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전쟁 속에 피어난 사랑과 환상...매튜 본의 '신데렐라'
[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전쟁 속에 피어난 사랑과 환상...매튜 본의 '신데렐라'
  • 주하영
  • 승인 2021.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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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런던 새들러스 웰스 공연 실황, 1941년 런던 대공습(London Blitz) 배경
매튜 본의 '신데렐라' 공연 장면. 마술 지팡이를 흔들어 호박을 황금마차로 변하게 만드는 요정 대모는 운명을 관장하는 존재인 '천사(리암 모어)'로 등장한다. 천사는 '신데렐라(애슐리 쇼)'를 오토바이의 보조석에 태우고 폭격이 있기 전 '카페 드 파리'로 데려간다./사진=LG아트센터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미국의 소설가 릭 라이어던은 “사랑과 전쟁은 항상 함께한다. 사랑과 전쟁이 인간 감정의 최고 정점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러디어드 키플링은 “다른 어떤 것보다 두 가지가 더 크다. 첫 번째는 사랑이고, 두 번째는 전쟁이다”라고 말했다.

사랑과 전쟁, 도무지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가지는 사실상 밀접하게 연관된 경우가 많고, 사랑은 전쟁을 촉발하며 전쟁 속에서도 사랑은 싹튼다. 이 때문에 ‘오 헨리(O Henry)’라는 필명으로 더 잘 알려진 미국의 단편소설가 윌리엄 시드니 포터는 “가난과 사랑, 전쟁을 경험할 때까지 인간은 삶의 풍미를 다 맛보았다 말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자정을 알리는 시계 종소리, 황급히 무도회장을 벗어나는 가운데 벗겨진 유리 구두 한 짝, 요정 대모의 마술 지팡이에 의해 황금 마차와 말로 변했던 호박과 생쥐들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하지만 재를 뒤집어 쓴 채 부엌 난롯가에서 새어머니와 의붓언니들의 구박을 받으며 궂은일을 하던 신데렐라는 유리 구두의 주인을 찾아 헤매던 왕자와 결혼에 이르고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

착한 마음이 보상 받고 허영심과 이기심이 벌을 받는 신데렐라 이야기의 역사는 기원전 7세기에 이를 만큼 오래되었고, 세계 각지에 수천 개의 다양한 버전이 존재할 만큼 보편적이다.

매튜 본의 '신데렐라' 공연장면./사진='신데렐라' 공식 트레일러 캡처.
안무가이자 연출가 매튜 본의 '신데렐라'. 2차 세계대전 중 런던을 배경으로 ‘신데렐라’ 스토리를 재구성했다.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버전은 1697년 프랑스의 동화 작가 샤를 페로에 의해 요정 대모와 호박 마차, 유리 구두가 추가된 이야기지만 1819년 독일의 그림 형제가 묶어낸 신데렐라 이야기는 매우 잔혹하다. 금으로 만들어진 작은 신발에 억지로 발을 끼워 넣어 신발의 주인임을 입증하려던 새언니들은 자신의 발가락과 발뒤꿈치를 잘라내고, 비둘기들은 신데렐라와 왕자의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새언니들의 눈을 쪼아 두 눈을 멀게 만든다.

유럽에서만 500가지 이상의 버전이 존재한다는 신데렐라 이야기의 공통분모는 ‘잃어버린 신발’이다. 또 대부분의 신데렐라 이야기가 공유하고 있는 내용은 못된 새어머니와 의붓언니들의 핍박, 그리고 신분이 높은 왕자 혹은 왕과의 결혼이다.

1997년 9월, 런던의 피카딜리 씨어터에서 1941년 ‘런던 대공습’ 당시 독일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카페 드 파리’를 배경으로 한 ‘신데렐라’가 초연 무대를 선보였다.

매튜 본의 '신데렐라' 공연장면. 집 밖으로 나온 '신데렐라(애슐리 쇼)'는 서치라이트와 공습 경보,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큰 공포와 혼란을 느낀다./사진='신데렐라' 공식 트레일러 캡처. 

1995년 ‘남성 백조’라는 발상의 전환으로 탄생한 ‘백조의 호수’로 영국 최고의 공연예술상인 ‘올리비에상’을 수상한 안무가이자 연출가인 매튜 본이 야심차게 준비한 차기작이었다.

