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또 다른 세상을 향한 경계에 있는 ‘문’...연극 '템플'
[앨리스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또 다른 세상을 향한 경계에 있는 ‘문’...연극 '템플'
  • 주하영
  • 승인 2020.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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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폐증 딛고 동물학 분야 세계적 권위자 된 템플 그랜딘의 자서전을 극화한 작품
연극 '템플' 공연장면. '템플(김주연)'은 자신이 고안해 낸 '압박기(hug box)'의 도움으로 모든 자극을 과도하게 느끼고 방어적이 되는 촉각방어의 장벽을 낮추고 마침내 엄마의 '포옹'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사진=공연배달서비스 간다
연극 '템플' 공연장면. '템플(김주연)'은 자신이 고안해 낸 '압박기(hug box)'의 도움으로 모든 자극을 과도하게 느끼고 방어적이 되는 촉각방어의 장벽을 낮추고 마침내 엄마의 '포옹'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사진=공연배달서비스 간다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사람은 일생 중에 독립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하나의 문을 걸어 나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학사모를 쓰고 졸업 연설을 하고 있는 주인공 템플의 첫 대사이다. 어둠 속을 환하게 비추는 조명 속에 있는 그녀가 말한다.

“작은 나무문은 내가 미래로 나아가는 것을 상징했습니다. 그 문을 넘어가려면 도전과 책임을 이겨낼 힘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니까.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여러 두려운 상황들을 이겨내고 그 문에 도달해야 합니다!”

문은 벽을 통과하기 위해 인간이 고안해 낸 장치이자 공간이다. 벽을 보다 쉽게 넘기 위해서, 또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문은 편리성과 안전성, 그 두 가지를 목적으로 설계된 인간의 고안품이다.

들어가고 나갈 수 있는 곳,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입구이자 한 세상의 끝이라 할 수 있는 ‘문’을 삶의 상징이자 은유로 받아들인 템플은 1968년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모든 공포와 불안감을 문 위에 얹어 놓았다. 문을 이렇게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문이 잠겨 있을 경우 정서적 분출구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면에서 문은 단지 상징일 뿐이지만 감정적으로 문을 여는 행위는 공포를 가져다준다. 문을 통해 나가는 행동은 공포와 사람들을 향한 불안감을 극복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템플이 두려워하는 것은 다른 세상에 있을지 모를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갇혀 있는 것에 대한 공포, 다른 곳으로 향하는 안전한 탈출로를 찾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것에 대한 공포, 자신이 향하는 길을 다른 사람들이 막아서거나 방해할지 모른다는 공포이다. 즉,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유를 얻지 못하게 될까봐 느끼는 공포를 말한다. 그녀는 이러한 공포를 초식동물이 사자를 만나 탈출구를 찾지 못했을 때의 공포에 비유한다.

연극 '템플' 공연장면. /사진=공연배달서비스 간다
연극 '템플' 공연장면.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입구이자 한 세상의 끝이라 할 수 있는 '문'은 '템플(김주연)'의 삶의 상징이자 은유가 된다. '문'은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이며, 템플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와 확신, 그리고 의지이다./사진=공연배달서비스 간다

연극 ‘템플’은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의 2019년 10월에 초연된 신작으로 ‘피지컬 씨어터(Physical Theatre)’의 특징이 강조된 작품이다.

템플 그랜딘은 2살 때 말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보호시설에서 평생 살아야 할 것이란 진단을 받았지만 모든 교육의 노력과 헌신을 다한 훌륭한 어머니와 창의력을 개발할 수 있도록 도와준 과학 선생님의 도움으로 동물학 분야의 권위자이자 가축 시설 설계자로서 성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 자폐인이다.

연극 ‘템플’은 기본적으로 “자폐인들이 언어가 아니라 그림으로 사고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1995년 책 ‘나는 그림으로 생각한다’에 근거해 자폐인인 템플이 느꼈을 심리와 감각, 감정들을 퍼포머들의 신체의 움직임을 최대한 활용해 무대에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연극 '템플' 공연장면. /사진=공연배달서비스 간다
연극 '템플' 공연장면. '템플(김주연)'이 졸업 연설을 하는 첫 장면은 끝 장면과 연결되면서 하나의 '틀'을 형성하게 되고, 그동안 그녀가 겪어온 삶의 과정은 템플을 포함한 8명의 퍼포머들의 입을 통해 전달된다./사진=공연배달서비스 간다

사실 연극 ‘템플’은 장르를 명확히 규정하기 힘든 작품이다. 주인공인 템플이 대학 졸업 연설을 하는 첫 장면은 끝 장면과 연결되면서 하나의 ‘틀’을 형성하게 되고, 그동안 그녀가 겪어온 삶의 과정이 여러 화자의 입을 통해 전달되기 시작한다.

