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멈출 수 없는 인간, 삶과 죽음...연극 '분장실'
[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멈출 수 없는 인간, 삶과 죽음...연극 '분장실'
  • 주하영
  • 승인 2021.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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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현대 연극의 거장 ‘시미즈 쿠니오’의 대표작, 1977년 초연 후 일본 누계 최대 상연
연극 '분장실' 공연장면./사진=T2N미디어
연극 '분장실' 공연장면. 죽은 존재인 A(서이숙, 왼쪽)와 B(배종옥, 오른쪽)는 영원의 시간 속에 분장실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머무르며 살아있을 때 맡지 못한 배역들을 연습한다./사진=T2N미디어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벨기에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극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는 수필집 ‘운명의 문 앞에서’를 통해 삶과 죽음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앞에 살다 간 사람과 우리 다음에 살아갈 사람 모두 우리 자신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살아 있습니다. 각자의 역할은 시간의 좌표에서 차이가 있으나, 인간이라는 존재가 구현하는 거대한 주기 안에서는 모두 하나이고 동시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마테를링크는 누군가 죽었다고 해서 존재하기를 멈췄다고 볼 수 없으며, 단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로 그 형체를 바꾸었을 뿐 “산 자의 끝은 죽은 자의 시작이고, 죽은 자의 끝은 시공간 속에서 우리가 더는 축적할 수 없는 또 다른 변모와 진화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만약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이 공간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간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떠난 존재들이 함께 머무르고 있다면,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이 지속하는 삶은 ‘삶’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연극 '분장실' 공연장면./사진=T2N미디어
연극 '분장실' 공연장면. (왼쪽부터) 배우 A(정재은), D(지우), B(황영희), C(손지윤)는 모두 각자 이 세상에 자신만의 설 곳을 찾아, 존재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무언가에 속하기 위해 어디론가 움직인다./사진=T2N미디어

일본 현대 연극을 대표하는 작가 시미즈 쿠니오의 연극 ‘분장실’에는 공연을 준비하는 분장실에 함께 머무르고 있는 죽은 여배우들 A와 B가 살아있는 여배우 C와 그녀의 프롬프터이자 언더스터디인 여배우 D의 삶을 지켜보고 있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극작가 안톤 체홉의 연극 ‘갈매기’의 여주인공 ‘니나’역을 맡은 C가 분장실에서 대사 연습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죽은 존재 A와 B는 살아있던 때의 기억을 소환하며 자신들의 삶과 시대를 회상한다.

살아 있는 존재인 C와 D는 죽은 배우들의 모습을 볼 수 없고 들을 수도 없지만 가끔 알 수 없는 존재의 “소리 없는 웃음”이나 자취를 감추는 소품들, “음침하고 썩은 것 같은 냄새”를 통해 무언가를 감지할 뿐이다.

살아있는 두 여배우의 모습을 바라보며 매일 밤 ‘갈매기’ 공연의 분장실에서 과거의 삶을 되풀이하는 A와 B를 ‘존재하기를 멈추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영원의 시간 속에서 분장실이라는 한정된 공간 외에 갈 곳을 찾지 못하고 공연을 준비하는 스텝들을 지켜보며, 여배우 C와 D의 이야기를 엿듣고, 살아있을 때 하지 못했던 주인공 역할을 위한 연기 연습을 지속하는 A와 B는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까?

연극 '분장실' 공연장면./사진=T2N미디어
연극 '분장실' 포스터 컷./사진=T2N미디어

1977년 초연된 후 일본에서 현재까지 가장 많이 상연된 작품으로 손꼽히는 연극 ‘분장실’ 공연이 대학로 자유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지난 4월 극작가 시미즈 쿠니오가 세상을 떠난 뒤 첫 해외 공연으로 펼쳐지고 있는 연극 ‘분장실’은 원래 여배우 4명으로 구현되는 작품을 남자 배우 4명이 연기하는 버전으로 변화를 더해 또 한 번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현실과 환상, 현재와 과거, 기억을 주된 주제로 다루는 시미즈의 작품들은 종종 체홉과 유사한 스타일로 비교되곤 한다. 미국의 일본문학자 J. 토마스 라이머에 따르면, 시미즈의 인물들은 체홉의 경우처럼 무언가를 강렬하게 열망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체홉의 인물들이 삶을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불러내지 못하는 반면 시미즈의 인물들은 상당히 많은 에너지를 표출한다.

