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의 자아'를 성취하지 못한 비극...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상상의 자아'를 성취하지 못한 비극...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 주하영
  • 승인 2019.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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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의 2018년 업그레이드 버전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공연장면. 새와 닮은 머리 동작과 팔을 많이 사용하는 움직임은 '새'이면서 동시에 '사람'과 같은 피조물을 만들고자 했던 매튜 본의 의도대로 맨발의 아름다운 '백조'를 탄생시켰다. /사진=LG아트센터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공연장면. 새와 닮은 머리 동작과 팔을 많이 사용하는 움직임은 '새'이면서 동시에 '사람'과 같은 피조물을 만들고자 했던 매튜 본의 의도대로 맨발의 아름다운 '백조'를 탄생시켰다. /사진=LG아트센터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2015년 소설 ‘잠(Le sixieme sommeil)’에서 수면 연구가인 카롤린은 잠든 아들 자크의 곁에서 우연히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을 읽게 된다.

“낮에 꿈꾸는 사람은 오직 밤에만 꿈꾸는 사람이 놓치게 되는 많은 것을 인식한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그는 영원을 포착하고 자신이 위대한 비밀의 문턱에 잠시 머물다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율하며 깨어난다.”

낮에 꾸는 꿈, 즉 몽상이 인간을 “형언할 수 없는 빛의 세계”로 침투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포의 생각은 그녀로 하여금 ‘잠의 세계’를 확장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도록 만든다.

1995년 초연 당시 휴고 글렌딩 스튜디오 촬영 장면.
1995년 초연 당시 휴고 글렌딩 스튜디오 촬영 장면./사진=LG아트센터

1958년 ‘공간의 시학(The Poetics of Space)’을 통해 “상상하는 주체의 의식”을 언급한 가스통 바슐라르는 “꿈과 몽상은 전혀 다른 두 개의 정신현상”이고, “꿈이 무의식의 활동에 속한다면 몽상은 의식의 활동에 속한다”고 말했다.

그는 “밤의 꿈이 자아를 잃어버린 어둠이라면, 몽상의 꿈은 자아의 중심에서 코기토(cogito)를 형성할 수 있는 정신활동”이라고 설명했다.

낮에 꾸는 꿈, 즉 몽상의 의식은 현실 세계와 비현실 세계 사이에서 작용하며 그 어느 쪽에도 구속될 수 없는 상태이고, 존재가 형성되기 직전의 영혼의 상태이자 존재하고자 열렬히 시도하는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는 몽상 속에 나타나는 대상은 “상상되어진 대상”이자 “꿈꾸어진 대상”이고, 그 안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고 안도를 느낄 수 있으며 행복을 성취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존재라고 말했다. 고독한 존재인 인간이 새롭게 태어나고 싶은 마음을 이미지로 형성해 자신의 존재를 변화시키고픈 방향성을 담아 완성한 “영혼의 투사”라는 것이다.

‘잠’에서 카롤린은 “끊임없이 이미지를 필요로 하는 인간의 뇌에게 상상하는 것은 곧 현실”이며, 마음속에 어떤 “심상이 만들어지는 순간 그 이미지는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지난 10월 LG아트센터와 드림씨어터에서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안무가”이자 2016년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은 최초의 현대 무용가인 매튜 본(Matthew Bourne)의 최고 히트작 ‘백조의 호수(Swan Lake)’의 내한 공연이 있었다.

2003년, 2007년, 2010년, 2019년 '백조의 호수' 내한당시 포스터 컷/사진=LG아트센터

2003년 LG아트센터에서 첫 내한공연을 가진 후 2005년, 2007년, 2010년의 재공연을 통해 국내에서만 8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던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는 2018년 ‘백조’ 역에 윌 보우지어(Will Bozier)와 맥스 웨스트웰(Max Westwell)이라는 새로운 무용수들을 영입하고 무대와 조명, 의상에 변화를 주어 보다 업그레이드 된 버전을 선보였다.