템플 역을 맡은 배우를 제외한 7명의 퍼포머들은 해설자이자 템플의 삶 속 인물들, 템플의 예민한 감각을 드러내는 그림자들, 소품이자 무대 배경, 음향 효과까지 매우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무대를 구성하게 된다.

템플이 자폐인의 특성을 드러내는 언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기도 하고, 어머니 역을 맡은 퍼포머가 연극이 만들어진 방식에 대해 설명하기도 하고, 당대의 의학 지식의 한계에 대한 논평이 곁들여진 지적을 하기도 하며, 퍼포머들이 특정 상황에 놓인 템플에 대해 설명을 이어가기도 하는 연극방식은 메타적 속성을 강조하는가 하면 강렬한 피지컬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한다. 또, 유머와 위트, 개그가 강조된 익살극이나 아이들의 극 놀이의 특징을 드러내기도 한다.

영국에서 1986년 ‘DV8’에 의해 처음 ‘피지컬 씨어터’라는 용어가 사용된 이래 30년이 넘도록 세상의 주목을 받아왔지만 여전히 명확한 구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이먼 머레이와 존 키프의 관점을 적용한다면, “진보적이고, 신선하며, 실험적이고, 연극적 관행과 거리가 있다”는 측면에서 ‘템플’은 피지컬 씨어터로 분류될 수 있다.

연극 '템플' 공연장면. /사진=공연배달서비스 간다
연극 '템플' 공연장면. "신체는 세상과 만나는 지점이다"라는 관점에서 보면 과도하게 예민한 감각으로 고통을 받는 자폐인의 성장과정을 '몸'으로 그려내며 '피지컬 씨어터'의 속성을 강조한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사진=공연배달서비스 간다

무엇보다 “신체는 세상과 만나는 지점이다”라는 관점에서 보면 과도하게 예민한 감각으로 인해 사람들과 눈을 맞추기가 어렵고 자신을 누군가가 만지는 것을 극도로 불편해하며 소리에 민감한 자폐인의 성장과정을 ‘몸’으로 그려내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게다가 ‘몸’은 언어와는 다른 의사소통의 도구라 할 수 있고, 자폐인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행동이나 예의범절을 습득할 경우 배우가 연기하는 법을 배우는 방식을 활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연극’은 자폐아인 템플이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을 드러내기에 적당한 예술 수단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모든 것을 이미지로 머릿속에 구현해 인식에 이르는 템플의 언어습득 과정이나 사고 체계를 이해하는 데에는 에미상과 골든글로브상을 수상한 2010년 영화 ‘템플 그랜딘’이 훨씬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과도하게 예민한 감각으로 인해 사람과의 접촉을 고통으로 느끼거나 신경발작을 일으킬 때의 괴로움은 연극 ‘템플’의 몸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사춘기 시절 호르몬의 증가로 인해 과도한 신경발작에 시달리는 템플의 고통은 붉은 줄 세 개가 교차하는 가운데 퍼포머들의 신체로 표현되는 아크로바틱 동작들과 불안을 가중시키는 바이올린 선율과 조명의 효과가 더해지면서 관객들에게 보다 감각적으로 전달된다.

또, 오르골 소리나 전화벨 소리가 주는 불편함, 템플을 안아주려는 엄마의 포옹이 주는 과도한 자극은 검은 옷의 퍼포머들이 템플 주변에 하나씩 더해짐으로서 가시적으로 관객들이 위협과 두려움, 압박의 무게를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연극 '템플' 공연장면. /사진=공연배달서비스 간다
연극 '템플' 공연장면. 사춘기 시절 '템플(김주연)'이 겪는 신경발작은 붉은 줄 세 개가 교차하는 가운데 퍼포머들이 신체로 표현하는 아크로바틱 동작들과 불안을 가중시키는 바이올린 선율, 조명의 효과로 인해 감각적으로 전달된다./사진=공연배달서비스 간다

템플 그랜딘은 ‘나는 그림으로 생각한다’에서 신경발작을 “커다란 통나무 아래 불쏘시개를 넣고 벽난로에 불을 지피는 것”에 비유하며, 아주 작은 스트레스에도 불이 확 붙으면서 통제할 수 없게 되는 극도의 공포감이라고 설명했다.

1947년생인 템플 그랜딘의 어린 시절 의학계는 자폐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프로이트 정신의학이 지배적이던 시기에 대부분의 의사들은 차갑고 냉정한 엄마, 일명 “냉장고 엄마”가 그 원인이라고 보았으며, 1944년 한스 아스퍼거가 발표한 ‘상위’ 자폐증 형태에 관한 주장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40년 동안 계속 무시될 터였다.

