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인간이 ‘분노’를 거두는 그 날까지...연극 '일리아드'
[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인간이 ‘분노’를 거두는 그 날까지...연극 '일리아드'
  • 주하영
  • 승인 2021.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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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메로스 '일리아드' 각색 1인극
- 연출가 리사 피터슨 & 배우 데니스 오헤어의 2010년 극본 '일리아드' 한국 초연
연극 '일리아드' 공연 장면. '시인(김종구)'은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을 대변하면서 그들의 분노, 고통, 기쁨, 상처, 영광을 모두 표현한다. 자유자재로 변모하며 이야기를 전달하는 시인은 조명과 뮤즈의 도움으로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몰입을 극대화시킨다./사진=더웨이브
연극 '일리아드' 공연 장면. '시인(김종구)'은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을 대변하면서 그들의 분노, 고통, 기쁨, 상처, 영광을 모두 표현한다. 자유자재로 변모하며 이야기를 전달하는 시인은 조명과 뮤즈의 도움으로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몰입을 극대화시킨다./사진=더웨이브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2014년 영국의 심리학 연구가이자 작가인 스티브 테일러는 ‘가디언’을 통해 영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지 100년이 되는 시점에 세계가 여전히 온갖 갈등과 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을 보면 인류가 전쟁을 멈출 수 없는 존재인가 하는 의심을 품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대부분의 전쟁이 자원과 영토를 두고 벌이는 이권다툼이거나 정부 혹은 국가가 더 큰 영향력과 힘을 갖고자 벌이는 권력투쟁이라 할 수 있지만 인류 전쟁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가장 놀라게 되는 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꺼이 전투에 참여하고 전쟁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는 사실임을 지적했다.

그는 전쟁만큼 인간을 강한 단결력으로 결속시키고, 공동의 목적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고 용기를 발휘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보다 살아있는 감정을 느끼게 만들고 소속감을 부여하는 전쟁의 심리적 장점이 인류로 하여금 전쟁으로 기울도록 만드는 것은 아닐까 우려를 표했다.

전쟁이 인류에게 내재된 속성인지, 아니면 사회가 복잡해지는 과정 속에 출현하게 된 특성인지에 대한 논쟁은 오랫동안 이어져왔다.

고고학자들의 발견에 따르면, 조직된 집단이 다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을 죽인 가장 오래된 전쟁의 흔적은 대략 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의 R. 브라이언 퍼거슨에 따르면, 지난 천 년간 전쟁의 전제조건은 보편화되었고, 갈등은 점점 악화되었으며, 사상자의 숫자는 매번 기록을 갱신해왔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의 “전쟁은 오직 인간의 발명품일 뿐 생물학적 필요가 아니다”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지난 천 년간 인류는 자신의 발명품을 보다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할 어떤 ‘필요’라도 발견했던 것일까? 인간은 정말로 전쟁을 갈망하는 존재인 것일까? 인간의 무엇이 파괴와 죽음, 고통과 비명으로 가득한 전쟁 속으로 뛰어들도록 만드는 것일까?

연극 '일리아드' 공연 장면. '시인(최재웅)'은 인간의 본성이 변하는 그 날까지, 인간이 분노에 중독되는 것을 끝내는 그 날까지, 전쟁 이야기가 세상에 불필요해지는 그 날까지 이야기를 전달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사진=더웨이브
연극 '일리아드' 공연 장면. '시인(최재웅)'은 인간의 본성이 변하는 그 날까지, 인간이 분노에 중독되는 것을 끝내는 그 날까지, 전쟁 이야기가 세상에 불필요해지는 그 날까지 이야기를 전달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사진=더웨이브

지금으로부터 약 2800년 전, 서구 문학의 토대이자 시초라고 할 수 있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인간이 전쟁에 뛰어드는 이유를 ‘분노(rage)’로 꼽았다.

기원전 725년에서 675년 사이에 문자화된 것으로 여겨지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당대의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이미 오랜 역사 혹은 신화가 된 400년 전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기원전 1250년에서 1180년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트로이 전쟁은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렌을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데려간 일이 발단이 되어 시작된 것으로 유명하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그리스군과 트로이군 사이에 10년 동안 지속된 전쟁의 9년째에 그리스의 전사 아킬레스의 ‘분노’가 폭발하게 되는 행보를 추적하면서 아가멤논 왕, 파트로클로스, 헥토르, 프리아모스 왕과 겪게 되는 갈등, 전쟁터의 격렬함, 죽음과 슬픔, 그리고 애도를 노래한다.