1995년 초연 이후 23년이 지난 시점에 새로운 버전을 선보이게 된 이유를 묻는 질문에 매튜 본은 유독 가족과 친구들을 데려오는 경향이 두드러지는 이 작품의 경우 “아직 작품을 보지 못한 새로운 세대”에게 또 한 번 영감을 불어넣고 기존의 관객들에게 새로움을 선사할 수 있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초연 당시 상반신을 탈의한 남성 백조들을 보고 극장을 나가버리던 관객들이 있던 과거에서 이제 무용을 전공하는 학생들과 많은 일반 관객들에게 필수적인 작품으로 여겨지는 현재로의 큰 변화를 생각한다면, “작품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일이 또 한 번의 기회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2018년 새로운 버전에서 '백조/낯선 남자'역을 맡은 '윌 보우지어(Will Bozier)'. 뮤지컬 배우 출신으로 2014년부터 '뉴 어드벤처스(New Adventures)'에 합류해 여러 작품을 함께 해 왔다.
2018년 새로운 버전에서 '백조/낯선 남자'역을 맡은 '윌 보우지어(Will Bozier)'. 뮤지컬 배우 출신으로 2014년부터 '뉴 어드벤처스(New Adventures)'에 합류해 여러 작품을 함께 해 왔다./사진=LG아트센터

그는 작품을 이전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조명 디자이너 폴 콘스타블의 영입과 자신만의 해석을 갖고 작품에 참여하게 된 새로운 캐스트들의 무대가 충분히 신선함을 불어넣을 것이라 예상하지만 수백 가지 작은 부분에 변화가 존재하는 새 버전의 차이점을 사실상 관객들이 크게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1995년 아담 쿠퍼 주연(Adam Cooper)의 초연과 비교할 때 2018년 버전은 여러 장면에서 차이가 두드러진다. 하지만 2011년 리처드 윈저(Richard Windsor) 주연의 영화와 비교할 경우 그 차이는 감소한다.

1995년 초연 당시 '백조' 역할을 맡았던 '아담 쿠퍼(Adam Cooper)'의 스튜디오 촬영 장면. 제작 준비 단계에서 휴고 글렌딩의 스튜디오에서 촬영했던 '사전 이미지들'은 실제 안무에서 '백조'의 모티프를 만들어냈다.
1995년 초연 당시 '백조' 역할을 맡았던 '아담 쿠퍼(Adam Cooper)'의 스튜디오 촬영 장면. 제작 준비 단계에서 휴고 글렌딩의 스튜디오에서 촬영했던 '사전 이미지들'은 실제 안무에서 '백조'의 모티프를 만들어냈다. /사진=LG아트센터

새롭게 재탄생한 2018년 버전의 가장 큰 차별점이라고 한다면 ‘왕자의 어린 시절 장면의 삭제’와 ‘남성 백조들의 동물적 속성과 야생성의 강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고전발레 ‘백조의 호수’에 등장하는 마법사 로트바르트(Rothbart)를 대체한 인물인 ‘개인 비서’의 표현에 있어서도 변화가 엿보인다.

마법과 운명의 힘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과거의 서사가 현대에 이르러 변형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매튜 본은 왕실에서 왕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언론 담당관”이자 집사인 ‘개인 비서’를 추가했고, 왕자에게 접근해 ‘여자 친구’가 되는 금발 여인과 여왕을 유혹하는 ‘낯선 남자’의 배후에 그가 상당한 개입과 역할을 한다는 표현을 초연 당시 분명히 했었다.

하지만 1998년 앨러스테어 맥컬리와의 인터뷰에서 매튜 본이 언급했던 “나쁜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여왕에게 접근하는 개인 비서의 아들”이라는 ‘낯선 남자’의 설정은 2018년 버전의 경우 상당히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매튜 본'은 백조의 안무를 위해 실제 백조들을 오랫 동안 공원에서 관찰하고 사진과 영상을 찍어 야생의 동작과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2018년 버전의 경우, 남성 백조들의 동물적 속성과 야생성이 더욱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공연장면. '매튜 본'은 백조의 안무를 위해 실제 백조들을 오랫 동안 공원에서 관찰하고 사진과 영상을 찍어 야생의 동작과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2018년 버전의 경우 남성 백조들의 동물적 속성과 야생성이 더욱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사진=LG아트센터

이전 버전에서 왕자의 스캔들과 죽음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듯 보였던 ‘개인 비서’는 2018년 버전에서는 왕자보다 여왕의 체면 보존과 이해관계를 위해 움직이는 듯 설정되어 있다.

그는 왕자에게 접근하는 금발 여인과 ‘아는 사이’로 설정되어 있지 않으며, 여왕이 골치아파하는 금발 여인을 왕자에게서 떼어내기 위해 돈을 제공하고 계획을 실행에 옮길 뿐 여왕의 남성편력과 왕실의 스캔들을 처리하는 자신의 직무에 지겨움을 느끼는 듯 보인다. 또한, ‘낯선 남자’와의 관계도 친밀한 사이임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설정의 변화는 신분상승을 위한 음모와 스캔들 조작이라는 특정 계층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갑갑한 왕실 사회에 속한 ‘왕자’라는 한 개인의 ‘구속된 자아’라는 보편적인 서사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든다.

