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편견에 맞서는 모든 여성의 삶...뮤지컬 '마리 퀴리'
[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편견에 맞서는 모든 여성의 삶...뮤지컬 '마리 퀴리'
  • 주하영
  • 승인 2020.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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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형 연출, 2020년 뮤지컬 '마리 퀴리'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사진=라이브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예측할 수 없고 알려지지 않은 무언가"에 온 맘이 들끓는 '마리'(김소향)는 "매혹적이고 흥미진진한 진리"를 탐구하고픈 욕망으로 늘 불타오른다. 궁금한 것을 참을 수 없는 마리는 실험을 할 때 가장 행복을 느낀다./사진=라이브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한 사람의 삶은 비춰지는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다.

위대한 사람의 삶일수록 큰 관심이 따르게 마련이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실제와 상관없이 그들이 보고 싶은 방식과 기대를 반영하며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시대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고, 다른 의미로 해석되며, 새로운 측면이 부각되는 위대한 사람들의 삶은 어쩌면 매번 되풀이되며 각색되고 연출되는 희곡 텍스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영국의 극작가 에드워드 본드의 말처럼 “현실에 바탕을 둔 허구”를 통해 “허구를 바탕으로 한 현실”을 얻는 것이 연극이라면, 연극에서 다루어지는 위대한 사람들의 삶은 ‘허구’로 구성된 것 속에 자리한 사실을 바탕으로 ‘현재’를 드러내고, 관객들이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의지’를 품도록 만들어야 한다.

허구가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게 되는 ‘혁명’이란 예술이 단순히 현실을 비추는 ‘거울’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의 손에 현실을 고칠 수 있는 ‘스패너(spanner)’를 쥐어주고 실제로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사진=라이브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마리'(정인지)는 4년여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드디어 스스로 빛을 발하는 물질 '라듐(radium)'을 발견한다./사진=라이브

2019년 공연예술 창작산실 ‘올해의 레퍼토리’ 선정작으로 초연되었던 뮤지컬 ‘마리 퀴리’의 재공연 무대가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 올랐다.

2019년 K-뮤지컬 로드쇼 해외 쇼케이스(상하이)의 선정작으로도 뽑히며 국내외에 창작 뮤지컬의 저력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은 뮤지컬 ‘마리 퀴리’는 역사적 사실에 허구를 가미한 ‘팩션(faction)’ 작품이다.

폴로늄과 라듐의 발견으로 역사상 최초로 노벨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과학자이자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인 ‘마리 스클로도프스카 퀴리’의 삶과 1920년부터 위해성 논란이 불거지며 수많은 직공들의 목숨을 앗아갔던 ‘라듐 공장 사건’을 결합해 만든 뮤지컬 ‘마리 퀴리’는 사실상 연대가 맞지 않는 사실들을 허구의 공간 속에 하나로 연결한다.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사진=라이브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마리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안느'(김히어라)에게 새로운 원소 '폴로늄'의 발견에 대해 설명하는 '피에르'(임별)와 '마리'(정인지)./사진=라이브

1898년 마리 퀴리에 의해 처음 발견된 라듐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 불렸고, 20세기 초 인체 조직을 파괴할 수 있는 라듐의 능력이 악성 종양의 제거에 효과가 있음이 알려지자 “일종의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암 뿐만 아니라 모든 질병의 치료제 및 보조제로 라듐을 사용했고, 라듐 스파가 운영되기 시작했으며, 건강음료로서 라듐 물을 하루에 5~7잔씩 마실 것을 권장했다.

라듐의 위해성이 인정되고 미국 식약청에서 라듐 의약품을 불법으로 발표한 것은 1931년의 일이었고, 라듐 가루가 들어간 야광 페인트 ‘언다크(Undark)’를 시계 숫자판에 칠하던 도장공들이 라듐 피해에 관한 소송 재판을 시작한 것은 1928년 1월이었다.