웨스트엔드에서 여전히 ‘백조의 호수’가 공연되고 있던 1996년 크리스마스 시즌부터 ‘신데렐라’의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고 말하는 매튜 본은 ‘백조의 호수’의 성공 이후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고, 관객들은 이미 스케일이 더 크고 전혀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아이디어를 기대하고 있었음을 강조했다.

십대 시절 프레더릭 애슈턴의 1948년 발레 ‘신데렐라’를 본 이후 줄곧 안무를 창작하고픈 마음을 품어왔다는 매튜 본은 본격적으로 작품 창작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2차 세계대전 중 런던’으로 ‘신데렐라’의 배경을 설정하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매튜 본의 '신데렐라' 공연장면. 공습 경보가 울리는 가운데 폭탄이 떨어지고 '신데렐라(애슐리 쇼)'는 거리 한 가운데 쓰러져 정신을 잃는다.
매튜 본의 '신데렐라' 공연장면. 공습 경보가 울리는 가운데 폭탄이 떨어지고 '신데렐라(애슐리 쇼)'는 거리 한 가운데 쓰러져 정신을 잃는다.

2017년 런던 새들러스 웰스 극장의 공연 실황을 영상으로 출시하면서 제공한 디지털 프로그램북에 따르면, 전쟁 중 런던을 배경으로 삼게 된 출발점은 1940년부터 1944년 사이에 작곡된 러시아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발레 음악’이었다.

1945년 볼쇼이 발레단에 의해 초연된 발레 ‘신데렐라’의 음악은 “신데렐라를 동화 속 인물이 아닌 고통을 느끼고 경험하며 우리 가운데 살아 움직이는 현실적 인물로 표현하고자 했다”는 프로코피예프의 의도를 담은 듯 어두운 분위기를 품고 있었고,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19세기 발레 음악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프로코피예프만의 20세기 모던 음악적 성격이 더해져 있었다.

프로코피예프가 작곡에 열중했던 시기가 2차 세계대전 중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음악 속에 전쟁의 암울함이 배어있을 것이라는 추측은 충분히 설득력 있는 것이었다.

매튜 본의 '신데렐라' 공연장면. 폭격 속에 쓰러져 정신을 잃은 신데렐라는 천사의 품에 안겨 천국으로 옮겨진다. 신데렐라의 무의식 속 '환상'으로 펼쳐지지만 천사는 신데렐라에게 '무도회 초대장'을 건넨다./사진='신데렐라' 공식 트레일러 캡처.
매튜 본의 '신데렐라' 공연장면. 폭격 속에 쓰러져 정신을 잃은 신데렐라는 천사의 품에 안겨 천국으로 옮겨진다. 신데렐라의 무의식 속 '환상'으로 펼쳐지지만 천사는 신데렐라에게 '무도회 초대장'을 건넨다./사진='신데렐라' 공식 트레일러 캡처.

매튜 본은 전쟁의 시기에 사랑을 찾게 되고 그 사랑을 갑자기 잃게 되는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시간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일깨웠으며 “마치 세상에 내일이 없을 것처럼 춤”을 추고 사랑을 갈구하도록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2018년 유튜브 채널을 통해 소개한 인터뷰 영상에 따르면, 대공습 당시 폭격을 맞은 ‘카페 드 파리’의 폐허와 파편들 사이로 무도회 신발 한 켤레가 놓여있던 유명한 사진 한 장은 신데렐라 스토리에 대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이미지가 된다.

신데렐라 이야기에는 주인을 잃어버린 신발 한 짝과 신데렐라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상실’의 이미지와 감정이 내포되어 있다. 또, 재를 뒤집어 쓴 채 고난 속에 있던 소녀가 왕자와 결혼하게 된다는 비현실적인 결말은 ‘환상으로의 도피’를 무엇보다 필요로 했던 세계 대전 당시 사람들의 ‘도피주의’를 떠올리게 만든다.