그리스 원문으로 15,693행에 달하는 ‘장단단(강약약) 6보격(dactylic hexameter)’의 운문으로 구성된 ‘일리아드’는 호메로스라는 실제 작가가 있었다는 설과 여러 시인들에 의해 구전으로 전해지던 이야기가 집대성된 것이라는 설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구전으로 전해지던 영웅 서사시가 있었고 그것이 기원전 8세기경에 문자로 남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연극 '일리아드' 공연 장면.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청동기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신전이자 트로이의 성벽을 의미하는 돌계단 아래에는 수많은 이름 모를 병사들의 청동 투구가 무덤처럼 쌓여있다. 투구를 쓴 '시인(김종구)'은 전쟁터의 격렬함과 잔혹함, 공포와 긴장을 호메로스의 고시(古詩)와  현대어 설명을 넘나들며 관객들에게 전달한다./사진=더웨이브
연극 '일리아드' 공연 장면.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청동기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신전이자 트로이의 성벽을 의미하는 돌계단 아래에는 수많은 이름 모를 병사들의 청동 투구가 무덤처럼 쌓여있다. 투구를 쓴 '시인(김종구)'은 전쟁터의 격렬함과 잔혹함, 공포와 긴장을 호메로스의 고시(古詩)와 현대어 설명을 넘나들며 관객들에게 전달한다./사진=더웨이브

그렇다면 호메로스의 ‘일리아드’가 당대의 관객들에게 호소했던 점은 무엇이었을까? ‘일리아드’가 창작된 이유는 무엇이며, 어떤 목적으로, 어떤 환경에서 ‘일리아드’가 공연되었을까?

고전학자 바바라 그라지오시는 ‘일리아드’의 목적이 무엇이었는가를 묻는 질문은 답하기 어려운 것임을 지적한다. 당대의 그리스인들에게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위한 노래나 전쟁을 고무하기 위한 공연의 종류들이 존재했지만 ‘일리아드’의 경우 결코 유쾌하다고 말할 수 없는, 상당히 잔혹하고 폭력적이며 비극적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는 24권으로 되어 있는 작품의 길이를 고려하면 3일 낮, 혹은 3일 밤 동안 노래되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관객들에게 상당히 불편하고 까다로운 작품이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역사학자 폴 카트리지는 ‘일리아드’가 “일리움에 대한 시라는 뜻이고, 일리움은 트로이를 일컫는 라틴어이므로 트로이에 관한 이야기가 되어야겠지만 사실상 트로이의 몰락을 묘사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주인공인 아킬레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 주목한다.

연극 '일리아드' 공연 장면. 아킬레스의 분노, 파트로클로스의 들끓는 흥분, 헥토르의 분노를 전달하는 '시인(최재웅)'은 전사들의 끓어오르는 분노와 피를 부르는 욕망, 광기를 느끼며 점점 더 폭력적으로 에너지를 분출하기 시작한다./사진=더웨이브
연극 '일리아드' 공연 장면. 아킬레스의 분노, 파트로클로스의 들끓는 흥분, 헥토르의 분노를 전달하는 '시인(최재웅)'은 전사들의 끓어오르는 분노와 피를 부르는 욕망, 광기를 느끼며 점점 더 폭력적으로 에너지를 분출하기 시작한다./사진=더웨이브

실제로 ‘일리아드’의 첫 단어는 ‘분노’로 시작되며, 그리스군 사령관이자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을 향한 아킬레스의 분노는 약 50일간의 이야기 중 23일 동안 지속된다.

전리품으로 인해 촉발되었으나 사실상 권위 싸움이나 다름없었던 갈등은 아킬레스의 분노를 일으킨다. 그는 아가멤논을 위해 결코 싸우지 않을 것을 선언하지만 그리스군의 후퇴와 부상을 보고만 있을 수 없던 파트로클로스가 출전할 것을 주장한다. 결국 아킬레스의 완고한 고집과 분노는 자신의 갑옷을 입고 대신 출전한 친구이자 형제, 연인인 파트로클로스를 죽음으로 잃도록 만든다.

아가멤논으로 인해 솟구쳤던 아킬레스의 분노는 파트로클로스를 잃은 슬픔과 자신에 대한 원망, 죄의식으로 인한 고통이 더해지면서 친구의 죽음을 야기한 트로이의 전사 헥토르를 향해 분출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헥토르를 죽인 후 그의 시신을 전차에 매달아 트로이 성벽을 3차례나 돌고도 멈추질 않는다. 아킬레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장례 기간 내내 무덤 주위로 헥토르의 시체를 끌고 다니며 울부짖는다. 이렇듯 멈춰지지 않던 아킬레스의 분노와 슬픔은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가 홀로 찾아와 무릎을 꿇고 몸값을 치를 테니 아들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호소하는 장면에서 비로소 화해에 이른다.