희극적이지만 죽음이 등장하고, 과거에 대한 갈망과 삶에 대한 열망, 아이러니가 담겨 있는 시미즈 쿠니오의 ‘분장실’은 어떻게 보면 체홉이라는 극작가에 대한 ‘오마주’와 같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체홉을 대표하는 4개의 극작품 중 첫 번째인 ‘갈매기’와 세 번째인 ‘세 자매’의 대사들이 작품에서 인용되고 있고, 극 속의 인물들은 ‘갈매기’의 여주인공인 ‘니나’를 연기하기 위해 ‘갈매기’ 속의 주요 장면들을 시연하기 때문이다.

연극 '분장실' 공연장면./사진=T2N미디어
연극 '분장실' 공연장면. 죽은 여배우들인 A(서이숙, 오른쪽)와 B(배종옥, 왼쪽)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극작가 안톤 체홉의 연극 '갈매기'가 공연 중인 분장실에서 살아있던 때의 기억을 소환하며 자신들의 삶과 시대를 회상한다./사진=T2N미디어

체홉의 1896년 극 ‘갈매기’ 속 여주인공 니나는 늘 꿈꾸고 열망하던 ‘배우’로서의 명성을 얻기 위해 정해진 틀을 벗어나 미지의 세계를 향한다. 하지만 사랑에 상처입고 아이까지 잃은 후 배우로서 성공하지 못하는 좌절을 겪고도 또 다시 삶을 향해 인내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를 인식하는 인물이다.

극의 마지막 장면이 주인공 트레플레프의 자살로 끝을 맺음에도 체홉이 자신의 작품을 ‘희극’이라고 말한 것은 니나를 통해 희망과 구원의 씨앗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문학비평가인 리처드 길먼은 체홉이 말하는 ‘희극’은 “단테의 ‘신곡’이나 발자크의 ‘인간희극’과 같은 의미”이며,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해방과 안도, 치유의 느낌을 진지하고 깊이 있게 전달”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2021년 연극 ‘분장실’은 시미즈 쿠니오의 원작에 상당 부분 변화를 주면서도 유머와 슬픔, 안타까움과 아픔, 연민과 긍정의 메시지를 조화롭게 잘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연극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들의 시대적 설정이나 현재 여배우들의 어려움과 고민을 드러내는 대사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셰익스피어의 연극 ‘맥베스’의 장면 시연에 연극계의 흐름과 변화를 드러내는 풍자적 특징이 더해져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도록 만든다.

슬픔을 간직한 작품이지만 희극적이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담은 연극 ‘분장실’은 시미즈와 체홉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며 단지 여배우들만의 고민이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관객들의 고민과 어려움, 불안과 초조, 두려움과 실망, 좌절과 인내를 반영하면서 위로와 응원을 목표로 한다.

연극 '분장실' 공연장면./사진=T2N미디어
연극 '분장실' 공연장면. 배우B(황영희, 왼쪽)와 A(정재은, 오른쪽)는 살아있을 때 연기하지 못한 배역들을 연습하고 서로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며 줄곧 분장실에 머무른다./사진=T2N미디어

A와 B, C와 D가 꿈꾸는 여배우의 삶은 보통 사람들이 꿈꾸고 열망하는 ‘어떤 삶’이라고 할 수 있고, 그들이 맞닥뜨린 현실과 고난, 삶의 무게와 암울함, 실패는 동시대를 살고 있는 관객들이 느끼는 답답함과 무거움의 무게와 일치한다.

호수를 향해 날아가고픈 갈매기, 끝없이 물가로 향하는 갈매기는 때로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의 총에 맞아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어쩌면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호숫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매기는 열망하는 것을 포기하거나 다른 곳을 향하지 못한다.

