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365] 김두호가 만난 영원한 영화인 정진우 영화감독
[인터뷰365] 김두호가 만난 영원한 영화인 정진우 영화감독
  • 김두호
  • 승인 2019.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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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작품부터 성공 시킨 최연소 감독
-시네포엠으로 한국영화 뉴시네마 선봉
-70㎜ 동시녹음 촬영시대를 견인하다
1963년 영화사상 최연소인 23세에 감독으로 데뷔한 후 지난 60여년간 한국영화 100년역사에 한 획을 그은 '거장' 정진우 영화감독. 데뷔작 '외아들'에 최무룡·김지미 등 당대 톱스타들을 출연시키며 범상치 않은 행보를 보였던 정 감독은 고 신성일이 "국내 영상영화의 시초"라고 부른 '초우'를 비롯,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자녀목',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등 30여년간 52편의 영화를 연출했고, 자신이 설립한 영화사 우진필름을 통해 135편의 작품을 제작했다. 1972년 '섬개구리만세'로 베를린영화제 본선 경쟁부문에, 1984년 '자녀목'으로 제42회 베니스영화제에 특별 초청되며 국제 영화제에 한국 영화를 알린 국내 대표 영화인이다./사진=인터뷰365

[인터뷰365 김두호 인터뷰어] ‘1956년 충무로에 한 청년이 나타났다. 봉두난발의 사자 깃처럼 치솟은 머리와 부릅뜬 눈에 고집불통, 세상을 향해 거침이 없는 저돌적인 모습의 약관 18세, 이 젊은 청년이 바로 미래의 영화감독 정진우(1937∼ )였다’

남양주 영화종합촬영소 영화인 명예의전당에 헌액되면서 펴낸 인물전기집 <영원한 영화인 정진우>에 ‘한국영화의 세계화에 앞장선 뚝심의 정진우’라는 제목의 글을 공동으로 기고한 송길한 시나리오작가와 유지형 작가 겸 영화감독의 머릿글은 그렇게 시작된다.

정진우 감독은 그들이 표현한대로 충무로에 나타나면서부터 영화인으로서의 광기를 드러내며 박상호·정창화 감독의 연출부를 거쳐 1963년 영화사상 최연소인 23세에 감독으로 데뷔했다. 감히 최무룡·김지미·황정순·태현실 등 톱스타들을 첫 작품 <외아들>에 불러냈고, 거침없는 기세로 무난히 흥행에도 성공했다. 신성일 엄앵란의 출세작이면서 실존 애정비화가 엮어진 <배신>은 그의 두 번째 작품이다.

대표작품 중에는 <초우>(草雨)가 있다. 비라는 오브제를 통해 가난한 연인들의 허망한 욕망을 그려낸 이 영화의 제목 ‘草雨’ 한자의 우리말은 ‘풀비’라는 뜻인데 국어사전에도 없는 낱말이다. 영화가 멋대로 창조해낸 신조어였다. 이 영화의 주연배우 신성일은 생전에 <문학세계사>를 통해 출연 회고담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정진우 감독의 <초우>는 국내 영상영화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영화적 열정에 탄복한 나는 그해 1966년에만 <초연> <하숙생> <초우> <악인시대> 등을 찍었다. 무려 22일 동안 잠을 못자고 촬영하는 정진우 감독을 보았다. 당시 최고 인기감독이었던 그는 돌출적 성격과 거친 말투로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그의 내면은 그의 영화처럼 온기에 가득 찬 사람이다.”

1973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 함께 참석한 (왼쪽부터)고 신성일, 정진우 감독, 김지미 배우./사진=영화인복지재단 제공 

소설을 원작으로 한 <목마른 나무들> <가을에 온 여인> <란의 비가> 등 그가 소재로 한 작품은 주로 한국적 소재와 사랑을 테마로 하고 있지만 스크린에 올린 그의 작품들은 흔한 통속성 애정물이 아니라 ‘영화의 시’(시네포엠)로 표현할 수 있는, 한국영화 뉴시네마의 길을 열었다는 평가가 따른다. 고은아·이순재 등의 명배우도 그 무렵 그의 작품을 통해 영화에 처음 등장한 연기자들이다.

