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질문하고 반항하기 위한 '설명서'...뮤지컬 '데미안'
[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질문하고 반항하기 위한 '설명서'...뮤지컬 '데미안'
  • 주하영
  • 승인 2020.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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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헤르만 헤세 원작, 오세혁 극작/작사 창작 뮤지컬
뮤지컬 '데미안' 공연 사진./사진= (주)모티브히어로 제공
뮤지컬 '데미안' 공연 사진. 이 작품은 고정된 배역 없이 6명의 남녀 배우로 구성된 페어가 회차 마다 싱클레어 혹은 데미안을 연기하는 독특한 2인극의 구성을 택하고 있다. 싱클레어(김주연), 데미안 외(유승현)./사진=모티브히어로 제공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실수에 대한 두려움 없이 행동할 수는 없을까요?”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탈리아 여성 주간지 ‘라 레푸블리카 델레 돈네’의 독자가 던진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애석하게도!...우리는 행동하기 전에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지 확신할 수 없고, 하루가 끝날 때까지 우리가 그 일을 과연 해낼 수 있을 것인지도 알 수 없다...우리의 행동들이 자신을 위해서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점점 더 중요해질수록, 그 행동들이 가져오는 결과는 더 불확실해질 것이며 그렇기에 예측하는 일도 점차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는 우리가 삶을 선택하는 순간에 “천천히 읽고 따라할 수 있는 설명서”가 부착되어 있지 않음을 강조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로마의 시인 루칸(Lucan)을 인용해 바우만은 이렇게 선언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사랑하는 일처럼 운명에 인질로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뮤지컬-데미안_비주얼컷_김바다
뮤지컬 '데미안' 비주얼컷 

운명과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그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원으로 돌며 위험을 감수하는 삶, 그러한 삶에 “읽고 따라할 수 있는 설명서”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과연 만족하게 될까?

바우만은 우리의 삶은 스스로 예술작품을 창조하듯 “인생의 과정과 인생의 ‘전반적인 목적’,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지’도 스스로 찾아야만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조용히 세계를 수용하고, 말로 불평만 할 뿐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여러 부정행위들에 협력하는 결과를 낳는 삶, 자신에게 부여된 의지를 온전히 세계에 맡겨버린 채 그저 고분고분 따르는 것이 운명이라 여기는 삶... 바우만은 우리가 이런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본보기로 삼아야 할 것은 “결코 쉴 줄 모르는 정신의 소유자, 자신에 대한 탐구를 늦춰본 적 없는 소크라테스라는 고대의 현자”라고 주장한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졌던 사람, 모방이 아닌 자신만의 개성을 창조할 수 있었던 사람, 인생이 예술작품임을 인지하고 단점과 장점까지 모든 것을 온전히 책임지는 “창시자(auctor)”... 삶을 대면함에 있어 작가(author)이자 배우(actor)로서, 디자이너이자 그 디자인을 실행하는 사람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어떤 개인을 모방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소크라테스를 모범으로 따른다는 것은 결국 “타율성과 모방, 복제, 복사와 같은 것들을 스스로 거부하는 일”을 의미한다. 무언가를 모방한 것이 독창성을 필요로 하는 ‘예술작품’이 될 수는 없기에 인간의 ‘삶’이라는 예술작품은 “반드시 무언가가 되기 위해 애써 투쟁하고 싸우며 노력하는 것”이어야 한다.

뮤지컬 '데미안' 공연 사진./사진= (주)모티브히어로 제공
뮤지컬 '데미안' 공연 사진. '데미안'을 맡은 배우는 싱클레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다른 여러 인물들, 크로머, 피스토리우스, 에바 부인 등을 자유자재로 연기하면서 다채롭게 변화한다. 싱클레어(정인지), 데미안 외(김바다)./사진= 모티브히어로 제공

1919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쟁에 참전했던 수많은 군인들이 인간의 잔혹함과 끔찍한 공포, 비참함과 굴욕을 경험하고 패배감과 회의에 빠져 돌아왔을 때 42살의 작가 헤르만 헤세는 ‘에밀 싱클레어’라는 20세 청년의 이름으로 소설 ’데미안’을 발표했다.

