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창작극 '화전가', 가슴 먹먹한 아우라를 안겨준 여인네들의 정한(情恨)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창작극 '화전가', 가슴 먹먹한 아우라를 안겨준 여인네들의 정한(情恨)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20.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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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삼식 작, 이성열 연출의 국립극단 70주년 기념 창작극 '화전가'
- 가요 ‘봄날은 간다’ 가락처럼 가슴 짠한 정서 물씬...우리 여인들의 애환을 오붓하게 담아내
배삼식 작, 이성열 연출의 연극 '화전가'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한국인들의 내면엔 신명도 넘쳐나지만 독특한 정서가 흐른다. 한(恨))이라고도 하고 정한(情恨)이라고도 한다. 그런 정서를 담은 가요 ‘봄날은 간다’(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는 대중들이 즐겨 부르는 명곡이다. 백설희가 처음 불렀지만 장사익 주현미가 불러도, 자우림과 린이 불러도 가슴 먹먹하고 나른함을 느끼게 한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시인들이 최고로 꼽았을 정도로 가사가 절절한데 느릿한 곡조는 들을 때마다 가슴을 짠하게 한다.

이처럼 애틋한 정한은 박수근의 그림에도 면면히 흐르고, 허준호 감독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도 호흡할 수 있다.

언제 들어도 가슴 먹먹한 노래 ‘봄날은 간다’같은 아우라를 안긴 여배우들만의 무대. 올해 70주년을 맞는 국립극단이 8월 6일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한 배삼식 작, 이성열 연출의 ‘화전가’(~23일까지)는 남성부재의 암울한 시기에도 단단하게 일상을 버텨낸 우리 여인들의 애환을 오붓하게 담아낸 연극이다.

배삼식 작, 이성열 연출의 연극 '화전가' 공연 장면/사진=국립극단

내용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고, 살뜰한 재미가 있는 연극도 아니지만 ‘봄날은...’의 노랫말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 가더라’라 처럼 무심하면서도 ‘청노새 짤랑대는..,’ 소리가 들리는 한 폭의 수채화 같은 무대였다.

안동 사투리가 넘실대는 대사를 다 알아듣지 못하고, 당시 시대상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음악(박성원)과 의상(김영진)과 무대미술(박상봉)과 조명(최보윤)과 소품(김혜지)이 어우러진 몽환적인 캔버스에 배우들이 빚어내는 아스라한 미장셴만으로도 감정선이 젖어드는 서정극이었다. 지루하고 난해한 대목도 없지 않았으나 오랜만에 우리의 정한(情恨)을 무대에서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창단 70주년을 맞은 국립극단이 창작극으로 기념의 테이프를 끊었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 그래야 세계 명작을 해도, 우리의 근현대 연극을 재조명해도 명분이 서는 것이다.

희곡 ‘1945’로 해방 공간을 다뤘던 배삼식 작가는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의 봄, 경북 안동의 한 가문을 무대로 여성들, 여배우들만 출연하는 또 한편의 시대극을 선보였다.

배삼식 작, 이성열 연출의 연극 '화전가' 공연 장면/사진=국립극단<br>
배삼식 작, 이성열 연출의 연극 '화전가' 공연 장면/사진=국립극단

6.25가 일어나기 직전의 봄날, 산하에는 여전히 꽃이 피었지만 권씨네 집안엔 찻잔 속의 고요 같은 무거운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3.8선이 그어지고 많은 인사들이 월북 또는 납북되었으며, 국대안 반대운동 등 요동치는 정국의 파장이 이 집안에 까지 밀려든 탓이었다.

권씨 가문의 남자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극에 존재하지만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런 와중에 안주인 김씨의 환갑을 기리기 위해 딸들이 모여들고 며느리와 집안일 돌보는 할매까지 가세해 집안은 여인천하가 된다. 시절은 하수상해도 꽃은 피고 새는 우는 일상이 흐르지만 시대에 치이고 세파에 할퀸 저마다의 상처는 아리게 마련이다.

배삼식 작가는 대사 속에 당시 시대상을 녹여내면서 특별히 여인들의 삶과 정서에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시대적 아픔을 한탄하기보다 역설적으로 여인들 최고의 축제인 화전놀이로 봄날의 한때를 클로즈업시켰다. 카니발 같은 놀이는 없었지만 한복으로 한껏 치장하고, 맛난 음식에 소주 한잔 걸치며 지나온 시절을 이야기 하는 설정은 신선했다.

배삼식 작, 이성열 연출의 연극 '화전가' 공연 장면/사진=국립극단

아쉬운 점은 등장인물들의 개인사와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해 전반 한 시간 가까이를 배분해 지루한데다 안동의 고어(古語)까지 살려낸 토속적인 대사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몽글몽글한 어미의 대사들은 듣기에는 시처럼 운율이 있고 아름다웠으나 맥락만 어림잡을 뿐 의미를 모를 때 오는 답답함은 견디기 쉽지 않았다.