아킬레스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깊은 슬픔과 돌이킬 수 없는 회환, 분노의 허망함과 상실의 고통이 모든 인간의 공통된 감정임을 인식한다. 그는 프리아모스와 함께 눈물을 흘린다. 친구를 잃은 자와 아들을 잃은 자가 느끼는 공통된 애도의 감정은 증오심과 복수심을 묻어놓고 서로를 연민하고 위로하도록 만든다. 아킬레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수레에 얹어주며 장례 절차를 위해 열하루 동안 전투를 멈출 것을 약속한다. 트로이에서는 마침내 헥토르의 장례식이 거행된다.

연극 '일리아드' 캐릭터 포스터 컷. '시인' 역할을 맡은 (사진 왼쪽부터)김종구, 황석정, 최재웅. 국내 공연의 경우, 내레이터의 역할을 하는 '시인'은 배우마다 다른 설정을 따른다. 김종구 배우는 '전쟁 박물관의 큐레이터'로 이야기를 전달하며, 뮤즈(이기화)는 '하프'를 사용한다. 황석정 배우는 '타로점을 치는 점술사'로 이야기를 전달하며, 뮤즈(김마스타)는 '일렉기타'를 사용한다. 최재웅 배우는 '길거리의 노숙자'로 이야기를 전달하며, 뮤즈(장재효)는 '퍼커션'을 사용한다. 

대학로 예스24스테이지 2관에서는 1990년 오비상을 수상한 연출가 리사 피터슨과 2003년 토니상을 수상한 배우 데니스 오헤어가 공동으로 각색한 연극 '일리아드'의 한국 버전 초연이 진행 중이다.

2010년 4월 시애틀 레퍼토리씨어터에서 처음 소개된 후 2012년 뉴욕 씨어터 워크숍 공연으로 오비상과 루실로텔상을 수상하고, 지금까지 8개국 17개 도시에서 공연되어 온 작품이다.

피터슨은 ‘백스테이지 닷컴’과의 인터뷰에서 작품이 탄생하게 된 배경은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전쟁이었으며, 고전 작품인 ‘일리아드’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국가가 전쟁 중에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왜 전쟁을 하게 되는 것인지, 전쟁의 결과가 무엇이 될 지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작품에 관심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친구이자 배우인 오헤어에게 공동각색을 요청했고, 두 사람은 2005년부터 5년간의 작업을 통해 24권으로 구성된 고전 ‘일리아드’를 7개의 파트로 구성된 100분 공연으로 압축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피터슨이 오헤어와의 공동각색을 원했던 것은 평화주의자로서 반전 운동에 목소리를 내는 오헤어가 전쟁의 공포와 잔혹함 뿐 아니라 전쟁의 영광과 형제애, 아름다움까지 보여주고 있는 고전 ‘일리아드’를 보다 깊은 관점에서 바라보고, 전쟁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연극 '일리아드' 공연 장면. 피터슨은 '작가 노트'에서 "대본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많으며, 시인이 여성이 아니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녀는 '시인(황석정)'이라는 존재는 전쟁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자,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열정과 재능을 가진 자라면 누구라도 걸칠 수 있는 외투임을 강조한다./사진=더웨이브
연극 '일리아드' 공연 장면. 피터슨은 '작가 노트'에서 "대본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많으며, 시인이 여성이 아니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녀는 '시인(황석정)'이라는 존재는 전쟁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자,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열정과 재능을 가진 자라면 누구라도 걸칠 수 있는 외투임을 강조한다./사진=더웨이브

피터슨과 오헤어의 ‘일리아드’는 1990년에 출간된 고전학자 로버트 페이글스의 영문 번역본을 따르고 있는데, 페이글스의 1990행의 운문을 그대로 차용해 전체 텍스트의 3분의 1을 구성하고 있다. 텍스트의 나머지 부분은 현대인에게 익숙한 회화체의 문장들을 사용하는데,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시인(Poet)’이라는 인물이 동시대의 관객들에게 ‘일리아드’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상황에 맞게 ‘스토리텔링’ 방식을 적용하기 위함이다.