정 감독은 1995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까지 52편의 영화를 연출했고 자신이 설립한 영화사 우진필름을 통해 135편의 작품을 제작하는 동안 70㎜ 6본 트랙 입체음향 동시녹음 촬영기자재를 도입, 1980년대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자녀목> 등 을 연출 겸 제작했다.

한국영화가 후시녹음에서 동시녹음시대로 접어들게 한 개척자로서의 기여도와 함께 1972년 섬마을 농구팀 이야기를 담은 <섬개구리만세>를 베를린영화제 본선 경쟁부문, 1984년 <자녀목>이 제42회 베니스영화제에 특별 초청되어 국제 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가 주목받게 한 공적도 그의 이력에 포함되어 있다. 강수연이 <씨받이>로 베니스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게 된 것이 그 이듬해였다.

정진우 감독의 영화 '초연'(1966), '자녀목'(1985),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1995) 포스터./사진=영화인복지재단 제공 

열정이 넘치는 행동주의자이고 때로는 겁 없이 비판과 반론의 목소리를 토해내는 직설적인 언행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오해를 사거나 충돌하는 사건도 많았고, 손해를 보거나 피해를 입기도 했다. 미완성 대작 <여명의 눈동자>를 연출 제작할 때는 권력층의 특정 배우 캐스팅 압력을 외면한 괘씸죄에 찍혀 촬영현장(충남 해미)에서 교도소로 수감되는 고난을 겪기도 했다.

파란만장한 영화인 정진우 감독은 요즘 시(詩)도 쓴다. 시단에 등단해 시집을 펴낸 시인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또 1984년 그 스스로가 앞장서 설립한 한국영화인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적을 두고 있고, 여전히 천부적인 영화감독의 재기(才氣)는 버리지 않고 새 작품을 틈틈이 준비 중이다.

영원한 영화인 정진우 감독을 만나 40년이 넘도록 인연을 이어온 기자가 마침내 그의 드라마 같은 삶의 기록을 함축해서 듣고 정리했다.

한국영화의 시발점은 <자유만세>

정진우 감독은 서울의 문화예술 진흥과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지난 10월 18일 서울시청에서 개최된 제68회 ‘서울특별시 문화상’시상식에서 대중예술 부문 문화상을 수상했다. 시상식장에 걸린 수상자 현수막 앞에 선 정 감독./사진=인터뷰365 

2019년 10월 18일, 서울시청에서 개최된 제68회 ‘서울특별시 문화상’시상식에서 정진우 감독이 박원순 시장으로부터 대중예술 부문 문화상을 받았다. 축하를 위한 자리에 팔순의 원로가 된 김지미 배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 감독의 데뷔 영화 <외아들>에서 최무룡과 출연했던 여배우, 실로 56년의 시공을 넘어 청춘을 영화에 바치고 노후에 정답게 자리를 함께 한 두 사람의 모습이 그들의 특별한 인연과 내력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만감이 피어오르게 한다.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김지미 배우는 시상식을 앞두고 곁에 앉은 노 감독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정성껏 빗어주며 따뜻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지난 10월 18일 서울시청에서 개최된 제68회 ‘서울특별시 문화상’에서 대중예술 부문 문화상을 수상한 정진우 감독을 축하하기 위해 영화인들이 대거 참석했다. 이 중 단연 눈에 띈 영화인은 배우 김지미. 김지미는 정 감독의 데뷔 영화 '외아들'에 출연한 후 60여년간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시상식에 앞서 김지미가 헤어스프레이로 정 감독의 머리카락을 매만지자 정 감독은 멋쩍은듯 활짝 웃었다./사진=인터뷰365

- 올해가 한국영화 100주년이다. 늦었지만 올해 서울시 문화상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후배들이 다들 받고 지나간 자리에 새삼 나를 오라고 해 쑥스럽고 어리둥절했다. 누가 연락을 했는지, 우리 김지미 여사가 참석해 흐뭇하다. 그런데 나는 한국영화 100주년의 출발점을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졌고 영화로 내세우기에는 미흡한 <의리적 구토>를 역사적 기준점으로 정한 것에는 이의를 가지고 있다."