소송은 마리 퀴리가 방사능으로 인한 골수암, 백혈병, 재생불량성 빈혈로 세상을 떠난 1934년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며, 1939년 10월 마침내 승소할 때까지 10년 이상의 세월을 필요로 했다.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사진=라이브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나는 라듐 페인트를 시계판에 칠하는 일을 하는 언다크의 '도장공들'./사진=라이브

우라늄 폐광석인 피치블랜드(pitchblende) 8톤을 부수고 녹이는 작업을 무한히 반복해야 겨우 0.1그램을 얻을 수 있었던 라듐은 발견자인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가 인류 공헌을 위해 특허권을 주장하지 않고 무상으로 제공했지만 추출 자체가 힘들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비싼 물질”일 수밖에 없었다.

1914년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라듐의 수요는 급증하기 시작했고,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계 전쟁은 중립을 선언했던 미국의 군수산업에 호황을 불러왔다. 1917년 4월 마침내 미국이 참전을 선언할 당시 라듐의 가격은 1그램에 12만 달러, 현재 가치로 약 220만 달러에 달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항공 계기판이나 군인들의 시계판을 라듐 가루가 들어간 야광 페인트로 칠하는 일은 주로 이민자들이나 어린 소녀들로 구성된 도장공들에 의해 작업되었다.

원래 나무 손잡이가 달린 낙타 털 붓으로 칠하도록 되어 있는 시계 숫자판들은 도장공들이 작업의 편의를 위해 개발한 ‘립 포인팅’이라는 기술이 추가되었고, 붓을 가느다랗고 뾰족하게 만들기 위해 입에 넣었다가 페인트를 반복적으로 칠하는 방식은 도장공들을 라듐 중독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사진=라이브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이민자로서 낯선 땅 프랑스에서 자신의 꿈을 향해 전진하는 마리를 "폴란드의 별"이라 부르며 응원하는 라듐 시계 공장의 직공들./사진=라이브

2016년 출간된 케이트 모어의 ‘라듐 걸스(The Radium Girls)’에 따르면, 당시 미국에서 도장 일을 하던 소녀들은 이미 10년 전부터 시계 숫자판 공장이 성업했던 유럽에서는 더 이상 립 포인팅 기술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모어는 당시 유럽에서는 붓이 아니라 속이 꽉 찬 유리 막대나, 끝에 솜뭉치가 달린 작은 막대, 혹은 날카로운 나무 바늘이나 금속 바늘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라듐이 묻은 붓을 입에 지속적으로 넣는 작업을 통해 위험 물질을 삼킬 일이 없었음을 지적한다.

하지만 뮤지컬 ‘마리 퀴리’는 라듐 기금 모금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주로 프랑스에 머물렀던 마리 퀴리와 라듐 중독으로 인해 턱뼈가 무너져 내리고 안면이 붕괴되어 죽음에 이르렀던 미국 시계 공장 직공들의 이야기를 한 공간, 같은 시기에 발생한 것으로 설정한다.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사진=라이브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립 포인팅' 기술로 인해 지속적으로 방사능에 노출된 탓에 이가 썩고 턱뼈가 무너질 뿐 아니라 허리와 엉덩이 뼈가 부서져 죽음에 이른 도장공들은 푸른 조명 속 '유령'처럼 표현된다./사진=라이브

마리 퀴리가 방사선 치료를 사용하는 “라듐 요법(radium therapy)”을 위해 라듐 연구소를 설립한 것은 1916년의 일이었다. 이는 그녀가 1차 세계 대전 당시 부상당한 군인들이 제대로 된 진단 없이 팔 다리를 절단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X선 촬영을 할 수 있는 장비를 공급하는 “방사선 차량”을 직접 운전하며 전장을 누볐던 일과 관련이 있었다.