매튜 본은 영국에서 영화와 극장이 가장 인기를 누렸던 때는 다름 아닌 2차 세계 대전 당시였음에 주목했다. 그는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 가운데 마이클 포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의 1946년 영화 ‘천국으로부터의 계단(A Matter of Life and Death)’에 등장하는 영국 공군 조종사(RAF)와 천국에서 내려온 천사를 작품 속 인물로 차용한다.

매튜 본의 '신데렐라' 공연장면.  '천사(리암 모어)'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폭격 속에 죽음에 이르게 될 사람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죽음의 천사'처럼 기능하기도 하지만 신데렐라를 줄곧 지켜보는 '수호천사'처럼 보이기도 한다./사진='신데렐라' 공식 트레일러 캡처. 

비행기가 추락하기 직전 무선으로 잠깐 나눈 대화와 목소리만으로 사랑에 빠진 남녀 주인공과 ‘죽음’에 이르렀어야 할 조종사가 살아난 천국의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온 천사, 사랑을 지키기 위한 주인공들의 노력과 시간을 멈추는 천사의 능력 등은 스토리텔링에 상당부분 적용된다.

이 때문에 매튜 본의 ‘신데렐라’ 속 왕자는 머리에 부상을 입은 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공군 조종사로, 신데렐라를 도와주는 요정 대모는 시간을 지배하는 운명 혹은 죽음의 천사로 등장한다.

신데렐라는 영화 속 주인공이 되기를 꿈꾸며 환상을 통해 현실에서 도피하는 젊은 여인으로, 새어머니는 화려했던 배우 시절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우울을 술로 달래며 신데렐라를 미워하고 신데렐라의 아버지를 휠체어에 앉도록 만든 장본인으로 설정된다.

매튜 본의 '신데렐라' 공연장면. 새어머니는 화려했던 배우 시절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우울을 '술'로 달래며 신데렐라를 미워하고 구박한다./사진='신데렐라' 공식 트레일러 캡처.  

신데렐라의 의붓언니들은 5명의 의붓 형제들과 자매들이라는 ‘대가족’ 구성으로 변경됨으로써 보다 다양한 인물 표현을 가능하도록 만든다. 또, 작품이 품고 있는 ‘갈등’이라는 주제는 서로 반목하는 가족 간의 갈등 뿐 아니라 전쟁 중에 있으면서도 전쟁을 의식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내적 갈등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1941년 3월 8일 ‘카페 드 파리’에서 춤을 추던 많은 커플들 가운데 폭격으로 인해 34명이 사망하고 80명이 심하게 부상을 당한 사건은 신데렐라 이야기 속 무도회장을 “유령처럼 춤을 추는 커플들로 구현”하도록 만든다.

폭격 가운데 정신을 잃고 거리에서 쓰러진 “신데렐라의 악몽이자 환상 속 꿈을 대변”하는 카페 드 파리의 무도회장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픈 욕망과 열정에 사로잡혀 매우 빨리 사랑에 빠지고, 공습경보가 울리는 가운데에서도 “오늘이 마지막 날이 될 것처럼” 춤을 추며 전쟁이라는 가혹한 현실을 잊고자 몸부림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는 1948년에 재건되어 주디 갈란드, 프랭크 시나트라, 험프리 보가트, 그레이스 켈리, 노엘 카워드와 같은 유명 인사들이 공연을 선보였고, 런던의 나이트클럽으로 웨스트엔드에서 100년이라는 세월을 지탱해 온 카페 드 파리가 Covid-19로 인해 2020년 12월, 영구히 문을 닫는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과 겹쳐지게 될 때 씁쓸함을 느끼도록 만든다.

매튜 본의 '신데렐라' 공연장면. 동화 속 신데렐라의 의붓 언니들은 의붓 형제자매들로 등장하며 '대가족 구성'으로 변경된다. 의붓 형제 중 한 명은 신데렐라에게 변태적 관심을 보이며 성추행을 시도한다./사진='신데렐라' 공식 트레일러 캡처. 

매튜 본은 신데렐라를 영화를 사랑하고 곧잘 이상적인 남자와의 사랑을 꿈꾸는 평범하고 순수한 젊은 여인으로 설정한다. 새어머니가 데려온 의붓 자매들은 신데렐라에게 집안일을 시키고 의붓 형제 중 한 명은 성추행을 시도한다. 하지만 신데렐라의 아버지는 휠체어에 앉은 채 그 어떤 일도 인식하지 못하는 듯 무기력한 상태에 놓여있다.