- 한국영화사를 정리한 사람들이 대다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던 해 10월 단성사에서 개봉한 김도산 감독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가 한국영화의 뿌리이면서 출발점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생각이 다른 우리 영화의 역사적인 관점이라면?

"<의리적 구토>를 이른바 연쇄극이라고 하는데, 연극 사이에 움직이는 활동사진의 맛보기 시늉이나 인서트 정도의 영상을 잠깐 보여주는 정도였지 영화 작품이 아니었다. 1919년은 또 3.1운동으로 민족적 저항운동의 영향을 받은 일제의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무단정치에서 고도의 일본화를 위한 기만정책인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언론 문학 예술 등 각분야 지원정책을 펴 1920년 3월에 조선일보, 4월에 동아일보도 창간을 허가했다.

물론 <아리랑>의 나운규 감독 같이 저항의 예술혼을 영화로 담아낸 선각자들이 우리 영화인의 원조로 볼 수도 있지만 일제 강점기는 영화 제작에 따른 신기술 등 서구 문명이 모두 일제를 경로로 들어왔고 제작활동의 배경이 되어 당시 작품을 우리 영화와 영화인의 뿌리라고 해석하는 데는 다른 의견이 따르게 된다.

그래서 나는 순수 우리 영화와 현대 한국영화의 시작을 독립 후, 해방 이듬해 1946년 10월 21일 개봉한 고려영화사 제작,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를 출발점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 영화는 작품의 주제도 항일운동과 독립투사를 소재로 한 작품이었다. 말 그대로 당당하게 만든 대한민국의 1호 극영화 작품이다."

2014년 '제 1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개최된 정진우 감독 회고전에 참석한 영화인들. (뒷줄 왼쪽부터) 배우 이대근, 김희라, 김지미, 김동호 강릉국제영화제조직위원회 위원장, 정진우 감독의 부인 한현숙 여사와 정 감독, 배우 최지희, 남궁원, 아랫줄 왼쪽부터 배우 안성기, 강수연

- 그 영화를 보았는가?

"나는 고향인 김포에서 초등학교 2학년 때 해방을 맞이했고 <자유만세>를 관람한 것은 5학년 때였다. 16㎜ 필름으로 담아낸 이 영화는 주인공 독립운동가 전창근이라는 명배우의 카리스마가 가슴속을 감동으로 가득 채워준 작품이었다."

- 영화감독의 데뷔 이력과 계보는 언제 어느 때 어느 감독의 연출팀에서 어떤 작품을 만들었느냐로 시작된다. 정 감독은 작가적 성향이 뛰어났던 박상호, 액션영화의 거장으로 홍콩영화계에 진출해 그곳 영화산업의 주역 역할을 했던 정창화 감독 등의 연출팀을 거쳤다. 첫 스승은 누구인가?

"나의 영화 입문 동기는 중앙대 선배인 최무룡 배우의 추천에서 비롯된다. 최고 인기 배우였고 영화제작에도 일찍 진출한 최무룡 선배가 제작했던 유현목 감독의 <유전의 애수>(1956)의 촬영 현장에서 영화인생이 시작되었다. 출발부터 현장에서 제대로 영화 수업을 쌓게 된 것이 행운이었고 영화수업의 탄탄한 기반이 되었다.

카메라의 메카니즘을 먼저 접하는 촬영팀으로 들어간 뒤 이어서 연출팀으로 옮긴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정이었다. 그후 강범구, 박상호, 신경균, 노필, 김소동, 정창화 감독 등 당대 주역 감독들의 연출팀에서 조감독으로 참여해 선배들의 다양한 창작 성향과 연출 기량을 두루 배울 수 있었다."