이는 ‘백조의 호수’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일관성 있게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 관한 것이자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한 차원에서 수용되기를 바라는 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답변해 온 매튜 본의 의도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기 위한 시도인 것으로 보인다.

2016년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작위를 수여받은 최초의 현대 무용가가 된 '매튜 본(Sir Matthew Bourne OBE)'.
2016년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작위를 수여받은 최초의 현대 무용가가 된 '매튜 본(Sir Matthew Bourne OBE)'./사진=LG아트센터

그는 백조와 왕자의 사랑을 ‘동성애’로 해석하는 관점에 자신의 작품이 지나치게 갇히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해왔고 더 넓은 관객층에게 “진정으로 자신이 될 수 없는 사회 속에 묶인 개인의 투쟁”, 혹은 속박된 삶 속에서의 “상실과 수용의 문제를 다룬 인간적인 작품”으로 읽히기를 바래왔다.

따라서 어린 시절 ‘백조 인형’을 끌어안은 작은 소년에 멈춰있는 정체성이라는 설정을 과감히 버리고 아무리 적응하려고 노력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왕실’의 경직된 사회 속에서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애를 쓰지만 결국 상처입고 스러지게 되는 상상적 자아라는 ‘자아 투쟁’의 관점으로 옮겨간다.

사실 “기존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선보이는 것이 목적이었던 매튜 본이 초연 당시 ‘백조의 호수’를 구상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아이디어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새(The Birds)’에서 영감을 받은 야생적이고 동물적인 ‘남성 백조’에 대한 생각이었고, 두 번째는 당시 언론의 가장 큰 관심이었던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카밀라, 퍼거슨에 관한 스캔들 이야기였다.

어린 시절 공원에서 백조를 바라보며 느꼈던 두려움과 피터 쉐퍼의 연극 ‘에쿠우스(Equus)’의 말 장면을 통해 느꼈던 강렬한 감정은 아름다운 ‘새’인 동시에 거친 야성 또한 갖추고 있는 ‘동물’로서의 백조를 표현하는데 많은 영감을 주었고, 힘든 결별을 한 뒤 거절과 수용, 상실과 아픔에 대한 감정적 고민을 느끼고 있던 당시 그의 상태는 ‘왕자’라는 인물을 완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로열 발레단 소속이었던 아담 쿠퍼에게 ‘백조’ 역할을 의뢰했을 때만 해도 결정된 것은 오로지 “왕자와 백조가 있고, 백조는 왕자의 상상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 뿐이었다고 한다.

왕자는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접근한 금발의 여인을 어머니에게 '여자 친구'로 소개하지만 여왕의 눈에 그녀는 하찮고 천박한 여인일 뿐이다.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공연장면. 왕자는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접근한 금발의 여인을 어머니에게 '여자 친구'로 소개하지만 여왕의 눈에 그녀는 하찮고 천박한 여인일 뿐이다./사진=LG아트센터

1막에서 왕자는 다른 젊은 남자들에게는 따뜻한 미소와 관심, 욕망을 드러내면서 아들에게는 유독 예법과 의무만을 강조하고 당당한 모습을 갖출 것을 요구하는 냉랭한 어머니에게서 애정 결핍을 느낀다.

왕자는 획일적이고 가식적인 삶에서 벗어나고픈 ‘자유’를 꿈꾸기에 간혹 하늘을 나는 ‘백조’의 모습을 꿈속에서나 몽상 속에서 본다. 여왕인 어머니는 자신의 역할에 안주하지 못하고 자주 딴 생각에 빠지는 아들이 못마땅하기만 하다.

어느 날 왕자는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는 한 금발의 여인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왕자의 말에 웃어주고 호감을 표한다. 왕자는 젊은 근위병과 밀회의 시간을 가진 듯 보이는 어머니에게 금발의 여인을 자신의 ‘여자 친구’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여왕의 눈에 그녀는 하찮고 천박한 여인일 뿐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수용하지 않는 어머니로 인해 화가 난 왕자는 혼자 방에서 술을 마시고, 축 쳐진 왕자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던 왕비는 술병을 발견하고 왕자를 다그치기 시작한다.

신비한 아름다움과 강인함, 자유로움을 품고 있는 '백조'를 향해 손을 뻗는 '왕자'.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공연장면. 신비한 아름다움과 강인함, 자유로움을 품고 있는 '백조'를 향해 손을 뻗는 '왕자'./사진=LG아트센터

2018년 버전의 경우, 어머니의 애정을 갈구하는 왕자와 아들의 손길을 매몰차게 뿌리치는 여왕의 서사는 더욱 강화되었다.