10살 소년에서 20살 청년이 되어 전쟁에 참전하기까지 에밀 싱클레어의 성장 과정을 담은 소설 ’데미안’은 삶에 대한, 세상에 대한, 존재에 대한 절망과 회의에 빠져 출구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젊은 군인들에게 해답처럼 느껴졌고, 신진 작가 에밀 싱클레어는 ‘폰타네상’을 수상했다.

이듬해인 1920년 싱클레어는 다름 아닌 이미 4번이나 폰타네상을 수상한 작가 헤르만 헤세임이 밝혀졌지만 선과 악, 빛과 어둠, 남성성과 여성성을 아우르는 ‘대지의 어머니(Mother Earth)’와 같은 신의 존재,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자아에 관한 성찰이 담겨있는 소설 ’데미안’의 인기는 시들지 않았다.

비교문학 비평가인 랄프 프리드만에 따르면, ’데미안’은 사실상 책의 서문과 마지막 챕터를 제외하고는 ‘전쟁’ 자체를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당대를 잘 반영한 ‘전쟁 소설’과 다름없고, 헤세는 20년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자신 사이에서 갈 곳을 잃은 젊은 청년들의 감정과 좌절을 매우 잘 표현해냈다.

기존의 체제 속에서 강요되는 사회 질서와 억압에 대한 반발, 제도의 실패를 향한 비판과 같은 주제들은 이미 1906년 작품인 ’수레바퀴 아래서’나 1914년 작품 ’로스할데’에서 드러난 것들이지만 ’데미안’은 아버지의 죽음과 아내의 정신질환 악화, 아들의 병, 자신의 신경쇠약으로 인해 헤세가 요양원에 들어가게 된 후 집필된 소설로서 헤세의 전기와 후기를 가르는 작품으로 간주된다.

뮤지컬 '데미안' 공연 사진./사진= (주)모티브히어로 제공
뮤지컬 '데미안' 공연 사진. 무대는 부서진 듯 보이는 창문, 책이 가득 꽂혀 있는 서재, 수레바퀴, 네모난 책상과 여러 개의 의자들을 배치해 '오브제'가 각기 싱클레어가 맞닥뜨리는 상황에 따라 "장애물이 되기도 하고 지지대가  되기도 하면서" 싱클레어의 심리적, 정신적 측면을 표현하는 데 활용된다. 싱클레어(정인지), 데미안 외(김바다)./사진= 모티브히어로 제공

헤세는 분석심리학의 기초를 세운 칼 구스타프 융의 제자인 ‘요제프 베른하르트 랑’ 박사의 치료를 통해 무의식과 내면의 관계를 탐구하고 자신의 심리적 불안의 원인을 찾는 추구를 계속하게 된다.

“헤세의 삶과 예술이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평가받는 소설 ’데미안’은 랑 박사의 영향으로 인해 기독교의 상징주의, 고대의 신비주의, 아우구스티누스, 프리드리히 니체, 칼 구스타프 융을 아우르는 엄청난 작품이다. 하지만 종교적 상징과 심리학적 원형을 배제하고 살펴본다면 싱클레어라는 소년이 고통스러운 자아 성찰의 과정을 거쳐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라 할 수 있는 ‘알’을 깨고 나와 독립적인 개인으로 성장하는 전형적인 성장소설(Bildungsroman)이다.

빛과 어둠, 선과 악으로 구분되는 세상의 경계를 막연하게 인식하기 시작한 10살 소년 싱클레어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공립학교 학생 프란츠 크로머가 이끄는 무리들과 어울리기 위해 훔치지도 않은 사과를 훔쳤다는 ‘거짓말’을 한다.

또래 집단의 일원이 되기 위해 허풍으로 지어낸 거짓말은 이를 눈치 챈 크로머의 2마르크라는 큰 액수의 돈을 가져오라는 협박에 시달리며 지속적으로 도둑질이며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는 나락으로 이어진다.