신년 무도회 초대장이 도착하고 신데렐라는 자신의 초대장을 기대하지만 새어머니는 초대장을 주지 않는다. 어머니의 유물인 듯 보이는 은색의 반짝이는 구두를 조심스레 꺼내 혼자 바라보던 신데렐라는 새어머니가 두고 간 밍크코트를 걸치고 혼자만의 공상에 빠져 춤을 추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의붓 형제들에 의해 방해를 받고, 우울해하는 신데렐라가 휠체어에 앉은 아버지를 껴안은 채 잠이 든 순간 난롯가 위에서 천사가 미끄러져 내려온다. 천사는 신데렐라를 현관문으로 이끌고 머리를 다친 듯 붕대를 감은 공군 조종사가 집 안으로 들어온다. 신데렐라는 새어머니의 눈을 피해 조종사를 숨기지만 곧 발각되고 새어머니에 의해 조종사는 집에서 쫓겨난다.

매튜 본의 '신데렐라' 공연장면. 영화를 사랑하고 곧잘 이상적인 남자와의 사랑을 꿈꾸는 '신데렐라(애슐리 쇼)'는 새어머니의 밍크코트를 걸치고 혼자만의 '공상'에 빠져 춤을 추기 시작한다.
매튜 본의 '신데렐라' 공연장면. 영화를 사랑하고 곧잘 이상적인 남자와의 사랑을 꿈꾸는 '신데렐라(애슐리 쇼)'는 새어머니의 밍크코트를 걸치고 혼자만의 '공상'에 빠져 춤을 추기 시작한다.

실망한 신데렐라는 조종사가 남기고 간 공군 모자를 재봉을 위해 재킷을 입혀 놓은 마네킹의 머리에 씌우고 마네킹이 사람인 양 춤을 추기 시작한다. 프로코피예프가 부엌 안에 홀로 있는 신데렐라를 위해 창안한 음악이자 애슈턴이 신데렐라가 빗자루를 붙잡고 마치 상상 속의 파트너인양 춤을 추게 만들었던 ‘빗자루 춤’은 매튜 본에 의해 ‘마네킹 춤’으로 변경된다.

마네킹을 빙글 빙글 돌리며 춤을 추기 시작한 신데렐라가 거실 커튼 뒤로 잠시 사라졌다 다시 등장하는 순간 관객들은 뻣뻣한 마네킹을 연기하는 공군 조종사 역의 무용수(앤드류 모나한)를 보게 된다.

매튜 본의 '신데렐라' 공연장면. 영화 속 주인공이 되기를 꿈꾸며 환상을 통해 현실에서 도피하는 '신데렐라(애슐리 쇼)'는 조종사가 남기고 간 공군 모자를 마네킹의 머리에 씌우고 마네킹이 사람인 양 춤을 추기 시작한다./사진='신데렐라' 공식 트레일러 캡처.
매튜 본의 '신데렐라' 공연장면. 영화 속 주인공이 되기를 꿈꾸며 환상을 통해 현실에서 도피하는 '신데렐라(애슐리 쇼)'는 조종사가 남기고 간 공군 모자를 마네킹의 머리에 씌우고 마네킹이 사람인 양 춤을 추기 시작한다./사진='신데렐라' 공식 트레일러 캡처.

매튜 본은 왕자를 ‘공군 조종사’로 변경한 이유와 관련한 인터뷰에서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대부분 공군 조종사를 주인공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과 영화를 사랑하는 신데렐라라면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한 조종사를 충분히 우상화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음을 밝혔다.

결국 신데렐라는 잠깐 만난 공군 조종사를 “낭만적인 영웅이자 멋진 연인”으로 간직한 채 2막에서 꿈속에 등장시키게 되고, 현실 속의 공군 조종사는 자신을 돌봐준 따뜻한 여인의 낯익은 신발 한 짝이 폭격의 폐허 속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그녀를 찾아 헤매게 된다. 사실 두 사람이 서로를 제대로 대면하게 되는 것은 3막에 이르러서이다.