9명의 여인이 모여 초콜릿과 커피를 시음하고, 밤을 새워 설탕 같은 달달한 대화를 나누고 화전놀이까지 나서면서 서로의 응어리를 풀고 아프지만 상처를 치유하는 내용의 중후반 만으로도 한편의 연극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밀도 있는 작품을 발표해온 이성열 국립극단 예술감독 겸 연출은 여러 기법으로 시간의 흐름, 감정의 변화 등을 다층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인물들이 내밀한 이야기가 술의 힘을 빌려 터져 나오게 한 밤 시간에 무게를 두어 갈등을 노정하기도 하지만 아침이 되면 다시 일상으로 회복되는 시간의 변화를 읽게 했다.

또한 무대에 물을 끌어들여 세월의 흐름을 연출해 냈는데, 특히 빗줄기가 떨어지는 대청마루에서 펼쳐지는 여인들의 넋두리는 노래 ‘봄날은 간다’의 한 대목처럼 아련한 아우라를 안겨 주었다.

이 연극을 보면서 그동안 접한 연극과 영화들이 떠올랐다.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 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들, 일상의 작고 소중한 행복들, 아스라한 종소리, 옛것은 물러가고 새로운 문명이 밀려드는 변화의 물결... 체홉의 ‘벚꽃동산’과 나탈리 우드 주연의 ‘초원의 빛’, 허준호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등등... ‘화전가’ 또한 글로는 표현하기 힘든 감정의 흐름을 잘 담아낸 연극으로 꼽힐 만하다.

배삼식 작, 이성열 연출의 연극 '화전가' 공연 장면/사진=국립극단

작가와 연출가는 이 작품의 처음과 끝에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와 T. S. 엘리어트의 시를 원어로 낭송케했다. 멋진 싯귀에서 이 작품의 주제를 함축하는 의미는 읽혔지만 우리의 시대적 아픔이나 정서를 그리는 작품 분위기에는 좀 생경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창작극 ‘화전가’는 원작과 연출의 조합도 좋았지만 저마다의 독특한 캐릭터를 저마다의 개성으로 살려낸 배우들의 개인기와 앙상블 장면이 볼만했다.

여성들만 9명이 출연하는 무대에서 배우들이 일사불란한 조화를 이루었다면 오히려 단조로웠을 것이다. 그런데 ‘화전가’에서 배우들은 목소리 톤도 다르고, 연기 폭도 다르고, 외양도 다르게 함으로써 이질적인 요소들이 부짖쳐 화학작용을 일으키게 했고, 부조화 속에 조화를 이루어냈다. 그럼에도 아쉬운 점은 배우들마다 열심히 연습한 안동 사투리 대사들이 속속들이 귀에 들어오기 보다는 눙쳐지는 부분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어머니 김씨 역 예수정과 고모 권씨 역 전국향의 찰떡같은 연기 호흡이 볼만했다. 두 배우 모두 이 시대의 명인답게 개성 넘치는 연기력과 호흡으로 극의 중심을 받쳐 주었다.

배삼식 작, 이성열 연출의 연극 '화전가' 공연 장면/사진=국립극단

집안의 어른으로 9명 중 리더인 예수정은 섬세하고 안정감 있는 연기를 보였지만 조금 더 당당하고 강단 있는 여인상을 보여주었으면 더 빛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전국향은 더부살이 아웃사이더 같은 캐릭터를 감초처럼 달달하게 해내면서 여러 여인들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이 집의 식구나 다름없는 독골할매 역 김정은과 홍다리댁 박소은 컴비는 일상적이고 평면적인 연극에 활력소 역할을 했다. 김정은은 여러 역할을 고루 소화하는 배우지만 이번 배역에서 연륜이 묻어나는 선굵은 연기력으로 존재감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큰딸 금실이 역 문예주와 둘째딸 박실이 역 이유진은 대조적인 목소리와 외양으로 조화를 이루었고, 큰며느리 역 이도유재와 작은 며느리 역 박윤정은 등장 자체만으로도 연민을 자아내는 역할을 해냈다. 막내딸 봉아 역 이다혜는 이 집안의 세대간 신분간의 간극을 이어주는 중심 캐릭터로 어리고 발랄하게 극을 이끌었는데, 대학생인 만큼 조금 더 성숙한 캐릭터설정도 좋았을 것이다.

전반부의 느슨함, 무엇보다 대사가 소화되지 않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미덕은 남성이 부재하는 인고의 세월을 견디는 여인들의 내면을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노래 가사처럼 우리네 정한으로 질박하게 펼쳐내 관객들의 가슴을 먹먹케 하고, 때로 눈시울을 붉히게 한데 있지 않았을까.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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