첫 작품으로 시선 모은 최연소 감독

촬영 현장의 정진우 감독. 20대 충무로에 혜성같이 등장한 정진우 감독은 데뷔작('외아들')부터 성공시킨 최연소 감독이다./사진=영화인복지재단 제공  

- 영화 연출 분야 인물들의 기록을 보면 정 감독이 당시 영화사상 데뷔한 나이로는 최연소로 알려진다. 23살 때인데.

"박상호 감독의 <모상> <내 청춘에 한은 없다>, 정창화 감독의 <지평선> <장희빈> <칠공주> <대지의 지배자> 등에서 조감독으로 활동할 때 제작스태프들이 조기에 작품을 맡길 수 있다고 인정을 한 덕분이다. 영화는 예나 지금이나 한 작품에 최소한 비싼 집 몇 채의 자본을 제작비로 쏟아 넣어 만드는 고가의 상품이다. 그걸 맡기려면 제작자의 눈에 확신이 따라야 한다."

- 데뷔작 <외아들>은 충무로의 톱스타들인 최무룡·김지미·황정순·태현실 등을 캐스팅해 기획단계에서부터 주목을 받았지만 영화가 국제극장에서 개봉되어 당시 흥행 성공 관객 수를 3만 명 정도로 볼 때 7만 명이 관람해 화제가 됐다. 그 영화의 소재가 감독 자신의 자전적 스토리라는 얘기도 따른다.

"사실 8남매를 낳아 정신없이 살아가신 나의 어머니의 고달픈 삶을 모델로 삼았다. 감독이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소재로 한다는 것은 영화의 생명인 리얼리즘 도출에 자신감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 결과도 성공으로 나타났다."

'은막의 어머니'로 일컫었던 생전의 황정순 배우와 함께한 정진우 감독. 고 황정순 배우는 정 감독의 데뷔작 '외아들'에 출연하며 인연을 맺었다./사진=영화인복지재단 제공 

- 두 번째 작품이 톱스타 신성일·엄앵란 부부가 두고두고 러브스토리로 활용한 <배신>(1964)이다. 두 남녀가 청평 호수에서 보트를 타고 데이트를 하는 장면을 찍을 때 카메라에서 점점 멀어지는 순간 느닷없이 신성일이 엄앵란을 포옹하고 실제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는 시나리오 밖의 일화는 충무로 야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비화였다.

"<배신>은 신성일 엄앵란 톱스타 커플의 화려한 출발점으로 볼 수 있다. 영화평론가들이 내가 <배신>을 만들 때 정진우의 영화적 마성(魔性)이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나는 애정 심리의 표현을 영상으로 묘사하는 연출시각을 시적인 감각의 영상미에 접근하려는 시도를 꾸준히 추구했다. 1950년대 프랑스의 뉴벨바그와 같이 우리 영화의 일반적인 표현방식의 틀을 바꾸어 내 나름의 영상미학에 집착했고 기존의 카메라 워크, 영상 구성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묘사에 욕심을 냈다. 그렇다. 나는 <배신>을 찍을 때 피사체가 가물가물 사라지면서 보여준 수상한 동작도 목격한 증인이다."

신성일, 엄앵란의 러브스토리가 점화된 영화 '배신'의 한 장면
신성일, 엄앵란의 러브스토리가 점화된 영화 '배신'의 한 장면/사진=영화인복지재단 제공

- 1966년 러브스토리 영화의 새장을 연 화제작 <초연>도 전작 <초우>의 연출성향을 잇는 뉴시네마로 평가를 받았다. 이순재의 데뷔작이었고 신성일 남정임이 공연해 관객들의 호평을 받으며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다. 그 작품과 관련해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면?

"전작 <초우>는 청춘의 고독을 주제로 스토리 중심의 사건 전개를 억제하고 카메라 워크의 영상표현을 최대한 살려 드라마를 이끌어냈다면 <초연>은 청춘의 방황을 영상감각으로 스크린을 가득 채워낸 작품이다."