‘지옥’과 같은 끔찍한 심적 고통과 영혼의 고통에 시달리던 싱클레어는 어느 날 우연히 마주친 비범한 전학생 ‘막스 데미안’의 도움으로 크로머에게서 벗어나게 된다.

뮤지컬 '데미안' 공연 사진./사진= (주)모티브히어로 제공
뮤지컬 '데미안' 공연 사진. 싱클레어 안에 내재하는 각기 다른 성향들이 서로 부딪치고 대립하면서 투쟁하고 성장하는 듯한 인상을 남기는 뮤지컬은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거울'처럼 서로를 마주한다. 싱클레어(김주연), 데미안 외(유승현)./사진=모티브히어로 제공

소년도 아니고 소녀도 아닌, 어른이기도 하고 아이이기도 한 “자기만의 특별한 개성”을 가진 데미안은 “카인의 표식”에 관한 이상한 질문을 던지고, 남다른 해석을 하며, 놀라운 인식을 보인다. 다른 사고, 새로운 인식에 충격과 흥미를 느낀 싱클레어는 “삶에 대해 인식하고 의심과 비판을 할 때마다 생각의 출발점”으로 카인과 살인, 표식에 관한 주제를 떠올린다.

그를 둘러싼 세상에 대한 인식의 균열은 시작되고, 싱클레어는 허무와 고독, 우울과 절망, 방황 사이를 맴돌며 스스로 ‘알’에서 나오기 위한 고독한 투쟁을 계속해 나간다.

최근 대학로 유니플렉스 2관에서는 독일 문학을 대표하는 헤르만 헤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창작 뮤지컬 ’데미안’의 막이 내렸다.

한 명의 배우가 소설 속 화자이자 주인공인 ‘싱클레어’와 그의 멘토이자 구원자인 ‘데미안’을 모두 맡아 열연한 뮤지컬 ’데미안’은 고정된 배역 없이 6명의 남녀 배우로 구성된 페어가 회차 마다 싱클레어 혹은 데미안을 연기하는 독특한 2인극의 구성을 택했다.

무엇보다 데미안을 맡은 배우가 싱클레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다른 여러 인물들, 크로머, 피스토리우스, 에바 부인 등을 자유자재로 연기하면서 다채롭게 변화하는 방식을 통해 사실상 싱클레어 안에 내재하는 각기 다른 성향들이 서로 부딪치고 대립하면서 투쟁하고 성장하는 듯한 인상을 남겼다.

뮤지컬은 원작 소설의 마지막 부분인 싱클레어가 전쟁터에서 포탄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해 거꾸로 삶을 회상하듯 10살 소년 시절로 되돌아가는 틀을 형성한다.

뮤지컬 '데미안' 공연 사진./사진= (주)모티브히어로 제공
뮤지컬 '데미안' 공연 사진. 원작 소설의 마지막 부분인 싱클레어가 전쟁터에서 포탄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해 거꾸로 삶을 회상하듯 되돌아가는 틀을 형성한다. 결국 뮤지컬의 마지막 부분과 첫부분은 하나로 연결된다. 싱클레어(전성민), 데미안 외(김현진)./사진=모티브히어로 제공

총성이 울리고 군복을 입은 싱클레어가 쓰러지면서 그를 둘러싼 세계가 무너지고 어둠이 짓누르는 가운데 데미안이 등장한다.

싱클레어가 말한다.

“난 너를 알아. 아주 오래 전부터 너는 나를 찾아왔어.”

마치 거울 속의 환영이 말을 걸듯 데미안이 말한다.

“너는 나를 알아. 아주 오래 전에 난 너를 찾아왔어.”

싱클레어는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 앞에 환영처럼 보이는 데미안이 누구인지, 자신이 과연 살아있기는 한 것인지 묻는다.

아직 살아있다고 말하는 데미안을 향해 싱클레어는 “살아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묻는다.

데미안이 답한다.

“이야기가 있어. 난 너의 이야기를 들으러 왔어.”

싱클레어가 말한다.

난 무서워. 죽는 순간 이야기도 함께 사라질까봐. 널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그 때도 넌 어둠 속에 있었어!”

