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연극 '리어외전', ‘효(孝)’라는 키워드로 걸판지게 풀어낸 고선웅 표 오락비극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연극 '리어외전', ‘효(孝)’라는 키워드로 걸판지게 풀어낸 고선웅 표 오락비극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20.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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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한국적 효(孝)라는 키워드로 풀어내
- 고선웅 식 위트와 재해석으로 대중성 살려
연극 '리어외전' 공연장면/사진=극단 마방진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오락 비극이란 용어가 생소하지만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 중(4월 11~19일)인 '리어외전'은 고선웅 연출 특유의 비틀기와 키치적 재미, 흥건한 놀이판을 펼치면서도 하고 싶은 말 다하는 이색 장르의 통속극임은 분명하다.

"세상은 무대, 인간은 배우! 자 놀다 가자"란 코러스장(長)의 대사로 시작하는 '리어외전'은 외전(外傳)이 말해주듯 '리어왕'과 줄기를 같이하면서도 고전을 비튼 고선웅 식 위트와 재해석으로 대중성을 살려냈다.

4백 년 셰익스피어가 만든 캐릭터와 스토리를 오늘 한국 사회, 조용필의 '허공'이 베토벤의 합창교향곡과 교차되고, 부와 권력의 왕가와 닭장 같은 빈민가가 대비되는, 그래서 영화 '기생충' 같은 계층 간의 갈등에 세대 간 변혁의 가치관까지 패러디한 무대는 통속적이지만 마스크 밖으로 웃을 수만은 없는 송곳 같은 비수가 꽂히고, ‘비극’이 주는 회한의 눈물도 나게 하는 야릇한 매력을 안긴다.

그리고 라스트에 고선웅의 한 방이 크게 터진다. 자신에게 불효하고, 권력 잃고 늙었다고 개무시한 두 딸과 사위들을 기관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의 목에도 방아쇠를 당기는 ‘현대판 리어의 복수극’이 관객들의 숨통을 화끈하게 터주는 것이다. 이윽고 배우들이 난장을 펼친, 인생축도 같은 무대는 공중에 떠오르고 연극도 막을 내린다.

연극 '리어외전' 공연장면/사진=극단 마방진

왜 다시 셰익스피어인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고립 상태나 다름없는 요즘, 대학로예술극장에는 셰익스피어 원작을 비튼 고선웅의 '리어외전'과 '햄릿'을 충청도 버전으로 번안한 이철희 작 연출의 '조치원 해문이'가 대소극장에서 나란히 공연되는 현상이 궁금했다.

그 의문의 일부가 '리어외전' 프로그램에 실린 영국 가디언 지(紙)의 토픽 "고립된 셰익스피어, '리어왕'은 전염병을 피하기 위한 격리 속에서 탄생한 것일까?"를 읽어보고 풀렸다. 17세기 영국에도 흑사병이 창궐해 인구의 4분의 1이 죽어나가고 극장이 폐쇄되는 등 격리 상태에서 셰익스피어가 '리어왕'을 썼을 것이란 주장이었다.

아무튼 '리어외전'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격리의 피로가 극에 달한 관객들에게 말의 성찬과 연극 특유의 놀이형식에, 무대미술과 영상과 음악과 조명이 빚어내는 현장 아우라로 청량음료처럼 톡 쏘는 재미와 통쾌한 클라이맥스를 선사했다. 연출가 고선웅만의 번뜩이는 기지와 패러독스, 그와 함께 하는 극단 마방진 배우들의 숙련도와 앙상블이 아니면 접하기 힘든 개성 만점의 연극이 아닐 수 없다.

고선웅의 미덕 중 하나는 배우들을 무대에서 마음껏 놀게 하면서 개인기를 살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리어외전'에는 22명의 배우들이 등장하는데 연령과 경력의 편차가 큰 데도 일체가 되어 쉴 틈 없이 극적 장면을 만들어 나갔다. 2012년 LG아트센터 공연을 보지 못했는데 8명의 코러스를 등장시켜 몹신과 멀티 연기를 펼치게 한 연출 의도가 특히 돋보였다.

