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연극 '파묻힌 아이', 손병호의 살떨리는 연기와 한태숙의 숨막히는 연출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연극 '파묻힌 아이', 손병호의 살떨리는 연기와 한태숙의 숨막히는 연출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21.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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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킹한 가족 붕괴를 섬세한 연극성으로 풀어내
 경기도극단의 연극 '파묻힌 아이' 공연 장면./사진=경기아트센터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경기도극단이 경기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공연(5월 27~6월 6일)한 '파묻힌 아이'는 샘 셰퍼드의 1979년도 퓰리처상 수상작을 한태숙 예술감독이 연출한 가족극이다. 어머니와 아들의 충동적 관계로 낳은 아이를 아버지가 익사시켜 뒷마당에 매장한 콩가루 집안의 흑역사를 통해 이 시대 가족 해체를 아프게 그려냈다.

근친상간, 영아살해 등 불편한 소재를 다룬 쇼킹한 연극으로 알려졌지만 오히려 희랍의 비극을 현대로 옮겨놓은 듯한 묵직한 연극성에 섬세한 연출, 배우들의 연기가 폭발한 근래 드문 ‘문제작’이었다.

‘가족’이란 화두는 최근 영화와 연극, 드라마의 최대 관심사다. 가족 관계는 정의하기 어려울 지경이고, 치매와 가족 해체 등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노매드랜드'나 '더 파더', '힐빌리의 노래', '미나리'도 가족을 다루고 있다.

배우이며 감독이자 극작가인 샘 셰퍼드는 이처럼 왜곡되고 절망으로 치닫는 현대사회‘가족’의 문제를 그만의 탁월한 극작술로 그려내고 있다. 허순자 평론가는 “도발적 발상과 공격적 상상력으로 응축시킨 작품”이라고 했다. 스타카토로 튀는 건조한 대사, 주문을 연상케 하는 서정적 톤과 리듬으로 인물들의 생명력을 살려냈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아들과 정을 통해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를 아버지가 익사케해 뒷마당에 묻었다.” 이같은 내러티브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일 수 있다.

여기에 희랍 비극 '오이디프스'까지 오버랩 시키면 신화로 비약할 수도 있다. 상징과 초현실을 넘나드는 샘 셰퍼드의 작품세계는 테네시 윌리엄스, 유진 오닐, 에드워드 올비가 다뤘던 20세기 가족극의 전통이 흐르고 있었다.

다행히 희곡에 대한 이해 없이 본 한태숙 연출의 '파묻힌 아이'는 거북스런 소재를 불편하지 않게 풀어냈다. 연출은 그 짐승같은 사건 이후 그걸 가리고 살아내는 가족들의 일그러진 초상에 초점을 맞추었고, 진실이 폭로되는 과정을 배우들의 파워로 긴장감 넘치게 끌어갔다.

한태숙 예술감독은 한동안 고수했던 깔끔하고 정형화된 연출 스타일에서 벗어나 리얼리즘에 충실한, 극성이 짙은 ‘배우들의 무대’를 보여주었다. 어둡고 거북한 소재를 다루었지만 1시간 40분을 극에 몰입할 수 있었다.

경기도극단의 연극 '파묻힌 아이' 공연 장면./사진=경기아트센터

그것은 탄탄한 희곡을 우리 입맛에 맞게 요리하고 식욕을 돋군 배우들의 난도 높은 연기가 있기에 가능했다. 집안의 뒷마당에 모자의 피붙이가 묻혀있다면 그 가족의 삶은 온전할 리 없다. 그 비밀을 은폐하며 살아가려니 그들의 인생은 서로가 서로를 저주하며 망가져버린다. 대화는 엇나가고 소통은 불통이다. 그걸 배우들이 리얼하게 해낸 것이다.

그 끔찍한 악몽 덩어리를 가슴에 묻고 살아온 70대 아버지 닷지(손병호)는 거실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소파에 누워 밭은기침을 해대며 위스키를 홀짝이는 알코홀 중독자다. 60대 중반의 어머니 핼리(예수정)는 근친상간의 장본인이지만 죄의식 없이 목사 듀이스(한범희)와 외도를 즐긴다. 큰아들 틸든(윤재웅)은 품에 안고 노래 들려주던 자기 아이가 죽어 파묻혔으니 정신이 온전할 리가 없다. 의족에 의지하는 둘째 아들 브래들리(정다운)는 아버지를 저주하며 기회만 되면 바리캉으로 아버지 머리를 밀어버린다.