무대는 이제 10살 소년 싱클레어의 삶을 구성하고 있던 밝음과 어둠, 깨끗함과 더러움, 아름다움과 추함, 선함과 악함으로 구분되던 이분법적인 세상을 구현한다.

뮤지컬 ’데미안’은 헤세의 원작에 충실하기 보다는 작가 오세혁의 소설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에 기반해 새로운 세상을 펼쳐보인다.

헤세의 원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서사인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 골고다 언덕에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두 도둑의 이야기, 허용된 세계만을 용인하는 반쪽자리 신에 대한 인식, 선과 악을 융합하는 그노시스파의 신 아브락사스(Abraxas)는 모두 담겨있지만 이야기를 바라보는 시선과 싱클레어가 만나게 되는 인물들과의 관계에 대한 해석은 작가 오세혁의 관점을 담고 있다.

무엇보다 ‘이야기’에 대한 언급은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 부분이다. 데미안이 ‘말’로는 담아낼 수 없는 깊은 내면의 생각과 통찰에 관한 언급을 하면서 설명이 길어질수록 “본모습에서 멀어지는 것”에 대해 경계를 하는 장면은 있지만 “이야기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거나 “죽는 순간 이야기도 사라질까봐” 두려워하는 싱클레어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뮤지컬-데미안_비주얼컷_정인지
뮤지컬 '데미안' 비주얼컷 

또한, 싱클레어가 ‘무리’에 섞여 자신을 상실한 채 그들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과 고독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며 깊이 침잠하는 것 사이에 갈등을 겪으며 안내자이자 소통자로서 ‘데미안’을 그리워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누군가와 이어지기” 위해 끊임없이 “너와 이어질 수만 있다면 난 무엇이든 할 수 있어”라는 말을 반복하는 인물은 아니다.

뮤지컬 ’데미안’은 모든 사람이 “세상의 조각으로서 하나로 이어져 있음”과 ‘연대’를 강조하기 위해 스스로 성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기존의 가치와 투쟁하고 부딪치는 혼자만의 고뇌와 고독을 ‘다른 사람들과 이어지려는 노력’으로 대체한 듯 보인다.

또, 데미안의 어머니이자 대지의 여신 가이아(Gaia)를 상징하는 에바 부인과 싱클레어의 관계는 상당부분 약화되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지나치게 의지하는 ‘크나우어’를 통해 혼자 서야 할 필요성을 인지하게 되는 서사와 아브락사스에 관한 지식을 전수해 준 피스토리우스에게 ‘진실’의 화살을 날림으로써 그가 ‘자신만의 운명’이라고 설정한 것이 사실상 고독한 채 있을 수 없어 사람들 곁에 있기 위한 타협적 선택이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서사는 삭제되거나 축약되었다.

뮤지컬 ’데미안’이 주목한 것은 오히려 ‘홀로 남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인 듯 보인다. 프로그램북 인사말에서 오세혁은 “죽음이 미치도록 무서웠던 시절”을 언급하면서 언젠가 반드시 사랑하는 존재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워 울음을 터뜨렸고, 삶의 마지막 순간을 홀로 맞이해야 한다는 사명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혼자가 되는 순간을 필사적으로 줄이려고 몸부림쳤다”고 피력했다.

그는 삶이 다하고 난 뒤 “우리의 삶을 정리해 주는 것”은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고, “그들이 기억하는 마지막 얼굴이 우리의 마지막 표정”이 될 것임을 강조하는데, 이는 ‘이야기’를 완성하는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 아니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나의 삶을 스쳐 지나간 ‘모든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뮤지컬 '데미안' 공연 사진./사진= (주)모티브히어로 제공
뮤지컬 '데미안' 공연 사진. 프로그램북에 따르면 '데미안'의 무대는 싱클레어의 방황과 성장을 품을 수 있는 관념적인 공간이다. 무대는 그림자를 적절히 활용하는데, 조명은 실체가 없는 허상이나 어둠 속을 가르는 희망의 빛을 상징한다. 싱클레어(전성민), 데미안 외(김현진)./사진=모티브히어로 제공

연출을 맡은 이대웅 역시 “각자의 ‘나’가 세상의 모든 진리, 사랑, 믿음, 용기, 의지, 자유, 용서, 존중, 희망을 연결하는 하나의 조각임을 잊지 말 것”을 강조한다.

