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365] 김두호가 만난 CF의 레전드 박경삼 감독
[인터뷰365] 김두호가 만난 CF의 레전드 박경삼 감독
  • 김두호 인터뷰어
  • 승인 2020.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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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호 월남전 영웅 최후 영상 특종 보도
- 평창올림픽, 대전엑스포, 월드컵 기록영화 총감독
- 아버지가 반도가극단 이끈 박구 영화감독
박경삼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 석좌교수는 CF와 영상 연출의 대가다. 인기CF송이었던 “12시에 만나요 브라보콘”의 유행어를 탄생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1970년대 해태, 롯데, 아모레, LG, 삼성, 현대 등 유명 CF를 진두지휘했고, 1993년 대전 엑스포, 2002년 월드컵,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등의 기록영화를 총감독했다. CF 연출 전인 1960년대엔 국방부특파 해병대 월남전 종군 보도병으로 활약하며 투이호아 전투 이인호 소령의 장렬한 최후 영상을 국내외신에 특종 보도하기도 했다. 박 감독은 '자유부인'(속편) 등을 연출한 박구 영화감독과 가극단 배우 출신인 서혜영 여사의 아들이다. /사진=인터뷰365

인터뷰365 김두호 인터뷰어 = 박경삼(1946∼ ) 감독은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 석좌교수가 현재의 직함이지만 1970년대에 최고의 인기를 누린 CF와 기록영상 연출분야의 명감독이다. 해태, 롯데, 아모레, LG, 삼성, 현대 등 대기업의 TV광고 영상이 그의 연출로 1000여 편이 제작됐다. 그가 만들어 히트한 광고카피는 그 시대의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톱스타로 일컫는 인기 연예인들이 그의 CF에 출연하기 위해 줄을 섰다. 1980년대 초에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에는 CF를 포함한 영상제작 기술의 하이퀄리티를 보여준 대형 영상분야를 개척, 주로 정부기관과 지자체의 홍보영상물로 이름을 날렸다. 1993년 대전 엑스포, 2002년 월드컵,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등 국제행사의 공식영화 제작프로젝트에 총감독으로 참여해 방송대상을 비롯한 국내외 각종 상을 받기도 했다.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 석좌교수 겸 영상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경삼 감독.

박 감독은 아버지가 일제 강점기 민족가극단인 반도가극단을 이끌었고 해방 후 영화 <자유부인>(속편) 등을 연출한 박구(1912∼1984)감독이다. 그의 타고난 대물림 재능은 1966년 해병대 월남전 종군 보도병 시절부터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가 찍은 투이호아 전투 이인호 소령의 장렬한 최후 영상이 국내외신에 특종 보도되어 파월전사기록으로 크게 화제를 남겼고 그로 인해 2017년에는 미국정부로부터 종군공로상도 받았다.

참전 후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최근 2020년 2월 7일 해병대신문에서 박 감독을 ‘자랑스런 해병’으로 선정, 발표해 아직도 그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고 후배 해병들의 귀감으로 남아 시선을 받고 있다. 그 몇 달 전인 2019년 12월 11일 월남 참전 55주년 기념식에서는 박 감독 자신이 직접 작사 작곡한 ‘월남전 참전 전우의 노래’를 참전전우회에 헌정, 이날 전쟁기념관 기념행사장에서 발표되기도 했다.

박 감독은 영화 분야에도 열정을 쏟았다. 김호선 감독이 연출한 <아담이 눈뜰 때>와 멕시코 로케이션 영화 <애니깽>의 프로듀서로 참여했고, 색스폰 연주에도 특기가 있는 그는 틈틈이 연주활동을 해오다가 ‘코리아 색스폰 하모니’를 2004년에 창단, 색소폰 연주 공연을 수시로 개최하고 있다. 음악 봉사활동인 UN산하 봉사 단체인 GCS밝은사회국제클럽의 예술단장으로 봉사하는 일도 지금 그의 인생에서 주요 일과로 포함 되어있다. 

인터뷰365가 영상 연출의 ‘천부적 귀재’ 박경삼 감독의 드라마틱한 삶을 함축해서 정리했다.

