편은 사업을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나의 모든 것도 날아갔다. 결혼 3년 만에 셋방살이로 전락해 딸 하나를 안고 헤어졌다."

- 다시 영화로 돌아와 붐을 이루던 액션영화에 출연해 한국의 브리짓 바르도(프랑스 배우)로 불리며 1970년대 초까지 인기를 회복 했던 기록이 있다.

"열일곱 소녀로 연기를 시작해 한창 활동할 나이에 영화를 떠났으니 돌이켜 보면 연기자로 오래도록 남아 있지 못한 미련이나 회한도 있다. 30여편 쯤 만들어진 용팔이 시리즈에서 나의 캐릭터도 알고보면 아름다운 악녀 역이었다. MBC TV드라마까지 진출하면서 인기를 모았지만 차츰 우리 영화가 검열이 강화되어 작품경향이 변하고 제작 편수도 줄어들어 활동에 위축감을 느껴 일본으로 떠난 것이다."

- 88년도 서울올림픽 축제행사인 프레올림픽쇼의 제작에 참여하면서 국내에 이름이 알려진 재미동포 코미디언 자니윤 씨와 인연이 궁금하다. 그가 한국에 알려지고 한때 국내 방송의 토크쇼 진행자로 인기를 누리기까지 후견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처음 만나게 된 동기부터 들려 달라.

"그에 대한 거라면 얘기가 길어진다. 처음에는 순수하게 만났다. 내가 신인 배우로 <인걸 홍길동>이라는 영화에 출연할 때 그는 연출을 맡은 김일해 감독의 조감독이었다. 그 후 오랜 세월 모르고 살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간 딸을 위해 LA에 있는 비버리힐스에 2층짜리 단독 주택을 샀다. 그곳에서 친구의 저녁 초대자리에 갔다가 자니윤을 만났는데 처음에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먼저 나에게 윤종선이라는 옛본명을 대며 자신을 소개해 과거 알던 사람임을 알게 됐다."

- 한때 연인관계로 소문이 났다.

"딸이 혼자 살아 내가 미국을 떠나면 보호자가 없어서 불안해 혼자 산다는 그에게 지나가는 말로 우리 집 2층으로 이사와 딸을 좀 보호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후 장문의 편지로 나의 청을 받아들이겠다는 생각을 전해왔다. 그 무렵 그는 코미디언이라는 직업이 있었지만 어쩌다 출연하는 개런티로는 넉넉하게 살 수 없는 처지였다.

나는 그를 만나면서 그가 능력을 발휘하도록 말 그대로 후견인이 됐다. 그를 국내로 불러들여 88 서울올림픽을 앞둔 축제무대인 프레올림픽쇼를 국내 방송사와 기획해 성공을 하고 <자니 윤 쇼>로 이름이 알려지게 뒷바라지에 최선을 바쳤다. 그런데 출세하니 변하더란 말을 그는 나에게 안겨주었고 물질적인 피해까지 남겼다. 우선 내가 맡겨둔 증권을 처분해 라는 영화에 나의 허락도 없이 투자했으나 내게는 손실을 입혔다. 프레올림픽쇼를 준비하면서도 내게 돌아온 것도 막대한 물질적 피해였다. 그를 만나고 헤어지면서 나는 또 한 번 남자를 이성적으로 만나면 내 팔자는 손해만 본다는 것을 절감했다."

(좌) 최지희 여사는 원로배우 태현실 여사와도 틈틈이 만나 식사를 함께 하며 옛정을 나눈다. (우) 근래 영화인 모임에서 만나 충무로시절의 정담을 나누는 최지희 여사와 1960년대 은막의 별 문희 여사.


- 이제 드라마처럼 살아온 자신의 삶을 정리해 달라.

"나는 부러움 없이 살았다. 하고 싶은 일, 즐기고 싶은 것, 갖고 싶고 누리고 싶은 것 모두를 이루고 살았다. 남들이 꿈꾸지 못할 때 세계일주 여행도 몇 번씩 하며 자유롭게 살았지만 단지 사랑에서는 허망한 인연을 반복했다. 사랑은 불운했다. 돌아서면 언제나 남는 것은 서운하고 후회되고 쓸쓸했다.

내가 밝고 처신이 활달해 걱정거리가 없는 여자로 다들 생각하지만 나의 깊은 마음속은 언제나 고독했다. 그렇다고 그걸 비관하고 또 누굴 원망하며 살지는 않았다. 지난 것은 깨끗하게 털고 내색을 내지 않고 살아왔고 그런 외로움을 일에 빠져 잊어버릴 수 있었다. 덕분에 오히려 씩씩하게 사업을 하며 성공할 수 있었다.

연예인들이 수시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을 볼 수 있는데 나는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배우나 연예인들이 대중 속에 살면서 인기를 누릴 때 즐겁고 행복하지만 그건 언젠가 거품처럼 사라진다. 인기가 사라지고 시선이 떠나면 텅 빈 공간에 버려진 사람처럼 방황하면서 고독과 싸워야 한다. 극복하지 못하면 제대로 살아가지 못한다.

한 때 화려하게 살던 분들이 어렵게 사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 나는 지갑을 털어주면서 우울한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내 스스로를 돌아보면 나의 현실도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고독과 싸우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완벽한 행복을 주지 않는다. 인생도 살다보면 좋을 때도 있지만 피할 수 없는 괴로움도 맞이한다. 나는 내 인생에서 불행보다 행복이 더 많았다는 생각을 한다. 독신생활을 해왔지만 덕분에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며 살았다는 점에서 만족하고 있다."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88서울올림픽 공식영화제작전문위원, 97아시아태평양영화제 집행위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대종상 및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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