커튼콜 무대에 오른 배우들/사진=정중헌
연극 '리어외전' 커튼콜 무대에 오른 배우들/사진=정중헌

고선웅 연출의 연극을 많이 접하지는 못했지만 명동예술극장에서 히트한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명불허전이었고, 이 작품의 주역 하성광의 빛나는 연기는 인상적이었다. '리어외전'도 리어 역 하성광의 열연이 없었다면 폭발적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했을 것이다.

"리어카를 끄는 리어" 하성광은 원전의 리어 캐릭터와 줄거리를 살리면서도 각색·연출인 고선웅이 하고자 하는 현 사회에 대한 풍자와 비판, 시대적 메시지를 유연하면서도 엣지 있는 연기로 표출해냈다. 다만 필자만의 아쉬움인지 모르겠으나, 고선웅과 호흡을 맞춘 '조씨고아'의 어투가 계속 리어의 캐릭터에 오버랩 되어 몰입이 덜 되었다.

원전의 주요 배역을 맡은 배우들은 고선웅 버전의 '리어외전'에서 각각의 성격을 잘 구현해 냈다. 특히 클로스터 역 유병훈의 호쾌한 발성과 에너지 넘치는 연기가 눈길을 끌었다.

큰딸 거너릴 역 강지원, 둘째딸 리이건 역 양서빈, 셋째딸 코딜리어 역 이지현의 각기 다른 개성 연기가 오락비극의 당위성과 대중적 재미를 잘 살려냈다. 남자 배우들의 연기 호흡도 잘 맞았는데 에드거 역 조영규의 선함과 에드먼드 역 견민성의 악함, 사위 올버니 역 원경식의 온유와 콘월 역 이정훈의 욕망이 콘트라스트 되어 극을 활력 있게 이끌었다.

커튼콜 무대에 오른 배우들/사진=정중헌
연극 '리어외전' 커튼콜 무대에 오른 배우들/사진=정중헌

개인적으로는 '겨울은 춥고 봄은 멀다'에서 강한 인상을 안겨 준 왕고 역 안상완, 그림자처럼 리어를 따라붙어 안정된 연기를 펼친 켄트 역 서제광, 코러스장 역 임영준의 다이내믹한 멀티 연기, 조금 더 약삭 빠랐으면 한 오스왈드 역 김형노의 연기가 좋았다.

필자는 마방진 연기진들의 파워풀한 앙상블과 집단 연기에 박수를 보내지만, 이번 무대에서는 대사가 명확히 전달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아쉬웠다. 특히 목청을 높이거나 마이크를 쓴 대사들이 또렷하게 들리지 않아 답답함이 없지 않았다.

고선웅 연출의 '리어외전'은 최근 선거에서 드러났듯이 변화된 한국의 사회상과 가치관의 혼란을 거울처럼 투영시겼다는 점을 평가할 만하다.

특히 고령화 사회에서 늙은 세대의 소외감, 자식들로부터 효도는커녕 애물단지 취급당하는 분노를 세대 간 빈부 간 대립으로 표출해 냈다. 따라서 보는 관점도 느낌도 세대별로 다르지 않았을까. 필자 같은 노년 관객은 총으로 존속을 날려버리는 라스트가 윤리적으로는 와닿지 않으면서도 통쾌했지만, 고령화로 인한 부담을 떠안아야 하는 젊은 관객들은 "와이 낫?" 하며 납득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백혜린의 무대와 소품디자인, 김태규의 작곡과 음향, 안미경의 안무, 신성환의 영상디자인, 류백희의 조명, 최인숙의 의상... 여러 스태프들과 어우러져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한국적 효(孝)라는 키워드로 풀어낸 고선웅의 기발한 발상과 키치적이면서 팝아트적인 표현 형식은 코로나로 경직된 우리 사회에 신선한 충격과 함께 막힌 숨통을 틔워주었다.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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