2막의 시작 부분에서 천사는 폭격으로 폐허가 된 카페 드 파리의 무도회장을 시간을 되돌려 원래의 상태로 복구한다. 마치 영화 필름을 거꾸로 돌리듯 화려한 무도회장의 모습을 되찾은 카페 드 파리는 천사가 신데렐라를 위해 선물한 ‘환상’이라 할 수 있다.

매튜 본의 '신데렐라' 공연장면. 2막의 시작 부분에서 천사는 폭격으로 폐허가 된 '카페 드 파리'의 무도회장을 시간을 되돌려 원래의 상태로 복구한다. 마치 영화 필름을 거꾸로 돌리듯 화려한 무도회장의 모습을 되찾는 '카페 드 파리'는 천사가 신데렐라를 위해 선물한 '환상'이다./사진='신데렐라' 공식 트레일러 캡처.
매튜 본의 '신데렐라' 공연장면. 2막의 시작 부분에서 천사는 폭격으로 폐허가 된 '카페 드 파리'의 무도회장을 시간을 되돌려 원래의 상태로 복구한다. 마치 영화 필름을 거꾸로 돌리듯 화려한 무도회장의 모습을 되찾는 '카페 드 파리'는 천사가 신데렐라를 위해 선물한 '환상'이다./사진='신데렐라' 공식 트레일러 캡처.

천사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폭격 속에 죽음에 이르게 될 사람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죽음의 천사’처럼 기능하기도 하지만 폭탄이 떨어진 거리에서 정신을 잃은 신데렐라를 천국으로 데려간다거나 그녀에게 무도회에 갈 ‘기회’를 주기 위해 시간을 되돌리는 ‘환상’을 제공한다.

천사는 호박이 황금마차로 변하는 마술을 선보이지는 않지만 천사의 오토바이의 보조석에 신데렐라를 태우고 ‘카페 드 파리’로 데려가 신데렐라가 아름다운 드레스와 반짝이는 신발을 신고 멋진 모습의 공군 조종사와 만나 춤을 추고 사랑을 나누는 무의식 속 ‘기회’를 만들어 준다.

하지만 잠시 후 2막의 끝부분에서 주변의 모든 건물들을 손짓으로 다시 무너뜨리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천사가 단순히 신데렐라를 보호하고 소원을 들어주는 ‘수호천사’가 아닌 “운명을 관장하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매튜 본의 '신데렐라' 공연장면. '천사(리암 모어)'는 '신데렐라(애슐리 쇼)'와 부상당한 '공군 조종사(앤드류 모나한)'를 서로 만나도록 이끌어주고 두 사람 사이를 이어준다./사진='신데렐라' 공식 트레일러 캡처.
매튜 본의 '신데렐라' 공연장면. '천사(리암 모어)'는 '신데렐라(애슐리 쇼)'와 부상당한 '공군 조종사(앤드류 모나한)'를 서로 만나도록 이끌어주고 두 사람 사이를 이어준다./사진='신데렐라' 공식 트레일러 캡처.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는 무대 위에 커다란 시계로 구현되며 조종사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는 신데렐라의 ‘환상’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음을 알린다. 현실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던 신데렐라는 의료진의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고, 공군 조종사는 그녀의 신발 한 짝을 가슴에 품고 트라우마를 겪는 속에서도 그녀를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신데렐라’의 런던 대공습을 배경으로 한 무대는 1997년 무대 디자이너 레즈 브라더스톤에게 올리비에 상을 안겨주었다.

또, ‘신데렐라’는 초연 당시에도 여전히 전쟁에 관한 사연들을 가족들의 역사의 일부분으로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헌정되었다. 매튜 본은 자신의 조부모님께 헌정된 ‘신데렐라’가 2차 세계대전 당시 “희생을 해야만 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사랑을 잃었거나 잃은 줄 알았던 사랑을 되찾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올 수 있기에 그들 모두에게 헌정된 작품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따라서 부상당한 공군 조종사와 신데렐라는 3막에서 서로 같은 병원에 입원하게 된 줄도 모르고 사람들에게 상처입고 전쟁의 고난에 지친 상태에서 우연히 서로를 발견하게 된다.