2011년 마리 퀴리의 전기를 쓴 수잔 퀸에 따르면, 전쟁터에서 직접 경험한 X선 장비의 활약은 마리 퀴리로 하여금 과학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인류에게 혜택을 줄 수 있음을 인식하도록 만들었고, 보다 적극적인 과학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도록 만들었다. 그녀는 라듐 연구소가 라듐을 추출하는 일 외에도 라듐 요법을 통해 군인들의 치료와 건강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기를 원했다.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사진=라이브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라듐의 유해성에 대한 위험을 인지하고도 악성종양 제거에 관한 연구를 지속하려는 '마리'(정인지)에게 '피에르'(임별)는 임상연구를 멈출 것을 권한다. 피에르는 영국 독성연구회에서 한 발제자가 보고한 라듐 시계공장 도장공들에 관한 보고서를 마리에게 건넨다./사진=라이브

1920년 프랑스에는 퀴리 연구소가 가진 라듐 1그램이 전부였지만 미국에는 50그램에 달하는 라듐이 있었다. 당시 인터뷰를 위해 파리를 방문했던 미국 여성잡지 ‘더 딜리니에이터(The Delineator)’의 편집장 마리 멜로니는 마리 퀴리에게 라듐 1그램을 구입할 수 있는 십만 달러의 모금을 약속했다. 미국으로 되돌아온 멜로니는 기금을 보다 빠르고 효과적으로 모으기 위해 암 치료제로서의 라듐의 성능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1921년 그녀는 “마리 퀴리가 암을 완전히 제거하는 수준까지 과학을 발전시킬 것”이라는 믿음을 온 미국에 설파했다. 하지만 암 치료 연구에 관한 마리 퀴리의 입장은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것”이었고, 전쟁 전까지 퀴리 연구소의 연구는 라듐 추출과 임상의들에게 라듐 사용의 국제적인 기준이 될 측정값을 제공하는 것에 일관되어 있었다.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사진=라이브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주기율표가 바닥에 그려진 가운데 '마리'(정인지)는 "새로운 물질, 아직 발견되지 않은 물질의 이름"을 찾아 어두운 공간 속을 '빛'으로 채울 것을 다짐한다./사진=라이브

물론 마리 퀴리가 동료들에 비해 실용주의적 과학의 목표와 의학적 적용에 관해 열망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폴란드 이민자인 그녀의 가족 배경에 스며들어 있는 “인류 발전을 위한 지식의 공헌”이라는 가치에 부합한 사상 때문이었고, 전쟁터에서의 경험 때문이었다.

멜로니는 암에 걸려 죽어가는 가난한 여인이 “자신이 겪어온 고통을 다른 사람들이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장례식 비용으로 저축해 둔 돈을 라듐 펀드에 기부했다는 일화들을 기사에 실으며 사람들을 독려했다.

하지만 프랑스에 있는 마리 퀴리는 이러한 일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라듐 요법은 의사이자 생물학자인 클로디어스 레고드 박사가 주도하는 라듐 연구소의 방사선 실험실에서 연구되고 있었고, 백내장으로 인해 눈이 흐려진 53세의 마리 퀴리는 연구보다는 보다 많은 라듐을 확보하고 전쟁으로 인해 소진된 라듐 연구소의 기금을 마련하는 일에 더욱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뮤지컬 ‘마리 퀴리‘는 이러한 전기적 사실 보다는 온갖 편견과 장애를 딛고 과학의 선구자로 우뚝 서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붕괴시켜 빛을 발하는” 라듐과 같은 여인 ‘마리’를 강조하려는 목적에서 여러 가지 설정을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사진=라이브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러시아 치하에 있는 고국 폴란드에서 가정교사 일을 하며 오랜 동안 독학의 길을 걸어온 '마리'(정인지)는 마침내 프랑스 파리 소르본 대학으로 향하는 기차에 오른다. 트랙터 주인이 되는 꿈을 간직한 채 프랑스의 유리공장에 취직하기 위해 길을 떠난 폴란드 여인 '안느'(김히어라)는 새로운 물질을 발명해 주기율표를 채우겠다는 꿈을 꾸는 마리를 바라보면서 자신 역시 꿈을 성취할 것을 다짐한다./사진=라이브

2020년 새롭게 변화된 뮤지컬 ‘마리 퀴리‘는 2019년 초연작의 피에르와 결혼한 마리가 새로운 물질을 찾는 연구에 매진하던 시점이 아니라 러시아 치하 폴란드에서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던 대학 교육을 받기 위해 마리가 프랑스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던 1891년에서부터 시작한다.