그런 탓에 그랜딘의 자폐증 진단은 그녀가 40대이던 1980년대에 이루어졌으며, 뇌 사진을 통해 일반인과 다른 두뇌의 특성이 증명된 것도 2010년, 그녀의 나이 63세 때의 일이었다.

아무도 정확히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그랜딘이 자신이 ‘특별한 아이’임을 인식하고 자신의 사고방식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 것은 마운틴 컨트리 고등학교에서 ‘칼락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서부터였다.

NASA에서 일하다 고등학교 과학 선생님이 된 칼락 선생님은 그랜딘이 단어 하나를 떠올리면 지금까지 봤던 모든 관련 이미지들을 머릿속에 한꺼번에 떠올리고, 책을 보면 사진으로 찍듯 이미지를 저장해 필요할 때 꺼내볼 수 있는 비범함을 지녔음을 인식했다. 그는 자폐인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고착증(fixation)’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해 그랜딘이 머릿속에 자신이 구상한 것들을 3D로 구현해 여러 각도로 돌려보는 일이 가능한 능력을 ‘과학’에 적용하도록 이끌었다.

연극 '템플' 공연장면. /사진=공연배달서비스 간다
연극 '템플' 공연장면.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템플(김주연)'이 자신이 '특별한 아이'임을 인지하게 된 것은 마운틴 컨트리 고등학교에서 '칼락 선생님(윤성원)'을 만나게 되면서 부터이다. /사진=공연배달서비스 간다

2010년 TED 강연에서 그랜딘은 자폐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창의적이고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선생님들이며 자폐아들이 가진 잠재력을 자극하고 계발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는 멘토”들임을 강조했다. 그녀는 “세상은 함께 협력하기 위해 다른 종류의 생각을 필요로 하므로 모든 종류의 사고를 발달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연극 ‘템플’은 “우리가 보는 세상만,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할 필요를 강조한다. 자폐를 고쳐야 할 병이나 장애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사고하는 독특한 사람들로 바라볼 수 있는 열린 시선을 획득할 때 우리가 얻게 될 무한한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숨겨진 보석과 같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옆에서 응원하고 지켜보며 도움을 건넸던 다른 사람들의 역할 또한 놓치지 않는다. 퍼포머들은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자유롭게 무대와 객석의 벽을 허물어뜨리고 관객들에게 말을 걸 뿐 아니라 인물이나 상황에 대한 해설을 하고 반응을 유도하면서 관객들을 강연장에 와 있는 관중이 되도록 만든다.

1945년 뮤지컬 ‘회전목마’의 2막에 나오는 위로와 격려의 넘버인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에요’를 졸업생들을 향해 부르는 템플의 마지막 장면의 감동은 영화 ‘템플 그랜딘’의 장면과 거의 같게 구현되지만 연극 ‘템플’은 템플이 엄마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묻는 장면을 추가함으로써 차별을 시도한다. 연극 ‘템플’의 주제를 꿰뚫는 상징이자 템플 그랜딘의 삶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열린 문’을 형상화한 나무 문틀에서 엄마가 템플을 향해 외친다.

“사랑은 누군가를 성장시키길 원하는 거야. 엄마는 템플이 성장하기를 원했어. 네가 너만의 시각적 상징을 만들었다는 건 템플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거야. 스스로 성장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거지.”

연극 '템플' 공연장면. /사진=공연배달서비스 간다
연극 '템플' 공연장면. 검은 옷의 퍼포머들은 예민한 감각을 지닌 '템플(김주연)'이 겪는 압박의 무게와 위협, 두려움과 공포를 관객들이 가시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템플에게는 위로와 사랑을 담은 '엄마(유연)'의 포옹조차 엄청난 공포와 압박으로 다가온다./사진=공연배달서비스 간다

사랑과 성장, 도전과 용기, 억압과 공포는 사실상 자폐인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삶에서 어려움을 겪는 일이라는 점에서 연극 ‘템플’은 모든 사람들의 ‘성장’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모자란 게 아니라 다를 뿐이다”란 열린 시각은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바라는 관점이다. 끝없이 경쟁하면서 정해진 틀에 갇혀 평가라는 굴레에 지속적으로 휘말리게 되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바라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괜찮다’는 관점 속에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템플 그랜딘의 TED 강연의 주장처럼 세상은 다양한 사고를 가진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만은 없으며, 누군가는 다른 방식으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찾아내야만 세상에 ‘개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랜딘이 시각적 사고를 하는 덕분에 ‘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좀 더 인간적인 방식으로 소들의 고통을 최대한 줄여줄 수 있는 가축시설을 설계할 수 있었던 것처럼 ‘템플의 이야기’는 우리가 자폐인의 특성을 보다 잘 이해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보다 따뜻한 태도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연극 '템플' 공연장면. '템플(김주연)'은 자신을 놀리고 괴롭히는 동급생을 향해 분노한 나머지 역사책을 던지게 되고 그 일로 인해 퇴학처분을 받게 된다. 템플이 던진 '책'은 퍼포머의 손에 의해 슬로우 모션으로 동급생들을 한명씩 거쳐 마지막 퍼포머의 눈을 찌른 후 바닥에 떨어지는 것으로 표현된다./사진=공연배달서비스 간다
연극 '템플' 공연장면. '템플(김주연)'은 자신을 놀리고 괴롭히는 동급생을 향해 분노한 나머지 역사책을 던지게 되고 그 일로 인해 퇴학처분을 받게 된다. 템플이 던진 '책'은 퍼포머의 손에 의해 슬로우 모션으로 동급생들을 한명씩 거쳐 마지막 퍼포머의 눈을 찌른 후 바닥에 떨어지는 것으로 표현된다./사진=공연배달서비스 간다