자신을 태워버릴 위험에도 불구하고 불꽃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처럼 무언가를 갈망한다는 것은 늘 그렇게 목이 마르고, 고통스럽고, 지치고, 아픈 일이 될 때가 많다. 하지만 사랑에 버림받고 배우로서도 실패한 니나는 호수를 바라보며 트레플레프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하는 일이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일이든 희곡을 쓰는 일이든 상관없어. 중요한 건 명예나 영광이 아니라 바로 인내심이야. 자신의 십자가를 질 줄 알아야지. 믿음을 가져야 해. 난 믿음이 있으니까 이제 고통스럽지 않아. 내가 가야할 길을 생각하면 두려울 게 없어. ... 내가 유명한 배우가 되면 꼭 나를 만나러 와야 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너무 지쳐서 서 있을 힘도 없는 니나이지만, 그녀는 다시 한 번 배우의 꿈을 움켜쥐고 나아갈 것을 결심한다.

연극 '분장실' 공연장면./사진=T2N미디어
연극 '분장실' 공연장면. 배우A(서이숙)는 프롬프터 뿐 아니라 남자 단역만 하다가 연극 포스터를 붙이러 나간 길에 시위대를 진압하는 전경에게 맞아 죽음에 이르렀다./사진=T2N미디어

연극 ‘분장실’에 등장하는 여배우들은 모두 자신만의 실패와 좌절, 고통을 간직하고 있다.

배우 A는 프롬프터 뿐 아니라 남자 단역 역할만 하다가 연극 포스터를 붙이러 나간 길에 시위대를 진압하는 전경에게 맞아 죽음에 이르렀다.

배우 B는 시골에서 상경해 안 해 본 일이 없이 고생을 하다 겨우 극단에 들어갔지만 꿈꾸던 ‘니나’ 역할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채 배신당한 사랑의 고통 속에서 자살에 이르렀다.

배우 C는 현재 ‘니나’ 역을 맡고 있지만 40대에 들어선 여배우가 느끼는 위태로움과 불안감, 가족들의 생계를 모두 책임져야 하는 부담감, 끝없는 고독과 피로감에 지쳐가고 있다.

연극 '분장실' 공연장면./사진=T2N미디어
연극 '분장실' 공연장면. 안톤 체홉을 대표하는 극이라 할 수 있는 '갈매기'의 '니나'역을 연기하고 있는 여배우C(손지윤)는 피로함과 압박감에 지쳐 대사를 잊어버리거나 소품을 깜빡하는 실수를 되풀이한다./사진=T2N미디어

배우 D는 극단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가 C의 개인 프롬프터로 살아남기는 했지만 영원히 자신에게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과 초조함, 미래가 보이지 않는 절망감에 시달리다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 D는 잠옷 차림으로 땀으로 흠뻑 젖은 베개를 품에 안은 채 분장실로 찾아오고, C에게 이제 잠도 잘 자고 건강을 되찾았으니 자신이 맡기로 한 ‘니나’ 역을 돌려달라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언더스터디가 아닌 주인공 역할을 내놓으라는 D의 요구에 C는 연출이나 기획사 대표가 자신에게 말도 없이 어떤 결정을 한 것인가 의심하지만 100년도 훨씬 전에 죽은 러시아 작가 체홉에게 병원에서 편지를 썼을 뿐 아니라 전화통화도 직접 했다는 D의 말에 그녀의 주장이 상상의 소산임을 인식하게 된다.

연극 '분장실' 공연장면./사진=T2N미디어
연극 '분장실' 공연장면. 죽은 여배우들 A(정재은, 가운데 왼쪽)와 B(황영희, 가운데 오른쪽)가 머무르는 공간의 거울은 오랜 세월의 이끼와 곰팡이를 품은 상태로 죽은 존재들의 공간임을 표현한다. 잠옷 차림으로 베게를 들고 나타난 배우 D(지우, 오른쪽)는 "여배우는 젊을 때만 한시적으로 하는 게 좋다"면서 배우 C(손지윤, 왼쪽)에게 이제 그만 자리를 내려놓고 쉴 것을 요구한다./사진=T2N미디어

D는 피곤으로 지쳐 대사를 자꾸 잊어버리고 소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C의 상태를 지적하면서 휴식을 위해 병실을 예약해 놓았으니 그만 쉴 것을 조언한다. D는 배우라는 직업 자체가 고통스러운 것이며, 여배우의 경우 나이가 들면 할 수 있는 역할도 줄어든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녀는 매니저가 없으면 도시가스 요금조차 어디에 납부해야 하는지 몰라 헤맬 정도로 생활 능력이 부족한 여배우는 젊을 때 한시적으로만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C는 ‘니나’역을 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으니 자신에게 양보하라는 D의 요구에 폭발하고 만다. C는 말한다.