경기도극단의 연극 '파묻힌 아이' 공연 장면./사진=경기아트센터

이 암울한 가정에 6년 전 가출한 손자 빈스(황성연)와 여자친구 셸리(정지영)가 들어오면서 무대는 새로운 긴장이 흐르고, 살벌한 상황에서 악몽의 과거가 실타래처럼 풀려나간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망연자실, 집을 뛰쳐나갔던 빈스는 차창에 어른거리는 가족들의 초상에서 핏줄(피는 물보다 진하다)을 느끼고 개선장군처럼 입성한다. 할아버지에게 상속을 받은 빈스가 할아버지가 뒹굴던 그 소파에 같은 모양으로 누워 잠드는 라스트는 희망의 서곡일지, 절망의 대물림일지는 관객이 판단할 몫이다.

필자는 전형적인 미국인 닷지 역을 맡은 손병호가 소파에서 뭉기적대다가 일어나 가족의 흑역사를 피를 토하듯 외치며 비틀대는 연기를 보고 전율을 느꼈다. 수십년전 '심청이는 왜 인당수에 몸을 두 번 던졌는가'에서 명연을 펼친 후 오랜만에 그의 신들린 연기를 본 것이다.

그는 콜록대면서도 대사 전달이 분명했고, 차근차근 감정을 쌓아올린 후 결정적 장면에서 폭포처럼 열정을 쏟아냈다. 온몸으로 발산하는 한 배우의 응집된 연기를 보며 살이 떨리는 기분이 들었다.

경기도극단의 연극 '파묻힌 아이' 커튼콜 무대의 배우들./사진=정중헌

어머니 역 예수정은 복잡미묘한 캐릭터를 기존과는 다른 패턴으로 해석, 에너제틱한 연기를 펼쳤다. 큰아들 역 윤재웅, 둘째 아들 역 정다운, 손자 역 황성연도 자신의 캐릭터를 다른 배우들과 앙상블을 이루며 개성 있게 소화해냈다.

특히 셸리 역 정지영의 존재감이 비극성이 짙게 깔린 어둠의 무대에서 보석처럼 빛을 발했다. 그는 비정상 속에서 유일한 정상인으로 주눅 들지 않은 연기를 펼쳐 생기발랄한 분위기를 뿜어냈다.

틸든이 죽은 아기를 안고 구덩이에 눕고, 소파 위와 아래에서 같은 포즈로 누워있는 빈스와 닷지의 구도로 펼쳐지는 라스트의 미장셴은 한태숙 연출의 명장면으로 남을 만하다.

경기도극단의 연극 '파묻힌 아이' 커튼콜 무대에 오른 배우들./사진=정중헌

이 연극에서 관객을 압도하는 것은 이태섭의 무대미술과 소품들이다. 높은 유리문과 그 창 넘어 옥수수밭, 가파른 계단, 풀이 솟은 구덩이, 낡은 소파와 찌직거리는 TV수상기... ‘비극성이 강조된 폐허와 같은 집’이라는 디자이너의 설명에 동의하면서도,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밭 한가운데 묻혀있는 전형적 고립된 농가풍의 소박한 세트였다면 극의 아우라가 훨씬 음산하고 깊이가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옥수수와 당근, 빗소리는 이 작품의 중요한 키워드다. 남근의 상징 같기도 하고, 까도 까도 속살이 잘 드러나지 않는 옥수수, 지난 20여년간 아무도 옥수수를 심지 않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뒤마당에 옥수수가 무성하고 당근도 싱싱하게 자랐다. 집안에 갇혀 짐승같은 삶을 이어온 가족들은 그걸 모르지만 어쩌면 그것은 상처에 돋는 새살이자 희망인지도 모른다.

한태숙 연출의 '파묻힌 아이'는 소문처럼 선정적이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묵직한 주제를 평판 있는 배우와 일급 스탭들로 빚어내 상업적인 연극과 다른 예술성 짙은 작품을 만나 반가웠다.

가족의 붕괴는 미국만이 아닌 세계적 현상이고 그 양상도 상상을 불허할 정도다. 우리도 아동 학대가 살인으로까지 번지고 있으니 이같은 작품이 쇼킹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경기도극단의 '파묻힌 아이' 공연은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점이 컸고, 공연계에도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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