매튜 본의 '신데렐라' 공연장면.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는 무대 위의 커다란 시계로 구현되며 조종사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는 '신데렐라(애슐리 쇼)'에게 '천사(리암 모어)'는 더 이상 환상이 지속될 수 없음을 알린다./사진='신데렐라' 공식 트레일러 캡처.
매튜 본의 '신데렐라' 공연장면.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는 무대 위의 커다란 시계로 구현되며 조종사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는 '신데렐라(애슐리 쇼)'에게 '천사(리암 모어)'는 더 이상 환상이 지속될 수 없음을 알린다./사진='신데렐라' 공식 트레일러 캡처.

2막의 환상 속에서 벗어난 신데렐라는 만나고 싶지 않은 의붓 가족의 병문안과 마주하고, 아버지를 불구로 만든 새어머니를 향해 분노의 시선을 보낸다. 새어머니는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신데렐라를 베개로 질식시켜 죽이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의붓 형제자매들은 충격에 빠져 자신들의 어머니를 외면한다.

3막에서 천사는 병원의 의사로 등장하며, 전기 자극 치료를 받으며 괴로워하던 공군 조종사는 비명 소리에 이끌려 옆 병실로 들어온 신데렐라와 조우한다. 조종사가 간직하고 있던 신발과 신데렐라에게 남겨져 있던 신발은 서로의 짝을 찾아 현실적인 ‘사랑’을 이룬다.

마지막 기차역 장면은 1945년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 ‘밀회(Brief Encounter)’에서 차용하고 있는데, 영화에서 작별을 고하는 장면은 새로운 삶을 위해 부부가 되어 함께 떠나는 신데렐라와 공군 조종사가 가족들과 화해를 하고 인사를 나누는 장면으로 구성된다.

새어머니는 보이지 않고 휠체어에 앉은 아버지는 딸이 떠나고 있음조차 인식하지 못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정신을 되찾고 작별 인사를 나눈다. 신데렐라는 줄곧 자신을 지켜봐 온 천사를 향해 몸을 돌려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인사를 눈치 채지 못하지만 천사는 기뻐하며 두 사람의 출발을 축복한다. 그리고 기차와 함께 두 사람이 떠나간 자리에 한쪽 구석에서 책을 읽으며 ‘공상’에 빠져있던 다른 여인 곁으로 천사가 다가선다. 이제 천사는 그녀를 운명으로 이끌기 위해 또 한 번의 마술을 시작하려 한다.

매튜 본의 '신데렐라' 공연 장면. '신데렐라'의 커튼콜 장면은 '유럽이 승리한 날(VE day)'을 기념하는 '승리의 춤'을 선보인다. 모든 출연진은 기쁨의 댄스를 선보이며 관객들에게 인사를 건넨다./사진=LG아트센터
매튜 본의 '신데렐라' 공연 장면. '신데렐라'의 커튼콜 장면은 '유럽이 승리한 날(VE day)'을 기념하는 '승리의 춤'을 선보인다. 모든 출연진은 기쁨의 댄스를 선보이며 관객들에게 인사를 건넨다./사진=LG아트센터

매튜 본은 ‘신데렐라’의 메시지를 묻는 질문에 “우리 모두에게 각자 수호천사가 있을 수 있고, 누구나 놀라운 상황에서 사랑과 성취를 발견할 수 있으며, 매우 평범하고 매력이 없고 우울한 상황 속에서도 낭만적인 사랑과 황홀하고 매혹적인 환상이 가능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백마 탄 왕자가 아니라 전쟁의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상처 입은 군인과 신분 상승을 이루는 신데렐라가 아니라 새로운 가족이 될 사람을 만나 이전의 삶을 떠나는 환상을 꿈꾸던 평범한 여인은 서로 작별하거나 청혼하는 다른 커플들과 함께 분주한 기차역의 일부로 녹아든다.

매튜 본의 ‘신데렐라’는 프로코피예프가 음악을 작곡하면서 “신데렐라와 왕자의 사랑이 탄생하고 피어나 장애를 극복하고 꿈을 성취하는 과정을 표현하고 싶었다”던 소망을 영화적이고 환상적인 ‘댄스 씨어터’로 구현해낸다. 평범한 사람들의 사랑은 성취되고 새로운 여인은 또 다른 ‘환상’을 품는다.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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