피터슨은 호메로스를 비롯한 고대의 음유시인들이 서사시를 노래하기 위해 ‘리라’와 같은 악기를 가지고 다녔다는 점과 음악의 신 뮤즈(Muse)를 통해 영감을 얻고 기억을 되살리고자 했다는 점에 착안해 ‘라이브 솔로 뮤지션’을 무대 위에 시인과 같은 ‘뮤즈’라는 등장인물로 배치시킨다.

그리스 신화 속에서 뮤즈의 여신들은 제우스와 기억의 여신 사이에 태어난 딸들이다. 9명의 여신들이 분야를 나누어 노래를 주재하고 기억을 촉진시켰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라이브 뮤지션(뮤즈)의 존재는 시인이 이야기를 기억하고 관객들에게 끝까지 전달할 수 있도록 기운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무대 위에서 뮤즈는 시인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집중하고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영감을 불어넣어 줄 뿐 아니라 관객들의 상상력에 힘을 더하고 감정적인 영역에 보다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음악의 힘”을 입증한다.

피터슨 연출의 오리지널 공연에서는 콘트라베이스가 사용되었지만 국내 공연의 경우, 시인 역할을 맡은 세 배우의 특색에 따라 각기 퍼커션(최재웅), 하프(김종구), 일렉기타(황석정)로 다른 악기가 등장한다.

또, 시인이라는 인물 역시 국내 공연의 경우에는 배우마다 다르게 설정된 것으로 보인다. 시인은 노숙자(최재웅), 전쟁박물관 큐레이터(김종구), 타로 점술사(황석정)로 다른 설정을 적용해 각기 표현되며 다른 느낌과 분위기를 자아낸다.

연극 '일리아드' 공연 장면. 리사 피터슨과 데니스 오헤어의 희곡 대본은 내레이터인 '시인'이 역사 속에서 펼쳐진 모든 전쟁들을 지켜보면서 갈등을 이해하고, 병사들을 기억하며, 전투를 경험해 온 영혼이라고 말한다. 국내 공연의 경우, 시인은 배우마다 다른 설정으로 각기 다른 느낌과 분위기를 자아낸다. 황석정 배우는 타로점을 치는 점술사로서 '일리아드'의 이야기를 전달한다./사진=더웨이브
연극 '일리아드' 공연 장면. 리사 피터슨과 데니스 오헤어의 희곡 대본은 내레이터인 '시인'이 역사 속에서 펼쳐진 모든 전쟁들을 지켜보면서 갈등을 이해하고, 병사들을 기억하며, 전투를 경험해 온 영혼이라고 말한다. 국내 공연의 경우, 시인은 배우마다 다른 설정으로 각기 다른 느낌과 분위기를 자아낸다. 황석정 배우는 타로점을 치는 점술사로서 '일리아드'의 이야기를 전달한다./사진=더웨이브

대본 역시 대부분 원작 희곡을 따르고 있으나 우리말 번역으로 인해 운율을 살리기 힘든 호메로스의 고시(古詩) 부분을 많이 덜어내고 배우가 선택한 캐릭터의 설정에 맞게 대사에 약간의 변형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피터슨과 오헤어의 ‘일리아드’가 불러오고자 하는 주제적 질문은 그대로 유지된다.

피터슨은 시인이 ‘호메로스’일 수 있다고 말한다. 고대의 이야기 ‘일리아드’를 대중 앞에서 노래하고자 하는 시인이라면 그 누구나 ‘호메로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수 세기 동안 전쟁을 지켜보며 이야기를 간직하고 전달해 온 일종의 “저주받은 영혼”과도 같다.

역사 속에 펼쳐진 모든 전쟁들을 지켜보면서 갈등을 이해하고, 병사들을 기억하고, 전투를 경험해 온 영혼은 세상에 또 다시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를 상기시킬 필요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 앞에서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전달한다.

2014년에 출간된 희곡의 ‘작가 노트’를 통해 피터슨과 오헤어는 “시인은 여전히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지 모르는 고대의 이야기꾼이자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를 전달할 운명을 지닌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 변하는 그 날까지, 우리가 분노에 중독되는 것을 끝내는 그 날까지, 전쟁의 이야기가 세상에 불필요해지는 그 날까지” 끝없이 이야기를 전달해야만 하는 ‘짐’을 진 사람이라고 덧붙인다.

시인은 여전히 고대의 신들을 믿으며, 신들은 그가 ‘일리아드’를 노래하는 연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세계 역사의 모든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병사들과 한 때 친구가 되었던, 전쟁이 불러온 온갖 죽음과 영광, 흉포함과 무모함, 슬픔과 상처를 모두 목격하고 기록해 온 “일종의 전쟁 개요서”라고 할 수 있다.