 죽음의 공포가 꿈을 준 전쟁터

 - 작년(2019년) 12월 11일 서울 삼각지에 있는 전쟁기념관에서 박 감독이 작사 작곡해 발표한 ‘월남전 참전 전우의 노래’는 노랫말부터 듣고 싶다.

‘조국의 부름으로 우리는 달려갔다 / 일천구백육십사년 / 머나 먼 정글 / 포화에 피고 진 전우의 혼백 / 겨레를 지켰다 / 나라를 지켰다 / 아∼ 아 / 찬란한 대한민국 / 아∼ 아 / 우리가 만든 선진 조국’이 1절이다.’

대한민국 건국이래 최초의 해외파병이 월남전이다. 1973년 주월군이 철수하기 전까지 8년8개월 동안 32만여 병력이 참전해 수천명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낸 아픔과 희생이 우리나라가 경제발전의 문턱을 들어서게 한 계기로 이어졌다. 맹호, 백마, 청룡부대의 군가는 참전용사들의 귀에 익지만 군을 떠난 옛전우들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마땅한 노래가 없어서 이번에 준비를 했더니 다들 좋아하고 반겼다.

박경삼작곡작사 월남전참전 '전우의 노래' 수방사군악대연주 2019년 12월 11일
2019년 12월 서울 전쟁기념관에서 개최된 월남전참전 55주년 기념식에서 '전우의 노래'를 연주 중인 수방사군악대. 박경삼 감독이 작사 작곡한 곡이다./사진=박경삼 제공
서울종합예술학교 박경삼 석좌교수가 작사 작곡한 월남전참전 '전우의 노래'<br>
박경삼 감독이 작사 작곡한 월남전참전 '전우의 노래'

- 월남전 참전시절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1964년 한국외국어대 일본어과에 입학했지만 이듬해 국방부 국군영화제작소의 카메라 촬영기술병 모집에 합격해 국방부 소속의 종군 영상뉴스 보도병으로 참전했다. 경쟁률이 200대 1이었고 합격자 중 내가 수석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젊은 혈기에 자긍심도 남다를 때였다.

- 적이 던진 수류탄을 온 몸으로 막으며 장렬하게 전사한 이인호 해병대 소령의 기록 영상을 카메라에 담았던 주인공에게 당시 현장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1966년 8월 투이호아 전투에서 나는 35㎜ 카메라를 총대 대신에 끌어 잡고 우리 국군의 격렬한 전투 현장을 정신없이 필름에 끌어 담았다. 그러나 내 카메라 앵글에 이인호 소령이 쓰러지는 장면을 알게 된 것은 내 필름을 전해 받은 고국에서 현상, 편집해 당시 국방부 제작 “월남전선”뉴스 영화 제6호를 통해 국민들에게 알려진 뒤였다.

그 전쟁터에서 나도 간신히 살아남았고 내가 찍은 필름은 여단장의 지시로 정훈장교가 고국으로 보냄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던 특종기록이었으며 곧 미국 매체에서도 보도가 되었다.

국방부특파 월남전 종군 박경삼 해병기자 1960년대에는 해병대 월남전 종군 보도병으로 활약하며 투이호아 전투 이인호 소령의 장렬한 최후 영상을 특종 보도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1966년 국방부특파 해병대 월남전 종군 보도병으로 활약했을 당시의 박경삼 감독. 그는 투이호아 전투 이인호 소령의 장렬한 최후 영상을 국내외신에 특종 보도하며 파월전사기록으로 크게 화제를 남겼다. 그는 2017년  미국정부로부터 종군공로상도 받았다./사진=박경삼 제공

- 이인호 소령은 터지는 수류탄을 몸으로 막아 부하를 구하고 숨진 강재구 소령과 함께 교과서를 통해 영웅담이 소개되기도 했다. 그런데 미국 정부가 2017년에 새삼 공로상을 준 것은 어쩐 일인가?