“배우로 산다는 거 잔인한 일이지. 특히 여배우라면 포기해야 할 것도 많아. 젊음은 영원하지가 않지. 해마다 몸이 나를 배신하는 것만 같고. ... 하지만 니나 역할은 말이야. 그냥 젊다고 해서 연기할 수 있는 게 아니야. ... 네 안에 어떤 경험치가 축적되어야 한다고. 축적! 긴 시간 경험을 쌓고 묵혀야 한다고!”

연극 '분장실' 공연장면./사진=T2N미디어
연극 '분장실' 공연장면. 배우C(우정원)는 여배우로 살아가는 일의 잔인함을 인정하지만 모든 것을 다 바친 '배우'라는 직업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강조한다./사진=T2N미디어

백발이 되어서도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C와 그만 역할을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는 D의 갈등은 급기야 C가 와인병을 집어 드는 지점까지 악화된다.

D는 순간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다. 이들을 바라보고 있던 배우 A와 B는 스텝들을 부르고 119에 전화를 할 필요를 느껴 허둥지둥 하지만 유령인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D는 베개를 꼭 붙들고 일어서서 ‘힘들 땐 쉬어야 한다’는 말을 남긴 채 분장실을 나간다. 혼자 남겨진 C는 흥분해서 소리치기 시작한다.

“나를 위하는 척하면서 밀어내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 내가 거꾸러지는 게 보고 싶은 거지? 미투, 갑질, 뭐라도 하나 터졌으면 좋겠지? ... 20년 넘게 이 바닥에 있다는 게 뭔지 네가 알기나 해?”

연극 '분장실' 공연장면./사진=T2N미디어
연극 '분장실' 공연장면. '갈매기'의 여주인공 '니나' 역을 맡은 배우C의 개인 프롬프터이자 언더스터디인 배우D(이상아, 오른쪽)는 입원해있던 병원에서 나와 땀에 젖은 베개를 품은 채 분장실로 찾아온다. 죽은 존재들인 A(서이숙)와 B(배종옥)는 D를 바라보고 있지만 D는 그들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다./사진=T2N미디어

C는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간 날, 욕실 문을 잠그고 온 몸을 떨며 우는 일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토로한다. 온 밤이 다 새도록 목소리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몸 안에 있는 모든 수분을 소진하기라도 할 듯 울부짖는 비명, 그 짐승의 울음과도 같은 폐부의 소리는 오랜 고통과 외로움으로 인한 ‘축적’의 분출이자 쏟아짐이다. 그녀는 말한다.

“난 모든 걸 바쳤어. ... 내가 멈춘다고 해서 멈춰지는 것도 아니야! 내가 멈추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짓밟겠지. 아무도, 아무것도, 멈출 수 없어. 너도, 나도!”

삶은 항상 그렇다. 무언가를 가진 자에게도, 가지지 못한 자에게도, 멈춤이란 있을 수가 없다. 멈춘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고, 모든 생명이 “그 슬픈 순환”을 마치는 데에는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한다.

계획한 대로 살아지는 것도 아니고, 꿈꾸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막다른 끝에 다다랐다고 느꼈을 때 새로운 문이 열리기도 하고, 성공의 길이라고 여겨졌던 일이 절망의 구렁텅이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의 상실이 내게 무엇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내려놓는다고 해서 특정한 누군가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연극 '분장실' 공연장면./사진=T2N미디어
연극 '분장실' 공연장면. 배우D(이상아)는 '니나'역을 줄곧 해 온 배우C(우정원, 오른쪽)에게 자신의 주인공 역할을 돌려줄 것을 주장하며, 자신이 러시아 작가 체홉에게 편지도 쓰고 전화통화를 했다고 말한다. A와 B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자신들의 의견을 보탠다./사진=T2N미디어

삶은 자신만의 방향성이 있고, 그 커다란 테두리 안에서 인간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위해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한다. 매일 밤, 희망을 품고 내일은 다른 날이 시작될 것이라고 꿈꾸면서 발버둥치는 날에도, 어떤 위치에 오르고 명성을 갖고 그것을 놓지 않기 위해 분투하는 날에도,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숨을 고르는 순간에도 멈춤은 없다.