뮤지컬 ‘마리 퀴리‘는 과학자의 꿈을 품었던 마리가 오랜 가정교사 생활과 독학의 시간을 뒤로 하고 소르본 대학으로 가는 도중 같은 폴란드에서 유리 공장에 취직하기 위해 기차에 탑승한 ‘안느 코발스키’와 만나게 된다는 새로운 상상을 더한다. 마리는 처음부터 새로운 물질을 찾아 주기율표의 어두운 빈자리에 “밝게 빛나는 이름”을 채우고 싶은 꿈을 간직하고 있다.

안느는 그런 마리의 모습에 고무되어 자신 역시 “농장주의 세 번째 부인”이 되는 것이 최고의 행운이라는 인습적인 생각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트랙터를 사 독립적인 여성이 될 것임을 피력한다.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사진=라이브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여성에게 대학 교육이 허락되지 않고 사회 속 여성의 위치에 대한 편향된 관점이 적용되던 20세기 초 여성 과학자로서 입지를 굳혀 나가기 위해 분투하는 '마리'(정인지)의 내면을 잠식하는 억압의 그림자는 중절모에 신사복을 입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남성들의 그림자에 의해 동작으로 표현된다./사진=라이브

“폴란드인이든, 이방인이든, 여자이든” 그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자신이 꿈꾸는 바를 이루기 위해 전진하는 것, 뮤지컬 ‘마리 퀴리’가 허구적 설정을 통해 추구하는 바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를 통과하는 기간 내내 지속된 여성들의 투쟁과 노력, 연대 그리고 성취이다.

피에르와 결혼한 마리가 폴로늄을 발견할 즈음 안느는 유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한 유독 가스로 폐가 망가진 동료를 위해 투쟁하다 공장을 그만두게 된다. 또, 마리가 45개월의 기나긴 노력 끝에 마침내 라듐을 발견하게 되자 안느는 라듐 페인트를 시계판에 칠하는 언다크 공장에 취직하게 된다.

이미 공장에는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한 ‘벨라’라는 직공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언다크 사장 루벤은 벨라의 병원비와 월급, 퇴원 후 일자리 복귀까지 보장하겠다고 말하며 자신의 직공들을 “라듐 엔젤스”라고 부르지만 사실상 부검 결과를 ‘매독’으로 조작하고 라듐의 위해성을 알리려는 안느의 편지를 몰래 빼돌릴 만큼 부도덕하다.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사진=라이브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악성 종양이 시신경을 눌러 앞이 보이지 않게 된 임상실험 대상자의 실패를 암 치료 연구 결과에 포함시킬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논쟁하는 언다크 사장 '루벤'(김찬호(오른쪽))과 '그레이스 병원 의사'(장민수), '피에르'(김지휘(왼쪽))./사진=라이브

한편, 마리는 안느의 상황에 무지한 채 피부질환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는 라듐에 관한 연구를 지속해 나간다. 인간에게 불을 선물한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존재를 찾아 “끝까지 가보고 싶다”는 욕망을 품은 루벤은 마리에게 라듐의 암세포 파괴에 관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지원할 것을 약속한다.

하지만 라듐요법의 임상실험 중간발표 후 마리는 피에르로부터 라듐의 위해성에 관한 자료를 받아 보게 되고, 루벤에게 자신이 해결책을 찾을 때까지 일단 공장을 멈추고 모든 직공들을 쉬게 할 것을 주장하지만 루벤은 그녀를 기만한다.