미국은 전쟁 공훈 기록이 확인이 되고 인정이 되면 시기와 관계없이 언제 어느 때나 상을 주는 관례가 있는 것 같다. 미국은 전쟁 영웅이나 전쟁터에서 공을 세운 사람을 국가와 국민이 가장 위대하게 대접하는 대표적인 나라다.

- 총 대신 카메라를 들고 월남전에 참전한 박 감독의 무용담이 남다르다. 총알과 포탄이 날아오는 포연 자욱한 죽음의 전장에서 카메라를 메고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면 영화의 한 장면 같이 잊을 수 없는 체험을 한 것 같다.

그렇다. 죽음의 전쟁터, 지옥의 전쟁터였지만 그곳이 나에게 꿈을 안겨준 계기가 됐다. 남들이 부러워할 수 있는 내 스스로의 특기가 카메라 영상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뛰어난 재능은 선천성과 후천성의 결합

박경삼 감독의 젊은 시절

- 재능은 타고난 것인가? 그보다 스스로의 노력에 의한 결실이라고 보는가?

양쪽 모두 관련이 있다. 영화감독인 아버지(박구 감독)의 유전인자도 이어받았지만 아버지 덕분에 아주 어릴 때부터 ‘시네마 키드’로 자랐고, 또 아버지가 카메라 수집광이어서 카메라와 더불어 성장했다. 아버지 곁에서 직접 찍어보며 타고난 재능을 스스로 좋아하고 가꿔온 덕분에 지금까지 일생을 영상기술의 전문가로 살고 있다.

- 박 감독이 어릴 때라면 그 무렵 카메라를 아무나 구경할 수 없는 시대였다.

비싼 독일제 라이카 카메라가 집 한 채 값일 때 우리 집에는 각종 카메라가 수십 개 있었고 집안에 현상시설도 있어서 아버지가 찍은 필름을 내가 현상도 했다. 우리 집에는 카메라 기술에 대한 일본 서적도 많아 일찍 일본어 공부를 하며 평생토록 활용한 카메라 기술을 독학으로 많이 익혔다.

- 감독의 인생 황금기인 1970년대 CF 감독시대로 이야기를 돌려보자.

내가 CF연출을 시작하기 전에 군복무를 끝낸 뒤 종군 카메라맨의 경력을 평가받아 1967년부터 10년간 TBC(동양방송)와 MBC에 특채되어 보도 사진기자와 프로듀서로 활동했다. 방송사를 떠나 1976년부터 CF 연출을 하게 되면서 해태, 롯데를 비롯한 제과기업, 아모레, 한국화장품, 한불화장품 등 화장품 메이커와 삼성과 LG, 현대 등 대기업 CF 1000여 편을 연출했다.

- 그때나 지금이나 인기 연예인의 소득 중 가장 많은 고액의 수입은 CF로 볼 수 있다. 요즘 인기 CF모델의 출연료가 수십억 대에 이른다는 것을 감안할 때 1970년대 인기 모델의 출연수입도 어느 정도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당신의 CF를 거쳐 간 인기 연예인은 누구인가?

2세대 트로이카 시대의 주연인 정윤희·장미희를 비롯해 원미경·이미숙·최진실 등 최고의 인기 배우들이 망라된다. 당시 연예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CF는 아름다운 용모에 포커스를 둔 화장품이나 패션기업의 광고였다.

1970년대 1000여편의 대기업 CF를 연출했던 박경삼 감독은 정윤희·장미희·원미경·이미숙·최진실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과 CF작업을 함께 했다. 사진은 배우 장미희(사진 오른쪽)와 함께한 박 감독. 그는 19세 장미희의 CF 데뷔작에도 참여한 인연이 있다./사진=박경삼 제공

- 특별히 기억에 남는 모델이 있다면?

어느 날 새벽에 느닷없이 미원그룹(현재의 대상그룹) 회장의 전화를 받았다. 소문을 듣고 나에게 광고 제작을 부탁한 것인데 나는 즉시 최고 인기배우인 홍세미를 발탁하겠다고 말했다. 1976년 출연료로 5천만 원을 주었는데 화폐가치에 대한 비교 느낌은 지금의 20억 원 쯤 될 것 같다. 또 LG의 전신인 금성 냉장고 광고에 TV에서 ‘수사반장’으로 인기 절정이던 최불암 배우를 등장시켜 성공한 것도 짜릿했다.