지나칠 정도로 아들을 외면하는 여왕의 태도는 실의에 빠진 왕자가 소호의 술집에서 여자 친구라고 믿었던 금발의 여인이 비서로부터 ‘돈’을 받는 모습을 보고 또 한 번 크게 실망하여 고독에 몸부림치다 공원의 호수로 뛰어들게 되는 절망의 마음을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든다.

왕자는 금발 여인이 비서의 돈을 거부했으며, 그가 억지로 주고 간 돈을 지나가는 다른 사람에게 줘 버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공원 벤치에 앉아 유서를 쓰고 호수로 뛰어들려던 찰나 ‘백조’가 등장해 왕자를 저지한다. 백조는 신비한 아름다움과 강인함, 자유로움을 가득 품고 있다.

매튜 본에 따르면, 왕자는 “결핍된 사람”이고 백조는 “왕자가 원하는 것”을 상징한다. 그는 백조가 처음 등장하는 순간 관객들이 모두 왕자와 같은 마음으로 놀라고 전율하며 백조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2막 호숫가 장면에서의 '백조'의 독무대는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안무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바슬라프 니진스키의 '목신의 오후'에 등장하는 팔을 머리 위로 감싸는 포즈는 '백조' 안무의 출발점이 된다.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공연장면. 2막 호숫가 장면에서의 '백조'의 독무대는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안무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바슬라프 니진스키의 '목신의 오후'에 등장하는 팔을 머리 위로 감싸는 포즈는 '백조' 안무의 출발점이 된다./사진=LG아트센터

2막의 호숫가 장면을 구성하는 어린 백조 4명과 중간 백조 6명, 큰 백조 4명의 춤, 백조의 독무대, 왕자와 백조의 듀엣 등의 안무는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그가 왕자의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해 19세기와 20세기를 아우르는 모든 왕조와 왕자들에 관한 자료들을 섭렵해 애정에 목마르고 자유를 꿈꾸는,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 사이에서 고통 받는 개인을 완성했다면, 백조의 안무를 위해 그는 실제 백조들을 관찰하고 사진과 영상을 찍어 그 모습을 무대 위에 올리기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바슬라프 니진스키의 ‘목신의 오후’에 등장하는 팔을 머리 위로 감싸는 포즈에서 영감을 받아 출발한 백조의 안무는 2018년 버전의 경우 훨씬 더 진보한 것으로 보인다.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공연장면. 쉽사리 인간과 친해지지 않고 경계 태세를 보이는 백조들은 '왕자'를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공연장면. 쉽사리 인간과 친해지지 않고 경계 태세를 보이는 백조들은 '왕자'를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는다./사진=LG아트센터

쉽사리 인간과 친해지지 않고 경계 태세를 보이며 점차 거리를 좁히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새들의 야생성을 강조한 동작들은 4막에서 무리의 뜻을 벗어나 왕자를 보호하려는 ‘백조’를 공격하는 다른 백조들의 폭력성과 동물성을 보다 설득력 있게 만들어 준다.

또한 3막에서 백조와 똑같이 닮은 ‘낯선 남자’가 거친 야성미를 풍기며 등장해 다소 변태적으로 ‘채찍’을 휘두르고 무도회의 모든 여인들과 여왕의 시선을 사로잡을 때, 왕자가 그를 ‘백조’로 오인하고 혼자 ‘몽상’에 빠져들어 환영에 시달리게 되는 장면 또한 이해가 가도록 만든다.

공원에서 백조와 함께 그 누구에게도 받아본 적 없던 따스함과 자유, 수용의 기쁨을 느꼈던 왕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공적인 삶을 받아들이려는 가운데 금발의 여인이 긴장을 조성하고 백조의 모습을 한 ‘낯선 남자’가 등장해 어머니를 유혹하는 무도회에서 느끼는 혼란과 배신, 슬픔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가르는 조명의 대비와 음악의 변화로 표현된다. 다른 공주와 춤을 추면서도 ‘낯선 남자’만을 바라보던 왕자는 ‘몽상’ 속에서 탱고를 추는 백조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왕실의 무도회에 나타난 백조의 모습을 꼭 닮은 '낯선 남자'는 야성미와 박력이 넘치는 춤을 추며 '여왕'을 유혹한다.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공연장면. 왕실의 무도회에 나타난 백조의 모습을 꼭 닮은 '낯선 남자'는 야성미와 박력이 넘치는 춤을 추며 '여왕'을 유혹한다./사진=LG아트센터

하지만 몽상과 현실 사이에서 혼란을 겪던 왕자는 혼자 등 뒤로 손을 뻗어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비웃음과 조롱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편집증적 환상에 빠지고, 결국 질투심과 절망감, 배신감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총을 꺼내 겨눈다.