자신이 투자한 비용을 회수할 수 없음을 염려한 루벤은 벨라의 부검 결과에 의심을 표명하는 안느에게 “사람을 살리는 라듐 연구”를 지속해나가는 친구 마리를 생각해서 경솔함을 자제할 것을 요청하고, 마리에게는 시간을 벌어주겠다고 하면서 오히려 공장을 24시간 운영하고 직공들이 밖에 나갈 수 없도록 감시하는 체제를 유지한다.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사진=라이브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시계 공장 도장공들의 부검 결과 사인을 '매독'으로 은폐하고 라듐의 위해성을 마리에게 알리려는 안느의 편지를 몰래 감추는 '루벤'(양승리)./사진=라이브

도장공들을 진료한 의사를 찾아 떠난 피에르와 임상실험에 전념하기 위해 그레이스 병원에 머무는 마리에게 안느는 계속해서 직공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을 설명하는 편지를 쓰지만 텅 빈 집으로 배달된 편지는 루벤의 손에 들어갈 뿐이다.

2020년 뮤지컬 ‘마리 퀴리’는 “위해성과 유익성” 두 가지 모두를 포기하지 않고 밝혀내겠다는 마리의 집념과 욕망을 언제나 소수자로서 배제되고 편견에 제지당해야 했던 여성 과학자가 다시는 주어지지 않을 기회 앞에서 물러설 수 없음을 느끼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한다.

그녀는 외친다.

“폴란드 인이니까 나중에 다시, 학교도 나중에 다시, 정확한 데이터가 있는데도 여자니까 나중에 다시, ... 나중에 다시 할 수 있는 걸 지금은 왜 못해? 나중에는 기회가 없을 걸 알면서 하는 말이잖아!”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사진=라이브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방사능 피폭으로 인해 죽음에 이른 '벨라'를 추모하는 도장공들은 그녀의 부검 결과 발표가 늦어지는 이유가 '은폐'를 위한 것임을 알지 못한다./사진=라이브

물론 그녀의 이러한 대사는 이민자이자 여성이라는 피해의식에 다소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게 사실이지만 곧이어 혼자 남겨진 그녀는 “제 몸에 상처를 내어 폭발하는 독하고 모난 나”라고 라듐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죄책감과 갈등에 시달린다.

결국 안느는 라듐으로 빛나는 작업복 차림으로 다리 위에 올라 자신이 죽고 나면 “반드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신을 부검”해줄 것을 외치고 뛰어내리려 한다.

마리는 그녀를 만류하며 다급하게 계단을 오른다.

“왜 미리 라듐의 위해성을 경고”하지 않았는지 비난하는 안느를 향해 마리는 “연구를 통해 모두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서 “라듐의 위해성이 밝혀지면 세상에서 버림받고 자신의 존재도 사라지게 될까봐 두려웠다”고 말한다.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사진=라이브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자신이 죽게 되면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부검해줄 것"을 요청하며 다리 위로 올라간 '안느'(김히어라)를 만류하는 '마리'(정인지)는 연구를 통해 "라듐이 인간을 해치지 않는 방법을 찾을 것"을 약속한다. 2020년 뮤지컬 '마리 퀴리'는 한계와 제약을 넘어서는 꿈을 꾸는 같은 여성을 지지하는 연대의 힘을 강조하고자 허구적 인물 '안느'와 마리의 서사를 강조한다. /사진=라이브

2020년 뮤지컬 ‘마리 퀴리’가 집중하는 바는 스스로 빛을 발하며 어둠을 밝히는 존재인 ‘라듐’이 곧 마리임을 드러내는 일이다.