- 당시 연출한 CF 작품들을 좀 더 소개한다면?

해태제과의 ‘브라보콘’으로 첫 연출 작품부터 “12시에 만나요 브라보콘”의 유행어를 만들어내면서 참신한 CF로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롯데가 삼강기업을 인수해 ‘쭈쭈바’를 신상품으로 내놓은 아이스크림 CF도 빅 히트해 매출에 대박이 났다.

CG(컴퓨터 그래픽)가 제대로 영상기술로 활용되지 않던 시절에 서울우유 CF 연출 때 우유방울이 떨어지는 장면에서 1초에 24프레임 정도로 찍던 영상을 500프레임의 고속 촬영 영상으로 담아내 충격적인 반응을 남겼다. 롯데 오렌지 스카치 CF는 국내 최초 해외 로케이션 작품이었다. 일본에서 재일동포 장훈 선수가 3000번째 안타를 치는 순간을 포착한 영상으로 CF의 다큐멘터리 화로 화제를 모았다.

- 당신에게 영상기술의 재능을 물려준 부친 박구 감독도 가극단 공연과 영화 제작활동을 통해 대중예술사에 많은 일화를 남긴 분이다.

아버지의 일대기를 언젠가 책으로 펴낼 준비를 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공연예술의 원조무대인 반도가극단을 이끌고 서울에서 만주, 상하이, 도쿄 등지를 순회하며 <장화홍련전> <심청전> <콩쥐팥쥐> <견우직녀> 등의 공연으로 고전가극 역사에 큼직한 발자취를 남기셨다.

가극무대가 시들해질 무렵인 1956년부터 반도영화사를 설립해 <자유부인>(속편)을 비롯해 40여 편의 영화를 제작하거나 연출했으며 동양 최대의 안양촬영소 창설에 참여해 초대 촬영소장을 맡으셨으며 감독협회 초대회장, 영화인협회 회장대행을 맡아 ‘충무로시대’ 산파역으로 이름을 남기셨다.

- 박 감독의 어머니인 고 서혜영 여사(1922∼2018)도 가극단 배우로 활동한 분이지 않는가?

2018년 별세직후 <인터뷰365>가 단독으로 보도해 많은 분들이 처음 알게 되었다고 인사를 해왔다. 어머니의 본명은 전영희, 95세로 장수를 누리셨지만 아버지 생전에 이혼해 불행도 겪으셨다.

1941년, 반도가극단의 연구생으로 입단해 주연배우로 활동하고 아버지와 헤어진 뒤에는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 가수가 이끄는 KPK 가극단에서 한국 최초로 ‘로미오와 쥬리엣’, ‘칼멘’등 수준 높은 오페렛타의 히로인을 맡아 활동하시고 1956년 은퇴하셨다.

모험과 도전, 실험정신으로 살아라

1996년부터 대학과 인연을 맺으며 영상전공 후학을 위한 강단에 서온 박경삼 감독. 그는 현재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 석좌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 1981년 잘 나가는 광고기업 정리하고 느닷없이 미국유학을 떠난 데는 동기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CF제작에 바람을 일으키면서 ‘선(SUN) 프로덕션’이라는 광고기업을 설립해 한 달에 30여 편의 CF를 제작하던 때도 있었다. 정신없이 일하면서 돈도 좀 벌었다. 그러다가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부)로부터 CF제작도 문화영화 제작 허가권을 인정받은 업체만이 가능하다는 규제지침이 떨어져 하루아침에 잘 나가던 회사가 무허가 기업으로 발목이 잡혔다.

제작을 하려면 허가권을 가진 문화영화사에 대명료를 주는 음성적인 거래가 필요했다. 여기에 CF도 엄격하게 심의를 받는 과정에 우리 회사가 제작한 ‘칠성사이다’의 발랄한 느낌의 CF송이 젊은이들에게 선동적이고 위화감을 준다는 이유로 심의필 도장을 찍어주지 않는 등 갈수록 난간이 다가왔다. 못 다한 학업을 위해 미국으로 따나는 결심을 안겨준 계기였다.

