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연극 '고기잡이 배', 배우 21명의 다양한 캐릭터...인생의 고뇌가 묻어나는 대사의 힘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연극 '고기잡이 배', 배우 21명의 다양한 캐릭터...인생의 고뇌가 묻어나는 대사의 힘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20.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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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명의 배우가 뿜어내는 에너지, 일사분란하게 돌아가는 앙상블...임선빈 작, 연출의 '고기잡이 배'
- ‘페스카마호 선상반란' 사건 모티브...인간의 심리와 정체성에 천착
연극 '고기잡이 배-바다로 간 한국 사람들'의 커튼콜 무대에 오른 21명의 배우들/사진=정중헌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코로나19 와중에 21명의 남자 배우들이 출연한 하드보일드 한 연극을 관람했다. 2017년 서울연극제에서 대상과 희곡상, 연출상(임선빈), 연기상(유승일)을 수상한 '고기잡이 배'의 2020년 버전이다. 

2017년 소극장 초연을 놓쳐 아쉬웠는데, 스태프까지 수 십 명이 함께 작업해야 하는 큰 작품을 다시 무대에 올렸다는 자체가 대견했다. 어렵게 창작해 수상까지 한 작품이 사장되곤 했는데 다행히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올해의 레퍼토리 참가작’으로 선정되어 더 완성도 높게 다듬어져 관객과 만난 것이다.

21명의 남자 배우가 뿜어내는 에너지, 일사분란하게 돌아가는 앙상블, 인생의 고뇌가 묻어나는 대사들...

“스탠바이!”로 시작되는 작품은 재미나 서스펜스 보다는 처음부터 묵직하게 치고 나갔다. 군더더기 없이 대사 위주의 배우들의 리얼리즘 연기로 끌어가는 공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연극 '고기잡이 배-바다로 간 한국 사람들' 포스터

초연은 보지 못했지만 2020 새 버전은 이 작품의 모티브를 이룬 ‘페스카마호 선상반란(1996년 남태평양에서 조업 중이던 참치잡이 원양어선 '페스카마 호'에서 조선족 선원 6명이 반란을 일으켜 한국인 선원을 포함한 11명을 살해한 역대 최악의 사건)’의 구체적 묘사보다 ‘인간의 심리’나 ‘정체성’에 더 천착한 느낌을 주었다.

작가 임선빈은 각기 다른 문화적 배경과 성격이 다른 캐릭터의 배우들을 통해 할 말이 많은 듯 보였다. ‘인간’이란 전제를 내세워 국적, 차별, 인권, 고향, 가족, 돈, 양극화, 비리, 배신, 잔혹성 같은 욕망과 이념의 덩어리들을 뼈있는 언어로 압축해냈다. 때로 그 내용이 지극히 철학적이고 모호하고 주관적이지만, 그것이 망망대해의 일엽편주같은 좁은 공간의 한계 상황이라는 설정에서는 생선 비늘처럼 퍼덕이는 생명력을 발했다.

살인사건 극화에 역점을 두기 보다는 인간의 본성, 억압과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때의 폭발성에 포커스를 맞춘 이 연극은 영화 '기생충'과 또 다른 묵직한 메시지를 이 시대에 던지고 있다. 배우들이 비명처럼, 절규하듯 뿜어내는 대사들은 송곳처럼 날이 선채로 관객의 가슴을 찍어 누르며 공명을 일으켰다. 때로는 슬픔이 배어나와 인생의 심연을 울리는듯 했다.

2017년 당시 공연됐던 연극 ‘페스카마-고기잡이배’의 장면
2017년 당시 공연됐던 연극 ‘페스카마-고기잡이배’의 한 장면

엄청 다이내믹하고 파워풀하리라는 기대와 달리 여성 연출가 임선빈은 산만할 수 있는 남성 선단을 섬세하게 지휘하여 인류애, 용서와 화해라는 항구로 관객을 이끌었다.

개인적인 인사는 했지만 작품은 보지 못한 임선빈 연출은 21명 배우들의 동선과 대사를 컴퓨터로 계산하듯 배분하고 배역의 캐릭터를 명징하게 살려내는 노련한 수완을 발휘했다.

극한 상황의 선상 반란을 다뤘지만 마무리는 진혼곡처럼 장중하면서도 따뜻했다. 피날레 무대에서 배우들의 노래는 그들의 감정분출 뿐 아니라 관객의 서늘해진 가슴도 위로해 주는 효과를 주었다.

이 연극의 묘미는 배우들의 동선을 따라 다니며 그들의 캐릭터를 파악하는 것인데 이 부분에 대한 제작진의 배려가 적은 점이 아쉬웠다. 21명의 배우들은 어느 하나 소외됨이 없이 고른 기량을 발휘했고 자신의 캐릭터를 개성 있게 소화해 냈지만 오브제처럼 보여 변별하기가 어려웠다.

강두, 김동림, 김성태, 김재현, 김준희, 김효배, 박태성, 서성영, 서진혁, 송현섭, 오일룡, 원완규, 유승일, 윤상현, 이민재, 이성원, 이지혁, 임병석, 정이재, 정진혁, 한동훈.

크고 작은 배역으로 10년 이상 대학로 무대에 서온 중견 남성 연기자 21명을 모아 한 무대에 세우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드림씨어터를 이끌어 온 이 작품의 정형석 예술감독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 '고기잡이 배-바다로 간 한국 사람들'의 커튼콜 무대에 오른 21명의 배우들/사진=정중헌

이 작품을 보면서 끝내 아쉬운 점은 그간 대학로 무대에서 본 낯익은 배우들이 많았지만 다양한 인물의 다양한 캐릭터를 파악하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극장 입구에 배우들의 사진을 붙인 배역표가 있긴 하지만 등장인물과 배우를 매칭시키기가 어려웠다. 차라리 한국인과 조선족의 배역을 대별하고, 갑판장 항해사 등의 직책을 표기했으면 일부라도 구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필자는 친분이 있는 이성원, 윤상현 배우의 캐릭터에 몰입했는데, 독백 같으면서도 전체적 조화를 위해 개성 넘치는 연기력을 발휘한 더 많은 배우들의 이름을 알리고 싶었다.

이 연극의 미덕은 연극성을 잘 살려냈다는 점이다. 신문기사나 소설로 읽어도 복잡한 선상 반란 사건을 배우들의 대사와 연기로 표출하면서 ‘고기잡이 배’라는 제한된 공간의 한계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군상들의 심리와 행동을 극적으로 승화해 낸 것이다. 6월 28일까지 대학로 유니플렉스 2관.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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