- 화제를 남기 두 작품 중 어느 작품에 더 애착을 느끼는가?

"<초우>보다는 <초연>에 더 애절한 정감이 남아 있다. 그 작품은 그 시대 주목을 받던 이만희 감독의 <만추>와 같은 날 개봉해 흥행에 밀리지 않고 나의 자존심을 당당하게 세워준 작품이다."

1966년 '초연' 신성일, 남정임
1966년 '초연'의 한 장면. 주연 배우인 신성일과 남정임./사진=영화인복지재단 제공

- 그 당시 <초연>을 소개한 신문 기사를 보았다. 영화평론가와 기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모은 작품이다.

"조선일보가 ‘청춘의 열병을 뿜는 올해의 수작’이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소개하고, 동아일보는 ‘인간본능을 추구한 감각적인 애정표현으로 신선한 영상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평을 실었다. 그 무렵 만든 <밀회> <하숙생> <밀월> 등이 모두 사랑의 방황과 고뇌, 파멸을 주로 다루었지만 진부한 대사로 이어지는 멜로드라마에 빠져들지 않고 절제된 대사 대신 영상효과를 통한 심리묘사에 치중한 작품이어서 대체로 새롭고 참신한 영화로 인기를 모을 수 있었다."

- ‘가슴 속에 스며드는 고독이 몸부림칠 때 / 갈 길 없는 나그네의 꿈은 사라져 비에 젖어 우네’로 시작되는 패티김의 노래 ‘초우’,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의 최희준 노래 ‘하숙생’ 등 1960년대 영화 주제곡들이 지금도 노래방의 애창곡들이다. 주로 러브스토리를 연출하다가 <8240 K.L.O>라는 전쟁영화도 연출했다. 계기가 있는가?

"조감독 시절에 액션이나 전쟁영화 연출에도 많이 참여해 주제 선택에 친숙감이 있었다. 또 감독으로 다양한 장르를 통해 역량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1967년 작품 <하얀 까마귀> <폭로> <국경선> 등은 분단의 아픔과 사회성 영화인데 검열에 걸려 필름이 조각나고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표현의 자율성이 심의 검열기관을 통해 예민하게 통제받던 그 무렵은 영화 만드는 것도 모험이었고 전쟁이었다.

<국경선>은 < 국경 아닌 국경선>으로 제목을 바꿔 개봉했는데 당시 김형욱 정보부장이 보고 감동받아 박수를 쳤다는 소문을 들었다. 구금된 지 10일 만에 풀려난 것도 그 소문과 연계성이 있는 것으로 느꼈다."

촬영 현장에서의 정진우 감독./사진=영화인복지재단 제공  

- 1970년대로 넘어서면서도 다양한 형식의 소재와 표현방식으로 많은 작품을 연출했다. 주요 작품을 정리해 달라.

"1960년대 말 ‘마농 레스코’를 번안한 <정부 마농>을 비롯해 <구름> <황진이의 첫사랑> <청춘> 등을 연출하고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부두 노동자의 척박한 삶을 그린 <항구무정>으로 시작해 스릴러와 애정물인 <국경의 밤> <동백꽃 피고지고> <돌아오지 않는 밤>, 이어서 스펙타클 대작인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을 연출했다.

내가 영화사 우진필름을 설립해 연출과 함께 제작을 하게 되면서 내 영화인생에서 자유로운 창작시대를 맞이했다. 우선 영화로 번 돈을 모두 최신 영화 촬영 장비를 도입하는데 우선적으로 사용했다. 덕분에 후시녹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시절에 누구보다 앞서 만들고 싶은 동시녹음영화를 제작해 우리 영화의 현대화에 앞장 설 수 있었다는 것은 행복이고 행운이었다."

- 섬을 무대로 원초적인 인간의 본능세계를 그린 <석화촌>, 이어서 연출한 섬마을 소년농구팀의 감동드라마 <섬개구리만세>는 베를린영화제 본선에 올라 한국영화가 해외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1973년 영화진흥공사 제작담당이사로 들어가 임권택 감독의 대작 <증언>을 기획, 제작하게 된 때도 있었다.