모두 각자 이 세상에 자신만의 설 곳을 찾아, 존재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무언가에 속하기 위해, 살아 숨 쉬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자 어디론가 움직인다. 때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때로는 무엇에 의해 파괴되면서, 때로는 지쳐서 넘어지고, 때로는 실낱같은 기회에 들뜨면서 모두들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산다. 그리고 각자 자신만의 고통, 불안, 초조, 의심을 감내한다.

체홉의 극 ‘세 자매’ 속 베르쉬닌의 말처럼, “삶은 고달프고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황량하고 절망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지 않은 미래에 화창하게 갠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지니는 일은 사실 쉽지 않다.

투젠바흐의 말처럼, “천 년이 지난 후에도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라고 한숨을 내쉬며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 할 것”이라는 데 동의하게 되는 것은 현재 우리가 삶 속에서 희망을 품기 어려운 때문이다.

연극 '분장실' 공연장면./사진=T2N미디어
연극 '분장실' 공연장면. 죽은 존재들의 영원한 시간 속에 함께 하게 된 D(지우, 오른쪽)는 A(정재은, 왼쪽)와 B(황영희, 가운데)가 연습하는 작품에 자신도 끼워줄 것을 요청한다./사진=T2N미디어

하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분장실에 머무는 죽은 존재들인 A와 B에게 합류하게 된 D는 더 이상 불러줄 때를 기다리며 무대 뒤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살아있을 때도 없던 기회가 죽어서 올 리 없다”는 A와 B의 체념에 반기를 든다.

연기하고픈 희곡이 있고, 배우가 있으면, 관객이 없다 해도 무대에 오를 수 있음을 주장하는 D는 혼자 텅 빈 무대에 올라 ‘세 자매’ 속 이리나의 대사를 연기한다.

잠시 후 B가 무대 공포증에도 불구하고 무대에 함께 하고, A는 ‘세 자매’의 의상을 들고 나타나 B와 D에게 건네주며 함께 무대에 오른다. 행진곡 소리와 함께 세 여배우는 올가, 마샤, 이리나의 역할을 맡아 마침내 주인공으로 ‘세 자매’ 속 마지막 장면을 연기한다.

모두가 떠나고 자신들만 남겨진 가운데에서도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함을 강조하는 그들은 말한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 모든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언젠가는 우리 모두 알게 될 날이 올 거야. 그 때까지 살아가야만 해!”

연극 '분장실' 공연장면./사진=T2N미디어
연극 '분장실' 공연장면.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죽은 존재가 된 배우D(이상아, 가운데)는 여전히 매일 밤 분장실에서 대본을 외우며 오르지도 못할 무대를 기다리는 일은 그만 하겠다고 선언한다. A(서이숙, 왼쪽)와 B(배종옥, 오른쪽), 그리고 C는 마침내 체홉의 연극 '세자매'의 주인공 역할을 연기하게 된다./사진=T2N미디어

그들 모두가 떠나가고, 잊혀지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도 세상은 여전히 움직일 테고, 언젠가는 삶이 고통스러운 이유를 알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마테를링크는 “육체는 램프와도 같다”고 말한다. 램프가 깨지거나 수명을 다하게 되면 불꽃은 사라지게 되겠지만 불꽃이 거기에 존재했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 된다. 그는 불꽃이든 영혼이든 분명 거기에 그것이 존재했었다는 점, 그것이 의미 있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는 말한다.

“죽음으로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상입니다. 죽음으로써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합리적인 추정일 것입니다.”

존재한다는 것, 열망한다는 것, 꿈꾼다는 것은 살아있는 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그 어떤 순간에도 우리가 멈출 수 없다는 것, 체념하는 것도 절망하는 것도 도전하는 것도 모두 우리의 선택일 뿐,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지치고 힘든 순간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며, 조금은 달라질 미래를 향해 오늘을 사는 것, 그것이 파도가 가득한 바다와 같은 삶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아닐까? 9월 12일까지 대학로 자유극장.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하영
주하영
jhy02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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