무도회에서의 소동은 왕자의 정신병을 치료하는 강압적인 병실 장면으로 이어진다. 손이 닿지 않는 벽 꼭대기에 작은 창문이 하나 있을 뿐 온통 하얀 무대 위에 비춰진 왕자의 그림자는 한없이 작기만 하다. 어머니는 똑같은 얼굴의 가면을 쓴 간호사들과 의사가운을 입은 개인 비서와 함께 등장해 왕자에게 약을 먹이고 충격요법을 실행한다.

2018년 버전의 경우 조명을 통해 강조되는 여왕과 간호사, 의사의 커다란 손동작과 그림자가 다소 약화된 점이 아쉽지만 두려움과 억압을 느끼는 왕자의 내면 의식을 드러낸 장면임은 충분히 암시된다.

약을 먹고 잠든 왕자의 침대 밑으로 다른 백조들이 나오고 등과 옆구리에 상처를 입은 ‘백조’가 침대를 뚫고 등장하는 장면은 모두 왕자의 ‘꿈’ 혹은 ‘몽상’이다.

2018년 새로운 버전에서 '백조/낯선 남자'역을 맡은 '맥스 웨스트웰(Max Westwell)'. 잉글리쉬 내셔널 발레단의 솔로이스트 출신으로 2018년 새롭게 '뉴 어드벤처스(New Adventures)'에 입단했다.
2018년 새로운 버전에서 '백조/낯선 남자'역을 맡은 '맥스 웨스트웰(Max Westwell)'. 잉글리쉬 내셔널 발레단의 솔로이스트 출신으로 2018년 새롭게 '뉴 어드벤처스(New Adventures)'에 입단했다./사진=LG아트센터

매튜 본은 4막을 통해 ‘백조’가 왕자가 꿈꾸던 이상적 자아이자 이미지로 구축한 상상의 자아임을 드러낸다.

왕자의 자아가 엄청난 상처를 입었듯 백조 역시 공원에서의 모습과는 다르게 만신창이로 지쳐있다. 이제 현실 세계와 비현실 세계는 충돌하기 시작한다. 백조들의 무리는 자신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왕자를 지키려는 ‘백조’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깃털을 뽑고 부리로 쪼아 대며 사납게 ‘백조’를 향해 달려드는 다른 백조들의 모습은 폭력적이고 무섭기만 하다. 사회 속에서 ‘일탈’을 행한 개인에게 가해지는 맹렬한 비난과 공격, 따돌림과 처벌이 그렇듯 동물적 ‘박해’의 속성은 점점 배가된다. 공격으로 인해 고통 받는 백조의 동작과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싼 왕자의 동작이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은 둘이 하나의 존재임을 긍정한다.

결국 ‘백조’는 사라지고 왕자는 정신을 잃는다. 문을 열고 등장한 여왕은 죽어있는 왕자를 발견하고, 관객들은 침대 너머로 왕자를 품에 안고 있는 백조의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백조는 왕자의 축 쳐진 팔을 들어 올려 자신의 어깨 위에 얻는다.

4막에서 백조들은 자신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왕자'를 보호하려는 '백조'를 공격한다. '일탈'에 대한 공격과 따돌림, 처벌은 무섭기만 하다.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공연장면. 4막에서 백조들은 자신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왕자'를 보호하려는 '백조'를 공격한다. '일탈'에 대한 공격과 따돌림, 처벌은 무섭기만 하다./사진=LG아트센터

현실 세계와 비현실 세계 사이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존재하기 위해 그토록 열렬히 분투했던 왕자의 ‘몽상’은 실현되지 못한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상상하던 자아이자 꿈꾸던 자아인 ‘백조’는 결국 죽음을 통해서만 ‘자유’를 성취한다.

왕자의 비극이 가슴 아픈 것은 일탈을 용서하지 않는 사회의 ‘가혹함’ 때문이며, 자신이 진정 원하는 ‘자유’를 얻기 위해 애쓰지만 의무와 규율이 보다 강제되는 사회 속에서 늘 현실과 타협하게 되고 스스로를 저버리게 되는 현대인들이 왕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사랑과 따스함, 포용과 관용을 바라지만 차가운 냉대와 가혹함, 억압과 구속이 지배적인 사회, 그 속에서 인간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자신이 상상하는 존재가 될 수 있는 진정한 ‘자유’임을 알기에 관객들이 그토록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에 공감하는 것이 아닐까?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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