- 이민을 유학보다 더 염두에 둔 것은 아닌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1981년 도미 후 캘리포니아주립대 필름스쿨에서 학사과정 마친 뒤 콜롬비아대 스클 오브 아츠에서 석사학위로 학업을 마무리 하고 돌아왔다. 그로부터 영화 기획, 연출에도 참여하고 정부와 지자체에서 주관하는 국제 행사 기록영상 연출의 총감독으로 꾸준히 활동했다.

- 동계올림픽 경기 공식기록영화, 대전엑스포, 상하이엑스포, 2002월드컵 공식기록영화 총감독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

국제 스포츠 경기의 기록영상도 의미가 있지만 보람을 느낀 작품은 1993년 대전 엑스포 개막축전의 영상연출 총감독을 했을 때였다. 오프닝 영상으로 분수의 물줄기를 워터 스크린으로 공중으로 쏘아 올리며 보여준 영상축제는 입장 관객의 엄청난 감동과 환호를 받았다. 야외 최초의 분수 영상쇼의 실험 연출이 제대로 빛을 발했다. 이어서 상하이 엑스포 때 한국관과 미라노 세계엑스포 한국관 영상연출을 통해 영상분야의 무한한 표현의 가능성을 보여준 성과와함께 국제무대에서 호평 받아 뿌듯했다.

평창동계올림픽 자문위원으로 활약하던 당시 박경삼 감독. 박 감독은 동계올림픽 경기 공식기록영화 제작에 참여했다./출처=KBS 캡쳐 

- 지금은 대학 강의가 본업인가?

1996년부터 대학과 인연을 맺으며 영상전공 후학을 위한 강단에 서게 되었다. 먼저 공채 교장으로 한국애니메이션 고등학교 제2대 교장직을 수행한 것이 인생 2모작이라는 시대의 내 인생에 큰 보람이었다,

그 후 대학으로 옮겨 명지대학교, 광운대학교, 명지전문대학에서 정년, 지금은 나이에 구애 받지 않고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에서 틈틈이 강의를 해오고 있다. 후진 교육은 1996년부터 해왔지만 교수는 팔자에 없는 직업이다. 나는 영상 예술의 창작 현장에 있어야 기운이 살아난다. 그래서 강의실보다 학생들과 현장을 찾아 실기 응용교육을 가르칠 때 더 즐거움을 느낀다.

- 영상예술 분야의 전문가로 일생을 바친 스스로의 삶을 통해 후배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한마디가 있다면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가?

창작의 세계는 남들이 가지 않거나 보지 못한 세계를 먼저 가보고 찾아내는 모험과 도전이 따라야한다. 나는 주제가 정해지면 보편적인 원리나 기존의 공식으로 답을 만들기보다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곳에서 가져올 수 있는 답이 없는 지를 찾는 호기심이 많은 인생을 살았다. 인생과 일에서 불확실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때로는 실험성에 승부를 거는 무모한 도전도 즐기며 살았다. 영상세계는 무궁무진한 소재와 표현기법들이 무한정 늘려있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초를 다투며 새로운 표현방식을 토해내고 있는 시대지만 모든 작품에는 인간의 향기가 반드시 스며 있어야 한다는 점은 영상미학에서 불변의 진리가 될 수 있다.

나는 지금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내가 쓴 영상 기술 저서와 논문도 많지만 여전히 영상기술 분야의 새로운 기술이론의 연구과제와 발표 주제를 찾기 위해 관련 자료를 찾아고전의 오손웰스의 시티즌켄을 통해 표현된 영상미학(Film aesthetic)을 연구하고 있다. 그 옛날 콜럼비아대학의 존 밸톤(John Belton) 교수의 영상미학론은 지금도 나의 영상제작의 바이블이다. AI시대를 향해가는 영상기술의 미래는 어떨까? MIT의 랩(Lab) 사이트를 이 밤에도 기웃거리며 미래의 영상을 탐구하고 환상에 빠지며 살고 있다.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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