"우리 영화의 선진 제작 기술 도입이나 촬영시스템 등에서 변화를 필요로 하는 시기였다. 임권택 감독은 강원도 인제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맡고 변인집, 전조명, 유재형, 박승배 등 최고의 촬영감독들이 총 동원되어 엄청난 스펙터클 촬영 작업을 진행했다.

미술의 노인택, 특수효과의 이문걸 등 쟁쟁한 기술팀은 특수 촬영스튜디오에서 한강철교 폭파장면과 인천상류작전에 동원된 B-29 폭격기 전단의 공중 미니어츄어 특수 촬영 작업을 전개했다. 일개 영화사의 힘으로 시도하기 어려운 처지 일 때 기획 제작 작업을 주관하는 기회가 주어져 정말 신바람이 났다.

<증언>을 만들면서 일본과 합작 형태로 미니어처촬영과 특수촬영 등 신기술을 도입하거나 시도하게 된 것도 우리 영화산업에서는 획기적인 시도였고 변화의 기회였다. 나는 그로부터 자신감을 얻어 1978년 최초의 동시녹음 영화 <율곡과 신사임당>을 제작해 대종상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여전히 영화의 꿈은 살아있다

촬영 현장에서 "레디고"를 외치는 정진우 감독의 표정에 만족감이 넘치고 있다./사진=영화인복지재단 제공

- 1979년 <심봤다>를 시작으로 1980년대로 넘어서면서 토속적인 소재와 서정적 색감의 작품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대종상을 비롯한 여러 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녀주연상 등 주요 부문상을 차지하는 등 특화된 또 하나의 연출 세계를 이어갔다. 그 무렵의 연출 및 제작 뒷 얘기를 들려 달라.

"사랑이라는 나의 키워드를 자연 속에서 피어나는 순박한 인정 풍물의 시대로 가져가 선과 악, 진실과 가식, 욕망이 분출하는 인간의 본능세계를 다채롭게 표현하는 작업이었다.

1979년 산삼 캐는 심마니의 인생을 담아낸 <심봤다>, 오대산에서 촬영한 정윤희 주연의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를 비롯해 <자녀목>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를 연출하고 제작했다. 드라마의 시대 설정을 고전으로 포장했을 뿐, 그 작품들의 모티브는 대부분 무겁고 강압적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착안하고 가져온 것들이다. 영화는 그 시대의 사회상을 어떤 형식과 배경으로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지를 과제로 삼는 장르다."

영화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1980) 오대산 촬영 현장. 동시녹음 카메라 앞에서 열연하는 주연배우 정윤희(사진 맨 왼쪽). 김지미를 잇는 최고의 미녀 배우로 사랑을 받은 정윤희는 장미희, 유지인과 함께 '2세대 트로이카'시대를 이끌었다. 오른쪽 맨 끝이 정진우 감독./사진=영화인복지재단 제공 

- 한 때 영화사 우진필름과 함께 신사동 네거리 가까운 곳에 시네마콤플렉스를 건립, 영화관 빌딩을 가진 재력을 과시했었다. 지금은 문을 닫거나 주인이 바뀐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이면에 그동안 어떤 일을 겪었는가?

"제작된 영화의 흥행 성공확률은 대개 10% 안팎이다. 영화 제작자는 대박을 내고 거액을 벌어도 계속해서 영화를 제작하면 언젠가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영화로 번 돈은 영화에 바쳐야 하는 것이 제작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망하지 않는 길은 한번 성공하면 돈 보따리를 싸들고 영화판을 떠나면 된다. 결국 영화사를 운영한 나도 그 예외의 길을 찾지 못했다."