연극 '일리아드' 공연 장면. 리사 피터슨과 데니스 오헤어의 희곡 대본은 내레이터인 '시인'이 호메로스 자신일 수도 있으며,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지 모르는 고대의 이야기꾼으로서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를 끝없이 전달해야 할 '짐'을 숙명처럼 지닌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국내 공연의 경우, 시인은 배우마다 다른 설정으로 각기 다른 느낌과 분위기를 자아낸다. 최재웅 배우는 길거리의 노숙자로서 '일리아드'의 이야기를 전달한다./사진=더웨이브
연극 '일리아드' 공연 장면. 리사 피터슨과 데니스 오헤어의 희곡 대본은 내레이터인 '시인'이 호메로스 자신일 수도 있으며,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지 모르는 고대의 이야기꾼으로서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를 끝없이 전달해야 할 '짐'을 숙명처럼 지닌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국내 공연의 경우, 시인은 배우마다 다른 설정으로 각기 다른 느낌과 분위기를 자아낸다. 최재웅 배우는 길거리의 노숙자로서 '일리아드'의 이야기를 전달한다./사진=더웨이브

피터슨은 맥카터 씨어터의 리허설 영상을 통해 이 작품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를 위한 작품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의 제목은 ‘The Iliad’가 아니라 하나의 견해를 보여주는 공연임을 의미하는 ‘An Iliad’가 된다. 그녀는 전적으로 학문적이거나 완전히 변형되고 개조된 것이 아닌, 마치 호메로스가 당대의 관객들을 모아놓고 노래를 하듯, 시장 한 가운데나 술집과 같은 현재의 장소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전쟁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도록 만드는 공연을 구현하고자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었고, 관객들이 상상력을 통해 전쟁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었으며, 그로 인해 두 가지 다른 생각이 자신 안에서 부딪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작가의 노트’에 따르면, 피터슨과 오헤어의 ‘일리아드’가 적용한 두 가지 관점은 “전쟁은 낭비이며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는 평화주의적 시각과 전쟁은 인간의 본성이며 전쟁을 좋아하는 인간의 경향을 바꿀 수는 없다는 인본주의적 시각”이었다. 피터슨과 오헤어는 이 두 가지 반대되는 생각들이 전쟁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시인’의 내면에서 갈등을 일으키며 서로 충돌하도록 만들었고, 그러한 갈등과 혼란, 내밀한 고민과 고통이 관객들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의도했다.

오헤어는 “모든 것은 관객들의 귀와 마음에 닿기 위한 것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관객들은 아킬레스의 분노와 죽음, 전쟁의 잔혹함과 허망함, 상실로 인한 슬픔과 애도로부터 벗어날 수 없어야만 한다. 이 때문에 피터슨과 오헤어의 ‘일리아드’에는 그리스 함선의 이름 대신 관객들에게 익숙한 미국 주요 도시의 이름과 병사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시인은 현재의 관객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그리스 함선의 이름을 암송하다 멈추고는 현재 전쟁에 참전했거나 군대에 복무하고 있는 가족 구성원, 친구, 혹은 친지를 기억해내도록 이끈다.

연극 '일리아드' 공연 장면. /사진=더웨이브
연극 '일리아드' 공연 장면. 리사 피터슨과 데니스 오헤어의 희곡 대본은 내레이터인 '시인'을 수 세기 동안 전쟁을 지켜보며 이야기를 간직하고 전달해 온 일종의 “저주받은 영혼”이자 전쟁이 불러온 온갖 죽음과 영광, 흉포함과 무모함, 슬픔과 상처를 모두 목격하고 기록해 온 “일종의 전쟁 개요서”로 설명한다. 국내 공연의 경우, 시인은 배우마다 다른 설정으로 각기 다른 느낌과 분위기를 자아낸다. 김종구 배우는 전쟁박물관 큐레이터로서 '일리아드'의 이야기를 전달한다./사진=더웨이브

또 9년 동안 이어진 전쟁의 속성을 이해시키기 위해 슈퍼마켓에서 20분 동안 줄을 서서 기다리던 가운데 갑자기 옆줄이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할 때의 스트레스와 좌절, 대가 없이 되돌아갈 수 없다는 자존심과 고집과 같은 일상의 감정을 연결시킨다.