이 때문에 뮤지컬 ’데미안’에서는 힘겹게 하나의 세계를 깨고 알에서 태어난 새가 또 다른 세상으로 날아가 새로운 문을 열고 또 다시 끊임없는 고독의 투쟁을 이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신”에게로 날아가 춤을 추고 “신비의 노래”를 한다. “새로운 신”은 타인이고, 타인은 곧 내가 되며, 나에게는 그대가, 그대에게는 내가 삶의 의미이자 이야기, 안내자이자 구원자인 ‘데미안’이 되는 것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분법적인 종교의 잣대가 지배적이었던 세계대전 이전의 서구 유럽의 시대적 분위기를 그대로 차용한 탓에 싱클레어의 개인적인 성장보다는 신학 논쟁에 집중한 듯한 느낌을 전달한다는 것이다.

천사와 악마, 선과 악, 순결과 욕망으로 구분되던 획일적이고 이분법적인 세상은 이제 모든 것이 지나치게 빨리 변하는 탓에 오히려 고정적인 가치를 찾기 힘들고, 정체된 사고 때문이 아니라 엄청난 변화의 속도에 대한 부적응으로 인해 두 발을 딛고 서서 제대로 통찰할 수 없는 “유동하는 현대(liquid modernity)”로 변화해 있다.  바우만의 말처럼, 현재 우리는 세상이라는 ‘집’이 변화하는 속도에 맞춰 끊임없이 대처할 수 있는 “유연한(flexible)” 능력을 갖춘 존재가 되지 못할 경우,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는 곳에 살고 있다.

어떻게 보면 헤세가 갑갑함을 느끼고 떨쳐버리고자 했으며, 정답이라고 사회가 규정해 놓은 것에 반항하고 도발적인 질문을 반복해서 던지며 갈구했던 세상은 현재에 이미 도래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갑갑함을 느끼고 불안에 떨며, 세상이 우리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우리가 세상의 온전히 한 부분이 될 수 없다고 느낀다. 단 몇 초 만에 지구 반대편의 세상과 연결될 수 있고, 언제나 각종 기기를 통해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는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 혼자임을 느끼고 자아를 찾지 못해 방황한다.

뮤지컬-데미안_비주얼컷_유승현
뮤지컬 '데미안' 비주얼컷 

변화하는 세상을 바라보는 일만으로도 벅차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잃어버린 것인지, 무엇을 향해 가야 하는지, 무엇을 박탈당한 것인지도 모른 채 스스로 생각을 정지시키고 세상이 흔들리는 대로 무리를 지어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 시대에 ’데미안’이 여전히 그 빛을 발하는 것은 싱클레어의 삶 속에 위기의 순간마다 나타나 자신을 가둔 세상을 깨고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는 질문을 던지는 “카인의 표식을 가진” 친구 데미안이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이고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헤세는 1930년에 쓴 한 편지에서 카인을 프로메테우스와 동일시했다. 그는 카인은 지식인과 자유를 대변하며, 대담한 질문을 거침없이 던지는 정신으로 인해 벌을 받았다고 말했다. 신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 준 도전 정신, 간이 쪼아먹히는 영원한 고통의 형벌 속에서도 대항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프로메테우스의 의지는 니체의 “가치전도(transvaluation of values)”의 개념과 연결되며 소크라테스에게 지혜의 목소리를 전달해주던 “다이몬(daemon)”, 즉 ‘데미안(Demian)’에 이른다.

바우만은 모든 예술작품은 자신만의 상상력을 새기기 위해 ‘저항’에 맞서 싸운 흔적을 품고 있다고 말한다. 패배와 강요된 타협의 흔적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깃발을 내걸고 “자신의 마음이 항상 자기 마음 자체를 지켜보는 사람”이 되고자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정신을 되살리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이 시대에 ’데미안’이 우리의 마음에 닿는 방식이 아닐까?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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