- 과거 해미읍에서 대작 스케일의 <여명의 눈동자>를 크랭크 인할 때 촬영 현장을 지켜 본 기억이 생생하다. 그 작품을 찍다가 갑자기 수사기관에 불려가는 사고가 일어나고 영화도 촬영이 중단된 일이 있었다. 그 사건은 정 감독에게 아마도 지금까지 지울 수 없는 아픈 상처로 남아 있을 것이다.

"특정 여배우를 주연으로 캐스팅해달라는 모처 권력자의 요청을 거절해서 일어났다는 소문이 그때 순식간에 충무로에 쫙 퍼져 다들 알고 있는 사건이다. 처벌 받은 죄목은 앞서 신영균 윤정희 주연의 <화조>를 프랑스 파리에서 촬영했을 때 감독이 촬영 스케쥴을 1주일 연장 조작해 제작비를 부당 지출케 했다는 것인데 그냥 처벌을 전제로 일상의 제작비 집행과정을 범법행위로 조사받고 수감된 사건이다. 그걸 어떻게 잊겠는가?"

- 당시 정 감독의 영화 출연배우들 중에는 촬영장에서 정 감독의 불같은 열정과 거친 말투에 상처를 받아 힘들었다고 고백하는 경우도 있었다. 정 감독은 평소에도 큰 목소리와 직설적인 표현으로 곧잘 오해를 사기도 하는데 그로 인해 손해를 보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카메라 앞에서 감독은 배우에게 완벽한 연기를 기대한다. 눈에 거슬리면 화를 내고 혼을 낼 때가 있다. 배우는 필름이 돌면 자신의 몸을 불사르고 배역 인물로 놀랍게 변신해야 한다. 그게 프로정신이다. 몸을 움츠리고 아끼거나 표정이 가식으로 드러나면 화가 날 때가 있다. 감독도 깜박 속을 정도의 열정의 리얼리티로 감동을 보여주지 못하면 관객들의 눈에도 실패한 연기자가 되고 작품도 살아나지 못한다.

내가 혼을 내는 이유는 그처럼 단순하다. 자신을 위해, 작품을 위해 배역에 승화되는 연기를 보여 달라는 요청이 화난 말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결국 배우를 아끼고 사랑하는 방법인데 지나고 나면 다들 이해하고 나를 좋아한다.

수많은 작품을 함께 한 김지미, 엄앵란, 문희, 윤정희, 정윤희, 유지인 등 다들 평생을 두고 변함없이 나와 가까운 우정을 나누며 모두 나를 좋아하고 있다. 아하, 최근 부군 백건우 피아니스트를 통해 아름답던 윤정희 배우가 알츠하이머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이 났다. 잠이 오지 않았다. 인생은 허망하다."

촬영 현장에서의 정진우 감독(사진 맨 오른쪽)./사진=영화인복지재단 제공

- 1995년에 김진명의 베스트셀러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블록버스터 영화로 제작했다. 기획에서 연출까지 직접 만든 그 작품은 여러 면에서 불운을 남겨준 작품으로 알고 있다. 그로인한 여파 탓인지 더 이상 영화작업을 하지 않았다. 지난 뒷얘기를 밝힐 수 있는가?

"당시 40억 이 넘는 제작비를 동원했다. 1년에 걸쳐 미국의 뉴욕과 보스톤, 파리와 폴란드까지 해외 로케이션을 감행하고 우리 영화 최초의 CG(컴퓨터 그래픽)를 활용한 영상작업, 돌비 6본트랙 녹음 등을 시도했다.

지금처럼 재벌 기업의 제작비 투자가 없던 시절이다. 아마도 내 영화 제작사상 가장 큰 부담이었고 나의 모든 열정을 투입해 제대로 된 대작을 후회 없이 만든다는 의욕과 집념이었지만 결과는 불행하게도 치명적인 좌절로 이어졌다. 결국 내 인생의 모두를 걸다시피 만든 영화가 영화인생을 기약 없는 공백기로 접어들게 만들었다는 말도 하고 싶다.

비극은 영화 개봉 2일 만에 아주 전격적으로 일어났다. 느닷없이 수사기관에 검거되어 조사를 받았고 전국에 개봉된 영화의 간판도 내려야 했다."