뿐만 아니라 아킬레스가 헥토르의 시신을 모욕하면서 트로이 성벽 주위를 도는 끔찍함과 잔혹함을 묘사하던 시인은 이 장면을 인류 전쟁의 역사와 연결시킨다.

기원전 2300년경의 수메르 정복부터 페르시아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시작된 리스트는 십자군 전쟁, 100년 전쟁, 미국의 남북 전쟁을 거쳐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이라크 전쟁, 시리아 내전까지 이어지며 약 150개에 달하는 전쟁의 역사 리스트를 완성해낸다. 국내 공연에서는 현재 내전의 위기를 겪고 있는 미얀마 사태가 덧붙여진다.

연극 '일리아드' 공연 장면. '시인(황석정)'은 전쟁터의 흉포함과 끔찍함, 이름을 다 나열할 수 없는 수많은 젊은 병사들의 죽음과 시체를 바닥에 흩뿌려진 타로 카드를 가리키며 설명한다. 카드들은 아직 소년에 불과한 어린 병사들이 되고, 꿈을 간직했으나 펼쳐보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른 가족, 친지, 혹은 친구가 된다./사진=더웨이브
연극 '일리아드' 공연 장면. '시인(황석정)'은 전쟁터의 흉포함과 끔찍함, 이름을 다 나열할 수 없는 수많은 젊은 병사들의 죽음과 시체를 바닥에 흩뿌려진 타로 카드를 가리키며 설명한다. 카드들은 아직 소년에 불과한 어린 병사들이 되고, 꿈을 간직했으나 펼쳐보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른 가족, 친지, 혹은 친구가 된다./사진=더웨이브

피터슨과 오헤어의 ‘일리아드’는 인류가 끊임없이 전쟁에 돌입하게 되는 이유를 탐색하기 위해 호메로스 고전의 광대한 분량에서 그리스의 상징인 아킬레스와 트로이의 상징인 헥토르를 중심으로 두 전사 사이의 갈등 요인, 싸움의 결과, 아킬레스의 깨달음, 헥토르의 망설임과 같은 필요한 장면들을 덧붙인다. 대신 신들의 개입은 최소화함으로써 전쟁이 신들에 의해 움직여지고 운명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지 않고자 노력한다. 아킬레스의 어머니인 바다의 여신 테티스가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에게 부탁해 새로 만든 방패에 그려진 세상을 묘사하는 장면을 간직한 것은 그것이 평화와 전쟁이 공존하는 인간들의 세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헥토르의 장례를 마지막으로 끝이 나는 ‘일리아드’의 노래를 마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트로이의 목마, 그 이야기는 하지 않을 거야. 어떤 속임수가 있었는지. ... 프리아모스 왕의 죽음에 대한 노래, 아킬레스 죽음에 대한 노래, 헥토르의 아기를 성벽에서 떨어뜨린 이야기, ... 강간당하고 학살당하고 끌려간 트로이 여인들의 노래, ... 오디세우스의 노래, 집으로 돌아가려는 분투, ... 이건 너무 심해! 이런 노래들은 모두 너무 심해! ... 상상해 봐! 한 인간이, 한 도시가, 한 문명이 파괴되어가는 모습을, 그것이 어떤 광경인지, 마치 알렉산드리아! 그 사라진 모든 역사, 콘스탄티노플! 몇 주에 걸쳐서 다 타버린 도시, 아즈텍! 완전히 다 파괴되어버린 신전들, 드레스덴, 사라예보, 마치 카불, 마치... 마치...”

시인은 끝을 맺지 못한다. 자신을 평화주의자라 말했던 시인은 분노의 순간, 이성을 잃고 솟구치는 감정에 모든 것을 내맡기게 될 때 인간이 어떤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어떻게 잔인해질 수 있는지, 얼마나 무모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노래하는 순간마다 그런 자신을 인식해야 하는 괴로움이, 그렇게 오랜 시간 노래를 해오고 있음에도 전쟁이 끝없이 반복된다는 사실이 무겁기만 하다.

그는 소망한다.

“매번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해!”

하지만 시인은 또 다시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기 위해 힘든 여정을 떠난다. 인간의 본성이 변하게 되는 그 날을 위해, 우리가 분노에 중독되는 것을 끝내는 날이 오기를 갈망하면서, 더 이상 전쟁의 이야기가 세상에 필요치 않은 그 날이 올 때까지, 그는 매번 최선을 다해 이야기를, 노래를 전달할 것이다.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스의 분노의 노래를! 9월 5일까지 예스24스테이지 2관.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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