신경학자인 올리버 색스는 1993년 템플 그랜딘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면서 ‘마음 이론(Theory of Mind)’을 갖지 못한 자폐인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정신적 깊이’를 드러낸 그랜딘에게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다.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그랜딘은 죽음으로 인해 삶 속에 함께 했던 모든 생각들이 사라진다는 사실에 ‘슬픔’을 보인다. 그녀는 죽음 후에도 ‘의미 있는 삶’으로 기억되도록 세상에 무언가를 남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겠다는 ‘의지’를 내보인다.

이는 버지니아 울프의 “세상의 아름다움에는 양날이 있다. 한쪽 날은 웃음이고 다른 쪽 날은 고통으로 심장을 둘로 갈라놓는다”는 말의 의미를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그랜딘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놀라운 점이다.

템플이 지닌 ‘디테일에 주목하는’ 자폐적 특징은 도축장에서 소의 죽음을 보면서 감정적인 고통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사라지는 것에 대한 존중과 사라지고 난 후의 세상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깊이’를 선물하게 된다. 죽음에 대한 인식은 삶의 소중함을 각인시키고 무엇보다 ‘의미 있는 삶’이 되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게 된다.

연극 ‘템플’은 템플 그랜딘이 대학을 졸업하게 될 때까지의 성장 과정만을 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랜딘의 성인으로서의 삶은 미국 가축 시설의 3분의 1을 설계한 성공한 동물학자에 대한 설명이나 그녀가 고안해 낸 ‘압박기’가 자폐인들의 촉각방어의 장벽을 줄여주는데 사용되고 있음만이 언급되지만 현재 73세인 그랜딘이 보여준 삶의 행보는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자폐증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할 수 있도록 자폐인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다해왔을 뿐 아니라 동물들을 위해 최대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시설을 만들고 60개가 넘는 논문과 여러 권의 책을 통해 세상에 지식을 보태기 위해 애써왔다.

연극 '템플' 포스터.

세상이 보다 나아질 수 있도록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사용하겠다는 템플 그랜딘은 말한다.

“손가락을 튕겨 한 순간에 자폐인이 아닌 사람이 될 수 있다 할지라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내가 아니니까요. 자폐증은 내 존재의 일부입니다.”

‘문’은 내가 있는 세상에서 또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는 ‘경계’에 서 있다. 현재의 세상이 나를 억압하는 곳이라면 그 문은 ‘출구’가 될 것이다. 현재의 세상이 편안한 곳이라면 그 문은 변화를 향해 나아가는 ‘입구’가 될 것이다.

템플이 ‘계단’이 아니라 ‘문’을 자신의 상징으로 설정한 것은 그녀의 삶의 방식을 규정한다. 성공을 향해 오르는 것이 아닌 다른 세상으로의 변화, 탐험, 자유를 향해 ‘문’을 찾는 여정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문’은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가 된다. 새로운 ‘문’ 앞에 서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초대에 응할 수 있는 용기, 누군가가 도움의 손길을 건넬 것이라는 확신, 반드시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또 다른 ‘문’을 찾아내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템플은 오늘도 그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그녀 자신이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의 손길이 될 수 있도록, 그녀의 삶이 남긴 모든 자취가 영원히 기억될 수 있도록, 자신만의 문을 찾지 못한 많은 다른 자폐인들이 새로운 세상으로 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녀는 노래한다.

“걸어요. 걸어요. 희망을 품고서. 결코 넌 혼자가 아니야!”

모든 인간이 바라는 것은 같다. 앞으로의 삶에 대한 희망, 누군가의 응원과 지지,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와 격려, 그 어떤 고난에 쓰러져도 누군가의 손길이 결국 나를 일으켜 줄 것이라는 믿음과 확신,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려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템플이 바라고 기대하는 좀 더 나은 세상이 훨씬 더 가까이 다가와주지 않을까?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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