 필자와 대화 중인 정진우 영화감독. 정 감독과 필자는 40년이 넘는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 어떤 곡절이 있었는가?

"제작을 끝낸 영화가 상영될 개봉관이 결정되면 영화사와 극장 측은 막대한 비용을 신문 또는 방송 매체의 광고비로 지출하게 된다. 그러나 한정된 광고예산이므로 모든 매체에 고루 광고를 배정할 수가 없다. 그 때 불만을 해소해 주지 못한 특정 매체가 작품에 문제점이 있다는 기사를 올렸다. 극영화는 다큐멘터리와 달리 픽션이 따르지만 예민한 남북관계와 한일관계에 영향을 끼칠 무리한 사건을 연출했다는, 이를테면 독도를 점유한 일본군을 내쫓는 과정에 남북한이 미사일 등 무력을 동원한 합동작전이 이루어졌다는 설정에 문제점이 있다는 보도기사가 당시 정부 고위층을 자극하고, 나는 결국 수사기관에 검거되어 한동안 시련기를 맞이했다. 그 작품 이후 신사동 네거리 부근에 있던 씨네하우스 영화관과 촬영소, 고향의 선영이 있는 임야까지 모두 잃게 되는 불운으로 이어졌다."

- 근래에는 시를 쓰면서 시인으로 살고 있다는 데 이제 영화를 잊은 것인가? 모든 것을 바친 영화인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정리해 달라.

"영화인으로 살았지만 원래 시를 좋아했다. 언젠가는 나도 시를 쓰며 살고 싶었다. 틈틈이 시작 구상을 하고 감정이 살아나면 시를 쓰다가 보니 몇 권의 시집을 낼 정도가 되었지만 나는 시인이 아니고 영화인이다. 영화를 그만두었느냐고? 천만에, 그건 내게 꿈이 없고 생존의 의미가 없다는 소리와 같다.

나는 지금도 작품을 준비하고 있고, 그동안 생각하고 있는 작품의 연출 헌팅도 해두고 있다. 일찍 기회를 만들지 못한 것은 제작 여건이 대기업 자본으로 움직이는 제작 환경에 적절하게 대응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살아 있는 한 영화작업의 꿈은 버리지 않겠다. 내 인생은 영화를 떠나서 살 수 있는 인생이 아니다. 나이 많은 감독도 제대로 된 영화를 보여줄 수 있다는, 인생 종반에도 뉴시네마의 기수가 될 수 있다는 독창적인 디지털시대의 영화 한편을 만들어 보겠다."

정진우 영화감독은 시집을 펴낸 시인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는 "나는 시인이 아니고 영화인이"이라며 "영화를 그만둔다는 건 내겐 생존의 의미가 없다는 소리와 같다"고 말했다. 

끝으로 정진우 감독이 어느 해 새해를 맞이해 동료 후배 영화인들에게 새해 인사 대신 보낸 시 한편을 그대로 옮겼다.

싸락눈 휘몰아치는 / 충무로 저녁 / 한 때 발자취 잔설에 덮이는구나 / 희뿌연 가로등 밑에 / 긴 그림자 숨긴 채 / 살아온 길 돌아보니 / 길고 짧은 사연들이 / 흰 머리카락처럼 많구나 / 야망과 명성에 엇갈려 / 다른 길로 흩어지는 / 영화쟁이들 

꿈과 사랑을 담아내며 은막의 화려한 인기를 누리던 아름다운 스타들의 거리가 충무로였다. 그 중심에서 젊음을 보낸 노 감독의 화려했던 시절도 전설이 되고 이제 흩어지는 잔설에 묻혀버린 추억일 뿐이다. 지나간 세월의 흔적을 생각하며 새해 기분을 정감 있게 전달한 정 감독의 ‘근하신년’ 시의 마지막 구절 아래쪽에 ‘모쪼록 포근한 봄이 올 때까지 평안하옵소서’가 달려 있다.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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