자연 속에 존재하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던 물질, 추출이 힘들지만 엄청난 에너지와 능력을 갖고 있는 원소, 인간에게 분명 유익함을 주지만 동시에 목숨을 빼앗을 만큼 치명적인 발견, 인류에게 존재하는 선과 악의 양면성과 함께 라듐은 곧 인간 ‘마리’를 상징하게 된다.

이 작품에서는 흔들리며 방황하는 마리를 붙들어 줄 “길잡이”로 ‘안느’를 내세운다. 안느는 사람들이 마리를 존경하는 이유는 라듐이라는 발견물질과 상관없이 그녀가 걸어온 힘든 여정에 대한 존경과 감탄에 기인함을 설명한다.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사진=라이브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안느'에게 편지를 받은 '마리'(리사)는 자신의 삶과 존재에 대한 '위안'을 얻는다./사진=라이브

이제 “라듐이 인간을 해치지 않는 방법을 꼭 찾겠다”는 마리의 굳은 약속은 이후 그녀의 삶을 지배한다. 마차 사고로 죽은 피에르의 시신은 라듐의 체내 축적을 밝히기 위해 부검되고, 마리는 방사능 피폭을 막을 수 있도록 측정단위를 세분화하며 안느와의 약속을 지키는 일에 자신을 헌신한다.

사실 2020년 뮤지컬 ‘마리 퀴리’는 초연과는 전혀 다른 작품처럼 느껴진다.

악역이었던 루벤에게 실린 무게감은 완화되었고, ‘정글북’의 하티 할아버지의 서사가 사라졌으며, 피에르의 역할이 축소되었고, 안느의 법정 투쟁을 위한 노력이 생략되었다. 대신에 마리가 죽기 직전 “스스로를 벌주듯 살아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안느에게 했던 약속을 지켰다고 말할 수 있는지, 혹시 실패한 삶은 아니었는지를 회상하는 구조를 추가했다.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사진=라이브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마리'(정인지)는 67년에 걸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프랑스로 향하는 기차에서 만난 '안느와의 약속을 제대로 지켰는지', 혹시나 실패한 삶을 산 것은 아닌지 회상한다./사진=라이브

엄마에게 “여전히 인류가 악보다는 선을 위해 기술을 쓸 것이라고 믿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마리의 큰 딸 이렌(Irène)의 모습은 실제 인물을 대변하기 보다는 후대 사람들의 의문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1차 세계대전 당시 17세의 나이로 엄마와 함께 전쟁터에서 X선 촬영사로 활약했고, 엄마와 같이 굳은 믿음을 가진 과학자로 살아온 ‘이렌’과는 차이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렌은 겸손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자신의 삶을 축소하려는 듯 보이는 엄마 ‘마리’의 태도에 불만을 표시한다. 하지만 이렌은 엄마와의 긴 이야기 끝에 그녀를 이해하고 유언을 받아들인다.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사진=라이브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장면.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음을 인지한 '마리'(정인지)는 큰 딸 '이렌'(이예지)에게 자신의 삶에 숨겨진 이야기를 전달하며 짧고 간략한 유언을 남긴다./사진=라이브

2020년 뮤지컬 ‘마리 퀴리’는 위대한 과학자 한 개인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꿈을 향한 욕망과 갈등 앞에서 편견과 역경, 장애에 무너지지 않고 변함없이 나아가려는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겪게 되는 어려움, 비난, 피해의식, 흔들림을 드러내 보인다.

뮤지컬 ‘마리 퀴리’는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성별의 제약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어둠 속에 자신만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답이 없는 곳에서 답을 찾기 위해 스스로를 붕괴시키고 끝없이 폭발하며 빛을 발해야 했던 여성들의 삶이 결국 현재를 가능케 했음을 강조한다.

“새로운 존재, 새로운 물질, 새로운 원소”, 그것은 답이 보이지 않는 속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암흑에 빛을 더하기 위해 자신을 불태우는 열정, 서로를 지지하는 연대, 그리고 강한 의지와 노력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선물인지도 모른다. 3월 29일까지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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